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 실린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를 옮겨놓는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현재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이달에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중인 <인형의 집>을 본 것이 희곡을 다시 들춰본 계기다. 번역본으로는 열린책들판(독어판 번역)과 민음사판(노르웨이어판 번역)을 참고했다. 



한겨레(18. 11. 16) 노라는 왜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가


1879년 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초연된 연극 한 편이 세계사를 바꾸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이 바로 그 작품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노라'라고도 불리는 이 문제작은 우리에게도 일찌감치 소개된 편인데 1925년 처음 공연된 이래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알려진 대로 주인공 노라의 가출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 이 작품의 문제성은 어디에 있으며 그 의의는 여전히 유효한가. 공연으로 작품을 보게 되거나 다시 읽을 때마다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결혼 8년 차의 주부 노라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남편 헬메르의 충실한 내조자다. 남편은 그녀를 ‘종달새'나 ‘다람쥐'라고 부르며 노라 또한 그런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남편은 노라가 돈을 너무 흥청망청 쓴다고 생각한다. 노라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 린데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첫 아이가 갓 태어났을 무렵 남편이 중병에 걸려 절대 요양생활이 필요했다. 요양에는 거금이 필요했지만 돈에 관해서라면 결벽증적 태도를 가진 남편은 빚을 금기시했다. 게다가 노라의 아버지는 병으로 위중한 상태였다.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남편에게도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노라는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리고 남편에게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한다. 남은 일은 남편에게 받는 생활비를 아끼고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몰래 빚을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억척스러운 노라를 남편 헬메르는 사랑스럽긴 하지만 낭비벽이 있는 여자로 오해한다.

 

아버지와 남편에게서 ‘인형’으로 대우받지만 노라의 숨겨진 비밀은 그녀가 남자와 같은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남편은 은행장으로 부임하게 되고 노라의 힘들었던 이중생활도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노라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은행직원이 비리로 해고 위기에 몰리자 차용증을 빌미로 노라를 협박한다. 결국 노라의 비밀을 알게 되자 남편 헬메르는 격분하고 노라는 자신의 행동이 남편에게 옹호되기는커녕 부당하게 매도당하는 현실에 절망한다. 그녀는 비로소 남편과의 관계는 물론 사회 속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그녀는 무엇이 법이고 정의인가를 다시 묻는다. <인형의 집>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대목에서 노라는 헬메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내가 당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한다는 거죠. 법도 내가 생각했던 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법이 옳다는 생각을 내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가 없어요. 여자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배려를 해줄 어떤 권리도 없고,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한 일을 할 권리도 없나요? 난 이런 법을 믿을 수 없어요.”(열린책들)

 

곧 노라의 항변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법을 상대로 한 항변이다. 노라는 그 법에 동의할 수 없고 따라서 순응할 수 없다. 노라의 이런 태도를 헬메르는 어린아이 같다며 비웃는다. 사회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자 노라는 이렇게 대꾸한다. “난 세상과 나 가운데 누가 옳은지 확인하겠어요.”(열린책들) 여기서 ‘세상’은 ‘사회’라고도 옮겨진다. “나는 사회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밝힐 거예요.”(민음사) 노라의 가출은 이 결심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 <인형의 집>이 여전히 읽히고 공연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남성 중심의 세상(사회)과 노라의 대결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18.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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