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책과 생각‘ 면에 실린 ‘책으로 떠나는 여행‘의 한 꼭지를 옮겨놓는다. 구소련을 찾아가는 여행을 제안받고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골랐다.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핸드 타임>과 같이 읽어보면 구소련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겠다.

한겨레(18. 07. 13) 이젠 가볼 수 없는 구소련의 하루

러시아 월드컵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이제는 러시아라는 이름이 자연스럽지만 대학에 들어가 러시아어와 문학을 공부할 무렵만 하더라도 소련이었다. 전공이 ‘소련학과‘라고 소개해도 통하던 시절이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지금은 구소련이라고 불린다. 이제는 지도에서 사라진 구소련을 어떤 책을 통해 찾아가볼 것인가.

1991년 해체 이후에 사회주의 소련은 자본주의 러시아가 되었지만 그 흔적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벨라루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세컨드핸드 타임‘이라고 염려할 정도다. 중고품 시대, 더 속되게 말하면 재탕 시대라는 뜻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함께 탄생한 인류사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역사의 악몽으로만 기억될 것인가.

조지 오웰의 우화소설 <동물농장>(1945)을 통해서 소련식 사회주의 신화는 진작 폭로가 되었지만 소련 내부의 고발이 전격적으로 터져나온 것은 1962년의 일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문제적 데뷔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되면서 소련문학은 다시는 그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실제로 8년간 수용소에서 복역했던 솔제니친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하루를 세밀하게 복원함으로써 오웰의 우화를 실사 버전으로 제공한다. 하루에 대한 묘사로 충분했던 건 10년형을 선고받은 이반 데니소비치에게 모든 날이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생환한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된다. 그를 기다린 건 감옥과 수용소의 나날이다. 비인간적 작업환경에서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에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인민들의 모습을 통해서 솔제니친은 사회주의 이상국가의 허상을 있는 그대로 폭로한다. 더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수용소 체제에 적응하여 생존의 규칙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망실한다는 데 있다. 내일 무엇을 하고 내년에는 또 어떤 일을 할지, 가족의 생계는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아예 사라져버린다. “그가 걱정하지 않아도 모든 것은 높은 사람이 대신 생각해준다.”

권력을 독점한 소수가 판단과 결정을 떠맡고 절대 다수 인민은 그에 따르도록 강요받는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도 제값의 민주주의적 체제라고 말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인민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솔제니친은 수용소 사회로 전락한 소련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고 있지는 않은데, 희망의 단초가 되는 것은 인민들의 소박한 인간성과 도덕성이다. 이제 마흔이 넘은 나이가 된 이반 데니소비치는 이빨도 반이나 빠져버리고 머리숱도 얼마 남지 않은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뇌물을 주거나 받은 경험이 없다. 그런 걸 배우지 못했을 뿐더러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소한의 도덕은 생존수칙이다. 수용소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자들은 남의 죽그릇을 핥으려는 자들이나, 의무실에 드나들 궁리만 하는 자들, 그리고 쓸데없이 간수장을 찾아다니는 자들이다. 비록 죽그릇을 속여서 두 그릇을 먹는 등 수용소 생활의 요령은 터득하고 있지만, 이반 데니소비치는 최소한의 도덕과 성실성을 통해서 자신의 위엄을 지킨다. 그리하여 자칫 아침에 영창에 갈 뻔했던 하루를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로 만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용소의 하루일 뿐이다. 아무런 주장이나 설교 없이도 솔제니친은 소련이 이반 데니소비치와 같은 인민의 품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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