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 개정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이동진이 진행하는 새벽 라디오 프로그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코너는 '변방의 북소리'다. 다른 요일들에는 시그널이 나오고 오프닝 멘트가 나오지만, 변방의 북소리는 책의 구절을 읽으면서 시작한다. 파격적인 진행이다. '빨간책방'에서도 책 읽어주는 코너가 있고, '책, 임자를 만나다' 코너에서 소개한 책들에 흥미를 느껴 구매하고 읽는 경우가 많지만, '변방의 북소리'는 한 시간을 올곧이 책 읽는 데에 거의 쓰므로 책에 대한 강렬함이 더 컸다. 그렇게 소개된 책으로 이 책, '검은 꽃'이 있다. 


김영하의 문장력은 익히 소문난 그대로다. 깔끔하고 강렬하며 깊이 빨아들인다. 초반의 힘이 아주 센 작가다. 




1905년, 조선에서의 기구한 삶을 접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보고자 천 여명의 사람들이 멕시코행 배에 올랐다. 망망대해를 건너 도착한 땅은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아니었다. 캐릭터 각각의 신상과 면면은 배를 타고 오는 동안의 일정으로 모두 소개했다. 황족의 딸인 연수 일가가 왜 그 배를 탔는지, 바오로 신부가 왜 소명을 접어버리고 머나먼 멕시코를 택했는지, 좀도둑 중의 좀도둑 최선길과 혈혈단신 이정까지... 


오도 가도 못하는 배 안에서 서로에게 끌린 이정과 연수의 로맨스. 그녀가 지나갈 때면 흠씬 풍기는 사향냄새가 독자까지도 매료시켰다. 그러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기에는 그들의 신분 차보다 그들이 처한 현실의 벽이 더 높았다.


유카탄 반도엔 강이 없기로 유명하다. 반도의 대부분이 낮고 평평한 석회암지대라 비가 내려도 물이 고이질 않는다. 큰 나무도 많지 않고 키가 작은 잡목과 덤불 들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물은 지하 수십 미터 아래의 우물에서 길어올릴 수밖에 없는데 이 때문에 마야의 고대 유적지 근처에선 아직도 직경이 수십미터에 달하는, 차라리 지하수 연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우물들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사람들은 사다리를 타고 석회암층 아래로 내려가 물을 길어 올라온다. (...) 보통 1km 족히 떨어진 곳에 세노테가 위치하고 있었다. 물은 땅에 떨어지는 즉시 증발하거나 스며들었다. 물이 흔하고 지반이 단단한 땅에서 이주한 조선인들을 가장 먼저 괴롭힌 것은 바로 물의 부족이었다. 하늘과 땅, 그 사이를 강산(江山)이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강과 산이 없는 세상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카탄엔 그 두 가지가 모두 없었다. -114쪽


금수강산이란 말의 의미가 확 와닿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면 어느 각도에서건 마주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산. 그 산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계곡. 흔해서 쉽게 깨닫지 못하는 소중한 산하가 이 책 속에서 그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다. 그렇지만 이곳 멕시코에서는 적어도 얼어죽을 걱정은 없다는 자조 섞인 소리에 이 탐나는 자연환경의 치명적인 속살도 같이 드러났다. 어딘들 아니 그렇겠냐만은, 이땅은 백년 전에도 지금도 가진 자에게만 윤택한 곳이었으니......


저기, 나는 안 돌아가려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배에 올라탄 이래로 그같은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까짓 나라,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돌아가겠는가. 어려서는 굶기고 철드니 때리고 살 만하니 내치지 않았나. 위로는 되놈에, 로스케 등쌀에, 아래로는 왜놈들 군홧발에 이리 맞고 저리 굽신, 제 나라 백성들한텐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나는 결코 안 돌아가려네. 주리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여기에서 버텨보려네. 땅도 사고, 그는 침인지 눈물인지를 꿀꺽 목구멍으로 넘기곤 말을 이었다. 물론 장가도 가야지. 새끼도 낳고. -96쪽


목숨을 부지할 한뼘의 땅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이 배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땅이 없었기에 군인이 되었고, 땅이 없었기에 장가를 가지 못했고, 결국 이 메마른 땅으로 와야 했던 그들이었다. 오늘날의 청춘들이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하면 기다리는 것은 수천 만원에 달하는 학자금 빚과 비정규직 일자리뿐. 그들에게 연애와 결혼, 이어지는 출산과 육아는 먼 나라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제 부총리께서는 비정규직으로 못살겠다는 청춘들을 향해 정규직이 과보호되고 있다고 뻘소리를 내뱉고 있다. 그까짓 나라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돌아가냐는 말이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 열심히 공부시켜서 유학을 보내고, 거기서 터를 잡고 돌아오지 않는 인재가 많이 있다. 단순히 그들을 '애국심'에 호소해서 돌아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돌아가고 싶은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오늘도 여당측 위원이 세월호 기초조사 예산에 0원을 책정했다는 뉴스타파 기사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굶다시피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이종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밥은 가장 먼저, 많이 먹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숭고한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식사 때마다 흙바닥일지언정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밥숟가락을 들었다. 아들에게는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아내와 딸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부장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일이 다반사인 왕조의 후손이었다. -130쪽


이역 만리까지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이종도의 결정 때문이었다. 천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을 대표한다는 착각 속에 그는 이곳 멕시코 땅을 밟았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이곳에서 '위대한 문자' 한자로 대화가 될 거라고 예상했다. 조선에서 농사로 뼈가 굵은 이들도 혀를 내두르는 에네켄 농장에서 손이 고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능력이 되어도 할 마음이 없는 인사였다. 그럼에도 밥은 가장 먼저, 많이 먹었다는 저 냉소 깊은 문장이 껍데기만 남은 양반의 위선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의지할 곳 없는 이곳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힘을 모으려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당연히 그런 마음들이 보인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루 일이 끝나면 남자들은 술을 마셨다. 남자들과 똑같이 일했지만 여자들은 집에 돌아와서도 쉬지 못했다. 불을 피우고 밥을 안쳤다. 옷을 깁고 집 안을 치우고 다음날 가지고 나갈 장비를 챙겼다. 차가운 개울물에서 빨래 한번 시원하게 해봤으면 더는 원이 없겠네. 어느 충청도 여자가 서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다른 여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빨래는 목욕만큼이나 사치였다. 우물은 멀었고 수량도 부족했다. 어서 우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30도를 넘는 더운 날에도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벗지 못했다. 웃통을 벗어붙인 남자들은 술만 마시면 제 아내를 두들겨팼다. 벌써 노름을 시작한 이도 있었다. 노름과 술은 조선 남자들의 뿌리깊은 병폐였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악다구니와 울음소리, 비명과 고함이 밤마다 이어졌다. 유카탄은 남자들에게도 지옥이었지만 여자들에겐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151쪽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달 반 쯤 전에 다녀온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 서약서를 썼다. 새신랑은 집안일을 가급적 많이 '돕겠다'고 썼다. 맞벌이 부부인데 집안일은 부인의 일이고 자신은 도우면 된다는 생각을 그 사람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새신부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겠다-라고 썼다. 하아, 부창부수랄까... 


유카탄 반도에서의 삶은 고단하고 처절했다. 큰돈을 벌어 조선 땅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미국 땅으로 건너가 새출발을 하는 게 이들의 목표였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실정이었다. 애초에 불공정하고 비도적인 계약 조건이었음을 그들이 은 알지 못했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계약의 노예가 된 뒤였다. 그러나 또 끈질기기로 치면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민족 특성답게 이들은 곧 마야인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에네켄을 베어냈고, 빚을 털어내고 기어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는 입장. 


이들의 가혹한 상황을 알아봐 준 이들이 생겼다. 동포들의 눈물겨운 상황을 고국으로 알리고, 또 다른 교포들에게 알려서 이들을 구제하려고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준 이들. 


문제는 경비였다. 이 부분에서 하와이와 본토의 한인들은 놀라운 희생정신을 발휘한다. 이들은 모든 경비를 자신들이 부담하기로 하였고 즉각 모금에 들어갔다. 하와이에서 5441달러, 본토에서 536달러가 걷혔다. 이 밖에 미리 약정한 후원금도 5000달러에 달했다. -278쪽


배 안에서의 시간은 꽤 천천히 흘러갔지만, 유카탄 반도에 도착해서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들의 사연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정과 연수의 로맨스가 결국은 실현될 것인가, 그들은 끝끝내 다시 만나질 것인가 독자는 뒷장을 재촉하며 읽어나갔다. 


처음 경험한 전투의 승리는 이정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미국도, 연수도 잊었다. 무수한 아시엔다에서의 멸시와 고난도 모두 잊었다. 전투의 승리에는 순정한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혁명군 내부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요시다의 주방에서 맛본 것과 비슷했다. 남자들만의 세계. 세상의 모든 의무로부터 면제된 세계. 그들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웠지만 그 안에는 어떤 편안함이 있었다. -287쪽


아기를 가진 연수 쪽이 이정을 더 못 잊는 게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전투의 승리에 취한 이정은 테스토스테론에 중독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의 그에게는 연수조차도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작품 말미에는 등장했던 사람들의 인생 최후를 짧게짧게 기술해 주었는데, 가장 충격적으로 큰 폭으로 변한 인물이 연수였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신산한 삶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몰입감이 좋은 소설이었다. 각각의 캐릭터들도 살아 있었고 조선과 멕시코를 비교하며 서술하는 대목에서도 그 확연한 차이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소재도 눈길을 끌었고, 문장력도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었으니, 절정까지 천천히 쌓아오르던 이야기가 너무 가파르게 마무리 되었다. 밀림 한가운데에 세워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작은 나라가 조금 뜬금없었다. 거기에 대한 설명이, 설득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다.


생각해 보면, 김영하의 작품들은 늘 즐겁게 읽다가 마무리에서 좀 김빠지면서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속도 조절이 다소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럼에도 또 다른 김영하의 작품들을 기꺼이 만날 생각이다. 아쉽기에 더 찾게 되는 미련이 그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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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2-1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노아님. 요즘 책 읽는데 삘받았나 봐요!! >.<

마노아 2015-02-12 17:06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이거 11월에 읽었더라구요. 요새 밀린 리뷰 열심히 쓰고 있어요.ㅎㅎㅎ

다락방 2015-02-12 17:32   좋아요 0 | URL
책 읽는데 삘받은 게 아니라 리뷰 쓰는데 삘 받은 거였군요. ㅎㅎ

마노아 2015-02-13 01:51   좋아요 0 | URL
밀린 리뷰가 카드빚처럼 쌓이더라구요. 털어내고 싶었어요. ㅋㅋㅋ

2015-02-13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3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옆차기 2015-03-02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과 연수의 로맨스만으로도 숨막힐 지경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Dreamer form DFOLD

마노아 2015-03-02 23:09   좋아요 0 | URL
이정과 연수의 이야기는 정말 숨막힐 정도의 감정이 느껴졌지요.
영상으로도 느껴지는 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