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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제가 알고 있는 많은 알라디너들(제가 즐겨찾기 한 많은 분들, 제가 즐겨찾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틈틈이 방문하는 서재의 주인장 들)이 마이페이퍼에 영화 카테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카테고리가 없더라도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올려주셨는데.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평이 안 올라오네. 이번 주말에 한 번 볼까하는 영화인데... 재미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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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09-1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이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올려주셨던데요. 한 번 읽어 보시는건 어떨까요.

마립간 2004-09-1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에서 받은 인상과 전혀 다른 영화평이네요. 가족 영화가 아니라 조폭 영화다. 글샘님이 '가족'을 보자 말자... 라고 하셨네. 이것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얀마녀 2004-09-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안 보려구요. ^^

마냐 2004-09-1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눈물이 너무 날거 같아 안보고 싶은데...
옆자리 후배가 "와이프랑 보러가는데 피곤해서 그냥 자다올려구요"라며 갔다가 "어, 생각보다 꽤 괜찮아서 안 자고 봤어요"라고...^^;;;

비로그인 2004-09-17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싶습니다. (마립간님 오랜만입니다. 쭈~우욱 함께 하고 있다는거 알아주세요 ^^::)

stella.K 2004-09-1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봐서 손해 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감이라는 게 생기면 포스터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영화들이 있죠. 최민식의 <꽃피는 봄이오면>도 상당히 괜찮을 것만 같다는...!

마립간 2004-09-1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눈물 흘릴 수 있을 때, 흘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눈물 흘릴만한 영화도 흔치 않는데.
폭스바겐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폭스바겐님의 서재 방문에 뜸한 것이 죄송스럽네요. 자주 인사하고 지내지요.
 
 전출처 : sweetmagic > 영화와 드라마 속의 수학

영화와 드라마 속의 수학


[한국일보공동] 수학으로 세상읽기

 

 
‘영화 속에 무슨 수학?’ 하겠지만 수학이 등장하는 영화는 드물지 않다. ‘굿윌 헌팅(Good Will Hunting)’은 수학적 천재성을 지닌 청소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는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존 내쉬를 주인공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지는 않았지만 외국에서 호평을 받았던 영화 ‘파이(Pi)’는 원주율 파이에서 나온 제목으로, 역시 천재 수학자를 소재로 한다.

영화 ‘큐브1(Cube)’의 속편인 ‘큐브2(Hypercube)’에서도 수학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육면체 모양의 폐쇄된 방, 즉 큐브의 입구에는 번호가 적혀 있는데, 이 번호는 그 방이 함정인지 아닌지를 알려 준다.

이 영화에서는 특별한 수학적 감각을 지닌 리븐이라는 사람이 큐브 번호가 소수(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 떨어지는 수)인지 판별하여, 함정이 있는 방인지 아닌지를 알아낸다. 이 영화를 제작할 때 자문을 한 수학자 프라비카(David W. Pravica)는 자신의 캐나다 주민등록번호(SIN, social insurance number) 476,804,539를 큐브 번호의 하나로 사용하기도 했다.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형수님은 열아홉’은 내용 전개에 수학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드라마에서 로맨티스트인 수학영재 승재(윤계상)는 여자친구 유민(정다빈)에게 방정식을 통해 마음을 전한다. 방정식 17x2-16|x|y + 17y2=225의 그래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하트 모양이 되기 때문에, 이 방정식을 일명 사랑의 방정식이라고 한다.

한편 승재는 유민에게 “내 마음의 변수 를 찾아보면...”이라고 말하면서, 변수 가 결국 유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연인 사이에서는 파트너가 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데, 이것은 함수에서 독립변수의 영향을 받아 종속변수가 결정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 드라마는 좋아하는 마음이 무한히 이어지면서 좋은 일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등장시킨다.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Möbius)가 처음 생각해 낸 뫼비우스의 띠는 직사각형 모양의 긴 띠를 한 번 꼬아 양 끝을 연결하여 고리 모양이 되도록 한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한바퀴 돌면서 선을 긋고 가위로 오려보면 두 조각이 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하나의 얇고 커다란 고리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뫼비우스 띠의 성질은 두 마음이 합치되어 하나가 되는 것을 은유할 수 있다.

또한 뫼비우스의 띠의 한 점에서 시작해 고리를 따라 원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선을 그어보면 안과 밖을 모두 돌아 처음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보통의 고리는 안쪽에서 선을 긋기 시작하면 안에만, 바깥에서 선을 긋기 시작하면 바깥에만 그려지지만, 뫼비우스의 띠는 안팎의 구분이 없는 독특한 성질을 갖기 때문에 안과 밖에 모두 선이 그려진다. 드라마의 두 사람을 각각 안과 밖이라고 보았을 때 안팎이 구별되지 않는 이런 성질 역시 두 사람의 사랑을 표현하는 적절한 은유가 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조세희의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첫 번째 제목으로도 유명한데, 이 소설에서 뫼비우스의 띠는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중층적 의미를 드러낸다.

드라마 ‘형수님은 열아홉’에서는 무미건조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학이 애틋한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수학의 본질적인 내용을 드라마에 반영한 것이 아니라 수학 그래프나 수학 개념을 피상적인 수준에서 연결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이 드라마가 일반인들이 수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  kparkmath@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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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GO의 세계화

 - 마냐님의 <세계화와 싸운다> 리뷰의 댓글에서 바람구두님이 질문하신 것과 마냐님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 부제 : '세계화를 반대하기 위한 NGO의 세계화, 내재적 모순'

 

 저의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rhetoric 모순이 그대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설명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생각의 단초로 중세시대에서 근세시대로 오는 상황을 먼저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지방 분권이 중세 즉 당시의 지배 계급의 꼭대기에는 물론 왕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지배력을 가졌던 것은 지방 영주였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 국가가 형성되면서 왕권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져 있던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타당 하느냐'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둘 다 부도덕하다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 사람에 권력이 집중되는 근세 제국주의 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중세가 그보다는 더 호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까? 아마 근세 국가 형태의 지배를 위해서는 장원이라고 하는 것의 연합보다 왕권이라는 것이 국가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적합하다고 하는 것은 힘을 발휘하기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지배구조보다는 근세 국가의 지배구조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를 느낀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로마의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되는 것입니다.


 NGO는 왜 세계적 연대를 갖으려고 할까? NGO의 상대, 즉 국가(대개의 선진국) 또는 다국적 기업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NGO가 세계적 연합이라는 형태를 갖고 그 목적을 성취했다면 세계적 연합을 풀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NGO의 상대는 지속적으로 힘을 비축하는 대로 세계를 향해 자기 자신의 확대를 다시 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NGO도 지속적인 힘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NGO가 힘을 갖게 된 이후에도 지속적인 도덕성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기대하지 못 하겠습니다. 어떤 강대국이 또는 독재적인 지도자가 철인적 도덕성을 갖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죠.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할 때는 자본가가 사회개혁의 주도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 계급은 신분보다는 능력이 중시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신분제도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된 이후 그들 즉 자본가들은 다시 지배계급으로 올라섰습니다.


 제가 가을산님이 세계 보건 포럼에 참석하러 떠나실 때 했던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NGO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구가 비대해지거나 영향력이 생기면서 권력화하는 경향을 보이거든요. 이런 이야기 아세요. '천사가 악마를 이기기 위해 한참을 싸우고, 다 이긴 후에 자신을 돌아 보았더니 자신이 악마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추어를 지향하던 올림픽도 과연 아마추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초심을 잃기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냐님이 이야기하셨듯이 NGO의 세계화는 영미 거대 기업과 금융의 다를 수 있습니다. 출발 선상에 있을 때는, 아니면 힘을 없을 때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을 수 있죠. 힘(경제적, 정치적 힘)을 갖게 되면 그리고 시간이 지났을 때에 처음의 순수함이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국가내의 인권문제도 처음에는 순수한 인간적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강대국이 약소국의 내정 간섭의 한 가지 도구로 사용됩니다.


 NGO의 영향력 역시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도 문제인데, 예를 들면 이라크 전쟁이 진행되는 있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세계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죠. 그러나 지구상에 이라크 전쟁 이외에는 전쟁이 없기 때문에 제가 다른 전쟁을 모른 것일까요. 아미 그곳에 NGO의 적절한 상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제가 이야기한 ‘NGO의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세계화가 강대국 또는 다국적 기업이 힘을 추구의 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NGO 역시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힘을 반대하기 위한 또 다른 힘 이것을 저는 내재적 모순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저는 어렸을 때 (1970년대) 많이 들었습니다. 전쟁 억지를 위한 군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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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9-1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직이 커지고 힘이 생기면 권력화한다..맞는 말입니다. 실제 얘기안되는 조직 이야기도 가끔 전해듣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며칠전 라디오에서 월 80만원 주는 단체에서 언론운동 하시는 분 얘기를 들었슴다. 힘이 없을 때는 순수해도 힘이 생기면 저들과 닮아갈게 뻔하다..고 해서 그들의 현 시점에서의 노력들을 지레 검열할 필요가 있나 싶네요.
세계화. 그거 폐해 많습니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 혹은 보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견제하기 위해..뭔가라도 하는 건 그들 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그들이 '연대'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싸움의 상대방과 자본력이나 정치력이나 힘의 차이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일단 눈앞의 전선이 분명한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본질적으론 비슷한거 아니냐, 어느 쪽도 편들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초심을 잃지 말라구 비판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겠지만 말임다. ^^;;;

마립간 2004-09-1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렵게 일하는 분들의 노고를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순수성을 잃더라도 순수함을 갖고 일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저의 가치관은 공功과 과過가 서로 상쇠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잘못의 가능성을 갖고 (없을 수도 있는데) 폄하한다는 것은 더욱 더 말이 안 되죠. 저는 내재적 모순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가을산님도 힘의 차이에 대해 같은 평을 주셨습니다. 전쟁의 억지를 위한 군사력도 반드시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 속에 내재적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한 비판의 눈길 - 얼마전 '맹목적 추종이 아닌 무정한 압박'에 대한 설명을 가을산님에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선을 향해 나가고자는 마음이겠죠. NGO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길 바랍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박노해 - 이불을 꿰매면서

이불을 꿰매면서

                                           박노해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 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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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여성해방’시로 평가받는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는 부부가 같이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담당해온 아내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절절히 읊고 있다. 이 시는 ‘당시 남성으로서는’ 선진적이었지만, 시의 주된 내용은 “앞으로는 내가 이불을 꿰매겠다”가 아니라 “나를 깨우쳐준 아내에게 감사한다”이다. 시의 화자는 ‘주인’과 ‘노예’의 자리를 바꾸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주체의 성찰과 각성을 위해 타자의 ‘훌륭함’을 동원하고 찬양한다. 이미 많은 남녀 논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적 성별 관계의 특징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기대라는 남성의 이중 시선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처럼 이 시는, 여성을 착취하고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여성에게 의존적인 한국 남성 무의식의 ‘80년대 진보 버전’이다.

얼마 전 미혼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증명되었듯이, 한국 남성들은 현모양처형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모양처는 기본이고, 현모양처에다 똑똑하고 돈 잘 버는 여성을 배우자로 원한다. 아마 한국 남성의 여성 팬터지가 가장 잘 재현된 티브이 드라마는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다모>일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밥 잘하고 정숙하면 됐지만,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밥만 잘해서는 어림도 없다. 밥 잘하면서 돈도 잘 벌고, 정숙하면서도 섹시해야 하며(물론, 섹시해야 되지만 섹스를 해서는 안 된다), 예쁘면서도 지적이고, 똑똑하면서도 겸손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앞에 나서지는 말아야 한다. 드라마 <다모>의 여주인공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며, 게다가 무술까지 잘한다.

성별 분업은 여성의 경험을 드러낼 언어가 없어서 서구·남성의 언어인 실증주의를 빌린 표현이다. 성별 분업은 남자는 ‘바깥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계급 문제로 인한 남성 집단 내부의 차이로 인해, 생계 부양이라는 성역할을 모든 남성이 잘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성의 일이라고 간주되는 공적 영역의 임금노동을 못하는 남성은 많지만, 가사노동에서 제외된 여성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여성들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두 영역에서 이중노동을 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억압받는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논리도 억압 세력의 이해 관계에서 구성된다. 앞의 시에서처럼, 타자의 고통은 주체를 위해서 제기될 때만 받아들여진다. 여성의 노동권은 생존권 차원에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노동력 활용 차원에서 주장되거나(활용할 필요가 없을 때는 제일 먼저 해고된다), 여성의 정치 세력화는 여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패 정치를 청소하기 위해, 동성애 커플의 결혼 합법화는 동성애자의 당연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이성애 결혼 제도의 다양성을 위해 옹호된다. 타자화의 내용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때만큼은, 피해자 여성은 억압자 남성을 위한 구원 투수가 되어 ‘좋은’ 타자가 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영혼을 장식하는 컬러 물감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의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져….” 초현실주의에서 좌파로 돌아선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미래의 시>의 한 구절,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낯설지 않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전히 주인공은 남자다. 여성은 설명하는 주체가 아니라 설명 대상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 문명의 선후에 있을 뿐, 현재를 사는 같은 시민이 아니다. 남성에 대한 기대는 격려를 동반하지만, 여성에 대한 기대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여성이 인류의 미래이고 대안이라는 높은 도덕적 기대가 아니라 동시대에서 차별 받지 않는 것이다. 정말 여자가 남자의 미래라면, 지금 모든 권력을 미래를 이끌어갈 여성에게 이양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남자의 인생은 남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 남자의 미래는 남자의 과거다. 피해자에게 해결사의 역할을 요구하지 말라.

출처 : 한겨레 2004-05-26 17:36


바람구두의 중언부언 ------ 이 사람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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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6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가을산 > 마립간님께.... 3

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덕분에 오늘은 자전거 출근을 하지 못했습니다.
퇴근 전에 지난 몇개의 글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도덕의 정치, 좌파/우파,  아버지의 원리/어머니의 원리  

우선, 도덕의 정치라는 책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을 놓고 분석한 책입니다.
이성적인 해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정책이나 선거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의 가치가 국가에 투영된 아버지의 원리와 어머니의 원리라는 설명을 도입했습니다.

(그런데,  '이성적인 해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대중의 반응'에 대해 우리 나라 정치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바람 (風)'이라고 부르지요. ^^  )

제가 보기에 도덕의 정치에서 아버지의 원리/어머니의 원리는 좌파/우파의 원리보다는, 바람구두님 서재의 정치성향 평가에서 제시된 '권위주의 - 자유주의'에 해당하는 구분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분석한 미국의 민주당만 하더라도 '좌파'라 볼 수 없지 않나요?   

도덕의 정치의 저자 조지레이 커프가 뒷부분에, 어느 원리가 더 '옳으냐?'에 대해 쓴 부분에서 여러 가지 설명을 했지만, 저는 그 사람의 전공 분야 - 인지과학 - 로는 힘에 부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을 파해치다보면 교육, 가정, 문화..... 를 거쳐 또다시 '인간의 본성' 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 합니다.

그래서 우파와 좌파의 문제보다는 권위주의와 자유주의를 놓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파든 좌파든 권위주의를 싫어합니다. -- 이건 가치판단이나 논리가 아니라 그냥 제 감정입니다. 제가 어떤 행동이나 가치를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 없이 강요당하거나 따르는 것이 싫습니다.   
물론, 종교나 가정의 연장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이나 신뢰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런 존경과 신뢰를 담보로 '규제화 된' 표현과 강제는 싫어합니다.

2. 종교와 권위, 자발적 가난,   

마립간님의 종교관을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종교의 권위 - 아버지의 세계관 - 를 인정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선택하신 것처럼 나타납니다. 
마립간님의 종교관이나 초창기에 올리신 독서 이력에 대한 글을 보면, 사고나 관심의 방향이 저와는 거의 반대순서로 섭렵하시는 것 같습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성당에 신실하고픈 신자였으나, 지금은 불가지론자, 혹은 다원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의 개념도 어려서는 당연하게 여겼으나, 지금은 그 존재에 대해 판단을 유보했습니다. 굳이 지금 답을 말하라면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업(業)'의 개념이 제게는 더 합리적으로 다가옵니다.

마립간님께서 개신교를 택하신 이유들을 보면, 이성적인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드는 믿음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이렇게 이성적인 분석과 대화가 가능한 경우조차 정말 드물어요.... ) 

마립간님의 글에서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네번째 이유, 즉 배중률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선택을 요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마도 계속 회색지대에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신의 뜻을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불가능 하듯,  이 우주와 생명체의 신비를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불신하거나, 무조건 믿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 이런, 저는 미적분이나 통계도 잘 이해 못합니다 그려.... ^^  )

'내가 아버지로서 너에게 충분히 너를 위한 유익을 행할 것이다' 라고 하는 아버지 원리의 대전제...
저도 부럽습니다.  받아들이고 의탁하면 그야말로 '천국'일텐데요...  
그래서 전에도 썼듯이 '주의 기도'는 공감합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소서'
하지만.... 아마 마립간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사도신경' 을 identity로 하는 기독교에는 영영 귀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추신: 마립간님, 십계명의 네번째, 다섯번째 계명이 무엇인지 외운지 하도 오래 되어서 가물가물합니다.
게다가 개신교와 천주교의 번호에 따른 계명이 조금씩 차이가 나서 더욱 헤깔립니다.
(이런 차이는, 원래는 번호가 매겨지지 않은 계명을 10개로 묶으면서 나타난 차이라 생각합니다만..)

3. 제 친구요. 아직도 독신입니다.
그 친구 학생때 같이 노숙자 진료도 하고, 달동네 공부방 어린이도 돌보고 했었는데,
요즘은 정신분석 쪽에 심취해 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들 중에서도 정신분석을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이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신분석자들끼리도 서로를 분석해주고, 분석 받고 한답니다.  마치 도를 닦는 것 같아요. 
'분석을 마친 사람'이 - 제가 듣기에는 마치 '득도했다'는 것과 비슷하게 들리는데 - 아직 우리 나라에는 없다고 할 정도네요.

'누구는 분석을 마쳐가고 있다더라' 라고 말하던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반박은 못했지만, 속으로는 '방이 어질러져서 말끔히 치워놓았는데, 그 방이 다시 어질러지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더라구요.   ^^;;

어쨌든.... 이 친구, 저도 분석을 받아볼 것을 권하더라구요.
일주일에 두번씩, 서울에 있는 분석가를 만나서 분석받으라구요.
제게 하는 말이, '분석을 받으면, 너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돼.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겐 오히려 이기적으로 보이게 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너 자신을 찾는 것일 수도 있어.' 

음... 저도 제 속에 있는 것이 궁금하기는 해요. 하지만, 한편으로 제 안에 꽁꽁 눌러놓았던 것들이 드러날 때 도질 아픔이 두렵기도 하구요. 

이런 친구이다보니, 자발적 가난 여부는 이 친구 관심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결혼한다고 배우자 가치관을 따라 갈 사람도 아니지만, '사랑'하게 된다면 혹시....  ^^

4. "맹목적 추종이 아닌 무정한 압박"

노빠들이 노무현을 지지한다면, 
개혁을 이루고 노무현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맹목적으로 노무현을 추종하기 보다는
비판과 압력을 넣는 것이 더 도움이 될거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 흐흐. 이 지점도 시민단체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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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1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님의 답글 밑에 저의 답글을 달아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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