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을 사러
동네서점에 갔다가 헛걸음
일본추리소설이 국외소설 전체에 맞먹는다는 걸
알았네 문맹이 낄 자리가 없다는 걸
대신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손에 들었네 다시 나왔으니 다시
보낸 편지인가 시를 쓰던 젊은 시절에
손에 들었을 텐데 수신자는 내가 아니었지
친애하는 카푸스 씨
에게 릴케가 보낸 답장이지
그게 시작이지
그걸 내가 훔쳐 읽는 건가
문맹을 읽으려고 했었다고
핑계는 마련해 두었어
인생이 당신을 잊지는 않는다는 걸
잊지 말라고 릴케는 쓰네
인생이 당신을 손안에 떠받치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쓰네
그런데
친애하는 카푸스 씨
에게 20년에 걸쳐 보낸 편지의
마지막 편지를 쓸 때도 나보다 젊다니!
릴케여 누구의 시인도 아닌 시인이여
내게는 젊지 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필요하다오
그런데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계산을 치르고 영수증도 이미 버렸지
하는 수 없이
나는 20년 젊은 척하기로 한다
세월의 문맹이 되기로 한다
편지의 수신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므로
누구의 시인도 아닌 시인의 수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