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는 근래에 읽은 책들 가운데 (지젝의 책들을 제외하면) 가장 재미있다. 테러리즘에 관한 원고를 쓰기 위해 여러 책을 만지작거렸지만 결국엔 이글턴의 책이 낙착된 이유이다(소개된 책들만 고려하더라도 한국어 이글턴은 다시 '중흥기'를 맞고 있는 감이 있다. 그의 소설 <성자와 학자>, 그리고 이론서 <우리 시대의 비극론>이 모두 최근 1년 안에 출간된 책들이고, 아마도 그의 책 두어 권 이상이 앞으로 1년 안에 더 출간될 것으로 보인다).  

 

 

 

 

필요 때문에 책과 관련된 리뷰 기사들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는 내용들도 눈에 띄었다. 이 페이퍼가 목표한바 <성스러운 테러>의 서문을 다루기 전에, 미리 읽어본다(한겨레의 리뷰가 보이지 않는 게 좀 특이하다). 먼저 동아일보의 리뷰.  

9·11테러 이후 일상으로 침투한 테러를 근대 이후의 예외적 현상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인간성의 심연에 내재된 일반적 어둠으로 이해할 때 진정한 극복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았다. 신화와 문학, 미학과 철학, 정신분석학과 정치학을 종횡무진 오가며 테러는 본질적으로 원초적 폭력에 대한 저항적 폭력임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테러가 폭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만 종식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 변주치고는 지나치게 현학적인 내용이 많다.

이글턴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책은 테러에 대한 일종의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 "테러가 폭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만 종식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 변주치고는 지나치게 현학적인 내용이 많다"는 촌평은 혹 이 책에서 형이상학적 통찰보다는 시사적인 비판을 더 기대했던 탓이 아닐까? 이러한 '빗나간 기대'에 대한 낭패감을 보기 흉할 정도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 중앙일보의 리뷰이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품게 된 테러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라면 이 책 말고 다른 걸 고르는 게 낫다. 여간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없는 독자라면 10분을 못 버티고 책을 던져 버릴 게 분명하다. 저자가 서문에서 미리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수많은 테러리즘 연구에 한 항목을 보태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테러라는 개념을 “형이상학적이라 부를 수 있는 맥락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다.

'최초의 테러리스트는 디오니소스?'란 타이틀의 이 리뷰는 논설위원의 글답게 첫문장에서부터 '고압적'이다. '테러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려는 독자라면 물론 다른 책들을 참조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제외되어야 할 이유를 나는 책을 읽으면서 찾지 못했다. 필자가 인용한 대목에 바로 이어지는 것이지만 "이 책은 최근에 내가(=이글턴이) 작업해온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의 국면에서 나온 성과"이며, 그런 점을 얼마간 고려하면 되는 것 아닌가. "여간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없는 독자라면 10분을 못 버티고 책을 던져 버릴 게 분명하다"? 내 생각엔 10분만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독자라면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울 것이다.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의 국면"은 "metaphysical or theological turn"을 옮긴 것인데, 'turn'은 물론 어떤 '방향전환'이나 '전회'를 가리킨다. 그의 오랜 독자들이라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이글턴이 웬 형이상학 혹은 신학 타령이냐, 라고 반문을 가질 법하고(그러니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외도'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수도 있겠다), 또 이글턴 자신이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하는 게 아니다. "혹자는 나의 이러한 연구를 환영했지만, 혹자는 경계와 실망을 타내기도 했다."라는 진술이 바로 이어지는 것이다(그가 각주로 미리 선수를 쳐놓았지만, 가령 '성스러운 테리Holy Terry'라고 놀림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한 종류의 반문에 대한 이글턴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좌파 진영의 친구들에게 사탄이나 디오니소스, 희생양과 악마 등 다소 이국적인 논의들이 담고 있는 정치학이 결코 오늘날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담론보다 덜 급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다." 나는 이글턴의 말에 공감한다. 리뷰를 마저 읽어본다.   

그런 눈으로 봐야 우선 『성스러운 테러』라는 제목에 반감을 버릴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자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로 언급하는 저자의 도발적 글쓰기는 서구 문명사를 구성하는 신화와 문학, 철학, 심리학, 정치학을 아우르고 고대와 현대의 시간적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며 테러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시도한다.

디오니소스의 예가 암시하듯 저자에게 테러는 이성과 광기의 양가성(兩價性) 개념이다. 디오니소스와 신도들의 광적 주신제(酒神祭)를 폭력으로 제압하려 했던 이성적인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결국 파멸하고 만다. “광기를 인정하는 것이 정신의 명료함인 반면 광기를 이성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일 뿐”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문명과 야만이 오랜 적대자인 동시에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인류가 문명 진화와 함께 야만을 휘두를 세련된 기술을 발전시켜왔음”을 본다. 테러는 결국 인간 자신에 내재한 폭력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테러를 막으려면 인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쉬운데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해석의 자의성은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시사적 의미로 테러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보다는 테러라는 주제로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하다. 화려한 언어의 향연 속에서 머리에 쥐가 났을 게 분명한 번역자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악취미를 가진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서평이야 취향에 따라 제각각일 테지만 "말은 쉬운데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해석의 자의성은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란 촌평에 나로선 공감하기 어렵다(고통스럽기까지 한 해석의 자의성?). 때문에 "시사적 의미로 테러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보다는 테러라는 주제로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하다"라는 기이한 추천의 변은 '분풀이'로 읽힌다(혹은 내가 '호사스런 문학적 유희를 만끽한 준비가 돼있는" 독자일는지도). 거기에 마지막 문장은 가관이다. "화려한 언어의 향연 속에서 머리에 쥐가 났을 게 분명한 번역자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악취미를 가진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읽기는 즐거웠지만 번역하기는 어려운 책이었다"니까 혹 '머리에 쥐가 났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번역에 하자가 있는 건 아니며 읽기에 특별한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요즘 나오는 번역서들에 비하면 상당히 준수한 수준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심지어 나는 순전히 같은 역자의 '작품'이어서 앨리슨 먼로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정도이다(<니체>와 <역사의 요동>은 이미 구매한 책들이다). 취향은 자유라고 하지만, 리뷰는 아무래도 취향을 남용한 게 아닌가 싶다.

"반어적이고 풍자적인 이글턴 문제 특유의 뉘앙스" 때문에 고생했을 역자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나대로 아쉬움을 표하자면,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두 번이나 '토스토예프스키'로 오기되고 찾아보기에도 'ㅌ'항에 배치된 것은 비록 '재미'는 선사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몇 군데 약간 부정확한 번역과 부정확한 조사 등은 또한 책이 다소 급하게 나왔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꺾을 정도는 아니다(물론 이글턴의 책을 처음 손에 든 독자라면 다소 어려울 수는 있겠다).

서문에서 밝힌 이글턴의 변은 이렇다. "고대의 제전에서부터 중세 신학, 18세기의 숭고 개념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내가 추적한 테러리즘의 계보학은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자격 미달의 비역사적 연구로 보일 수도 있을 터이다. 테러만이 그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전(全)역사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 이 연구의 자의성이 지적될 순 있겠지만, 이 연구를 비역사적이라고 비판하는 후자의 견해에 대해서라면 이는 역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반박하고 싶다."

'전(全)역사적 현상'이라고 한 건 'pre-history of the phenomenon'의 번역이므로 '전(前)역사적 현상'으로 교정되어야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의도한 '테러리즘의 계보학'이 자의적이고 비역사적이란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때 비역사적이란 비판은 "in a somewhat impoverished understanding of the historical", 즉 "역사에 대한 빈곤한 이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심각한 오해'까지는 아니다. 왜냐면 그런 식의 역사 이해도 가능하기에. 앞에서 인용한 리뷰가 가능한 것처럼). 거꾸로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진 독자라면 <성스러운 테러>와의 만남은 말 그대로 '향연'이다...

07. 0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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