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브에서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왔다는 대목까지 적었는데 이후에 저녁을 먹기 전까지 슈투트가르트의 궁전과 광장을 둘러보았다. 슈투트가르트 도심에는 신궁전과 구궁전, 두 개의 궁전이 있고, 더불어 두 개의 광장이 있는데 구궁전 뒤편에 있는 광장이 실러광장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실러는 1759년생으로 괴테와는 10년 터울이다. 하지만 오랜 투병생활을 거쳐 1805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알려진 대로 독일문학의 고전주의(바이마르 고전주의)는 괴테와 실러가 만나서 우정을 나누고 협력했던 1794-1805년까지를 가리킨다(혹은 길게 잡으면 괴테가 이탈리아여행을 떠난 1786년부터 1805년까지로 보기도 한다). 바이마르에 가서 확인해볼 참이지만 실러가 갖는 위상과 의의를 알 수 있다.

긴밀한 우정과 흥미로운 협업 관계를 보여주지만 괴테와 실러는 출신배경이 상이하다. 괴테가 황제 직할의 자유시 프랑크푸르트의 상류 시민가문 출신인 반면에 실러는 뷔르템베르크 주의 마르바흐 출생으로 아버지는 하급 군의관이었다(뷔르템베르크는 바덴과 통합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가 된다. 슈투트가르트가 뷔르템베르크 주의 수도였다). 원래 신학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영주 카를 오이겐의 명령에 따라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군의관이 된다. 하지만 창작에 대한 뜻을 꺾지 않는다.

데뷔작 <도적떼>(1782년 초연)로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지만 오이겐 공은 그의 직무를 군의관에 한정하고 저술활동을 금지시킨다. 이에 실러는 슈투트가르트를 떠나 소위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의 문학의 주제가 독일의 봉건적 질서에 대한 저항인 것은 자연스럽다. 괴테가 바이마르의 젊은 대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빙으로 바이마르에서 공직에 몸담게 되는 것과 대조가 된다. 이를테면 권력과 문학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데 있어서 좋은 사례다.

실러의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서 러시아 시인 푸슈킨이 떠올랐다(동상 자체도 1880년 모스크바에 세워진 푸슈킨 동상을 연상하게 한다). 실러의 <도적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도 영향을 미친 작품이어서 실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는 흥미로운 비교문학의 주제인데, ‘실러와 푸슈킨‘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학계의 동향에 대해서 둔감해진 탓도 있겠지만). 괴테의 파우스트가 푸슈킨에게 미친 영향에 관해서라면 나도 몇 마디 할 수 있는데 실러와 푸슈킨에 관해서는 백지다. 전제적 권력과의 불화와 그 비판이라는 주제에서라면 푸슈킨과 더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는 작가가 실러로 보이는데 푸슈킨이 그의 작품을 얼마나 읽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문학기행이 떠안겨주는 숙제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어제는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다. 세 시간 거리. 도중에 타우누스 공원의 단풍을 구경하고 산정에 올라가 기분을 내기도 했다(나는 커피를 마셨지만 일행은 맥주를 마셨다). ‘서울‘이라는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해외 한국식당에서 먹어본 식사 가운데 가장 좋았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여유롭게 프랑크푸르트에 입성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물론 괴테의 생가이자 기념관인 괴테하우스였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적어야겠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