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클레지오의 <사막>(문학동네)을 강의에서 읽었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로는 초기작 <조서>(1963)와 <홍수>(1966)를 강의에서 다뤘고 후기작에 속하는 <황금물고기>(1996)도 두 차례 읽은 적이 있다. 전환점을 표시하는 <사막>(1980)도 이번이 두번째였다.

연속적인 면도 있지만 분명한 차이점도 간과할 수 없기에 초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나는 초기 소설들에 더 후한 편이다. 한데 초기작은 <사랑의 대지>(1967)까지 소개되고(하지만 절판된 상태) <사막> 이전에 발표된 네 편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다작의 작가이고 다수의 작품이 번역 소개되었지만 나름 구멍이 있는 것. 차례대로 하면 <도피의 서>(1969), <전쟁>(1970), <거인들>(1973), <저편으로의 여행>(1975) 등이다. 이 가운데 <전쟁>과 <거인들>이 궁금하다. 아직 후기의 자전적 소설들을 읽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르 클레지오에 대해서는 가늠이 될 것 같다. 두번째 아내 제미아와 결혼하는 1975년에 발표한 <저편으로의 여행>은 <사막>의 예고편이 아닐까 싶다.

북아프리카 소녀의 여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사막>과 <황금물고기>는 마치 연속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황금물고기>의 주인공 라일라는 <사막>의 주인공 랄라와 포개놓을 때 그 의미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점을 강의에서 지적하다 보니 생각이 미친 게 <빛나>(서울셀렉션)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한국인 소녀 빛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르 클레지오 소설의 ‘외도‘라기보다는 핵심의 반복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랄라, 라일라, 빛나, 주인공 이름도 운을 맞추고 있는 만큼 나는 심지어 삼부작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가방에 넣고 온 <빛나>를 조금 읽어보니 전라도 작은 어촌마을 출신의 빛나가 대학에 진학하여 홍대입구역 근처 고모네 아파트에 얹혀 지내게 된 이야기가 시작이다. 버릇없는 사촌여동생과 고모의 구박을 못 견디고 거리로 나와 도시를 배회하는 빛나의 모습은 북아프리카의 고향마을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와서 이주자로 도시를 배회하는 랄라나 라일라의 판박이다. 르 클레지오 소설의 공식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다르게 얘기하면 <빛나>를 통해서 그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자전적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전혀 다르다는 전제하에 <빛나>를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르 클레지오 소설의 입문서로 읽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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