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처음 볼때는 탁 트이는 청량감에 감동하지만 이미 한꺼번에 모두 맛본 뒤의 뒷맛처럼 그다지 잔잔한 여운이 길지 않은데 반해, 숲은 들어갈수록 하나하나 느끼는 행복이 느긋합니다.

숲은 누구든지 저절로 사색가로 만드는 모양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한그루, 놀란듯 뛰어가는 산짐승들 하나하나가 모두 나와 자연을 하나로 묶는 고리가 되어, 이고지고 끌고 온 생각을 모두 덜어내고 넉넉한 가슴을 안고 가게 만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전통’이라고 소나무며 호랑이 도상이라든가 오방색이 표내고 있는 예쁘장한 장식화, 혹은 고갈된 창작력을 민족정기로 떡칠해놓은 주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폼페이의 거리를 걸으면서 새삼스럽게 길을 포장한다는 이 사치스러운 인간의 문화를 생각하게 된다.

도로 포장의 혜택은 평민과 가난뱅이들에게도 주어지는 도시의 선물이다. 발에 흙탕칠을 하는 것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서울 거리의 어디에나 인도의 포장이 제대로 된 곳이 한군데도 없다. 으스러지고, 뒤집어지고, 찌그러지고, 무시로 파헤치고, 다시 엉터리 포장을 하고, 서양 도시와 우리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이 길을 덮는다는 것에 대한 감각의 차이에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그 일을 그렇게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문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에서 흙탕물에 발을 담그고 살아온 감각 때문일까? 논농사를 하지 않고 밭에서만 일을 해온 사람들의 감각 때문일까?

유럽의 골목들이 아름다움은 그러고 보면 그 골목이 모자이크처럼 견고하게 포장된 때문일까? 유럽의 도시는 길바닥도 도시인 것이다.

20층, 30층짜리 빌딩에서 한발 밖으로 나서면 거기는 발목이 삐기 십상인 초라하고 불결한 인도가 있는 우리나라.

파리나 로마는 현대 도시로서의 다른 기능은 몰라도 보통 사람들, 소시민들이 안심하고 걸어다니고, 길가의 찻집에서도 쉬고 갈수 있는 리듬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는 사람들을 마주 대할 때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그러하겠지만 그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타인들과의 대화가 조금만 길어지면 그는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나가듯 자신의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광경이 환시로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상대방으로 인해 에너지를 빼앗기는 동시에 반대급부로 그만큼의 에너지를 돌려받는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김동학은 그런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생각해보라.
회사에서 점심시간이 되면 동료들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가자고 부를까 봐 전전긍긍하는 인간,
어쩌다 끌려가면 멍한 얼굴로 밥알을 헤아리면서 속으로는 좌불안석이 되는 인간,
사무실에서 상사의 눈길이 그를 향하고 있으면 자기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어디 다른 곳, 아니면 자기 주변의 컴퓨터나 의자 따위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려 하는 인간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소심하거나 심약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차피 공적인 일들로 마주치는 타인들과 그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그 소통이나 교감의 한계가 애초에 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상투적이고 진부한 관계들로 인해 일상의 구석진 자리에 옥죄어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가 스스로 채널 인간이 되고자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그는 어쩌다 상사의 질책을 받거나 성가신 인간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단호하게 채널을 돌려버리게 되었다.

그럴 때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채널의 끝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이 그들의 머리를 뎅강뎅강 잘라버렸다.

그가 겉으로는 결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방금 자기들의 머리가 잘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목에서 우유처럼 흰 액체가 공중으로 치솟곤 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가 그들의 목을 치는 것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저열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탓이었다.


- ‘채널 부수기‘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마추어 소설가 또는 비직업적 소설가의 소설들, 그리고 그러한 소설들이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나 편견,또한 독자나 가끔은 소설가로 활동하는 소설가나 비평가로 활동하는 비평가도 가지고 있는 오해가 아닐까.

소설은 이야기, 그러니까 어떤 아이디어, 독특한 발상, 상상력이 머릿속에 있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라는 것.

소설이 단순히 독특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시시할까.
그것은 독특한 아이디어 밑으로 작품이 수렴되는 것인데,

그건 그림이 단지 그 그림이 묘사하는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진이 어떤 상황을 알리는 역할만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소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알고자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거나 볼라뇨의 말처럼 "어둠 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허공으로 뛰어내릴 줄 아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단일한 주제나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금정연씨와 나는 나눴다.

엉성한 문장,
나이브한 자본주의 비판(일반적이고 상식적이고 단순해서 전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반성도 불러오지 않는 비판)이 <엄청멍충한>을 재미없게 만든다고 우리는 말했다.

-p.32

독립 출판을 하는 이들은 실험적이거나 도전적인 작업을 하(려고 하)는 이들인데 소설은 오히려 퇴행적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소설에 대해 사실은 굉장히 관심이 없다는 것,

이를테면 미술은 현대미술이나 추상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문학에 대해서는 미술로 치면 인상파 이전의 인식,
현실이나 관념을 모사해내는 것(뛰어나게든 기발하게든)이라고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한 아이러니에 대해 말했다.


- p.33

바틀비 증후군

베케트는 침묵에 빠져 있었고, 조이스 역시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경우에도, 대화는 자주 두 사람 다 슬픔에 젖어 침묵만을 교환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베케트는 대부분 세상 때문에 슬펐고, 조이스는 대부분 자신 때문에 슬펐다.

- <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마따스 저, 조구호 역, 소담출판사(2011) 에서 재인용.

- p.35

C.S. 루이스는 <문학비형에서의 실험> 을 통해
어떤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문학적인 취향을
판단하던 일반적인 관습을 뒤집어 어떤 사람이 문학을 읽는 방식에 따라 어떤 장점을 찾아낼 수 있는지 추론하는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그는 서로 다른 독서 방식을 가진 다수와 소수로 독자들을 구분한다.

하나. 다수는 어떤 책을 두 번 다시 읽는 법이 없다.

반면 소수는 다시 읽기의 기쁨을 아는 독자이고 좋아하는 책이라면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도 읽는 독자다.

둘. 다수는 아무리 책을 자주 읽는다고 해도 독서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수는 정확히 그 반대로 한동안 독서를 하지 못하면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을 느낀다.

셋. 소수는 어떤 문학작품을 읽고 영원히 바뀐다.

다수는 조금은커녕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는다.


- P.58

글쓰기에 대한 역사적 유형학


롤랑 바르트는 작품과 이상 자아에 가까운 나의 연관관계에 따라 문학을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1. 내가 증오스럽다 -> 고전주의적
2. 내가 자랑스럽다 -> 낭만주의적
3. 내가 시대에 뒤졌다 -> 현대적

- <롤랑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저, 변광배 역, 민음사(2015) 에서 재인용.

- p.89

우리가 이중의 시대착오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선생님의 지적은 참으로 지당합니다.

시대착오적인 시대를 살며 아무도 읽지 않는 한국문학을 논하는 시대착오적인 행위를 하는 우리.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시대착오인지 모릅니다.
하나의 거대한 충동 혹은 제어할 수 없는 의지로서의 시대착오 -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찰스 다윈

하지만 나는 오늘 몸이 매우 좋지 않고,
매우 바보 같으며,
모두가, 모든 것이 싫소.

- 1861년 10월 1일, 찰스 다윈이 찰스 라이엘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010년 9월 18일, 미국의 에픽스 채널에서 방송된 자신의 쇼 <완전 웃긴> 에서 루이스 C.K. 는 기술-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경이로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걸 싫어하거든.
난 아직까지 한 번도 누가 내 폰이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이러는 걸 못 봤어.

다들 이러지.
아 진짜 좆같아서 못 쓰겠네.
이거 왜 안되고 지랄.
이런 식이라고.

일 초만 기다려!
그걸 못해?
딱 일 초만 줘봐! 그 신호 우주까지 날아간다고!
신호가 우주까지 날아갔다 돌아오는 데 일 초도 못 기다려?

빛의 속도도 네 성에 안 차냐?
그냥 좀 기다릴 수 없겠어?
숨 한 번만 가볍게 쉬어볼 수 없겠냐고!

우린 다 그냥 화가 나 있는 거 같아.
내 폰 진짜 존나 싫어!

아니, 아니거든!
그거 대단한 거야.
이 세상에서 제일 구린 폰조차도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그 폰을 쓰는 네 인생이 좆같은 거지!"

- p.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