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안 부는 대로
그렇게 고개 숙이고 지내다가도
풀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마당도 쓸고 마루도 닦고
먼지 풀풀 날리는 날이면
물주전자로 물도 뿌리고
비가 오는 날에도
심심하면 물 뿌리고
그건 풀이 해야 할 일
풀의 과거는 묻지 말기로 하자
바람 불지 않아도
풀은 꼬박꼬박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도 먹고
풀은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저녁을 먹고도 심심하지
풀은 가끔 밤하늘을 보기도 하지만
별을 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풀은 모든 일이 예정돼 있다고
풀은 기운이 날 때나 풀 죽어 있을 때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풀다운 감상에 젖기도 하지
바람이 부는 건 바람의 일이고
풀은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고
양치질을 하고 언제부턴가 마당은
쓸 일이 없고 물주전자도 뿌릴 일이 없고
그래도 풀은 매일같이 물 뿌리는 마음으로
여생을 기다리지
풀의 미래는 묻지 말기로 하자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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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6-10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 풀 풀 거리다가
김영갑의 사진집을 꺼내 봤네요.
풀도 있고 바람도 있고
시에는 안나오는 구름도 있는~~

로쟈 2018-06-10 21:32   좋아요 0 | URL
제주도 풀들은 스러져도 으스대는 풀들이죠.~

로제트50 2018-06-10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때 바위가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어떤 고난이나 슬픔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풀은 저보나 낫네요.
기다리는 마음이라도 있으니...

로쟈 2018-06-10 21:28   좋아요 1 | URL
바위는 유치환의 바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