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놓고 친구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발견한다. 한계를 직면한 욥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죽음을 제외하고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이 동시에 욥에게 들이닥친다. 욥은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친구들의 충고는 고통의 이유를 더욱더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인간에게 닥치는 고통을 바라보는 욥의 생각도 그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뿐 아니라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걱정하며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러하기에 지금 그는 왜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경건하다. 하나님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명백한 대상으로 인식하는 그들에게는 인간의 고통은 죄의 결과이며,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며,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운 것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실재와 맞닥뜨린 욥은 더이상 사변에도, 전통의 권위에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죄의 결과로서의 고통과 그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는 통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욥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불합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가 불합리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고 묻는다. 고통을 바라보는 욥의 관점이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인간이 대답할 수 없는 이 물음에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려보지만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욥은 한계에 부딪힌다.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한계에 다다른 욥은 계시를 통해 우주 만물의 거대하고 질서 정연한 체계에 비해 인간의 인식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닫는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고통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의심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 인간의 총체적 한계를 자각한 욥을 따라 말한다면, 나는 내가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것이, 아니 그것만이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