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김연수 소설집
소설이 되지 못한 삶을 위로하는 소설가
김연수소설집|창비|268쪽|9500원
▲ 김연수·소설가 | |
2003년 제34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연수(35· 사진 )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상복이 많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글쓰기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한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는 “선배 작가 중에서 김원우 선생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중진 작가 김원우라면 문단에서 젊은 작가들의 경박함을 주저없이 질타하는 선배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김원우는 적확한 문장과 튼실한 서사 구조를 추구하는 작가다. 그는 아방가르드와 같은 형태 파괴적 실험소설을 쓰지 않지만, 정통 소설의 틀에서 소설 혹은 소설가의 존재를 탐구하는 소설을 써왔기 때문에 일반 독자보다는 동료 소설가들 중에 더 많은 애독자를 두고 있다. 김연수는 김원우처럼 소설의 본질을 향한 탐험 정신을 놓지 않는 젊은 작가다.
이미 4권의 장편 소설과 2권의 소설집을 펴낸 김연수가 이번에 내놓은 3번째 소설집은 문학의 다음성(多音聲)을 입증하는 무대와 같다. 한 작가의 소설집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다양한 목소리의 반향으로 가득하다. 중국인 관상가가 한국인 소설가를 만나 한국 전쟁 참전기를 들려주는 ‘부넝숴(不能說)’는 권력의 후원을 받는 기록의 역사에 억눌린 개인적 체험의 역사에 제 목소리를 주려는 작가 의식을 담고 있다. ‘부넝숴(不能說)’란 인간의 역사는 기념비가 아니라 인간의 몸에 새겨진다는 것이고, 진실한 삶은 ‘결코 말해질 수 없다’(不能說)라는 것이다.
이 소설집의 또 다른 작품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은 춘향전을 서로 다른 세 명의 시선에 따라 새롭게 재구성한 소설이다. 춘향과 옥을 지키는 사령, 변 사또가 서로 각자의 시점으로 똑같은 사건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대다수 작품들에서 작가는 독백체와 서술체를 그때그때 다르게 활용하는가 하면, 등장 인물의 언어 습관에 따라 일본어 영어 한문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하나의 음성과 문법으로 기록될 수 없고, 진실은 단순하게 포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와 그 언어로 타인에게 전하는 이야기 속에 감금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가란 마치 남의 책을 대필하는 유령작가(Ghost writer)처럼 소설이 되지 못한 삶의 이야기를 대신 써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양한 문체와 소재를 동원해 지적인 농담의 묘미도 선사하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김연수는 한없이 갈라지는 소설의 미로를 탐험하는 작가의 초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