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책장 공사를 하며 식당과 거실의 책을 얼추 정리했지만(그래도 거실 바닥에는 아직도 쌓여 있는 책들이 있다) 아직 서재로 쓰는 두 방의 책들은 철옹성을 자랑한다. 무질서하지만 빈틈없이 쌓여 있어서 터무니없는 비유를 쓰자면 마치 도요토미의 오사카성 같다. 강의에 필요한 책을 찾다가 이번에도 허탕을 치고 대신 <2018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을 손에 들었다. 기억에 대상작인 박민정의 ‘세실, 주희‘를 읽다 만 것 같다.

다시 손에 든 건 마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붙인 작가노트를 읽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연휴 초반에 손에 들게 돼 그럭저럭 읽어버린 게 박상영의 첫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여서 일종의 디저트로 읽었다. 예상대로 그의 많은 이야기가 경험담으로 보이는데, 공식적인 분류는 아니지만 나는 이런 작가군을 자멸파라고 부른다. 자기 삶을 창작의 불쏘시개로 쓰는 작가들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가 다자이 오사무. 내 식으로 분류하면 박상영은 다자이과에 속한다. 하위분류로는 ‘퀴어 다자이‘.

<자이툰 파스타>의 첫 단편 ‘제제‘(제목이 너무 길어서 ‘제제‘라고만)에 이끌려 한편 더 읽어보자는 계산으로 읽어나갔는데 나로선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와 그 짝이 되는 ‘부산국제영화제‘까지가 재미있었고 ‘자이툰 파스타‘에 이르러서는 벌써 물린다는 느낌이 들었다(뒤에 이어지는 단편들은 현저하게 힘이 빠졌다). 작가 자신의 토로대로 감정 과잉은 독자를 오래 붙들지 못한다. 술 마시고 택시를 탈 때마다 울었다는 고백도 두번, 세번 듣다 보면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소설집 이후에 발표된 작품으로 <자음과모음>(2018 겨울호)에 실린 ‘재희‘가 나로서는 박상영의 한 시기를 결산하는 것으로 읽힌다(대학시절 특별한 절친이던 재희의 결혼식에 참석한 ‘나‘가 그들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야기인데, 현재 시점의 ‘나‘는 갓 등단한 신인작가로 나온다). 믿거나 말거나 그 자신의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편인데, ‘패리스 힐튼‘과 ‘부산국제영화제‘와 3종세트로 따로 묶어도 좋겠다 싶다.

한번 적었지만 문제는 이 작가에게 더 쓸 거리가 있을까, 라는 것. 자멸파 작가들은 자기 생을 탕진해가며 쓰기에 소재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다작이 가능하더라도 대개 반복이고 재탕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몇몇 작품으로만 기억되는 이유다. 이런 작가가 무얼 취재해서 3인칭 시점의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얼른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건 다른 종류의 작가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이리라. 두번째 소설집에는(짐작컨대 2-3년 안으로 나옴직한) 어떤 작품들이 실릴지 궁금하다. 작가로서의 생산력을 가늠하게 할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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