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난 김에 '한 줄 오역'을 지적하려고 하니까 부지기수다. 어제 학교에서 들고 온 리처드 커니의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의 첫 장도 예외는 아닌데,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어(Strangers to ourselves)'란 제목의 이 장은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이다(크리스테바는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한 대목만을 따라가본다. 이 대목은 민족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에 대한 것이고 전체 대담은 1991년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참고로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커니: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당신의 코스모폴리타니즘과, 당신의 출신지(*불가리아)에 대한 충성을 어떻게 결합시키겠는가? 민족적 또는 지역적 출신 기원을 어느 정도 인식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당신은 민족주의가 병적 현상이라는 견해를 보였지만, 그건 단지 우리가 어떤 민족적 정체성을 위해 기본적인 인간적 요구를 부정할 경우에만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크리스테바: 내가 보기에 발틱, 시베리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는 퇴행적이고 우울증적 태도다. 잠시 옆길로 새서 약간의 정신분석을 해보아도 좋다면, 이 분리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정체성이 굴욕을 당해온 사람들이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정체성을 인식하지 않았고, 그래서 현재 조증의 형태를 띤 반울증적 반작용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도 좋다면 말이다.(29쪽)

일단 여기서 끝으면, 먼저 오역은 '세르비아(Serbian)'를 '시베리아'로 옮긴 것이다. '발틱(Baltic)'도 형평에 맞게 옮기자면 '발트국' 내지는 '발트 3국'이라고 해야겠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Soviet Marxism did not recognize this identity, so they have now an anti-depressive reaction which takes manic forms, if I may put it like that."(9쪽)인데, 여기서 'recognize'는 내가 보기에 '인식하다'가 아니라 '인정하다'로 옮겨야 한다. 소비에트 블록 하에서 구 동구권 국가들의 민족적 정체성이 인정되지 않고 억압돼 왔으며 이것이 사회주의 몰락, 사회주의 블록 해체와 함께 거의 조증의 형태로 폭발했다는 얘기다. 이러한 현상의 문제점?

출신 기원과 의고적 민속 가치를 찬양하는 것은 폭력의 형식을 띨 수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적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이상 공산주의가 적이 아니므로 다른 것이 적이 된다. 다른 종족 집단, 다른 민족, 희생양 등등 말이다. 이 병적 상태는 오래 갈 수 있고 또 이런 낡은 원한을 품는 것은 그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경제적-문화적 발전을 막거나, 또는 분명히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병적 상태가 좀더 빨리 지나가도록 돕기 위해 사람들은 그 과정을 가속화시키려 노력할 수 있고, 정체 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 애쓸 수 있다. 그리고 그 차원에서 한편으론 교회가, 한편으론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내가 보기에 '동유럽' 가톨릭 교회는 공산주의 반대 저항운동에서 주된 역할을 했다. 오늘날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일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상 - 순전히 종족의 것이거나 낡은 민족적 이상이 아닌 - 을 부여하는 일에서 교회가 맡은 바 역할이 크다. 최근에 작성된 교황의 회칙을 보면, 교회가 전체주의에 대항하면서 또한 일종의 '아메리카니즘'에도 대항하는 도덕적 투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도 기독교 교회가 저 민족주의들 - 지나치게 신속히 없애 버려서는 안되겠으나 초월하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을 위한 치료책으로 이러한 코스모폴리탄, 보편주의의 이념을 제시한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29-30쪽)

대담 번역에서 하이픈(-)을 집어넣는 것은 '현명한' 처사는 아닌 듯싶다. 여하튼 당연해보이는 것은 스스로를 언제나 '이방인'으로 간주하는 크리스테바가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보편주의로서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그러한 보편주의의 이념을 제시하는 데 기독교, 특히 동유럽 가톨릭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대목: "교회가 전체주의에 대항하면서 또한 일종의 '아메리카니즘'에도 대항하는 도덕적 투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도 기독교 교회가 저 민족주의들을 위한 치료책으로 이러한 코스모폴리탄, 보편주의의 이념을 제시한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기독교의 보편주의(=바울주의)에 대해서는 바디우나 지젝 등이 최근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관련된 부분만 조금 더 읽어본다.

커니: 당신은 종교가 특정 종파나 분파를 넘어서 어떤 공통의 보편적 비전을 투사함으로써 어떤 긍정적 역할을 할수 있으리라고 시사하는 것인가?

크리스테바: 배타적 종교들에는, 당신이 그들의 전제들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이방인으로 만들 그런 어떤 동질성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유일신 종교들은 타자 개념을 발전시키려 노력해 왔던 것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풍부하게 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서구 사상의 유산이다. 계몽주의자들은 그것을 추론해내려고 애썼고,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카리타스(caritas)의 이념은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어떤 힘을 준다. 이를테면 '가톨린 구호단' 또는 프랑스의 기독교인들이 외국인들을 위해 조직하는 여타의 행동 양식들을 보면 이것이 발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주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읽기를 가르치고,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는 등의 그런 일들 말이다. 나는 종교 문화의 이런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대중적 지지를 누리고 또 협소한 민족주의의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한에서는 말이다.(31-32쪽)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에 주목하며 그 단독성(singularity)의 차원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가라타니 고진도 같은 의견이지만, 오직 단독성의 차원만이 보편성을 보장한다). 그녀의 '사랑의 정신분석', 혹은 '사랑으로서의 정신분석'이 뜻하는 바가 그런 것인데, 거기서 정신분석은 기독교적 사랑(카리타스)과 만난다. 사실 크리스테바 자신이 프랑스 도미니크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고 그러한 교육에 의해서 그녀의 삶 자체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그녀의 독특성(singularity)이 보편적 이론의 차원에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07. 09.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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