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2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강의 일정이 많다 보니 리뷰도 주로 강의에서 다룬 작품에서 고르게 되는데, 지난주에 쓴 원고에서는 최근에 다시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적었다. 올해가 단행본 출간 150주년이라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았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한겨레의 칼럼에서도 한 차례 다룬 적이 있다...



주간경향(19. 05. 13) 인간의 자유와 역사적 필연은 별개이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 (1869)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지 150주년이 되었다. 이후에 쓰인 <안나 카레니나> <부활>과 함께 그의 ‘3대 장편소설’로 불리지만, 톨스토이의 기준으로는 <안나 카레니나>만이 유일하게 예술장르로서 소설에 부합하고 나머지 두 작품은 소설을 초과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단행본에 붙인 후기에서 ‘이것은 장편소설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고, 역사적 연대기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물론 당대가 기준이기는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고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장편소설’은 근대 유럽에서 발명된 산문 장르여서 ‘유럽의 형식’이라고도 지칭되는데, 동시대 작가로 이 장르의 대가는 투르게네프였다. 그런데 투르게네프는 <전쟁과 평화>를 격찬하면서도 작품에 포함된 상당 분량의 역사철학적 성찰이 너무 과도하며 소설의 미학적 성취를 해친다고 보았다. 프랑스 소설의 거장 플로베르도 투르게네프의 권유로 <전쟁과 평화>를 읽고서는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일례로 <전쟁과 평화>에는 2개의 에필로그가 붙어 있는데 작가의 역사철학을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 두 번째 에필로그 같은 것은 군더더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에게는 그 역사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 의도였기에 그러한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군더더기를 포함한 초소설(소설을 초과하는 소설)을 선택한다. 

톨스토이가 제시하는 역사철학이 과연 장황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전쟁과 평화>에서 통상적으로는 톨스토이가 당대의 영웅사관에 맞서서 민중사관을 제시한다고 이해한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러시아의 승리를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민중의 승리로 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민중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보았다는 견해는 작품의 실상과 맞지 않는다. 역사의 전개는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민중계급이 영웅을 대신해 그 주체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 역사철학의 핵심은 역사가 주체와는 무관한 몰주체적 과정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개미나 벌과 같은 사회성 곤충들의 행태와 닮았다. 각 개체는 각자의 일에 충실할 따름이지만 결과적으로 전체의 목적에 부합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국가의 대세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눈앞의 개인적인 관심에만 지배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야말로 당시 가장 유익한 사람들이었다.” 

톨스토이는 역사에서 필연의 법칙을 믿었지만 그것이 개인의 자유나 의지와는 별개라고 보았다. 우리 개개인은 각자의 활동범위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그것이 천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개인으로서 인간의 자유와 역사적 필연은 별개이며 각기 다른 법칙에 따른다. 비교하자면 인간의 자유가 유기체적 현상인 데 비해 역사는 초유기체적 현상이다. 따라서 역사를 영웅사관처럼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이 이러한 윤곽을 갖는다면 이미 극복된 견해로 치부할 수 없다. 역사에 대한 성찰을 새롭게 하는 데에도 <전쟁과 평화>는 여전히 유효한 작품이다.


19.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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