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31025

 

<무미예찬> 서평 별점 ; ★★★☆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무미라는 도교적 문화를 느낄 것으로 생각했는데, 느낌보다는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내가 선호하는 자연(스스로 그러하다.)은 원형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창발에 가까운 것인가?

 

p119 “재현 너머 재현”이요, “풍경 너머 풍경”이다. ; 재현 너머 재현은 원형으로 회귀인가, 아니면 새로운 창발인가?

 

대칭의 깨짐으로 우주가 태어났다. (대칭이 유지된 때가 좋았나, 아니면 대칭이 깨진 이후가 좋았나? 여기서 ‘좋았나’라는 용어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이다.)

 

근원/본本이 지협/말末이보다 우월하나? 아니면 근원보다 이후 창발된 지협/말末아 우월하나? (이때 우월은 수직적 가치관이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적용된다고 판단될 때 보다 가치가 있다고 판돤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일반인/주류?의 가치관은 (도덕과 같은 가치관을 포함한) 정신은 생물(의 본능)보다 우월하고, 생물(생명)은 무생물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물리학의 4개자 힘의 기술보다는 통일장 힘(즉 근원적인 힘)이 이론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지적 부조화는 개신교에서는 근원(창조)과 정신(靈, spirit)을 동일시함으로 존재하지 않겠고 플라톤의 이데아적 가치관이다.

 

도교적 관점은 원형일 것이다.

p48 자발적이고 사심 없는 본성의 발로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것이 도가의 시각에서도 이렇듯 비판되고 있다. ; 사심 없는 본심이라는 것이 후향 확증 편향인 것 아닌가?

 

나는 동양에서 도가적인 삶(양주-디오게네스 적인 삶)보다 도가적인 문화를 선호한다. 서양에서 고르자면 스토아stoa적 삶을 선호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발끝으로 서 있는 자 오래 서 있지 못한다.’ 라는 것이 있다. 튀면서 오래 가기는 (불가능하기보다) 확률적으로 힘들다. 인생을 울퉁불통한 굵기로 굴곡있는 삶을 살기보다 (굵다면 짧게, 가늘다면 길게) 일정한 굵기로 가고 싶다. 자연(nature)와 관련하여 나는 고갈이 싫다. 그래서 녹색당 성향의 가치관을 갖는다.

 

p39 유가의 선비들이 보기에, 자연이 순환을 계속하고 그 풍요로움을 고갈시키지 않고 전파하는 것이나 군자의 덕이 꾸준히 행사되어 만물에 부단히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하늘도 군자도 자신의 도정道程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않기 때문이다.

p43 이런 절제는 고갈되지 않음의 조건이다. ‘단순함’과 ‘평범함’은 진정성의 보장이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 관점에서 보자면 태양의 고갈이 있을 테고, 빅뱅 이후의 무한팽창이나 빅크런치 어느 것인든 간에 우주의 고갈이 예상된다.

 

* 밑줄 긋기

p17 자로의 침묵은 질문이 빗나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스승의 덕을 이루는 것을 ‘말로써’ 표현하기를 꺼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p20 사변적 관점 (즉 헤겔적 관점)에서는 ‘맛없음’으로 판단되었던 것이 그렇다면 가장 맛있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 맛있음 ; There is taste. vs That is delicious.

p31 모든 맛은 구미를 당기는 동시에 기만적이다. 그것은 지나는 이의 걸음을 “멈춰 세우고” 그를 “유혹”하지만 채워주지는 못한다.

p32 속히 큰 공공을 이루고자 해서는 안 되며 항상 사물의 기초적 단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 굴절적응은?

p35 텅 비고 고요하며 무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위한 것, 무미하고 초연한 것이 현실의 기초를 이루며 도는 삶에 기조가 된다. 그러므로 그 기호나 흥미의 결여를 박탈의 징후로 보아서는 안 되며, 하물며 그것을(절대자에 대한) 부정적인 신학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p39 이런 변화의 효능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이 애초에 제기되는 질문이다.

p44 절제할 때 가장 큰 호소력이 나오는 것이다.

p45 만일 담백함이 도의 맛, 유일하게 가능한 맛이라면, 그것은 체념이나 환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담백함이야말로 근본의 맛, 사물의 가장 진정한 ‘뿌리’의 맛이기 때문이다.

p53 어느 한 가지 방향의 긴장은 모든 내적 자원을 집결시켜 돌출하게 하는 반면, 담백함은 이 모든 자원이 편안하게 서로 어울리며 융화되게 한다.

p54 군자는 개인적 자질 가운데 어떤 것도 특별히 부각되지 않고 어떤 특정한 성향도 미리 계발되지 않으며 따라서 항상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으므로, 시의에 따라 극히 유연하게 공적 생활에 참여하거나 물러나거나 할 수 있다. 이는 ‘기회주의’로 매도될 수도 있겠지만-사실 일종의 기회주의이기는 하다-그런 태도의 밑바탕을 이루는 윤리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p55 이러한 상호 보완은 인성 안의 다섯 가지 근본 기량 즉 오상五相-오미五味나 오행五行과도 궤를 같이 하는-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기량 안에서도(강직함과 유연함, 온화함과 견고함 등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p56 자질은 적당히 절제될 때 오히려 좀 더 ‘섬세’하고 ‘정밀’하게 발휘되며 구속되지 않는다.

p56 다섯 가지 자질이 충만하게 존재할 때, 인상은 담백함으로 감싸인다. ... “그러면 두드러진 맛이 없게 된다.”

p61 미묘한 균형이 이상으로 제시되었다.

p62 낭랑하지 못하고 탁한 소리를 낸다. ; 음악에서의 낭랑함이라?

p66 이처럼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이 상반된 두 가지 현실이며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모방이라는 생각

p67 감각에 의해 지각될 만큼 충분히 ‘조야한’ 음악과 너무나 미묘해서 감지될 수 없으므로 ‘정신’이라는 좀 더 예민한 기관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음악 사이에 근본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

p97 ‘충담沖澹’이라니 그것은 단일한, 고립되고 자족적인 용어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두 용어의 균형이다.

p98 만일 ‘조화’가 지나치게 추구된다면, 그것은 완벽한 무관심에 이를 것이며, 무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싫증이 날 것이다. ; 극단적인 조화는 (수직적 가치관이 적용될 때) 최상이 아닌가?

p106 예스런 담백함에는 진정한 맛이 들어 있다. ; 무엇이 진정한 것인가?

p112 즉 문학적 맛이란 의식이 어떻게 감각의 전개를 체험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 우호적인 조건들은 무엇인가를, 가장 즉각적인 따라서 전체적인 방식으로 밝혀주는 것이다.

p115 진짜 맛이 음식과의 감각적이고 거친 접촉 너머에서 비로소 드러나듯이, 시적 향수 또한 시의 언어적 질료 너머에서 중국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언어의 너머에서’만 누릴 수 있다. ; 진짜? 나는 느낄 수 없다. 해석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했던 정서

p132 서력 기원 초기에 인도에서 나타난 중관中觀사상은 공空과 관련하여 중심의 가치를 평가한다.

p135 중심의 맛은 그러므로 어떤 특수한 맛에도 갇히지 않을 줄 알되 그렇다고 그것을 배제하지도 않을 때, 한 가지 맛에 집착하여 다른 맛을 무시하지 않으며 이 맛도 저 맛도 즐길 수 있을 때, 그런 맛들을 자유롭게 넘어서 그 배타성을 무너뜨릴 때에 비로소 얻어진다.

p136 ‘중심’과 ‘가장자리’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이제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중심은 ‘원형’이고 가장자리는 ‘창발’

p138 일체의 제약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이완을 맛보게 한다. ; 해방은 자유

p151 수련기 ; “선인들을 모방할 때 처음에는 ‘비슷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다가 ‘너무 비슷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만일 비슷하지 않다면 그것은 내가 그들의 기술에 통달하지 못한 때문이요, 너무 비슷하다면 그것이 더 이상 내 자신의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기술과 독창성이 똑같이 ‘망각’되고 그 배타성이 극복될 때야 비로소 ‘담백하고 자연스러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p157 자연스러운 초월

p164 중국의 담담은 모든 맛의 기본인 맑은 물의 맛이 나타내듯이, 단순한 완곡법이나 가장된 (또는 복잡해진) 담담함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그 너머를 포함하고 있는 전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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