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의 한 대목 읽기이다. 내가 유익하게 읽은 책들은 모두 한 다스 이상의 이런 '읽기'를 허용하지만 모두 다룰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간혹 이런 식의 '견본'으로 입막음을 하는 수밖에 없다(매번 그냥 지나치게 되면 또 우울증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그것도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겠다. 제3장 '공포와 자유'의 한 대목인데, 당통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게오르크 뷔히너는 자신의 극 <당통의 죽음>에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수 X를 규명하기 위해 우리 인육(人肉)의 수학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피 흐르는 사람들의 팔다리로 방정식을 써 나가야 할 것인가?'라고 당통의 입을 통해 묻고 있다. 이 섬뜩한 이미지 속에서 자코뱅주의자 및 국가 테러리스트들은 육신의 물질성을 경멸하는 사나운 추상성에 사로잡혀 자유, 정의, 진리, 민주주의 따위의 허상을 좇고 있는 인물들로 그려진다."(134쪽)

물론 여기서 자유(Liberty), 정의(Justice), 진리(Truth), 민주(Democracy) 등은 모두 대문자이다. 이글턴이 1장에서 이미 주장한 바에 따르면 "고대의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 많은 다른 현상들처럼 테러리즘 혹은 공포정치 역시 사실상 근대의 발명품이다. 정치사상으로서의 테러리즘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처음 나타났는데, 그런 점에서 테러리즘과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한 배에서 태어난 일종의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11쪽) 즉 "당통과로베스피에르 시대에 테러리즘은 국가 주도의 공포정치 형태로 처음 등장한다. 그것은 얼굴 없는 적이 국가주권에 가한 위협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의 적을 향해 행사하는 공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혁명의 대수학은 어떤 것이었나?

"세계의 물질성을 분할하고 나누어 다시 재배열함으로써 고상학 대수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그들은, 자신이 제시한 공식의 답이 신체 없는 추상의 형식이기를 기대한다. 인류를 구원한다는 명목 아래 그들은 언제든지 신체를 공격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유령적 이념들 손에 넣은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18세기 자코뱅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슷한 환상에 사로잡힌 몇몇 서구 국가들에서도 똑같은 기획을 발견한다. 그들은 축복받지 못한 나라의 국민을 구하기 위해 우선 그들을 공격해 죽인 후 그들의 심장에 새겨진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찾기 위해 시체의 배를 가르고 있기 때문이다."(134쪽) 민주주의를 위한 이라크 전쟁이 바로 그 비근한 사례 아닌가.

덧붙여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나 미국 몬태나 주의 산악지대를 배회하는 테러리즘 역시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 결합이 낳은 산물이며, 그런 점에서는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서구적 경향의 괴물적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135쪽)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다음에 '시장(marketplaces)'이 빠졌는데, 이 지역을 배회하는 테러리즘은 하마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몬태나주의 산악지대를 배회하는 테러리즘은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으로 악명을 떨친 (미시간)민병대이다. 이 두 경우에도 공통적인 것은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의 결합이며, "그런 점에서는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서구적 경향의 괴물적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In this sense, it is a monstrous parody of the form of life it opposes."(76쪽)를 옮긴 것인데, 주어 'it'을 어떤 점에서 '테러리스트들'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the form of life'를 '서구적 경향'으로 옮긴 것도 역자의 과도한 개입이 아닌가 싶다. 짐작에 단수 'it'으로 받을 수 있는 건 도덕적 이상주의(moral idealism)이어야 할 듯하다. 그렇게 본다면, "도덕적 이상주의는 그것이 반대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괴물스런 패러디이다." 도덕적 이상주의가 본시 반대하는 것이 바로 폭력(테러)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건 이와 유사한 자본주의 자체의 이중성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상주의와 회의주의, 천사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기이한 결합이다." 회의주의라고 옮겨진 건 'cynicism'인데, 굳이 '냉소주의'를 '회의주의(skepticism)'와 동일시할 이유는 없어 보이므로 이후의 인용에서는 모두 '냉소주의'라고 바꾸겠다. 그럼, 어째서 기인한 결합인가?

 

 

 

 

"자본주의는 이상주의와 냉소주의의, 천사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기이한 결합이다. 그것은 이윤을 위한 자신의 경쟁을 신성한 가치들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이런 현상이 고상한 종교적 열정과 저급한 물질적 이익 모두의 성소인 미국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은 '미국에서 종교적 광기는 흔한 현상'임을 지적한 바 있다."(135쪽)

마지막 문장에 이어서 이글턴이 달아놓은 토가 재미있는데 그는 종교에 대한 서구문명의 태도를 이렇게 정리한다: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닌데, 서구 문명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대개 알코올 중독 카운슬러가 중독자에게 종교를 권하는 입장과 비슷하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그들은 종교가 자신의 일상을 진지하게 구속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것을 받아들인다. 기업 경영자들이 윤리에 대해 취하는 입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문장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역자와 다르기에 원문도 같이 옮겨놓겠다: "It is true, however, that Western civilization, not least the British, adheres by and large to what one might call the alcohol counsellor's view of religion: 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This is also the view which corporate executives tend to adopt of morality."(76쪽)

물론 이런 정도의 대목이야 그냥 읽고 지나쳐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지만 'alcohol counsellor's view of religion'란 표현이 재미있어서 짚어보는 것이다. 역자는 이걸 '알코올 중독 카운슬러가 중독자에게 종교를 권하는 입장'이라고 풀어서 이해를 했는데, 바로 앞에 나오는 'what one might call'이란 표현을 간과한 탓인 듯하다. 내가 보기엔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라고 해야 맞다.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에 맞춰지는 것이다. 그럼,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알콜 대신에 종교를 집어넣은 것이겠다. "종교생활, 좋습니다. 일생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기업가 도덕? "도덕, 아주 좋지요. 기업가는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단, 기업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요."

"냉소주의와 이상주의의 이런 결합은 테러리즘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그것은 허무주의를 탐닉하는 악마적 얼굴을 들이밀며, 보라, 모든 가치를 박탈당한 채 불에 탄 신체들의 폐허, 절단된 팔다리들처럼 의미 없이 흩날리는 날것의 물질들,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귀중한 서구 문명이 다다른 귀결점이다, 라고 외쳐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정의로운 이념을 내세우며 무너지는 건물을 서구의 눈앞에 들이밀기도 한다. 쓰레기라도 처리하듯 그들의 적대자를 화염으로 몰아넣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거창한 이상들이다."(135-6쪽)

대체로 역자는 가독성을 고려하여 재량권을 한껏 발휘하는 편인데, 원문에 따르면 이 대목에서도 핵심은 두 번 반복되는 '보라'(Look.... Yet look also...)에 있다(번역문에는 '들이밀며... 들이밀기도 한다'로 옮겨져 있다). 즉, 이걸 봐라, 그리고 또 이것도 봐라, 구문이다. 무얼 보란 말인가? 하나는 너희 서구 문명이 꽤나 자랑하던 게(9.11의 경우엔 쌍둥이 빌딩) 어떻게 폐허가 됐는지를 보라(=냉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너희 앞에서 그렇게 건물을 무너뜨리게 만든 '고결한/천사적 이상들(the angelic ideals)'을 보라(=이상주의)이다. 이러한 이중성의 결합은 하지만, 테러리즘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적은 대로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발흥기에 그것의 천사적인 면과 악마적인 면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해결책을 통해 좀더 쉽게 공존할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언어는 세속적인 동시에 비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이윤 창출 자체가 영적 소명이 될 수 있었다."(136쪽)  

이런 지적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사를 통해서 그대로 입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속적인 동시에 비세속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도록 해준 게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이라면 한국 개신교는 미국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별종이 아니라 모범이고 정통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이런 프로테스탄티즘 전통은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의 이동, 다시 말해 생산 기반의 자본주의에서 소비 기반의 자본주의로의 이동, 다시 말해 생산 기반의 자본주의에서 소비기반의 자본주의로의 이행 때문에 사라지게 된다."

이글턴의 흥미로운 지적인데, 다만 원문이 'not only... but (also)'구문이므로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가 아니라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로 교정되어야겠다. 그렇다면, 생산기반 자본주의(=산업사회)에서 소비기반 자본주의(=탈산업사회)로의 이행이 무엇이길래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연계/결합이 약화되게 되는가?

"우리에게 근검절약과 신중함, 욕망의 통제와 권위에의 순종을 요구하는 신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하도코어 포르노를 보고 개인용 비행기를 구입하며 어머어마한 양의 정크푸드를 먹어치우라고 명령하는 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간의 연결고리는 소비주의에 의해 결국 단절된다."

가령, 똑같이 '축적'이란 차원에서 'After Doritos'를 신의 은총으로 정당화하기는 이제 어렵다는 얘기이다(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간주된다). “이 세상, 날씬한 것들은 가라. 곧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먹어라, 네 시작은 비쩍 곯았으나 끝은 비대하리라!”는 알다시피 개그콘서트의 구호이지 현실의 구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단절의 지점에서 사람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건져 올렸다."라고 하여 이글턴은 '절대 자유'로서의 신 개념이 갖는 의미장을 계속해서 조망해나간다. 하지만 나의 '한 대목 읽기'는 여기까지다...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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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근본주의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7-31 18:12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
 
 
심술 2007-09-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네요.

로쟈 2007-09-1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들 읽어보시라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지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