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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 엮음,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
안병직, 이영훈, <<대한민국 歷史의 岐路에 서다>>, 기파랑, 2007.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기파랑, 2007.

1. 뉴라이트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개관해보고자 했던 이유는 이른바 뉴라이트들의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보다 좁게는 이영훈의 일제시대에 대한 해석-그 대표적인 것이 종군위안부 문제와 식민지근대화론 쯤이 되겠다-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나는 뉴라이트를 정치적으로 굉장히 싫어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몇 가지 주장들(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불리는 수탈론에 대한 반박)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비난이 가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그 대표적인 비난의 요지는 거칠게 말하자면 일본이 우리 좋으라고 공장 짓고 철도 깔았겠느냐라는 것이고, 지네가 전쟁하려고 설치했으니 이를 가지고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비난이 식민지근대화론을 전혀 논박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뉴라이트 경제사학자들에 의해서 주로 주장되고 있는 것인데, 이들은 역사학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경제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행위주체의 의도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선량한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썼던 저 유명한 말, "우리가 빵을 먹는 것은 빵집 주인의 선의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기심 때문이다." 경제학은 '결과적으로' 경제주체의 행위가 자신과 타인의 효용을 증대시켰는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므로 일제가 조선을 부국강병시키려는 의도이든 수탈하려는 의도이든 간에 그들이 일제시대에 조선에 설치한 산업 인프라에 의해서 조선의 경제가 성장하고 산업구조가 근대화되었다면 '일제에 의해서 조선이 근대화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논지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아마 내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였다면 일군의 반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네 말도 맞아. 내 말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산업이 근대화되었다는 것일 뿐이야." 

   그리고, 뉴라이트를 친일파, 변절자 등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예컨대 안병직은 좌파적 지식인에서 전향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보통 태도를 이렇게 180도로 바꾸면 사람들은 변절자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사람의 관점은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영훈과 안병직의 대담집인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의 1부에서 안병직은 자신이 사상적으로 전향하게 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안병직은 이른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장했던 좌파적 경제학자였다. 식민지나 종속국에서는 자립적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주된 요지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안병직은 1970년대에는 한국 경제가 곧 파탄에 직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박정희 정권이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자본주의가 파탄되지 않는 것을 보고 사상적인 전환이 시작되었”고, 그 사상적 결과가 지금의 뉴라이트의 이론적 기초로 나타났다. 이에 의하면 그가 기존에 가졌던 이론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좌파적 이론을 버렸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상적, 이론적 전향은 단순한 변절이라기보다는 학문적 성찰의 결과로서 오히려 상찬받아야 할 일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관점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뉴라이트의 이론적 정초를 놓은 안병직이 주장하는 캐치-업 이론은 꽤 현실에 부합하는 이론이 아닐까? 요컨대 한윤형의 말처럼, "나는 일단 식민지 근대화론자, 혹은 뉴라이트들의 주장이 뿔이 난 도깨비의 말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들은 논쟁의 대상이지 '민족반역자'로 '처단'해야 할 인물이 아니다."(한윤형, <<뉴라이트 사용후기>>, p.39)
   
   이 글에서의 '뉴라이트'는 안병직과 이영훈 등을 필두로 하는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을 의미한다. 내 생각에 뉴라이트와 관련된 분란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뉴라이트라는 집단의 외연이 너무 넓어서 이상한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모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뉴라이트의 관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뉴라이트'라고 불리우는 정치인들의 '망언' 등을 검토대상에서 제외시키고 학술적인 주장만을 살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뉴라이트' 자체의 외연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2. 지난 4세기에 걸쳐 자본주의는 연속적인 발전도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 차례의 큰 파동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제1파동은 16세기 중엽에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성립한 최초의 자본주의(선발자본주의), 이 시기에는 선발모델이 없기에 각 국가는 자생적으로 발전하였다. 제2파동은 19세기 후반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등 열강의 자본주의 성립으로 나타나는데(후발자본주의), 이 시기에는 선진자본주의로부터 이식된 근대적 산업의 발달(근대적 발전)과 그 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전개되어 온 재래적 산업의 발달(재래적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복선적 발전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제3파동은 1960년대의 NICs의 자본주의적 발전(후후발자본주의)으로, 이 시기의 특징은 재래적 발전은 거의 없으며 선진국에서 이식된 근대적 발전이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때, 후후발자본주의 발달은 전적으로 선발, 후발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밖에 설명할 수 없는데, 이 관계 하에서 후후발자본주의국가들의 성립과정과 자본주의의 발달 요건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캐치-업 이론이다. 안병직의 캐치-업 이론에 따르면 후발국이 자본주의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조건은 세 가지로 축약되는데, 그 조건은 i)후발국에서 이용하지 않은 기술이 선발국에 축적되어 있을 것, ii)선발국과 후발국 간의 지식과 정보의 이동이 자유로울 것, iii) 후발국이 선발국으로부터 기술을 흡수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social capability)이 있을 것 등이다. 여기서 사회적 능력이라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뒤떨어져 있으나 문화적으로는 발달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시장경제제도의 성립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후발국이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상태하에 놓이면, 후발국의 발전단계가 어느 수준에 있든지간에 바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룩하여 선발국의 경제발전 수준에 근접하는 정도까지 추격(catct-up)이 가능하다는 것이 캐치-업 이론의 개요이다.

   이러한 안병직의 캐치-업 이론은 모제스 아브라모빗츠(Moses Abramovitz)의 연구에 기반하고 있다. 아브라모빗츠는 2차대전 이후 서구의 선진국들이 미증유의 고도성장을 이룬 점에 주목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였는데, 그의 분석 결과는 i)종전 직후 미국과 그 외의 선진국들간의 생산력 격차는 제 1차 석유파동에 이르기까지 감소하였으며, ii)종전 직후 경제발전의 수준과 그 후의 경제성장률이 반비례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브라모빗츠는 이 높은 성장률의 원인을 미국으로부터 기타 선진국으로의 기술이전에서 찾았으며, 이러한 기술이전이 가능하였던 것은 전후 UN과 같은 국제협력기구의 탄생, 그리고 냉전으로 인한 자유진영의 긴밀한 협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모빗츠의 연구는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위에 언급하였던 후발자본주의 발달의 요건 중 두 번째인 지식과 정보의 자유이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선진국의 경우에는 종전 직후에도 이미 '사회적 능력', 즉 시장경제제도라든가 법의 지배 등 자본주의적 도약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기에 이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캐치-업 이론을 한반도의 근현대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추격을 가능하게 하였던 사회적 능력이 어떻게 성숙되어 갔는가를 선행하여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3. 캐치-업 이론을 통하여 한국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조선 후기에서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회적인 능력이 축적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60년대에 자본주의적 추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수입하던 목록을 자체생산하기 시작함에 따라 조선의 무역수지는 감소하였는데, 당시의 지배층은 수출대체정책을 추진하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려 중국의 비단수입을 자유화함에 따라 국제화폐는 중국으로 빨려들어갔다. 또한 무분별한 개간과 벌목으로 삼림이 황폐화됨에 따라 잦은 홍수가 발생하였고 농업생산성은 하락하였다.

   19세기의 조선시대는 위기였으나 개화기를 전후해 성립된 쌀시장을 배경으로 신흥 지주들이 발흥하였고, 이들의 자본축적은 한국 자본가들의 원류가 되었다. 특히 식민지기는 조선의 사회적 능력이 결정적으로 배양되었던 시기였다. 조선민사령의 시행으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근대적 재산권과 시장경제제도의 근간이 확보되었고, 한일 병함으로 인해 일본과 조선이 단일한 시장권으로 통합됨에 따라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투하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이 주도하는 중소상공업도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근대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가 결정적으로 늘어난 시기였으며, 일제 치하에서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세대는 해방 후 경제 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기의 농지개혁은 지주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자영농화한 농민은 합리적 경영능력을 지속적으로 배양할 수 있었다. 또한 1950년대는 대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는 등 인적 자본이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근대 조선기로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합리적 경영능력, 사유재산제도의 확립, 소농 체제의 형성과 자본가 계급의 형성 등 ‘문화적 능력’의 배양을 바탕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은 폭발적인 자본주의적 성장을 이룬다. 그런데 캐치-업 이론에 의할 때, 문화적 능력을 바탕으로 후발국이 선진국을 추격하기 위해서는 선진국과 후발국 사이의 자유로운 지식과 기술의 이전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영훈과 안병직은 선진국에서 후발국으로 자유로이 기술이 이전될 수 있었던 세계사적 동향을 다국적기업의 출현에서 찾는다. 전술한 아브라모빗츠의 연구 결과에 의할 때, 2차 대전 후 제 1차 석유 파동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선진제국은 고도로 성장하였는데, 그 결과 선진국과 후발국의 임금수준의 격차가 급격히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선진국의 노동생산성이 낮은 사양산업은 임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을 가진 후발국으로 이전된다. 이 이전 과정에서 기술과 제도가 역시 후발국으로 이전되는데, 1960년대부터 발생한 다국적기업이 이 이전의 매개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사적 동향에 더하여, 안병직은 한국의 경제성장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한 일본과의 무역 재개를 꼽는다. 이 한일국교정상화로 인해 무상 3억, 유상 3억의 자금을 확보하여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일본과의 무역이 재개됨에 따라 자본재 및 중간재의 공급의 안정화, 그리고 완제품인 공산품의 수출시장의 확보, 기술 도입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안병직과 이영훈은 조선 후기에서 1950년 사이의 한반도의 경제사를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회적인 능력-그 핵심이 합리적 경영능력의 발전, 사유재산제도의 성립이다-이 배양되어왔던 시기로 본다. 또한 한반도의 경제적 성쇠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로서 일본과의 무역의 성쇠를 지적하는데, 이를 통하여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일국사, 즉 자주, 독립이라는 일국적 관점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해석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4. 이상이 안병직의 캐치-업 이론과 뉴라이트의 관점에서 서술된 한국 근현대사를 개관한 것이거니와 뉴라이트들이 쓴 저작물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들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논박하기가 꽤나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식민지기의 서술에 있어서 그러한데, 조사된 수치와 경제학적 방법론을 이용하여 수탈론이 설득력이 없음을 논증하는 글들은 뉴라이트들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인 음험함에도 불구하고 논증의 명확함에서 나오는 순수한 즐거움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개관하면서 나는 예전보다 더 식민지기에 대한 수탈론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인은 그때 꽤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캐치-업 이론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설명하는 틀로써 상당히 쓸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무역론과 노동경제학의 방법론과 논리를 이용하여 한반도에 일어났던 경제적 사건들의 원인과 영향을 설명하는 방식은 경제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대단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뉴라이트 경제사학자들의 연구는 실증적인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허구들을 상당 부분 밝혀내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할 것이다. 결국 그들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한 주장이 상당 부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뉴라이트들의 주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일은 그들의 사실적 주장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성과가 수용될 수 있는 한계점을 정확히 판단해내는 일일 것이다.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세간의 비난처럼 뉴라이트 집단을 단순히 친일파라든가라는 식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온당치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역사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그 관점이 타당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영훈과 안병직이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대항해시대 이후의 세계사는 서구의 해양 문명과 동양의 농경 문명이 대립하는 과정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해양 문명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근현대사는 이러한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지, 세계사적 환경과 떼어놓고 고립된 역사로 파악해서는 온당치 않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반도의 근현대를 세계사와의 관련 하에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이들의 관점 하에서 세계사는 서구의 승리의 역사이며, 한반도의 근현대는 그들을 추격(catch-up)하는 역사이다. 이는 근대 이후의 서구의 성취를 세계의 보편적 성취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나아간 경로를 하루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서구 중심적인 역사관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점은 뉴라이트들이 ‘서구의 성취’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로 경제적인 문제, 즉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것이다. 물론 근대의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물질적인 풍요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가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현재의 중산층조차 중세의 왕후장상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발전, 진보하는 역사를 성취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끊임 없이 진보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역사에서 강조하여야 할 것은 문제점이지 과거의 성취가 아니다. 과거의 성취만을 바라보면서 잘했다고 소리높여 외친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경제적 풍요는 성취했으나 아직 한국에는 해결하여야 할 문제점이 산적해 있다.  

   게다가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들이 목놓아 외치는 관점의 문제,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역사는 굴욕과 슬픔의 역사가 아니라 경제성장의 역사이며,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의 역사적 성취는 경제발전 뿐이다”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실증적 분석의 중요성과 사실의 사실로서의 인정과 가치판단의 배제를 주장하는 것과도 이율배반적이라는 점이다. 뉴라이트의 저 주장 하에는 한반도에서의 경제성장을 ‘대단한 것’으로 보는 가치판단이 분명히 내재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는 것은 사실적 명제이다. 이 명제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이 명제가 참이라고 해서 ‘경제성장은 좋은 것이다’라는 가치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식민지기에 조선은 사회경제적 근대화의 기초를 닦았다”는 사실적인 명제가 “일제 덕에 우리가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가치판단의 타당성을 추인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뉴라이트 사학자들은 후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분리를 강조한다. <<재인식>>에 실린 주익종의 논문 말미에는 이러한 언급이 있다 :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없기 바란다. 이상의 논증의 목적은 일제 덕분에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한국인이 잘살게 되었음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다. 이 논증의 취지는 일제 하의 경제생활에 관한 지금까지의 부적절한 논의를 그만두고 더 생산적인 논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 즉 해방 이후의 한반도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사실과 가치판단의 분리는 허물어진다. “‘나라세우기’의 정치에서 그가 후대에 남긴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입니다”(<<대한민국 이야기>>) 여기서 ‘그’는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하고, 한국전쟁을 방위하고, 농지개혁을 이끌어냈다. 그것을 ‘공적’이라고 평가할 때, 자유민주주의의 도입, 시장경제의 확립 등의 역사적 사실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로서는 왜 일제 시대의 사회경제적 근대화는 일제의 공적으로 보지 않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식민지기에 사회경제적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적 인과관계의 판단이 "일본 덕에 우리가 근대화할 수 있었다"는 평가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이듯이,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자본주의적 발달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판단은 "이승만 덕에 우리가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가치판단과는 역시 분리되어야 한다. 아니면 정직하게 "이승만 덕에 우리가 잘먹고 잘 살게 된 것과 같이, 일본 덕택에 근대화되었다."라고 말하거나.



 
 
 

가이즈카 시게키 지음, 김석근 옮김, <<제자백가 - 중국 고대의 사상가들>>, 까치, 1989.

절판되었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제본하여 읽었다.

   제1장과 제3장은 공자 사후 공문이 분파되어 가는 상황과 제나라에서 백가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서술하며, 나머지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중심 사상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각 사상가들의 중심 사상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으며, 저술의 번역은 저자의 말대로 '현대적'으로 되어 있어서 딱딱하지 않고 쉽게 읽힌다. 나는 제1장과 제3장을 열심히 읽었으며 이 글도 그에 관한 것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전국시대는 제자백가로 불리는 "독창적이며 일가를 이룬 사상가들이 겨우 2세기 반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 늘어서" 있는 "중국사상사의 황금기"였다. 전국시대는 패도(覇道)가 전면화하여 각국이 패권을 얻기 위해 격렬하게 다투던 시기여서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을텐데, 이러한 전국시대가 중국의 전 시기를 통틀어 "사상의 자유가 절정에 달했던 때"(p.65)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사상이 생겨날 수 있던 계기를 제공한 이는 위(魏)나라의 문후(文侯)였다. 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철환천하 이전에 받아들였던 인문학파인 선진(先進)파와 말년에 노나라에 사숙을 열고 받아들인 사회과학파인 후진(後進)파로 분화되었는데, 후진의 대표적인 제자였던 자하는 만년에 문후의 초빙을 받아 위나라로 갔고, 자하의 제자들이 위나라에 등용되어 정책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회(李悝)의 변법운동이 그 대표적이다. 문후는 신하도 스승으로 예우하였는 바 이는 "학자나 사상가들이 세속사회를 넘어서서 독자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확립되는 첫걸음이었다."(p.35) 또한 전국시대에 들어 옛 지도세력이었던 귀족 영주가 완전히 몰락하고 농촌의 지주들과 도시의 상공업자 세력이 발흥한 것도 대개 귀족이 아니라 양인 출신이었던 공문의 제자들이 등용될 수 있었던 사회적 여건의 변화였다.

   전국시대에 이렇게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인용될 수 있었던 이유를 저자는 전국 7웅의 팽팽한 대립에서 찾는다: "233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서 중국대륙이 서로 힘이 비슷한 일곱 개의 강대국으로 나뉘어져 대립, 항쟁했던 것은 중국역사상 그런 예를 다시 찾아볼 수 없다."(p.74) 서로 경쟁하는 일곱 나라는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천하의 인재들을 모집하였고, 따라서 학자들과 사상가들을 유인하기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특히 이런 사상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여 제자백가의 사상이 결정적으로 정립된 장소와 시기는 제나라의 위왕과 그의 아들 선왕의 치세 약 50년간(BC 357-301)이었고 저자는 이 시기를 "중국 역사상에서 기적과도 같은 시대"(p.73)라고까지 말한다.
 
   제나라는 수도 임치성의 직문(稷門) 근처에 문화구역이 설정되어 천하의 학자와 사상가들을 초빙해, 고액의 급료를 주고 직무도 맡기지 않으면서 자유로이 학문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 직하(稷下)의 사상계의 특징은 우선 모여든 학자의 국적과 학문 성향이 지극히 다양하였다는 점이다. 이 다양성의 충돌로 인해 제자의 사상이 피어났다: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의 개화는 실은 전국시대의 현학(顯學), 즉 유행학파인 유가와 묵가 계통을 잇는 학자들이 직하의 토론장에서 서로 접촉한 결과 다양하게 배합된 종자로부터 발생했다."(p.68)

   그 두 번째 특징은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직하의 사상계는 위나라의 정책학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이론학을 지향하였다."(p.67) 저자의 언급대로 이는 사상적인 진전이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이치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동양철학이 시작된 시기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사상적 진전와 근본적 이치의 탐구는 현실에서는 일보 후퇴한 것이기도 하다. 제나라 직하의 학자들의 당대의 권위는 위나라 문후 시절에 비하면 하락해 있었고, "대표적인 사상가들 사이에서조차도 ... 고대 성왕(聖王)이 일찍이 만들었던 이상적인 왕국을 다시 이 세상에 재현시켜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사회를 재건하고, 전란에 시달리는 중국인민들을 구해낸다는 사회의 복고적 혁신의 정열이 점차로 식어갔다."(p.73) 전국시대는 패도와 모략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힘의 시대가 전면화함에 따라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생각하였던 이상적인 세계가 실현될 가능성은 점점 요원해졌고, 그래서 학자들은 이론으로 후퇴한 것이 아닐까? 뭐랄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개를 편다는 말이 생각난다.



 
 
 

피터 두으스, <<일본근대사>>의 앞부분을 조금 읽음.

   이 책의 서문에서는 일본의 근대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소개한다. 서양의 일본사가들은 주로 일본의 근대화가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전후 일본의 역사가들은 일본 근대의 어두운 부분을 보다 강조하는데, 전자는 냉전기에(이 책이 1976년에 출판되었고 번역이 1983년에 되었음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자유경제 하에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한 것을 선전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 하에 있으며, 후자의 원인은 아마도 전후 일본 지식인들의 대다수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읽을 때 어떤 사실을 취사선택하여 강조하는가,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살필 때에는 반드시 '현재'를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다.

   인상적이었던 문장: "실패를 단지 장기적 목표달성을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대가로 취급해 버리는 것보다는, 목표달성을 위해 겪어야 했던 고난은 성공과 비교하여 지워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밝히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다."(p.14)



 
 
 

한자오치, <<사기 교양강의>>의 이사 부분을 읽음.

   생애에 대한 간단한 요약: 이사는 초나라 사람으로서 한비자와 함께 순자를 사사하고, 진나라에 출사하여 진의 중국 통일에 기여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실시하여 승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진시황 사후에 조고에 의해 몰락했다. 

   한자오치는 이사가 몰락한 원인을 가진 것을 지키고자 원칙을 어긴 데에서 찾았다. 그런데 그가 원칙을 지켜 호해가 아닌 부소를 황위에 올렸다면 참혹한 결말을 맞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물론 조고는 이사와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를 설득하는 그의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부소가 황제가 되었더라도 이사의 말년이 안온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진시황의 유지를 속여 호해를 황위에 올렸기 때문에 결국 죽었다는 결론은 상당한 정도 결과론적이지 않은가? 과거로부터 섣불리 단정적인 결론을 얻으려는 태도는 위험하다.



 
 
 

복거일,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를 읽음.

   복거일이 책에서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결론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으나 소위 '수구'들의 감정적 언설과 달리 복거일의 결론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 결론이 나름의 합리적인 현실분석에 의해 도출된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가 미국 밖에 없다면, 그리고 중국보다는 미국이 온화하다면,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중국에 대한 협상력을 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복거일의 책은 이제 읽은 것이 제법 된다. 복거일의 견해에 제법 동의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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