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51207

 

<이론 이후> 서평 별점 ; ★★★★, 도서관 대출

 

이 책을 어디서 소개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알라디너 서재에 링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페이퍼를 읽고 이 책은 읽은 것은 아니다. (아마 일간지 칼럼이나 Book section을 읽고 나중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꽤 마음에 들었던 책이고 내 입장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백미러 속의 우주> p23 “페르시아의 양탄자는 완전하게 불완전하며, 정확하게 부정확하다.”

<비극의 탄생>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식이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하다.”

<과정과 실재>,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 유럽의 철학 전통을 가장 일반적이고 무난하게 규정하자면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잇따른 각주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 관점 http://blog.aladin.co.kr/maripkahn/7538844

    

용어의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하자면 그만큼의 타당성을 제공하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제시해야겠지만, 대략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플라톤과 비플라톤, 이성과 감성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나는 플라톤-노자주의, 디오게네스-양주주의라고 표현한다. 이 책에서는 플라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주된 용어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주의와 반이론주의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이중텐의 <백가쟁명>을 읽고 그렇다면 (플라톤-노자주의 입장의) 어느 상황에 어느 중국 철학을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기지만은 그 외의 주장에 대해 대체로 동의한다. 마찬가지로 <이론 이후> 역시 같은 감상을 갖는다.

 

세상이 혼돈스러울 때, (이성과) 이론은 세상을 바로 세우는 듯 했다. 그러나 1,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런 생각은 오류이자 환상이었다. (반이성주의 즉) 반이론주의가 득세를 하였으나 강강 디오게네스-양주주의는 틀렸다고 말한다.

 

대개의 진리는 사람의 심미적 직관을 만족시킨다고 한다.

The imperfect can be perfect!

    

* 독서기록 151007 원림 http://blog.aladin.co.kr/maripkahn/7834066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다. There is ‘perfect’ in the sentence.

 

* 밑줄 긋기

p28 몇몇 포스트모던한 사유에 따르면 합의는 압제적인 것이고, 연대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획일성일 뿐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적인 것을 내세워 순응주의에 반대한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주변적인 것과 소수적인 것을 내세워 순증주의에 맞선다.

p29 그러나 얄궂게도 포스트모던니스트들이 자신들의 보수적인 적수에게서 가장 싫어하는 점이 바로 이런 엘리트주의적, 획일적 관점이다./규범은 억압적이다. ...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사자와 황소를 위한 법칙은 억압니다라고 노래했듯이 말이다.

p144 문화는 실용적이지도, 편협하지도 않는 궁극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을 자기 소관 밖으로 쫓아내려던 사람들은 보편적인 것이 종종 대안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망각했다.

p149 동시대의 문화이론에서 절대적 진리만큼 배척당한 개념도 없다.

p149 실제로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진리를 일절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교조주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p150 그런데 이론 이론은 반위계적인 것이 왜 위계적인 것보다 바람직한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p152 여기서 절대적 진리란 단지 진리를 의미할 뿐이다./진리가 절대적이라는 말은 그저 무엇인가가 진리로 입증되면 그것을 상반되게 볼 수는 없다는 뜻일 뿐이다.

p154 어떤 상황이 인종차별적이라는 게 진리라면 그 진리는 절대적이다. ... 부분적으로 진리라는 게 절대적이다.

p154 ‘절대적 진리란 어떤 맥락에서든 진리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특정한 프레임 속에서만 판단을 내릴 뿐이다. ; 모든 판단은 맥락에서 해야 한다. 이 문장 모든이라는 전칭에도 불구하고 참인가?

p155 그러나 진리란 것이 우리의 진리 (truth-for-us)를 뜻한 뿐이라면 다른 문화와의 갈등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진리란 그들의 진리 (truth-for-them)일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진리가 오직 우리만 옳다고,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진리만 옳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 갈등이 유발하는 이유다. 현실이 그렇지 아니한가.

p163 베스트의 삶이 무너진 이유는 그가 그 이상 뭔가를 성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득점과 트로피와 연봉을 더 쌓아올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at his best)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p164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에서 핵심은 인간 본성에는 목표 따위가 없다.

p165 인간 본성의 실현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적 성공 윤리에 불리하다.

p165 그렇다고 이것이 선한 사람들은 늘 성공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선한 사람들이 성공한다는 교리는 필딩도 언급한 바와 같이 단 한 가지 결점, 즉 진리가 아니라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p166 무엇보다 반본질주의자들은 본선을 신뢰하지 않는다./따라서 반본질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옹호자들과 마찬가지로 본성 개념을 경계한다.

p167 이 다툼은 맥베스처럼 인간 본성의 한계를 의미 있는 한계로 이해하는 사람들과 맥베스 부인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뛰어넘는 존재라고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다.

p170 오닐의 지적에 따르면 본질주의란 무엇인가가 그 자체가 되려고 한다면 가질 필요가 있는 속성이 있다는 믿음이다.

p177 여기에는 수단과 목적의 비극적인 갈들이 잠재해 있다. 만약 수단-목적에 조금이라도 덜 사로잡힌 삶의 형태를 창조해내기 위해 도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기꺼이 조금은 덜 바람직한 방식으로 살아야만 한다. ; 과연 최적의 덜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

p177 우선 진정한 번영은 주관적인 일이 될 수 없다.

p179 결단론자나 실존주의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도덕적 가치는 당신이 우연히 선택하게 된 그 무엇이 아니다. 도덕적 가치란 우리 모두가 우연히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요컨대 도덕적 가치란 주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주관적이라고 믿는 도덕 철학자들도 있다. ; 나도 도덕이 간주관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덕의 정의에 따라 객관에 가까울 수도, 주관에 가까울 수도 있다.

p180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과 정치학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정치학의 하위학문이다.

p190 우리는 주관을 자아와, 객관을 세상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주관이 가치의 문제라면, 객관은 사실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는 미스터리다.

p190 자기인식은 분리 불가능한 사실과 가치의 문제이다.

p191 객관성의 반대말 중 하나는 나르시즘이다.

p198 그렇지만 히틀러의 등장과 관련된 역사의 복잡한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이 히틀러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 그럴까? 어떤 대상이 종교화된 상황에서는 대개 그런 방식으로 믿는다.

p199 마르크스는 도덕 morality과 도덕주의 moralism을 혼동했던 것/도덕주의란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확연히 구분되는 문제, 즉 이른바 도덕적 문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p200 확실히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p201 요컨대 법률, 원칙, 의무 등은 풍요로운 삶의 발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행위는 대충 경험에 비추어 해도 상관없지만, 원칙은 느슨해지면 안 된다.

p201 정작 문제는 도덕을 풍요로움이 아니라 의무와 금지로 여기는 데 있다.

p201 성 바울이 모세의 율법에 대략 이런 입장을 취했다. ... 모세의 율법이 사랑과 정의의 율법임을 제대로 이해했다./p202 인간에 대한 연민 아래 율법을 제쳐둔다고 해서 유대인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p203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 없이는 사랑도 있을 수 없다.

p204 법이 뒤죽박죽이면 불의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입법자가 애매한 입자을 취한다면 강간범도 풀려날 수도 있다. ... 법의 정신이 그 내용을 이루는 단어들 자체보다 늘 우선시되지는 않는다.

p207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데는 거의 모두들 동의한다. ... 사람들은 무엇을 착취로 간주할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서로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컨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이 자명한 것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212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분명 도덕적 판단은 존재하지만, 그런 판단의 근거나 합리적 토대는 부족하다.; 최근 윤리학은 토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없다고 선언하며, 실질적으로 최소한의 직관이 필요하다고 한다./예컨대 데리다에게 윤리란 절대적인 결단의 문제이다.

p213 전형적인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이란 윤리의 문제이지 숭배의 문제가 아니다. 즉 부자들의 폭력에 맞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려 했는가를 다루는 문제이지, 얼마나 꼼꼼하게 의례를 준수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구원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문제이다.

p214 니체는 정의, 분별, 용기, 절제 등, 사실상 도덕의 모든 현상이 본질적으로는 동물적이라고 주장했다.

p217 확실히 생명의 능력은 일종의 원리이다. 거칠게 말하면 우리를 살아가기 힘들게 만들고, 때로는 불가능하게 만다는 것이 문화와 정치이다. 인간을 분할하는 주된 근원은 문화이다. ; 이는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바이고, -페미니스트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 <소모되는 남자>의 주장이기도 하다.

p218 단순히 서로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또는 페미니스트와 가부장주의자가 서로 앙숙이 될 일은 없다. 그렇지만 살인적인 언쟁을 불러오는 인간의 공유된 본성을 연도 일구어낸다. ; 이 연대가 또한 문화이기도 하다.

p219 인간의 육체는 오직 문화를 통해서만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다. 문화는 우리에게 자연적인 것이다.

p219 담비 만약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 동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왜냐하면 그 동물의 육체, 그러므로 그 동물의 물질적 습관은 우리의 습관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담비까지 ... 남녀조차 생물학적인 이유로 대화가 안 되기가 비일비재한데.

p221 거짓 보편성은 우리 모두 똑같다고 주장한다.

p224 영원한 가소성 可塑性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던의 주창자들이 무엇을 염두에 두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변화가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p229 우리에게는 강렬한 사랑과 이보다는 더 차분한 우정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용어가 필요한데, 우리에게 이런 용어가 없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 사랑과 우정 사이일반적 언어이면서 과학적 용어

p233 사실상 평등한 존재들 사이에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상호적 자아실현의 과정을 얻을 수 없다. 엄밀히 말해서 평등은 사랑에 필수적이지 않다./그러나 평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라고 말한 것, 혹은 우정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사랑보다는 평등이 더 적절한 정치적 용어일 것이다.

p234 온갖 형태의 인간 본성이 서로 경쟁하며 저마 다른 윤리이론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본성은 사실 (그것은 무엇인가)과 가치 (어떻게 존재해야만 하는가) 사이를 넘나드는 다루기 힘든 개념이다.

p235 인간의 협력 자체는 미덕이 아니다. 누구와 무슨 목적으로 협력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p236 인간들은 간의 연대를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할 목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따라서 연대를 가치와 자아실현의 원천이 아니라 뜨뜻미지근한 합의나 악의적인 순응주의로 보는 동시대 문화이론은 사회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 내가 자주 언급했던 좌파, 진보의 내재적 모순의 다른 표현이다. 연대는 좌파의 본질적 코드인데, 이는 우파의 코드인 순응을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p237 윤리적인 것은 영광의 구름인 동시에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일이기도 하다.

p238 [이사야서, 113, 17] ... 야훼는 병적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들에게 구원이란 종교적인 일이 아니라 정치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늘 상기시킨다.

p239 사람들 편에서는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일보다는 종교단체가 주는 위안이 더 좋았다.

p241 무신론자들은 종교에 대해 투박한 고정 관념을 갖고 있는데, 그들이 어떤 학문 분야에 종사하든지 간에 종교라면 몸서리치는 이유가 틀림없이 이 때문일 것이다.

p241 이 신은 마피아 보스와 프리마돈나 사이에서 태어난 것 같은 존재로서, 결국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불러주는 것 말고는 아무런 말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p242 ‘복종[순종]’을 뜻하는 단어인 이슬람은 자비, 평등, 공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궁극적인] 승리라는 복음을 설파하는 알라에게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라는 것을 함축한다.

p243 이사야서는 이와 같은 혁명 이후의 시대에 강력한 울림을 주는 책이다.

p243 역사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법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믿는 사람들과 그런 생각은 좌파들의 소름 끼치는 과장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말이다./이것은 서로들 각자의 상대방이 어떻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믿을 수 있는지 이해해보려고 상상력을 총동원하는 일종의 갈등이다.

p244 급진주의자들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진보라는 것의 실제 모습을 거부하기 때문에,/p245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거대서사를 비판하는 데 온 정신이 쏠려 있기 때문에 진보의 개념을 거부한다.

p246 어떤 의미에서 혁명에 필요한 것은 순수한 리얼리즘이다.

p246 발터 벤야민의 지적처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후손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꿈꿔서가 아니라 조상들이 노예가 되었던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p248 극이 전개되는 와중에 리어 왕은 겸손하게 확실한 어떤 것 something’이 별 의미도 없는 포괄적인 전부 all’보다 낫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p252 부유한 사람들의 문제는 재산이 그들을 현실에 붙박이게 만들고, 그리하여 죽음을 막는 보호막을 치게 만든다는 점이다. 부유한 사람은 더 즉흥적으로 살 필요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안전하게 살 필요가 있다.

p252 우리는 삶 속에서 죽음을 연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을 덜 두려운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p253 서구, 특히 미국은 리어 왕에게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미국은 실패를 수치스럽고, 원통하고, 심지어 완전히 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이다.

p255 미국이 의지력의 땅이라면, 유럽은 그것과는 거의 상반된 니체 식 권력의지의 고향이다.

p255 의지는 그 자체로 지배이다./흔히 의지가 군사적 형태를 띤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p257 의지에 대한 숭배는 우리가 살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진리, 즉 우리의 의존성이라는 진리와 인연을 끊으려고 한다.

p258 우리를 비동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루기 힘들고, 정도를 벗어나고, 결코 충족되지 않는 이 욕망이다.

p259 그렇지만 의지에게는 거대한 장애물이 있다. 바로 그 자신이다. ... 이런 엄격함은 의지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사실상 즐길 수 없게 만든다.

p260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

p261 바로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틀렸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근본주의자가 어떤 차원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냐가 아니라 바로 그 주장의 본질이 무엇이냐이다. ; 나도 이 주장처럼 판단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독립적) 본질은 존재하지 않고 어떤 차원에서 주장하냐, 즉 관계론의 입장이 본질이자 진리라는 생각을 반박할 수 없다.

p265 토대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또 다른 토대를 슬그머니 원래의 토대 밑에 끼워 넣는 것이 언제나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 마치 세계가 코끼리 위해, 코끼리는 거북이 위헤 올라가 있는 형국이다.

p269 인간에게는 이제 형이상학적인 토대가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은 인간이었다. 오로지 비겁함과 병적 향수만이 인간을 그런 토대에 얽매이게 한다.

p270 니체가 축출려고 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가부장적인 신의 이미지였는데, 니체는 그것이 신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지는 몰랐다./p270 신은 노보대디가 아니라 친구, 연인, 동료인 희생자임이 밝혀진다.

p271 돈과 형이상학이 최후의 일전을 벌이면 결국 사라지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p272 토대를 믿는다는 것과 근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p276 이 신성한 텍스트는 삶 자체보다 중요한데, 이런 믿음은 폭력으로 결실을 맺기도 한다. ... “문자는 사람을 죽인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36]

p279 근본주의자들은 사회적 삶이라는 고단한 공간에서 표류하면, 그 위를 걷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깨끗한 빙판 같은 절대적 확실성을 그리워한다. ; 나는 절대적 확실성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에서 근본주의자이지만, 그 무엇에도 절대적 확실성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적이지 않다./p282 근본주의는 텍스트의 죽은 문자와 사랑에 빠져 있는 일조의 시체애호증이다./p285 기본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은 물신숭배자들이다.

p286 인간의 의식은 즉자적인 사물이 아니며, 그 자신이 무엇을 보느냐 혹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의 관점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p287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이, 만약 영원성이 어딘가에 있다면 바로 여기,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p289 죽음을 받아들이면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 ; 실제 연구 결과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솔직히 나는 실감은 못하고 있다./p291 죽음을 꺼리는 사회는 이방인도 두려워하기 쉽다.

p292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말한 대로 나는 타인에게서 나 자신을 빌린다.” 나는 타인들과 내가 공유하는 발화행위 속에서만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나가르주나는 자아에 본질이 없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는 수많은 타인의 삶, 그리고 그들이 행한 선택과 행동의 결과와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p293 근본주의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우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p294 니힐리스트는 자신의 아버지[형이상학적 사고방식]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면 가치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근본주의를 아버지로 둔 니힐리스트일 수 있다. 이렇게 질문한다. 빅뱅부터 빅크런치까지 (또는 영원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도 없다. 맞는 말인가? 하물며 수학의 소수 prime number까지도?

p296 자유주의자들은 악을 얕보는 경향이 있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악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 악이라는 실체를 과소평가하려고 하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과 감성적 휴머니스트들에 맞선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은 확실히 옳다.

p297 니힐리즘으로서의 악은 현존 자체에 앙심을 품은 맹렬한 분노이다. 고용된 암살자가 아니라 나치의 집단처형장이, 정치적 목적으로 수행된 대량 학살이 보여주는 악이 바로 이런 악이다. 이것은 악의적이긴 하지만 뭔가를 주장하려고 하는 테러리즘이 보여주는 악과는 다른 종유의 것이다.

p302 세상에는 더 나쁜 것이 존재한다.

p302 소멸에도 해로운 형태가 있고 뭔가 결실을 낳는 형태가 있다.

p304 이론 없이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숙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이론 이후에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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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2-07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개의 진리는 사람의 심미적 직관을 만족시킨다고 한다.

The imperfect can be perfect!

이문장 기억하겠습니다^^..

마립간 2015-12-07 13:49   좋아요 1 | URL
대개의 진리는 사람의 심미적 직관을 만족시킨다고 한다. ; 이 글은 어디선가 읽은 내용의 글이고,

The imperfect can be perfect! ; 이 글은 제가 쓴 拙文입니다.

기억해 주신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