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있는 책 몇 권 책장에 꽂다가
시집 한 권 빼냈다 그늘과 사귀다
시집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그런 자리가 따로 없지만)
빼내는 건 일도 아닌데
시집 속에 껴 있던 영수증이
난데없는 일거리를 만든다
빛바랜 영수증에 찍힌 행적이
나를 닦아세운다
2007년 9월 13일 아무 기억도 없는 날짜에
경인문고 송내점에서
저녁 9시 34분 53초
고작 시집 한 권 구입하다니
쿠폰 700원에 현금결제 5300원
(어려운 시절이었나?)
그늘과 사귀다
시인의 이름은 기억해도
읽은 기억이 없는 시집이건만
사귄 기억이 전혀 없다고 부인해도
명백한 물증이라며 몰아세운다
아 그때는 아직 삼십대였고
아직 젊었구나
해도
딴소리하지 말라고
하필 그늘을 사귀겠느냐고
해도
그건 중요치 않다고
하는 수 없이 진술서를 쓴다
시집에서 베껴 적는다
폭설 이쪽의 세상이 바로 저 세상이란 걸
저 세상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라는 듯 귀소하는
하늘의 젖은 새, 하나
어떤 풍경도 풍경의 안에 숨졌을 뿐
그렇다, 오늘 나는 연락을 받았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아요
늦어버린 너무 늦어버린
식은 풍경의 마지막 두 연을 옮겨 적고
그늘과의 관계를 청산한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