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죽길, 바라다 소담 한국 현대 소설 4
정수현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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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들은 협박 같은 알람 시계의 기계음과 더불어 아침을 맞이한다. 비몽사몽 샤워기 앞에서 잠을 깨고, 허기 품은 배를 움켜쥐며 대중교통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누군가를 비판하며 나 자신을 보호하고, 누군가를 위로하며 정작 나 자신을 안심시키는 편협함으로 무장한 채 각자의 전쟁터로 향한다.

반나절동안 너덜너덜해진 그들의 몸과 마음은 친구, 애인,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한 끼와 커피 한 잔으로는 완벽하게 재충전될 수 없다. 마치 점차 수명을 다해가는 배터리처럼.

그렇게 매일 조금씩 소진되는 에너지. 누군가 불쑥 나타나 귀에 대고 ...라고 속삭인다 해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서서히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삶.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지긋지긋한 빚보증 단어가 연달아 튀어나오는 부모님의 말다툼, 신랑신부 이름에 한때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남자와 친구였던 여자의 이름이 새겨진 채 뻔뻔히 우편함에 꽂혀있던 청첩장, 쥐꼬리만한 월급을 금괴라도 되듯 하사하며 노예처럼 부려먹던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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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류가 만든 도시 가운데 파리를 첫 번째로 꼽는다.
그 도시 역시 가장 빼어난 시와 함께 아름다움의 절경이다.
신이 전원을 만들고 인간의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도 파리의 거리에 서서 고쳐야 한다.
파리야말로 신과 인간이 함께 만든 예술인지 모른다.

화장이란 무엇일까.
화장이란 남자의 종속물로서의 여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자 자신의 존엄성과 관련된 정치적 미학의 자기 실현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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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스럽게 놀면서 운치있는 태도를 두고 우리는 풍류있다고 말한다. 본래 ‘풍류‘란 말은 품격이 우아하고 세속의 일을 초월하여 고상한 놀이를 하는 것, 예법에 구속받지 않고 스스로 일파를 이루어 뭇 사람과 다른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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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글쓰기 나남산문선 11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기획 / 나남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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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에 철저히 무능해서 글쟁이가 되고 말았다면 믿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곧이들어도 무방한 사실이다.
더욱이나 이 엄연한 사실조차 세상살이가 갈수록 시드럽고 따분할 뿐더러 역겨워지는 최근에서야 깨달았으니 역시 내 무지몽매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아무튼 어릴 때부터 얼마나 얼치기였는지 새삼스럽게 열거해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듯하다.

우선 약골로 태어난데다 겁이 많아서 운동에는 젬병이었다. 어떤 대상을 그럴듯하게 선으로 빚어내는 소질도 없었다. 음치를 겨우 면한 수준이었지만 부끄러움을 잘 타서 여러 사람 앞에서는 곧장 가락이 엉터리로 꼬이는가 하면 고저장단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무엇을 맞춤하게 빚어내는 손재주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 힘이나 꾀로 다부지게 매조질 소질도 아예 안 비쳤다.

그러니까 내 모든 일거일동은 어딘가 짜이지 않아 엉성궂기 이를데없었다. 총기도 고만해서 학교공부도 그냥저냥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시건방져서라기 보다도 철이 늦들어서, 공부를 잘해야 출셋길이 열린다는 세상이치도 미처깨닫지 못했다.

하기야 끈기와 집중력을 발휘하여 한사코 매달리면 다들 통과하는 그런저런 관문들마다에 악착같이 덤비는 근성도 부족했다. 아마도 때이르게 어떤 체념이 제2의 성정으로 자리잡아 매사를 규제하고 있던 만큼 공부를 열심히, 또 잘하고 싶은 엄두도 못 냈던 게 분명하지 싶다. 멀뚱거리는 눈치만은 뻔해서 떳떳하게 경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도 안 갖춰진 집안형편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부를 하라 마라고 닦달하는 사람을 집안팎에서 못 만났던 걸보면 워낙 둔재에다 있으나마나한, 요컨대 될성부른 떡잎이 진작부터 안 비쳤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한심한 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 하나는 있었으니 그것은 책읽기였다. 내성적인 성격에다 별다른 재주도 없었으니 소일거리삼아 그쪽으로 자연히 관심이 쏠렸을 것이다.

책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서 누가 선물로라도 집어주는 법도 없었고, 또 사볼 형편도 못돼서 친구들이나 이웃집들로 부터 빌려보았다.
아무리 책이 귀했다 해도 막상 눈여겨보면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 책이었다.

궁하면 통하고,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그대로 그쪽으로 눈이 뜨이자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 탈이었다.

책만 잡으면 곧장 그 속에 빠져들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책읽기과 글쓰기의 고락 - 김원우

집안형편상 돈의 허비가 만부득이 따르는 일체의 한눈팔기는 우선적 금기사항이었다. 그런 처지였으니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마구 읽는 것이 가장 만만한 소일거리였다.

중학생인 주제에도 누님이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헐값에 사서 보던〈여원〉이나〈여상〉같은 여성용 월간종합지를 화보에서부터 편집후기까지 죄다 독파함으로써 유명인사와 여러 글쟁이들의 이름을 익힐 수 있었다. 고등학교때는 주로 학교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았다. 언젠가부터 월간〈사상계〉의 애독자로서 함석헌, 유달영 같은 계몽가의 우람한 글을, 최재서. 여석기 같은 영문학자의 좌담을 재미있게 읽어대는 조숙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현대문학〉에 매호마다 실리는 추천소감을 읽는 재미도 수월찮았다. 신간 소설책은 번역 서건 국내저작물이건 하룻밤을 지새워 다 읽어치우고 그 다음날 반납하는 나날을 보내곤 했다. 수업시간에는 눈만 멀뚱거리고 있을 뿐 강의는 귀밖으로 흘려들으면서 쉬는 시간에 읽다만 읽을거리와 눈씨름할 궁리로 마음이 바빴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무엇에 쫓기듯 읽을거리와 마냥 노닐었다.

(...)또래의 학우들과 대면하기가 싫고 시간낭비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앙도서관에만 들어가면 왠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정기간행물 열람실이나 햇빛이 잘들지 않아 늘 어둑신한 일반열람실의 한 고정석을 독차지하고서는 영한사전을 뒤적거리며 더러는 온종일을 삭여냈고, 졸업때까지 한껏 늑장부리는 지겨운 세월을 죽였다.

되돌아보면 한창 나이때 그처럼 몰아적으로 매달렸던 내 독서벽에도 나름의 유별난 구석은 있었다. 난독이란 말그대로 아무 책이나, 이를테면 소설. 문학평론. 전기. 역사 물. 시. 기행문. 수필 등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는 버릇이 첫번째 특징이었다.

좋게 보면 지적 욕구가 제법 출중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같은 천방지축의 독서는 일단 질보다 양부터 챙기는 젊음 특유의 허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한번 손에 잡은 책은 반드시 끝까지 독파한다는 자기규정은 대체로 실천했던 것 같고, 당연하게도 숙독하는 버릇에 길들여졌다.

그러나 그 정독 내지 통독에도 장애물은 너무 많았다, 가령 곳곳에서 서식하다가 느닷없이 출몰해대는 아리송한 대목들, 도무지 종잡을 수없는 앞뒤 문맥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림짐작도 못하게 만드는 전체적/부분적 작의 같은 복병들과 대적해야 하는 싸움이 그것이었다. 그야말로 난해해서 난감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츰 이력이 났다. 그런 불가해한 난적과 굳이 그 자리에서 결판을 내려고 서두르지 않는 처신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숫기도 없어서 누구에게 물을 주변머리도 없었고, 또 주위에는 그런 질문에 응해줄 위인도 없었지만, 설마 누군들 책 한 권을 통째로 옳게, 또 온전하게 이해할 리야 있겠느냐라는 나름의 유한 배포가 작동하게 된 셈이었다.


-김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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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이도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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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주름살이 느는 것을 서러워하기보다 동네 어귀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기품이 더해짐을 흐뭇해하고, 점점 기억력이 떨어짐을 슬퍼하기보다 먼바다처럼 생각이 더 깊어짐을 기뻐하고, 글 읽는 시간이 차츰차츰 짧아짐을 안타까워하기보다 권태로운 소처럼 적은 글로도 많은 의미를 되새김질할 수 있음을 흐뭇해하고,나이는 먹는데 더 높이 오르지 못하고 많이 갖지 못함을 안달하기보다 비보 숲처럼 낮은데 처하여 많은 이들 품을 수 있음을 즐거워하고,차츰 사람들이 멀어져감을 쓸쓸해하기보다 겨울 끄트머리에 먼길 떠나는 기러기떼처럼 함께 길을 걷는 사람 사이 정이 더 도타워짐에 거늑해지고, 사랑하고 베푼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음을 탓하기보다 바라지 않고 베풀 수 있는 사랑이 가득함에 가슴 벅차고, 많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함을 쑥스러워하기보다 한 노래를 더 원숙하게 부를 수 있음을 흥겨워할지니,세상이 정 모질고 몰강스레 두들기더라도 어두울수록 별이 맑게 반짝이듯 고통이 클수록 깨달음이 깊어짐에 기꺼워하자.

그리그리 또 그리 버티다 정녕 힘들거든, 아무리 삶이 곤고해도 기댈 언덕이 있는 한 그 삶은 의미로 빛나리니,
철없이 늙은 아내든 늙은 벗이든 찾아 술잔을 기울이거나, 늘 아름다운 저 산속 숲가에 고요히 앉아 능선과 하늘이 만들어준 여백에 쉼없이 기억을 수놓는 구름을 온몸으로 들이마시고 뱉으며 환희심으로 가득한 나를 다시 만나자.
하여, 채우기보다 비워지는 아름다움에 새록새록 물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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