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 EBS 교육대기획 초대형 교육 프로젝트 
EBS <학교란 무엇인가> 제작팀 엮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빌려읽음. 

1. 이 책은 EBS에서 10부작으로 기획된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책은 총 2권으로 기획되어 있는데, 이 책은 그 중 첫 번째 권이라고 한다. 미래의 학부모가 된 자신을 상상하면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각론적인 부분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인상 깊었던 몇몇 부분의 요약. 

   (1)아이를 무작정 칭찬하기만 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칭찬이나 벌은 외적인 자극인데, 아이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이런 외적인 자극이 아니라 내재적 동기 유발이다. 칭찬, 특히 아이의 성취를 칭찬하는 것은 결국 아이를 평가하는 것이며, 아이는 오히려 실패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의 성취를 칭찬하는 것은 아이가 부모를 기쁘게 하거나, 아이에게 감동을 주었을 떄에만 살아받는다고 느까게 만든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칭찬이라는 평가가 아니라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따라서 아이를 평가하거나 아이에게 기대를 품고 칭찬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기울인 노력에 대하여 칭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사교육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과도한 사교육은 아이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쌓아갈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한다. 아이는 사교육에서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게 될 뿐이며, 그 결과 자기에게 맞는 공부법을 알아낼 시간도,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점검해볼 시간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진짜 실력을 점검하지 않고 주어진 프로그램을 이행한 결과, 아이에게 남는 것은 자기가 뭔가 알고 있기는 하다는 느낌,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자만심 뿐이다.

2. 이런 내용들은 미래의 학부모로서의 나에가 아주 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었던 것은 미래의 학부모로서의 행동지침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게 따끔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메타인지 능력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그러하였다.

   이 책에서 바람직한 자녀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는 '상위 0.1%'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그들이 메타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메타(meta)는 한 단계의 고차원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메타인지는 자신이 무엇을 인지하고 있는지를 한 처원 위에서 조감할 수 있는 능력, 즉 스스로 얼마만큼 아는지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은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지식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 사이의 격차를 자주 경험할 때 길러진다.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양을 정화히 확인하는 방법은 자신이 학습한 내용을 스스로 복습, 정리하는 것이다. 사교육에  매몰된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므로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을 키울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부분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지금까지 공부해오면서 철저하게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나는 꽤 많은 시간을 전공을 공부하는 데에 쏟아 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정복하기 어려운 난해한 부분들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훑고 지나가고,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지도 못하였으면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희미한 느낌을 내가 아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메타인지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막연하게 느꼈던 이런 불안감이 메타인지라는 명확한 개념으로 나에게 주어진 이상,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아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렇게 나는 이 책의 각론적인 내용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다만, 이 책은 교육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교육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을꺼? 이 책의 말미에는 유명한 대안학교인 서머힐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그 학교가 제시하는 교육의 방향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이지만, 나와 내 자녀들이 살아갈 한국의 현실에 합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 모든 것을 학생의 자율에 맡기고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연제 공부할지를 전적으로 학생들이 결정하게 하는 방식은 지금의 한국에 도입하기에는 너무나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이는 2011년의 대한민국은 나의 학창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고, 아마 내 자녀들도 비슷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세상에 한 명의 학부모로서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까? 내 자녀들을 어떤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까?

   랜디 포쉬는 <<마지막 강의>>의 서문에서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옳고 그름에 괸하여, 현명함에 관하여, 그리고 살면서 부닥치게 될 장애물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싶어햔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무엇에 가중치를 두고 가르칠 것인지? 한국의 많은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직업을 얻어 부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을 대학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12년의 학창시절은 오로지 좋은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고, 아이들은 경쟁으로 내몰려 피폐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경향성을 단호히 거부해야 하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종종 신문에서 대학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한국의 현실을 단호히 부정하고 자신의 자녀를 다르게 교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들의 선택은 용기 있는 행동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들의 자녀는 감옥같이 답답한 학창시절에서는 자유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서 삶을 지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한국에서 한 사람이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는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자녀들은 이러한 현실과 맞닥드리게 되었을 때 이겨낼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또한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벌이라는 일종의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좋은 대학에서 받는 최고의 교육, 전국 최고의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쌓는 경험들, 우수한 사람들과 꿈을 공유하면서 넓어지는 시야. 이른바 명문대에 다님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이런 체험은 확실히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절실히 느꼈다.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틀의 범위까지만 성장할 수 있다면, 그 틀을 최대한 넓혀 두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은 대학에 진학할 나이의 학생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틀을 한껏 넓혀 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를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것을 지상 명제로 삼아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우수한 지적 능력과 인격적 성숙은 별개라는 사실 역시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로지 자신의 성취를 위해 달려 나가며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이득만이 우선이며 더불어 살아갈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그 우수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이 사회에서 높은 성취를 누릴 지도 모른다. 그라니 나는 내 아이들이 그런 괴물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요컨대 나는 내 아이가 균형 잡힌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내 아이가 살게 될 한국 사회를 현명하게 살아나갈 힘을 가지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내 아이를 키우고 싶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길로 나아가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 같다. 어떻게 나와 내 아이는 이러한 좁은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책에서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는 0.1%의 아이를 만드는 것은 그 길로 나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0.1%의 아이는 당연히 학업성취도가 뛰어난 아이들이다. 다만 나는 성취 그 자체보다도, 그들이 학업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는 책의 부분에 더 마음이 간다.

  "어린 시절,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해서 공부에 몰입해본 경험, 최선의 노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의 성취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유혹을 극복하는 힘, 이런 능력들은 아이가 인생을 살아 나가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p.250)

   "우리가 아이들에게 공부법을 알려주고 공부를 잘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아이들이 배우는 기쁨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는 문제를 해결했을 대의 희열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학창 시절에 그런 기쁨과 희열을 맛본 경험은 아이들 가슴속에 자리 잡은 꿈을 이루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돕기 위해서이다."(p.251)

   배움을 통해서 희열을 얻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힘을 얻으며, 자신의 꿈을 위해서 노력하는 삶, 책의 이 구절들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바람직한 자녀 교육의 방향으로 여겨진다. 다시 한번, 미래의 내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할 줄 알며,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나중에 내가 자녀들을 교육할 때 이 책을 읽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강변 대화 - 무신론자와 신학자, 기독교를 말하다 
자오치정.루이스 팔라우 지음, 이상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독실한 기독교인과 대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대화와 소통은 내가 아닌 상대방이 옳을 수도 있다는 점을 전제한 뒤에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을 상정하기 힘들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 쪽에는 신의 말씀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인간의 말들이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면서 듣는 모든 말은 인간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말들은 절대적 진리에 비추어 교정되고 교화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말이 신의 말씀을 교정하게 되는 기적을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자오치정은 과학자이자 공산당 간부인 무신론자이며 루이스 팔라우는 빌리 그레이엄의 후계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전도사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대화자들은 그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었으며 많은 소통과 교감을 나누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일말의 기대와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과연 그들은 소통할 수 있었을까? 가능했다면 어떤 통찰을 공유하게 되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기대는 사라졌고 실망의 확인만이 남았다. 그들은 서로 친목을 도모하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로 인해 다시 한번 분명해진 사실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결코 근본적인 점에서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할 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팔라우 박사의 말을 읽을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내가 경멸하는,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전도할 때 쓰는 논법을 그대로 구사하기 때문이었다. 자오치정의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질문에 대해서는 논점을 회피하면서 도망가고, 인과관계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다 하느님의 섭리로 끌어오고, 논리적 비약과 협박을 일삼아대는 그 논법들. 인간이 영적으로 고독하기에 신을 찾는다는 말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결론이 아무런 논증도 없이 도출되는가?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감탄했던 것은 자오치정의 동양 철학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이었다. 자오치정이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짜증 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노회한 정치가이니만큼 좋게좋게 넘겼겠지만.

   어쨌든 내가 기독교인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을 시간을 들여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의 입장 차이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데에서 끝난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소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두 사람이 쓰는 어휘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자오치정은 끊임 없이 팔라우에게 "이해할 수 없다"고 묻는다. 팔라우는 끊임 없이 "믿는다"고 말한다. 이해와 믿음의 간격은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노신선집 1 - 소설 수필 
노신문학회 지음 / 북피아(여강)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아Q정전>을 오랜만에 읽음. 

   예전, 그러니까 내가 10대였을 때 이 소설을 읽고 나는 그냥 아Q가 병신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20대의 막바지에 다시 읽고 나서는 그렇게 간단히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중국 인민을 각성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 뿐이었던가? 루쉰은 아Q를 경멸하기보다는 연민한다. 아Q의 모든 어처구니 없는 행동과 생각은 그가 현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Q는 결코 그의 삶을 바꿀 기회도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승리법을 통해 위안을 얻거나, 성으로 가는 것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성에서 가장 먼저 패배하여 사라지는 것은 삶을 바꾸고자 신기루같은 희망을 품고 성으로 올라온 사람들이다.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 엮음,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
안병직, 이영훈, <<대한민국 歷史의 岐路에 서다>>, 기파랑, 2007.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기파랑, 2007.

1. 뉴라이트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개관해보고자 했던 이유는 이른바 뉴라이트들의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보다 좁게는 이영훈의 일제시대에 대한 해석-그 대표적인 것이 종군위안부 문제와 식민지근대화론 쯤이 되겠다-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나는 뉴라이트를 정치적으로 굉장히 싫어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몇 가지 주장들(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불리는 수탈론에 대한 반박)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비난이 가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그 대표적인 비난의 요지는 거칠게 말하자면 일본이 우리 좋으라고 공장 짓고 철도 깔았겠느냐라는 것이고, 지네가 전쟁하려고 설치했으니 이를 가지고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비난이 식민지근대화론을 전혀 논박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뉴라이트 경제사학자들에 의해서 주로 주장되고 있는 것인데, 이들은 역사학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경제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행위주체의 의도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선량한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썼던 저 유명한 말, "우리가 빵을 먹는 것은 빵집 주인의 선의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기심 때문이다." 경제학은 '결과적으로' 경제주체의 행위가 자신과 타인의 효용을 증대시켰는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므로 일제가 조선을 부국강병시키려는 의도이든 수탈하려는 의도이든 간에 그들이 일제시대에 조선에 설치한 산업 인프라에 의해서 조선의 경제가 성장하고 산업구조가 근대화되었다면 '일제에 의해서 조선이 근대화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논지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아마 내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였다면 일군의 반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네 말도 맞아. 내 말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산업이 근대화되었다는 것일 뿐이야." 

   그리고, 뉴라이트를 친일파, 변절자 등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예컨대 안병직은 좌파적 지식인에서 전향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보통 태도를 이렇게 180도로 바꾸면 사람들은 변절자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사람의 관점은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영훈과 안병직의 대담집인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의 1부에서 안병직은 자신이 사상적으로 전향하게 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안병직은 이른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장했던 좌파적 경제학자였다. 식민지나 종속국에서는 자립적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주된 요지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안병직은 1970년대에는 한국 경제가 곧 파탄에 직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박정희 정권이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자본주의가 파탄되지 않는 것을 보고 사상적인 전환이 시작되었”고, 그 사상적 결과가 지금의 뉴라이트의 이론적 기초로 나타났다. 이에 의하면 그가 기존에 가졌던 이론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좌파적 이론을 버렸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상적, 이론적 전향은 단순한 변절이라기보다는 학문적 성찰의 결과로서 오히려 상찬받아야 할 일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관점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뉴라이트의 이론적 정초를 놓은 안병직이 주장하는 캐치-업 이론은 꽤 현실에 부합하는 이론이 아닐까? 요컨대 한윤형의 말처럼, "나는 일단 식민지 근대화론자, 혹은 뉴라이트들의 주장이 뿔이 난 도깨비의 말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들은 논쟁의 대상이지 '민족반역자'로 '처단'해야 할 인물이 아니다."(한윤형, <<뉴라이트 사용후기>>, p.39)
   
   이 글에서의 '뉴라이트'는 안병직과 이영훈 등을 필두로 하는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을 의미한다. 내 생각에 뉴라이트와 관련된 분란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뉴라이트라는 집단의 외연이 너무 넓어서 이상한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모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뉴라이트의 관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뉴라이트'라고 불리우는 정치인들의 '망언' 등을 검토대상에서 제외시키고 학술적인 주장만을 살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뉴라이트' 자체의 외연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2. 지난 4세기에 걸쳐 자본주의는 연속적인 발전도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 차례의 큰 파동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제1파동은 16세기 중엽에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성립한 최초의 자본주의(선발자본주의), 이 시기에는 선발모델이 없기에 각 국가는 자생적으로 발전하였다. 제2파동은 19세기 후반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등 열강의 자본주의 성립으로 나타나는데(후발자본주의), 이 시기에는 선진자본주의로부터 이식된 근대적 산업의 발달(근대적 발전)과 그 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전개되어 온 재래적 산업의 발달(재래적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복선적 발전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제3파동은 1960년대의 NICs의 자본주의적 발전(후후발자본주의)으로, 이 시기의 특징은 재래적 발전은 거의 없으며 선진국에서 이식된 근대적 발전이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때, 후후발자본주의 발달은 전적으로 선발, 후발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밖에 설명할 수 없는데, 이 관계 하에서 후후발자본주의국가들의 성립과정과 자본주의의 발달 요건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캐치-업 이론이다. 안병직의 캐치-업 이론에 따르면 후발국이 자본주의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조건은 세 가지로 축약되는데, 그 조건은 i)후발국에서 이용하지 않은 기술이 선발국에 축적되어 있을 것, ii)선발국과 후발국 간의 지식과 정보의 이동이 자유로울 것, iii) 후발국이 선발국으로부터 기술을 흡수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social capability)이 있을 것 등이다. 여기서 사회적 능력이라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뒤떨어져 있으나 문화적으로는 발달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시장경제제도의 성립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후발국이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상태하에 놓이면, 후발국의 발전단계가 어느 수준에 있든지간에 바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룩하여 선발국의 경제발전 수준에 근접하는 정도까지 추격(catct-up)이 가능하다는 것이 캐치-업 이론의 개요이다.

   이러한 안병직의 캐치-업 이론은 모제스 아브라모빗츠(Moses Abramovitz)의 연구에 기반하고 있다. 아브라모빗츠는 2차대전 이후 서구의 선진국들이 미증유의 고도성장을 이룬 점에 주목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였는데, 그의 분석 결과는 i)종전 직후 미국과 그 외의 선진국들간의 생산력 격차는 제 1차 석유파동에 이르기까지 감소하였으며, ii)종전 직후 경제발전의 수준과 그 후의 경제성장률이 반비례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브라모빗츠는 이 높은 성장률의 원인을 미국으로부터 기타 선진국으로의 기술이전에서 찾았으며, 이러한 기술이전이 가능하였던 것은 전후 UN과 같은 국제협력기구의 탄생, 그리고 냉전으로 인한 자유진영의 긴밀한 협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모빗츠의 연구는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위에 언급하였던 후발자본주의 발달의 요건 중 두 번째인 지식과 정보의 자유이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즉 선진국의 경우에는 종전 직후에도 이미 '사회적 능력', 즉 시장경제제도라든가 법의 지배 등 자본주의적 도약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었기에 이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캐치-업 이론을 한반도의 근현대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추격을 가능하게 하였던 사회적 능력이 어떻게 성숙되어 갔는가를 선행하여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3. 캐치-업 이론을 통하여 한국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조선 후기에서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회적인 능력이 축적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60년대에 자본주의적 추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수입하던 목록을 자체생산하기 시작함에 따라 조선의 무역수지는 감소하였는데, 당시의 지배층은 수출대체정책을 추진하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외려 중국의 비단수입을 자유화함에 따라 국제화폐는 중국으로 빨려들어갔다. 또한 무분별한 개간과 벌목으로 삼림이 황폐화됨에 따라 잦은 홍수가 발생하였고 농업생산성은 하락하였다.

   19세기의 조선시대는 위기였으나 개화기를 전후해 성립된 쌀시장을 배경으로 신흥 지주들이 발흥하였고, 이들의 자본축적은 한국 자본가들의 원류가 되었다. 특히 식민지기는 조선의 사회적 능력이 결정적으로 배양되었던 시기였다. 조선민사령의 시행으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근대적 재산권과 시장경제제도의 근간이 확보되었고, 한일 병함으로 인해 일본과 조선이 단일한 시장권으로 통합됨에 따라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투하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이 주도하는 중소상공업도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근대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가 결정적으로 늘어난 시기였으며, 일제 치하에서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세대는 해방 후 경제 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기의 농지개혁은 지주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자영농화한 농민은 합리적 경영능력을 지속적으로 배양할 수 있었다. 또한 1950년대는 대학생 수가 크게 증가하는 등 인적 자본이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근대 조선기로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합리적 경영능력, 사유재산제도의 확립, 소농 체제의 형성과 자본가 계급의 형성 등 ‘문화적 능력’의 배양을 바탕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은 폭발적인 자본주의적 성장을 이룬다. 그런데 캐치-업 이론에 의할 때, 문화적 능력을 바탕으로 후발국이 선진국을 추격하기 위해서는 선진국과 후발국 사이의 자유로운 지식과 기술의 이전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영훈과 안병직은 선진국에서 후발국으로 자유로이 기술이 이전될 수 있었던 세계사적 동향을 다국적기업의 출현에서 찾는다. 전술한 아브라모빗츠의 연구 결과에 의할 때, 2차 대전 후 제 1차 석유 파동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선진제국은 고도로 성장하였는데, 그 결과 선진국과 후발국의 임금수준의 격차가 급격히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선진국의 노동생산성이 낮은 사양산업은 임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을 가진 후발국으로 이전된다. 이 이전 과정에서 기술과 제도가 역시 후발국으로 이전되는데, 1960년대부터 발생한 다국적기업이 이 이전의 매개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사적 동향에 더하여, 안병직은 한국의 경제성장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한 일본과의 무역 재개를 꼽는다. 이 한일국교정상화로 인해 무상 3억, 유상 3억의 자금을 확보하여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일본과의 무역이 재개됨에 따라 자본재 및 중간재의 공급의 안정화, 그리고 완제품인 공산품의 수출시장의 확보, 기술 도입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안병직과 이영훈은 조선 후기에서 1950년 사이의 한반도의 경제사를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회적인 능력-그 핵심이 합리적 경영능력의 발전, 사유재산제도의 성립이다-이 배양되어왔던 시기로 본다. 또한 한반도의 경제적 성쇠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로서 일본과의 무역의 성쇠를 지적하는데, 이를 통하여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일국사, 즉 자주, 독립이라는 일국적 관점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해석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4. 이상이 안병직의 캐치-업 이론과 뉴라이트의 관점에서 서술된 한국 근현대사를 개관한 것이거니와 뉴라이트들이 쓴 저작물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들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논박하기가 꽤나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식민지기의 서술에 있어서 그러한데, 조사된 수치와 경제학적 방법론을 이용하여 수탈론이 설득력이 없음을 논증하는 글들은 뉴라이트들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인 음험함에도 불구하고 논증의 명확함에서 나오는 순수한 즐거움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개관하면서 나는 예전보다 더 식민지기에 대한 수탈론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인은 그때 꽤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캐치-업 이론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설명하는 틀로써 상당히 쓸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무역론과 노동경제학의 방법론과 논리를 이용하여 한반도에 일어났던 경제적 사건들의 원인과 영향을 설명하는 방식은 경제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대단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뉴라이트 경제사학자들의 연구는 실증적인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허구들을 상당 부분 밝혀내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할 것이다. 결국 그들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한 주장이 상당 부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뉴라이트들의 주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일은 그들의 사실적 주장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성과가 수용될 수 있는 한계점을 정확히 판단해내는 일일 것이다.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세간의 비난처럼 뉴라이트 집단을 단순히 친일파라든가라는 식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온당치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역사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그 관점이 타당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영훈과 안병직이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대항해시대 이후의 세계사는 서구의 해양 문명과 동양의 농경 문명이 대립하는 과정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해양 문명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근현대사는 이러한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지, 세계사적 환경과 떼어놓고 고립된 역사로 파악해서는 온당치 않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반도의 근현대를 세계사와의 관련 하에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이들의 관점 하에서 세계사는 서구의 승리의 역사이며, 한반도의 근현대는 그들을 추격(catch-up)하는 역사이다. 이는 근대 이후의 서구의 성취를 세계의 보편적 성취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나아간 경로를 하루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서구 중심적인 역사관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점은 뉴라이트들이 ‘서구의 성취’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로 경제적인 문제, 즉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것이다. 물론 근대의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물질적인 풍요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가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현재의 중산층조차 중세의 왕후장상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발전, 진보하는 역사를 성취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끊임 없이 진보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역사에서 강조하여야 할 것은 문제점이지 과거의 성취가 아니다. 과거의 성취만을 바라보면서 잘했다고 소리높여 외친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경제적 풍요는 성취했으나 아직 한국에는 해결하여야 할 문제점이 산적해 있다.  

   게다가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들이 목놓아 외치는 관점의 문제,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역사는 굴욕과 슬픔의 역사가 아니라 경제성장의 역사이며,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의 역사적 성취는 경제발전 뿐이다”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실증적 분석의 중요성과 사실의 사실로서의 인정과 가치판단의 배제를 주장하는 것과도 이율배반적이라는 점이다. 뉴라이트의 저 주장 하에는 한반도에서의 경제성장을 ‘대단한 것’으로 보는 가치판단이 분명히 내재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는 것은 사실적 명제이다. 이 명제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이 명제가 참이라고 해서 ‘경제성장은 좋은 것이다’라는 가치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식민지기에 조선은 사회경제적 근대화의 기초를 닦았다”는 사실적인 명제가 “일제 덕에 우리가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가치판단의 타당성을 추인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뉴라이트 사학자들은 후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분리를 강조한다. <<재인식>>에 실린 주익종의 논문 말미에는 이러한 언급이 있다 : “여기서 한 가지 오해가 없기 바란다. 이상의 논증의 목적은 일제 덕분에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한국인이 잘살게 되었음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다. 이 논증의 취지는 일제 하의 경제생활에 관한 지금까지의 부적절한 논의를 그만두고 더 생산적인 논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 즉 해방 이후의 한반도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사실과 가치판단의 분리는 허물어진다. “‘나라세우기’의 정치에서 그가 후대에 남긴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입니다”(<<대한민국 이야기>>) 여기서 ‘그’는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하고, 한국전쟁을 방위하고, 농지개혁을 이끌어냈다. 그것을 ‘공적’이라고 평가할 때, 자유민주주의의 도입, 시장경제의 확립 등의 역사적 사실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로서는 왜 일제 시대의 사회경제적 근대화는 일제의 공적으로 보지 않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식민지기에 사회경제적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적 인과관계의 판단이 "일본 덕에 우리가 근대화할 수 있었다"는 평가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이듯이,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자본주의적 발달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판단은 "이승만 덕에 우리가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가치판단과는 역시 분리되어야 한다. 아니면 정직하게 "이승만 덕에 우리가 잘먹고 잘 살게 된 것과 같이, 일본 덕택에 근대화되었다."라고 말하거나.



 
 
 
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헌책방에서 사서 읽음.

1. 나는 뭔가에 공감하고 싶어서 문학을 읽는다. 그런데 이 <<일식>>은 다 읽고 나서도 저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하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머리를 써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는 느낌. 저자가 이 작품을 문예지 <<신조>>에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에 쓰여 있는 저자의 문학관인 "나는 예술지상주의자이며, 문학으로써 성스러움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p.202)는 문장 역시도 나의 찝찝함을 상쾌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다만 저자는 소설의 본령인, 작가의 사유에 의한 새로운 세계의 구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저자는 자신이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발자크의 후예임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일식日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따져봄으로써 소설의 주제에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2. 소설에서 일식은 안드로규노스의 화형장면에서 등장한다. 안드로규노스는 한 몸에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닌 전인적全人的 존재로 그려지는데, 소설에서는 마지막에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다. 일식은 화형이 진행되는 와중에 안드로규노스의 양물이 드러남과 동시에 시작되어, 양물에서 사정된 정액이 안드로규노스의 음문으로 들어갈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해가 가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소설의 초반부인 pp.25-26에서 '나'는 세계에 대한 증오를 핵심으로 하는 이단 마니교가 왜 남프랑스에서 번성했는지를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생각에 이른다.

  "태양 탓인가?!"
  ......절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저 먼 곳에 걸린 위열(偉烈)한 태양이 눈에 들면서, 홀연 그같은 이단은 처음부터 모두 저 눈부신 원을 근원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일었던 것이다. 이 햇빛 때문에, 이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며 반짝이는 거대한 빛 대문에, 거기에 감추어진 어떤 암울한 예감 때문에 사람들은 대지를 증오하게 된 것이 아닐까. 육신을, 이 무거운 고통스러움을 모멸하게 된 것이 아닐까
.(pp.25-26)

   태양은 육신에 대한 모멸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육신에 대한 모멸은 이단이 번성하게 된 원인이다. 따라서 태양이 사라지면 육신에 대한 모멸도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단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의에 이르게 된다. 이는 '나'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참으로 바울로의 사상은 의심할 여지 없는 영원의 진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들은 언젠가는 멸망한 이 육신(肉身)과 세계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커다란 이유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뿐 아니라 신은 육신을 받으셨던 것이다.(p.38, 강조는 나의 것)

   무엇보다도 청빈의 생활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리스도의 육화(肉化)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의의를 확실히 하여, 이 세계를, 이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p.40)

   소설의 절정인 안드로규노스의 화형장면은 '나'의 인식이 옳음을, 즉 영육의 합일이 완전성에 이르는 길임을 드러낸다. 안드로규노스의 양물-肉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이 드러남에 따라 일식은 시작되고, 안드로규노스의 양물에서 사정된 정액이 안드로규노스의 음문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일식은 절정에 이른다. 육신의 완전성이 드러나는 순간에 해가 완전히 가려짐으로써 하늘은 영육의 합일이 요구됨을 긍정하고, 거인은 먼 하늘에서 교합함으로써 이를 추인한다. 그리고 pp.167-168의 독백에서, '나'는 그리움과, 회귀욕구와, 세계와의 합일을 느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 남는 것은 완전함의 상징인 금金이다. 그러니 결국 일식은 육신과 세계에 대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영육의 합일을 통해 완전의 길로 나아가라는 계시적 상징인 셈이다.

3.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시기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전통의 기독교에 있어서, 육과 영이라든가, 신과 세계라든가가 무한히 접근했습니다. 20세기 이전에 단 한 번 있었던 예외의 시기였지요. 그것이 플라톤주의 수용과 종교개혁에 의해, 다시 신과 세계는 짝 갈라져서, 육에 대한 영의 우위가 확립되어버립니다. 그 갈라지기 직전의 긴장된 시기가 <<일식>>의 시대 배경입니다.(p.204)
 
   저자의 말대로 당시의 유럽은 "스콜라 철학적인 고전주의와 르네상스적 인문주의가 부딪치던 시기"(p.205)이며,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의 여인들>>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체는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라고 썼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 예외적인 시대를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육체를 긍정함으로써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을 지양하고 르네상스적 정신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것인지? 이는 내 추측일 뿐이지만. 어쨌든, 이런 저자의 주제의식은 매우 장대한 것이다. 나는 <<일식>>이 소설적으로는 꽤 정교하게 구축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주제는 저자에게 너무 버거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젊은이의 허세. 이 소설이 묘하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