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즈카 시게키 지음, 김석근 옮김, <<제자백가 - 중국 고대의 사상가들>>, 까치, 1989.
절판되었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제본하여 읽었다.
제1장과 제3장은 공자 사후 공문이 분파되어 가는 상황과 제나라에서 백가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서술하며, 나머지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중심 사상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각 사상가들의 중심 사상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으며, 저술의 번역은 저자의 말대로 '현대적'으로 되어 있어서 딱딱하지 않고 쉽게 읽힌다. 나는 제1장과 제3장을 열심히 읽었으며 이 글도 그에 관한 것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전국시대는 제자백가로 불리는 "독창적이며 일가를 이룬 사상가들이 겨우 2세기 반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 늘어서" 있는 "중국사상사의 황금기"였다. 전국시대는 패도(覇道)가 전면화하여 각국이 패권을 얻기 위해 격렬하게 다투던 시기여서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을텐데, 이러한 전국시대가 중국의 전 시기를 통틀어 "사상의 자유가 절정에 달했던 때"(p.65)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사상이 생겨날 수 있던 계기를 제공한 이는 위(魏)나라의 문후(文侯)였다. 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철환천하 이전에 받아들였던 인문학파인 선진(先進)파와 말년에 노나라에 사숙을 열고 받아들인 사회과학파인 후진(後進)파로 분화되었는데, 후진의 대표적인 제자였던 자하는 만년에 문후의 초빙을 받아 위나라로 갔고, 자하의 제자들이 위나라에 등용되어 정책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회(李悝)의 변법운동이 그 대표적이다. 문후는 신하도 스승으로 예우하였는 바 이는 "학자나 사상가들이 세속사회를 넘어서서 독자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확립되는 첫걸음이었다."(p.35) 또한 전국시대에 들어 옛 지도세력이었던 귀족 영주가 완전히 몰락하고 농촌의 지주들과 도시의 상공업자 세력이 발흥한 것도 대개 귀족이 아니라 양인 출신이었던 공문의 제자들이 등용될 수 있었던 사회적 여건의 변화였다.
전국시대에 이렇게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인용될 수 있었던 이유를 저자는 전국 7웅의 팽팽한 대립에서 찾는다: "233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서 중국대륙이 서로 힘이 비슷한 일곱 개의 강대국으로 나뉘어져 대립, 항쟁했던 것은 중국역사상 그런 예를 다시 찾아볼 수 없다."(p.74) 서로 경쟁하는 일곱 나라는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천하의 인재들을 모집하였고, 따라서 학자들과 사상가들을 유인하기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특히 이런 사상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여 제자백가의 사상이 결정적으로 정립된 장소와 시기는 제나라의 위왕과 그의 아들 선왕의 치세 약 50년간(BC 357-301)이었고 저자는 이 시기를 "중국 역사상에서 기적과도 같은 시대"(p.73)라고까지 말한다.
제나라는 수도 임치성의 직문(稷門) 근처에 문화구역이 설정되어 천하의 학자와 사상가들을 초빙해, 고액의 급료를 주고 직무도 맡기지 않으면서 자유로이 학문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 직하(稷下)의 사상계의 특징은 우선 모여든 학자의 국적과 학문 성향이 지극히 다양하였다는 점이다. 이 다양성의 충돌로 인해 제자의 사상이 피어났다: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의 개화는 실은 전국시대의 현학(顯學), 즉 유행학파인 유가와 묵가 계통을 잇는 학자들이 직하의 토론장에서 서로 접촉한 결과 다양하게 배합된 종자로부터 발생했다."(p.68)
그 두 번째 특징은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직하의 사상계는 위나라의 정책학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이론학을 지향하였다."(p.67) 저자의 언급대로 이는 사상적인 진전이다. 현상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이치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동양철학이 시작된 시기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사상적 진전와 근본적 이치의 탐구는 현실에서는 일보 후퇴한 것이기도 하다. 제나라 직하의 학자들의 당대의 권위는 위나라 문후 시절에 비하면 하락해 있었고, "대표적인 사상가들 사이에서조차도 ... 고대 성왕(聖王)이 일찍이 만들었던 이상적인 왕국을 다시 이 세상에 재현시켜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사회를 재건하고, 전란에 시달리는 중국인민들을 구해낸다는 사회의 복고적 혁신의 정열이 점차로 식어갔다."(p.73) 전국시대는 패도와 모략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힘의 시대가 전면화함에 따라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생각하였던 이상적인 세계가 실현될 가능성은 점점 요원해졌고, 그래서 학자들은 이론으로 후퇴한 것이 아닐까? 뭐랄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개를 편다는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