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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잿빛 하늘,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지,
그나마 어렵게 꿈틀대는 것들은 남아 있는 생존자들에게 도살당하는 현실.
신이라는 절대자가 포기해버린 이 땅은 잔혹하면서 처참할 뿐.
성경에서 말하는 아마겟돈이 이러할 것이고 북구유럽의 신화에서 말하는 신들의 황혼(라그나뢰크)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종말의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원인규명이나 이야기의 발단이 된 사항에 대해 활자 몇 개의 조합으로 주절거리는 건 구차하고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 바다라고 불렸던 곳으로의 여정을 밟는 한 걸음마다 끈적끈적한 절망만이 묻어날 뿐이다.
이런 처참하다 못해 막막한 인류문명 몰락 후 소수의 생존자의 여정은 현실감 있게 또는 진절머리 나게 코맥 매카시는 로드라는 소설을 통해 계속해서 되뇐다.
자신의 핏덩이라고 인식하고 싶은 연약한 어린 짐승 같은 아이와 사내가 주고받는 단발적인 대사에선 희망 부스러기조차 감지되지 않는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면모만을 갖춘 채 육식동물에게 쫒기는 초식동물마냥 위태위태한 그들의 여정엔 너무나 본능적이다 못해 과거 인간이라 불렸던 동물들의 추악한 흔적만이 남아있다. 예정된 마지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들에겐 동정이나 애처로움보단 어떠한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무생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혹자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줄기의 희망을 마주쳤다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희망일진 미지수이다. 바퀴벌레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을 가진 인류라고 하지만 심해의 바닥까지 내려간 상황에서 반동으로 튀어 올라 상승곡선을 그리기엔 이 책에 묘사된 처참한 상황전개의 몇 십 배의 쓴물을 삼키며 살아남아야 진정한 희망이 손톱만큼 감지되지 않을까.
작가의 극악적인 페이소스를 잔뜩 쳐 바른 책 한권 다 읽고 조금씩 올라오는 쓴물은 아마 이 책을 탈탈 털어내 떨어지는 잿가루를 들이킨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