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투의 속성

 

‘거지는 거지를, 시인은 시인을 시기한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한 말이다. 투박하긴 하지만 내 식 표현은 이렇다. ‘질투라는 것은 옆집에 사는 또래 아줌마에게 느끼는 감정이지, 강남 고급 아파트에 사는 젊은 새댁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하고픈 말들의 알짜배기는 언제나 선현들 차지이다. 어디 말 뿐일까. 인생 전반에 걸쳐 후대들은 선대들이 이미 이룬 것들을 인정하고 적용하고 재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예술을 말할 때 지상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질투는 같은 레벨 선상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같은 목적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산을 오르거나 같은 배를 탄 사람끼리 생기는 게 질투지, 다른 목적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산을 오르거나 다른 배를 탄 사람끼리는 애초에 질투라는 감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내 모의고사 성적의 비교 대상은 경쟁 상대인 내 짝지이지, 먼 학교에 다니는 나와 비슷한 성적을 내는 아이이거나 처음부터 비교대상이 아니었던 전교 일등 친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똑똑한 한 남자가 질투하는 대상은 똑 같은 레벨에 있는 사람이지 자신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다른 분야 또는 계급의 사람이 아니다. 정치인이 동료 정치인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경우는 있어도, 노숙자에게 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까봐 경계하지는 않는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가없는 사랑과 관심을 자신보다 계급적 하위에 있거나 또는 범접할 수 없는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베풀 수 있지만, 그것을 같은 경쟁자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할당하지는 않는다. 그들 서로는 질투가 어울리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기초는 질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질투는 뒤지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 있다. 따라서 질투라는 말은 좋게 보면 자기발전의 다른 말로 보아도 무방하다. 질투할 깜냥조차 되지 않을 경우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질투의 대상 위에 있을 때 인정하거나 고개 숙여 버리는 것 또한 인간 보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2. 작은 차이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면에서는 누구나 비슷하지만, 그 감성이나 판단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딘 사람이 있고, 뛰어난 직관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바리함 속에 헤매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눈치가 빠르고 직관 또한 뛰어나다고 한다. 단순 말싸움에서 아내가 남편을 압도하며, 어떤 상황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이 빠르게 판단·결정한다는 점 등을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야 눈치나 직관의 문제는 남녀 차이가 아니라, 개별자의 성정이나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여러 경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남자의 직관보다 여자의 직관이 앞선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당신은 이미 읽혔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자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밥은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때마침 밥의 여성 친구가 옆을 지나가다 이렇게 속삭였다. 밥, 포기해. 저 여자는 너를 얼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밥은 깜짝 놀랐다. ‘저렇게 날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믿을 수 없어.’ 보통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밥은 입술을 꽉 다물고 치아를 드러내지 않은 채 짓는 여성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꽉 다문 입술을 옆으로 당겨 일자를 만들고, 치아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웃는 거짓 미소를 남자는 자신에 대한 호의로 착각한 것이다. 속마음을 감출 때 흔히 이런 미소를 짓는데, 여자들은 이것이 거절의 신호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지만 남자들은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한다.

 

 

눈치나 직관이 반응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그들만의 정서적 기제가 발동하는 것일까. 여성이 비교적 눈치가 빠르고 직관이 뛰어난 것은 어느 정도는 선천적인 것과 관련이 있고, 달리 보면 사회화 과정에서 터득한 훈련의 결과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일상적인 면에서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하게 반응하는 남성에 비해, 오묘하고 복잡하게 반응하는 여성의 심리 기제가 이런 사소한 차이점을 낳게 한 것은 아닌지.

 

 

 

 

 

3. 한 호흡, 반 박자

 

“핵심은 상대의 말에 말려들어가 두 번째, 세 번째 발언이 이어지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 정말로 무례하고 공격적인 말을 들었다면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왜냐고? 침묵은 금일 뿐 아니라 잘못 인용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에는 이처럼 매력적인 문구들이 많이 나온다. 여타 인간관계 관련 책보다 진솔하고 현실적이다. ‘웬만하면 참아라, 포용하면 언젠가 상대가 맘을 알아준다.’ 류의 원론적 자기 수양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이 책은 그런 소극적 방식을 넘어선 적극적 자기 표현법을 제시한다. 타자의 입장만을 우선하는 인간관계론은 반쪽짜리 가르침일 뿐이다. 자기 확신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

 

 

일상의 철학을 담백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 삶은 그런 것에서 멀어질 때가 있다. 매사가 피로하며, 어쩐지 귀찮고, 확실히 다혈질이며, 언제나 부서지기 쉽고, 자주 옹졸하다. 겉으로 단단하게 보이는 사람이라고 이 ‘저급하고도 진실한’ 인간 심성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예상치 못한 일탈로 일반 대중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가 하면, 잘나가는 정치인일수록 허술한 수신제가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지게도 된다.

 

 

자기모순을 줄이고 자기 확신에 이르는 길목에서 필요한 것이 ‘한 호흡, 반 박자’의 원칙이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위기가 닥치거나 흥분이 몰려오는 그 순간 한 호흡만 쉬고, 반 박자만 멈추면 된다. 침 한 번 삼키고 잠시 허공에 눈길 한 번 주면 될 것을, 찰나가 주는 침묵의 향연을 야무지게 새기면 될 것을. 그 리듬을 잃고 성급히 굴다가 자기모멸이란 자술서를 쓰게 된다. 회한과 후회와 번민의 모든 뒤안길에는 지키지 못한 한 호흡, 반 박자가 원죄처럼 남아 있다. 휘말리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을 가장 쉬운 전략은 한 호흡 가다듬고, 반 박자 멈추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실천이 어려운 것.

 

 

 

 

4. 잘 듣기

 

잘 말하기도 어렵지만 잘 듣기는 더 어렵다. ‘적당히 말하고 나머지는 잘 들어주기’ 이런 소통 자세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다양한 개별자만큼의 다양한 소통 방식이 세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그에 따른 소통 방식도 달라진다. 일방통행으로 말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묻어가는 자세로 듣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다. 자신의 관심사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노골적으로 재미없어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재미없어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조용히 묻어가거나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남의 얘기를 듣는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말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을 뿐, 결코 말하고 싶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남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는 것, 거기다 기왕이면 잘 들어주는 것 이런 소통법을 실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잘 말하는 것 못지않게 잘 들어주는 연습도 필요하다. 듣는다(listen)는 것은 영어에서 침묵하는(silent) 것과 같은 철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잘 듣기 위해 잠시 침묵하는 일, 그다지 어려울 것 없어 보이는데 범부로선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지.

 

 

잘 듣는 행위의 주체는 나이고, 대상은 너이다. 그 대상인 ‘너’는 당연히 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만 한다.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직면한 아픔과 의혹을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 비굴하고 비열하고 연약한 우리 영혼은 강자의 말을 듣는 것엔 잘 길들여져 있다. 반면에 약자에겐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학습 없이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방한 활동이야말로 ‘잘 듣기’의 최고봉이라 할 만한 행보였다.

 

 

 

 

 

 

5. 본다는 것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내 눈에 비치는 거울, 내가 지닌 프리즘, 내가 가진 가늠자를 통해서 본다는 것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어진 대상에 대해 특별하거나 누적된 경험은 그것에 대한 고유한 이미지를 남기고, 그 이미지는 특정 대상에 대한 하나의 범주를 가능케 한다. 관찰자의 눈은 축적된 여러 경험의 씨날줄들을 엮어 그 사람은 참 착해, 그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 이런 심상의 카테고리들로 대상을 범주화하게 된다. 그것이 비록 환상이나 오해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

 

 

예를 들어 유도화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그가 그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그 나무에 대해 축적해온 자신만의 이미지 때문이다. 좋아했던 여자애의 티셔츠에 그 꽃무늬가 등장했고, 한 때 근무했던 분위기 좋았던 사무실 복도에 그 화분이 있기도 했으며, 추억 속 방죽의 가로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가 그 꽃을 좋아하게 된 거지 그 꽃 자체와 호불호는 별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한데 그 유도화 가지에 독성분이 있고, 그것 때문에 인체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정보 -비록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일일지라도 -를 얻은 뒤로 그는 유도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게 된다. 긍정의 이미지가 강했던 대상이 어떤 상황에서 부정의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하게 될 때 관찰자가 받는 심리적 타격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크다. ‘믿음’이라는 환상이 깨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당하는 정서적 충격은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환상에 가까운 긍정의 편견을 그 대상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또 다른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틀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은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축구공처럼, 먼지떨이질에 살아나는 먼지처럼 느닷없고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8월에 읽고 보려고 산 것들

동어반복인 줄 뻔히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글쓰기 관련 책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 버금 가는 앨리스 먼로 것 두 권

언제나 사는 속도에 비해 읽는 속도가 느리다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책 사기

몰타의 매 DVD는 내 취향은 아니었어. 그놈의 샘 스페이드를 화면으로 보겠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역시 데밋 해실의 문장으로 읽는 게 옳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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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호흡, 반 박자! 오늘 제 화두로 삼겠습니다^^
고종석의 문장 요즘 읽고 있는데 참 좋아요.

음성엔 비가 오락가락 합니다. 이런날엔 조용히 책을 읽으렵니다.
맛난 점심 드세요^^

다크아이즈 2014-08-23 09:35   좋아요 0 | URL
한 호흡, 반 박자가 안 돼서 문제를 그르친 경우가 많거든요.
스스로를 위한 반성문입니다. 반성은 잘 하는데 실천이 안 되는 게 문제라는 것ㅋ
근데 알라딘 글자 포인트가 높아졌어요. 한결 읽기 편하네요.

라로 2014-08-22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호흡, 반 박자!!ㅎㅎㅎ
제가 언니에게 글감을 많이 드리는 것 같아~~~~~.ㅋㅎㅎㅎㅎㅎㅎ
암튼 언니 좋은 글 감사해요. 귀감이 되는 분이시면서 귀감이 되는 글까지 쓰시는 분!!!
[아무래도 성악설인 게야]를 읽었던 날 언니 글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저렇게 글을 잘 쓸까? 혼자 생각하다가 그건 사유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부럽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8-23 09:41   좋아요 0 | URL
잘쓰는 건 아니고, 늘 잘 쓰고 싶지요. 잘 쓰는 분들 보면 신기하고 부럽고...
근데 고수들이 포진해 있으니 더 위축되고 뭐, 늘 도돌이표로 진행되는 고민이지요.
아주 잘 쓰는 사람들은 태어나는 것 같고,
노력해서 기본이라도 극복하자, 이런 맘으로 써요.
사유도 지나치면 엉뚱한데서 예민해지거나 예리해져서 별로 도움이 안 되어요.
일상에 무디면서 사유의 끝자락을 부여잡는, 그 고충도 제가 바라는 바는 아니에요. 저는 아롬님 글과 생활 다를 부러워한다니깐요~~


페크pek0501 2014-08-2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라온 새 글, 반갑습니다.
역시 잘 쓰시는구나, 하면서 읽었네요. 글을 쓴 세월이 많다는 흔적을 느낍니다.
제가 이 글을 책으로 읽었다면 여기에 밑줄을 긋겠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틀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은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축구공처럼, 먼지떨이질에 살아나는 먼지처럼 느닷없고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크아이즈 2014-08-25 20:39   좋아요 0 | URL
넘 오랜 만이라 감을 잃었어요.
알라딘은 안 보면 보고 싶은 친구 같은 느낌.
가끔 들어와서 페크님 글 읽는 기쁨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제가 들어올 수 있을 때 언니 새글 많이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

[그장소] 2015-01-2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없는 사색과 명쾌한 글들..즐겁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