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도 두어 차례 다녀간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매트릭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 )의 책들은 나는 부지런히 사들였었지만 언제부턴가 자제하고 있다. 번역서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역본과 같이 읽지 않을 경우엔 읽는 게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마도 기억엔 7년전 <예술의 음모>(백의, 2000)가 출간된 이후에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 듯하다. 책을 읽을 수 없었으니까.

 

 

 

 

사실 <예술의 음모>는 출간당시 얇은 분량에 너무 고가이기도 했다. 내 재정형편을 고려하면 더더욱. 보드리야르의 예술론 6편과 보드리야르론 5편을 묶은 이 책을 나는 어제서야 다시 대출했는데(책은 이미 품절됐다), 그건 지난주에 책의 영역본을 구했기 때문이다(지난 2005년에 나온 영역본을 나는 작년에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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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본 또한 제목은 '예술의 음모'라고 돼 있지만 보드리야르의 짤막한 예술론들을 모아놓은 책의 제목이 국역본과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 왜냐하면 국역본이나 영역본 모두 불어본 원저를 번역한 게 아니고(불어본은 없다!) 각각 두 편(역)자가 잡지 등에 실린 보드리야르의 예술론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제목이 같은 것은 '예술의 음모'란 표제의 글이 그의 예술론을 집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인 듯하다.

겨우 6편의 글을 모아놓은 국역본과는 달리 영역본은 보다 본격적이어서 인터뷰를 포함해 전부 21편의 글을 싣고 있다. 분량으론 2-3배 차이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얼마나 읽을 수 있느냐이지만. 예컨대, 표제글인 '예술의 음모'(1996)의 첫문단은 이렇다.

만약 욕망의 환상이 주위의 포르노그라피에 몰입했다면, 환상의 욕망은 현대 예술에 몰입했을 것이다. 포르노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든 욕망의 대향연과 해방 후에, 우리는 성의 투명성의 의미에서 성전환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성의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없애버리는 기호와 이미지로 옮겨갔다. 즉 성이 욕망의 환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환으로 옮겨간 것이다.(7쪽)

지극히 '보드리야르스러운' 문장들인가? '지적 사기'라는 비아냥의 표적이 되기도 했을 만큼 보드리야르의 후기 저작들은 난삽하고 현란하다. 새로운 개념들을 마구 쏟아내는 것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면서 독해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한데, 그런 거 다 고려하더라도 인용문은 해독이 잘 안된다(나의 한국어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독자의 무능인가? 영역본은 어떤가?

The illusion of desire has been lost in the ambient pornography and contemporary art has lost the desire of illusion. In porn, nothing is left to desire. After the orgies and the liberation of all desires, we have moved into the transsexual, the trasparency of sex, with signs and images erasing all its secrets and ambiguity. Transsexual, in the sense that it now has nothing to do with the illusion of desire, only with the hyperreality of the image.(25쪽)

내가 영역본을 갖다놓고 불어나 독어 번역의 오역을 지적할 때면 그게 아무래도 '중역'과 같은 것이어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내가 바라는 건 그분들이 갖는 관심이나 걱정만큼 이런 일에 동참해주시는 거다(나도 이런 수고를 좀 덜고 싶다). 옮겨적은 영역본이 국역본과 갖는 차이점이라면 적어도 무슨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그리고 보드리야르의 생각이 재밌다는 것도 알겠고). 그럼 한 문장씩 대조해보기로 하자.

만약 욕망의 환상이 주위의 포르노그라피에 몰입했다면, 환상의 욕망은 현대 예술에 몰입했을 것이다. The illusion of desire has been lost in the ambient pornography and contemporary art has lost the desire of illusion.

먼저 'ambient' 같은 단어는 사전을 찾을 만한데, '주위의'란 뜻이고 'ambient air'하면 '주변 공기'를 말한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니까 그만큼 널려있다는 것이겠다. 구문상 병치되고 있는 것은 '욕망의 환상'과 현대예술이 갖고 있는 '환상에의 욕망'이다. 이때 '환상(illusion)'이란 말은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라고 할 때의 '환영으로서의 예술' 말이다. 영역본의 문장은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욕망에 대한 환영이 주변의 포르노에 푹 빠져있다면 현대예술은 환영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다."

포르노는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 In porn, nothing is left to desire.

불어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다. 영역본으로 보자면, "포르노는 욕망에 더이상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즉, 욕망을 다 탕진시킨다, 정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욕망이란 원래 금지의 베일 때문에 작동하는 것인데, 포르노는 모든 베일을 벗겨내는 것이니 욕망이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해서 더이상 욕망할 게 없다!

모든 욕망의 대향연과 해방 후에, 우리는 성의 투명성의 의미에서 성전환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성의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없애버리는 기호와 이미지로 옮겨갔다. After the orgies and the liberation of all desires, we have moved into the transsexual, the trasparency of sex, with signs and images erasing all its secrets and ambiguity.

국역본에 아무런 강조 표시가 돼 있지 않지만, 영역본에 따르면 여기서 'transsexual'은 보드리야르가 '신조어'로 도입하고 있는 말이다. 적어도 그는 이 단어를 다시 정의한다. 한데 웬 '성전환'? 바로 다음 문단에 나오지만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이 환영에 대한 욕망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초미적'(transaesthetic)이게 되었다고 말한다(국역본은 이 단어의 불어를 'transthetique'라고 오기했다). 그러니까 그가 오늘날의 예술적 상황을 지시하기 위해서 도입하고 있는 용어가 transaesthetic'이며 이것은 'transsexual'와 병렬적 관계에 놓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transsexual'은 '성전환'과 무관하며 '성을 넘어선', 곧 '초성적인'이란 뜻이다. 발가벗은 성, 아무런 비밀/베일이 없는 성, 방탕 혹은 난교파티 이후에 도달하게 되는 '투명한 성'을 가리키는 말이 보드리야르에게선 '트랜스섹슈얼'인 것이다. 이성(들)의 육체와 성기를 봐도 '무심한' 상태 말이다. 그런 맥락으로 다시 옮기면, "모든 방탕과 욕망의 해방 이후에 우리는 성에서 모든 비밀과 모호함을 다 제거해버린 기호와 이미지 들과 함께 '초성적인' 상태, 성의 투명성에 도달했다."

즉 성이 욕망의 환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성전환으로 옮겨간 것이다. Transsexual, in the sense that it now has nothing to do with the illusion of desire, only with the hyperreality of the image.

"이제 욕망의 환영과는 무관하고 단지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티하고만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초성적인' 상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현대)예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식 통찰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술 역시 모든 것을 미적 평범한 것에 이르게 하기 위해 환상의 욕망을 없애버렸으며, 따라서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8쪽) The same is true for art, which has also lost the desire for illusion, and instead raises everything to aesthetic banality, becoming transaesthetic.

 

 

 

 

'평범한 것의 미적 변용'은 미국의 철학자 아서 단토의 연구서 표제이기도 하다(이 책은 국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 계열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마르셸 뒤샹이나 앤드 워홀 이후의 팝아티스트들이다. 단토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함께 예술이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았는데(<예술의 종말 이후>), 보드리야르의 입장도 대동소이하다. 그런 걸 기점으로 해서 미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초미적인' 상태에 우리가 도달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시 옮기면,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 또한 환영에 대한 욕망을 상실하고 대신에 모든 것을 미적인 평범함(범속함)으로 끌어올리면서 '미를 넘어선 것',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 주변엔 포르노만큼이나 예술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예술이 범람하게 되었다. 보드리야르가 얘기하는 '예술의 죽음'이란 그러한 과잉과 범람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됨으로써 예술이란 말의 의미 자체가 실종돼 버리는 현상, 그리고 그런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가? 혹은 그런 시대로 진입해들어가고 있는가?..

07.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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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1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보드리야르를 읽고 있는데 이해가 잘되지 않는게 제 머리탓만은 아니군요.ㅎㅎ

로쟈 2007-02-1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육을 받고도 읽을 수 없는 책의 80%는 번역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고난도여서 어려운 책은 세상에 20% 미만일 테니까요...

yoonta 2007-02-1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esire for illsuion--->desire for illusion ^^
정말 그런 경우가 종종 있더라구요. 독어본을 해석했다는 책들이 영어본보다도 읽기 힘든 경우. 영어본을 해석한 중역본이 더 읽기가 좋은 경우..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물론 영어본 자체에도 번역상의 오류가 빈발한다고는 합니다만..

로쟈 2007-02-1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yoonta님도 꼼꼼히 읽으시는군요^^). 영역본이건 독역본이건 오역이야 다들 있겠죠. 하지만 우리만큼 날림으로야 하겠습니까? 중국번역의 현황을 잘 모르고 제가 '중국산'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번역서들이 최소한의 기본과 성의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