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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맑은 햇살이 쨍쨍―우리 눈을 부시게 하자, 다들 이렇게 탄식해. 아, 햇볕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니! 아열대로 기후가 변해서 이젠 여름은 구름과 비로 뒤덮이고, 가끔 이렇게 이탈리아의 8월 햇살이 우릴 기쁘게 해주는구나.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방충망에 붙어 몸통을 흔들며 울어대는 매미가 아주 반가워. 날씨가 급변해서일까. 화음을 맞추는 걸까. 유혹에 경쟁이 붙은 걸까. 교미의 신음일까. 낯선 침입에 떠는 걸까. 나도 실바플라나의 호숫가에 멈춰선 니체처럼 그들의 오케스트라에 잠시 귀 기울였더니 한참 이상한 생각에 빠져들어. 사마귀나 풍뎅이에겐 어떤 연민도 생기지 않지만, 괴성을 질러대는 매미에겐 왠지 끝없는 연민이 피어올라. 왜 그럴까.

 어릴 때, 한쪽 날개를 서로 포개고 X자로 얽힌 두 매미의 정사 장면을 본 적 있어. 그리고 매미들이 7일 만에 죽는다는 얘길 들었을 때, 그 모습이 어찌나 슬프던지. 하물며, 7년 땅속에 있다가 나온 그 매미, 7일간 쉴 새 없는 정사를 벌여야 하는데, 그 소통의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린 올해 7일간의 장맛비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결국, 다 허무한 것일 뿐일까.

 니체를 읊조려서인지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 어쩌면, 200억 우주의 역사 중 티끌에 지나지 않는 100년의 인간사가 그토록 큰 의미인 것처럼, 7년의 인생 중 일주일의 바깥나들이는, 크게는 덧없지만, 어쩌면 그들에겐 길다면 긴 자기만의 생의 리듬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지거든.

 만약, 비 때문에 그 소중한 7일을 놓쳐버린 그 매미에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준다면, 또 매미로 태어나고 싶어 할까.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면벽 수도 중에 이런 질문을 거듭했을 거라고 봐. 무언가를 깨친 차라투스트라가 속세로 내려와 처음 꺼낸 화두는 “신은 죽었다!”였어.

      인간이 신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아니면, 신이 인간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실제로 부처든, 예수든, 마호메트든 신의 대명사들은 다 죽었어. 하지만, 그 그림자들은 여전히 존재해. 즉, 신은 죽었어도 신앙은 남은 거지. 그 신앙은 경배할 대상을 계속 찾는 거고. 정말로 영원불멸하는 건 신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이 아닐까? 니체는 신보다 신앙이 더 오래된 것이고 더 오래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어. 신이 있어서 신앙이 생긴 게 아니라, 신앙이 있어 신이 생긴 거니까.

  이 화두에는 플라톤의 ‘이데아’든, 칸트의 ‘물 자체의 세계’든, 죄 많은 ‘이 세계’와 천국이라는 ‘저 세계’라는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에 대한 짙은 혐오가 깔려 있어. 근데, 여기서 이 선언은 단순히 한 우상의 몰락이 아니라, 신앙 자체의 몰락, 즉, 인간의 죽음이고 동시에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을 뜻한 거야. 자신 이외의 기준에 복종해서 노예로 살아온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란 말이지.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쉬 이해하지 못했어. 인간들 앞엔 몇몇 치명적인 방해물이 있었거든.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 도덕 교사로 나서서 내린 처방이 그 중 으뜸이야. 시대, 공간, 종족, 문화에 따라 수없이 많은 선악의 기준이 존재함에도,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시킨’ 기괴한 모습의 도덕 말이야. 여자가 가축과 같은 재산 목록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십계를 지금 그대로 들이미는 것이나, 자민족에게 선이라고, 타민족을 억압하는 수많은 전쟁처럼 말이야. 그런 도덕을 무기로 내세운 자들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무엇이 악인지 알려주고, 공포를 줘서 그 악을 피하게 하는, 즉, 가치 ‘창조’에 대한 판단을 포기시키고, 기존 가치에 대한 ‘복종’만 훈련하거든. 그 결과 독재 권력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온 민중들의 배신이 역사 속에 수두룩하게 발견되잖아.

      그대 살았으면 죽지 않았고, 죽었으면 존재하지 않거늘, 죽음이 뭐 그리 두려운가.                         
                                                                           「에피쿠로스」      

  또 다른 방해자들이 있어. 바로 에피쿠로스를 경멸하는 ‘죽음의 설교자들’이지. 그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지겹도록 강조해. 결국, 사람들은 극단적인 피로감을 느껴. “빨리 끝났으면……” 하고. 인간들에게 일시적 위안을 주면서 근본적으로는 생의 피로감을 더욱 확장시키는, 이 ‘죄’라는 바이러스 공급자들의 모토, 그건 바로, “생은 고통일 뿐이다!”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외치는 자들한테 소원대로 빨리 이 세상을 뜨라고 얘기해. “이런 동굴과 참회의 계단을 꾸며내는 자야말로 맑은 하늘 보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이 아닌가?” 맞아. 사실 인간들이 바보이긴 하지만, 죄인은 아니잖아! 내가 딛고 선 ‘이 세계’를 무시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저 세계’를 만들고, 예정된 끔찍한 보복에 짓눌려 겨우 견디면서 동시에 영생을 꿈꾸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니체는 따끔한 충고를 날려.

      삶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긴 삶에 대한 사랑의 반대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또 다른 방해자가 있어. 냉혹한 사기로 우리를 속이는 무시무시한 괴물, 바로 국가야. 순진하고 귀 얇은 자나 근시안만이 무릎을 꿇는 게 아니고, 영웅들도 수없이 무릎을 꿇었어. 사람들이 교회에 바친 우상숭배를 똑같이 자신에게 해주길 바라고, 자유보다는 복종, 생명보다는 죽음을 부추기는데도, 진심 어린 봉사를 끌어내는 그 모순적인 존재, 국가한테 말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독배를 들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자신을 잃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신의 목숨을 끊어가면서 ‘생’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려는 국가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했어.

  헌데, 히틀러의 독일군들은 어째서 배낭에 이 차라투스트라를 한 권씩 넣고 다녔을까.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라! 낡은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런 아포리즘이 전쟁 찬가로 쓰인 건데, 사실 이 말은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일에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그것을 위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아무리 봐도 인종 청소로 새 삶을 찾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잖아?

      인생이 견디기 힘들긴, 개뿔! 사람이 견디기 힘든 거지.      

  이제, 가장 큰 방해물을 제거해야 해. 뭐냐고? 바로 인간적인 인간이야.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이 경직된 도덕화를 가져왔다고 했어. 벌레는 왜 태어난 것일까? 새한테 잡혀먹히려고! 방충망은 왜? 여름 매미를 위해! 질문이 흐르다 보면 궁극적으로 세계가 왜 창조됐을까? 에 닿게 돼. 답은, 인간을 위해서! 그렇다면, 선악도 분명해. 인간에게 이로운 게 선, 해로운 게 악. 그러니까, 지진과 해일도 누군가 죄를 지어서! 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거지. 대체 인간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숲 속 개미도 숲의 존재 목적이 자기 자신이라도 믿고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지구가 인간을 낳으려고 그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고 믿을 수 없듯,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만한 발상이야.  

     

존재 자체를 자기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 세계의 심판자 인간. 이런 태도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가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인간과 세계’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인간과 세계가 ‘과’라고 하는 귀여운 글자에 의해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작은 글자에는 인간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즐거운 지식』

     

즉,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자부심을 품는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극복할 수 있다는 거야. 이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경멸'이야. 대지의 피부병 중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 말이야. 여기서 '인간을 넘어서기', 또, '새 인간 낳기'에 대한 테마가 펼쳐져.

  누군가 “유일신이 왜 위대해졌는지 아는가?”라고 물으면 “그건 인간들이 왜소해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 인간은 목적이 아니야. 과정이자 몰락이지. 그래서 위대하고 또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거지. 니체는 다윈을 존중했지만, 진화라는 것이 결국 저급에서 고급 유형으로의 발전이라는 개념이니까, 그것과는 다른 개념을 취했어. 초인이 된다는 건, 종착역을 향한 진화가 아니라, 철저한 몰락을 거친 변신이라는 거야.

      “순종하느니 절망하라!”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풋과일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리려고 집착하지 말고, 새 생명을 위해 익어서 떨어지라는 이 말.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변신하기’라는 미션은 바로, ‘정체성을 극복하는 것으로만 정체성을 갖기’ 프로젝트인 셈이야.

  결국, 다시 돌아가서, 세상에게 “왜?”라고 신성한 목적을 캐묻지 말자는 거야. 그냥, 그게 세상이 노는 방식이니까. 우리는 우울해할 필요가 없어. 태어난 게 ‘죄’고 죽는 게 ‘벌’이라는 말에 속을 필요 없어. 영원한 게 없다고 비통해할 필요 없어. 탄생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만들어내는 이토록 찬란한 다양성. 그곳에 무슨 도덕적 책임이 있겠니.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이 모든 게 하나의 유희라고 생각해보자는 거야. 세상엔 우리의 침울한 두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상의 행복이 있는 법이니까!

      참된 철학자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비시대적이다.      

  니체는 자기 시대의 습한 공기와 접촉하는 한, 최소한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하므로, 위대함이란 바로 비시대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어. 즉, 시대에 순응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거스르는 자의 것이라는 거지. 사실 미쳤다는 건, 길들지 않았다는 뜻이잖아. 즉, 당대의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으면 그건 남들과 다른 시계를 차는 것일 뿐. 그 시대가 포착하지 못하는 광기, 탈주, 예외 등은 바로 시간상의 불일치라는 깨달음이 차라투스트라에겐 소중한 위로가 돼. 그에게 미래는,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와 있지만, 오해되는 시간이니까. 자기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시간, 때에 맞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니까. 물론, 이건 시대에 대한 반대, 즉, 반시대성은 아니야. 대립만으로는 넘어설 수가 없거든. 반시대 역시 결국 시대적이니까. “네가 아직도 적대 받는 한 너는 너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너의 시대가 너를 전혀 알아볼 수 없어야 한다.”

  여기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타임머신의 비밀이 있어. “미래를 창조할 것, 이미 있던 모든 걸 (파괴라는 형식의) 창조로 구제할 것” 그러니까, 과거의 구원을 위한 수수께끼의 정답은 창조와 생성에 있다는 거지. 그게 시간 자체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거야. 이게 바로, 시간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을 갖게 되는 비밀. 그리고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되는 비밀.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 아닌가.”

  니체의 단순한 비유는 여기서 빛이 나. 앞선 퀴즈의 답을 가르쳐 줄게. 차라투스트라가 제시하는 정신적 변화 방향의 단계야. 낙타―사자―[ ? ]. 빈칸은 ‘아이’야. 낙타는 무릎이 닳도록 복종에 익숙하면서도 반항 안 해. 그 착한 동물이 자기 삶에 얼마나 못된 고문을 가하는 걸까. 인생은 고되게 견뎌야 할 것이다, 라는 진리를 받들고 살고 있잖아. 사자는 낙타와 달리 강요되는 의무에 용기 있게 ‘아니오!’를 이야기할 수 있어. 그에게는 자유가 있어. 하지만, 싫어하는 걸 알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자유야.

      어린 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자신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니체는 아무리 반복돼도 피곤해하지 않고 즐겁게 노는 아이들처럼,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도덕과 법률, 제도가 심판할 수 없는 행위를 하는 자. 즉, 도덕이 필요 없고, 갖고 있지도 않은 비도덕적인 존재, 그것도 웃으면서, 춤추면서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주장해. 그리고 이런 아이가 보고 싶거든, 낳아라. 자기 아이를 낳으려면 사랑해야 한다. 네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얘기해.

      세상의 많은 것들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어.
고약한 냄새는 구역질을 나게 하지.
사람은 구역질 때문에 날개를 창조해 내는 거야.
사람은 구역질 때문에 ‘샘물을 찾아내는 능력’을 창조해 내는 거야.      

  세상은 헛된 거라고,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라고, 산다는 건, 자신을 불태우지만, 스스로는 따뜻해지지 못하는 격이라고, 고약하게 썩은 현세를 포기하라는 엉터리 신의 명령에 맞선 니체. 그는 대신 ‘삶의 친구들’을 늘 찾았어. 그건 삶을 사랑하는 동류의 인간들에 대한 지칭이야.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해. 즉, 삶을 아름답게 재창조하는 것, 그게 바로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거야. 니체는 이걸 ‘운명애(Amor Fati)’라고 불렀어. 이건 운명과 맞서 싸운다거나 그것에 복종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야. 거부도 순종도 아닌 예술적 창조에 대한 예찬이야. 단, 이 창조에 따르는 고통을 인정해야 해. 즉, 재창조를 위해 하나의 삶은 다음 삶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파괴가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범죄행위일 뿐이잖아. 새로운 창조가 한 번에 그친다면, 그것 또 어느새 낡은 기득권이 되어버리잖아. 그러니까, 끝없는 창조, 즉, “한 번 더”라는 영원한 생성에 대한 욕구가 중요해. 이건, 지금의 삶을 “그래!”라는 무한한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살게 돼도 똑같은 삶을 원하는 욕구 말이야. 나아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거지. 이 변형된 윤회에의 희구가 차라투스트라의 천로역정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야. 긍정, 또, 긍정의 축복.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동굴을 떠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마지막 굴레인 연민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초인으로 거듭나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 신은 바로 인간의 그림자야. 그림자가 사라지는 위대한 정오. 그림자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인간이 초인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의 예찬이야. 여기서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장면이 겹치지 않니?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그 장면은 인간이 초인으로 거듭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차원의 비약을 그려내고 있잖아!

  그럼에도, 모든 결정적인 것은 ‘그럼에도’ 오고야 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극적으로 완성된 이 『차라투스트라』. 완벽한 멜로디를 구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하고 싶어 했던 니체는 정말이지 온화하고 미묘한 가락에서 귀를 찢는 듯한 팡파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역을 구사했어. 하지만, 너무 일찍 왔기 때문인지 독자들은 철저히 외면했어. 그래도 니체는 여유로웠어.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싯바늘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낚시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만인을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란 부제를 달았어. 만인을 친구로 삼고 싶었지만 아무나 친구로 삼지는 않는 책. 무슨 뜻일까. 이 책은 아무나 읽으라고 썼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만 읽어낼 수 있는 글이란 뜻 아닐까? “영혼의 운명은 바뀌고 바늘은 앞으로 움직이며 비극이 시작되리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무모하게 도전하는 독자에게 던진 말이야. 어때? 그에게 한 번 낚여 인생의 시곗바늘이 바뀌고 몰락을 경험할 용기를 내보는 건. 물론, 낚이지 않아도 돼. 왜냐면 그게 감수성이든, 용기든, 낙관이든, 긍정이든, 결국 제멋대로 소화하고 자기 삶에 응용할 수 있는 사람, 나아가 전혀 읽지 않고도, 전혀 지지하지 않고도, 삶을 긍정하고 아름답게 가꿔가는 사람이라면 이미 니체를 기쁘게 해줄 훌륭한 독자이며, 니체의 열렬한 팬이라고 생각하니까.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숨을 멈췄어. 하지만, 육체의 시계는 이미 멈춰져 있었어.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다 잊어버린 채 거의 식물인간으로 말년을 보냈으니까. 그를 동정해야 할까? 우리는 식물인간과 얼마나 다를까. 기존 관습이 억압하는 대로 정해진 길에 매달려 죽음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걸까. 수없이 질문을 던진 니체처럼 매 순간 주인으로 살아가는 걸까. 2011년 8월 25일이 되면, 111년이 돼. 그날엔, 저 매미의 절절한 외침이 울음소리가 아니라 노랫소리, 웃음소리로 들릴 거야. 또 그날엔, 비록 잠시 헤어지지만, 아직 우리에겐 더 많은 여행이 필요하다는 너의 속삭임이 어느 때보다 감미롭게 들릴 거야. 죽음에 대고, 삶에 대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깨달음을 찾기 위한 여행일 테니까.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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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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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유하기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맑은 햇살이 쨍쨍―우리 눈을 부시게 하자, 다들 이렇게 탄식해. 아, 햇볕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니! 아열대로 기후가 변해서 이젠 여름은 구름과 비로 뒤덮이고, 가끔 이렇게 이탈리아의 8월 햇살이 우릴 기쁘게 해주는구나.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방충망에 붙어 몸통을 흔들며 울어대는 매미가 아주 반가워. 날씨가 급변해서일까. 화음을 맞추는 걸까. 유혹에 경쟁이 붙은 걸까. 교미의 신음일까. 낯선 침입에 떠는 걸까. 나도 실바플라나의 호숫가에 멈춰선 니체처럼 그들의 오케스트라에 잠시 귀 기울였더니 한참 이상한 생각에 빠져들어. 사마귀나 풍뎅이에겐 어떤 연민도 생기지 않지만, 괴성을 질러대는 매미에겐 왠지 끝없는 연민이 피어올라. 왜 그럴까.  어릴 때, 한쪽 날개를 서로 포개고 X자로 얽힌 두 매미의 정사 장면을 본 적 있어. 그리고 매미들이 7일 만에 죽는다는 얘길 들었을 때, 그 모습이 어찌나 슬프던지. 하물며, 7년 땅속에 있다가 나온 그 매미, 7일간 쉴 새 없는 정사를 벌여야 하는데, 그 소통의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린 올해 7일간의 장맛비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결국, 다 허무한 것일 뿐일까.  니체를 읊조려서인지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 어쩌면, 200억 우주의 역사 중 티끌에 지나지 않는 100년의 인간사가 그토록 큰 의미인 것처럼, 7년의 인생 중 일주일의 바깥나들이는, 크게는 덧없지만, 어쩌면 그들에겐 길다면 긴 자기만의 생의 리듬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지거든.  만약, 비 때문에 그 소중한 7일을 놓쳐버린 그 매미에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준다면, 또 매미로 태어나고 싶어 할까.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면벽 수도 중에 이런 질문을 거듭했을 거라고 봐. 무언가를 깨친 차라투스트라가 속세로 내려와 처음 꺼낸 화두는 “신은 죽었다!”였어.       인간이 신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아니면, 신이 인간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실제로 부처든, 예수든, 마호메트든 신의 대명사들은 다 죽었어. 하지만, 그 그림자들은 여전히 존재해. 즉, 신은 죽었어도 신앙은 남은 거지. 그 신앙은 경배할 대상을 계속 찾는 거고. 정말로 영원불멸하는 건 신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이 아닐까? 니체는 신보다 신앙이 더 오래된 것이고 더 오래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어. 신이 있어서 신앙이 생긴 게 아니라, 신앙이 있어 신이 생긴 거니까.   이 화두에는 플라톤의 ‘이데아’든, 칸트의 ‘물 자체의 세계’든, 죄 많은 ‘이 세계’와 천국이라는 ‘저 세계’라는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에 대한 짙은 혐오가 깔려 있어. 근데, 여기서 이 선언은 단순히 한 우상의 몰락이 아니라, 신앙 자체의 몰락, 즉, 인간의 죽음이고 동시에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을 뜻한 거야. 자신 이외의 기준에 복종해서 노예로 살아온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란 말이지.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쉬 이해하지 못했어. 인간들 앞엔 몇몇 치명적인 방해물이 있었거든.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 도덕 교사로 나서서 내린 처방이 그 중 으뜸이야. 시대, 공간, 종족, 문화에 따라 수없이 많은 선악의 기준이 존재함에도,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시킨’ 기괴한 모습의 도덕 말이야. 여자가 가축과 같은 재산 목록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십계를 지금 그대로 들이미는 것이나, 자민족에게 선이라고, 타민족을 억압하는 수많은 전쟁처럼 말이야. 그런 도덕을 무기로 내세운 자들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무엇이 악인지 알려주고, 공포를 줘서 그 악을 피하게 하는, 즉, 가치 ‘창조’에 대한 판단을 포기시키고, 기존 가치에 대한 ‘복종’만 훈련하거든. 그 결과 독재 권력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온 민중들의 배신이 역사 속에 수두룩하게 발견되잖아.       그대 살았으면 죽지 않았고, 죽었으면 존재하지 않거늘, 죽음이 뭐 그리 두려운가.                                                                                                     「에피쿠로스」         또 다른 방해자들이 있어. 바로 에피쿠로스를 경멸하는 ‘죽음의 설교자들’이지. 그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지겹도록 강조해. 결국, 사람들은 극단적인 피로감을 느껴. “빨리 끝났으면……” 하고. 인간들에게 일시적 위안을 주면서 근본적으로는 생의 피로감을 더욱 확장시키는, 이 ‘죄’라는 바이러스 공급자들의 모토, 그건 바로, “생은 고통일 뿐이다!”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외치는 자들한테 소원대로 빨리 이 세상을 뜨라고 얘기해. “이런 동굴과 참회의 계단을 꾸며내는 자야말로 맑은 하늘 보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이 아닌가?” 맞아. 사실 인간들이 바보이긴 하지만, 죄인은 아니잖아! 내가 딛고 선 ‘이 세계’를 무시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저 세계’를 만들고, 예정된 끔찍한 보복에 짓눌려 겨우 견디면서 동시에 영생을 꿈꾸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니체는 따끔한 충고를 날려.       삶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긴 삶에 대한 사랑의 반대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또 다른 방해자가 있어. 냉혹한 사기로 우리를 속이는 무시무시한 괴물, 바로 국가야. 순진하고 귀 얇은 자나 근시안만이 무릎을 꿇는 게 아니고, 영웅들도 수없이 무릎을 꿇었어. 사람들이 교회에 바친 우상숭배를 똑같이 자신에게 해주길 바라고, 자유보다는 복종, 생명보다는 죽음을 부추기는데도, 진심 어린 봉사를 끌어내는 그 모순적인 존재, 국가한테 말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독배를 들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자신을 잃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신의 목숨을 끊어가면서 ‘생’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려는 국가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했어.   헌데, 히틀러의 독일군들은 어째서 배낭에 이 차라투스트라를 한 권씩 넣고 다녔을까.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라! 낡은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런 아포리즘이 전쟁 찬가로 쓰인 건데, 사실 이 말은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일에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그것을 위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아무리 봐도 인종 청소로 새 삶을 찾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잖아?       인생이 견디기 힘들긴, 개뿔! 사람이 견디기 힘든 거지.         이제, 가장 큰 방해물을 제거해야 해. 뭐냐고? 바로 인간적인 인간이야.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이 경직된 도덕화를 가져왔다고 했어. 벌레는 왜 태어난 것일까? 새한테 잡혀먹히려고! 방충망은 왜? 여름 매미를 위해! 질문이 흐르다 보면 궁극적으로 세계가 왜 창조됐을까? 에 닿게 돼. 답은, 인간을 위해서! 그렇다면, 선악도 분명해. 인간에게 이로운 게 선, 해로운 게 악. 그러니까, 지진과 해일도 누군가 죄를 지어서! 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거지. 대체 인간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숲 속 개미도 숲의 존재 목적이 자기 자신이라도 믿고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지구가 인간을 낳으려고 그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고 믿을 수 없듯,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만한 발상이야.         존재 자체를 자기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 세계의 심판자 인간. 이런 태도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가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인간과 세계’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인간과 세계가 ‘과’라고 하는 귀여운 글자에 의해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작은 글자에는 인간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즐거운 지식』       즉,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자부심을 품는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극복할 수 있다는 거야. 이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경멸'이야. 대지의 피부병 중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 말이야. 여기서 '인간을 넘어서기', 또, '새 인간 낳기'에 대한 테마가 펼쳐져.   누군가 “유일신이 왜 위대해졌는지 아는가?”라고 물으면 “그건 인간들이 왜소해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 인간은 목적이 아니야. 과정이자 몰락이지. 그래서 위대하고 또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거지. 니체는 다윈을 존중했지만, 진화라는 것이 결국 저급에서 고급 유형으로의 발전이라는 개념이니까, 그것과는 다른 개념을 취했어. 초인이 된다는 건, 종착역을 향한 진화가 아니라, 철저한 몰락을 거친 변신이라는 거야.       “순종하느니 절망하라!”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풋과일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리려고 집착하지 말고, 새 생명을 위해 익어서 떨어지라는 이 말.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변신하기’라는 미션은 바로, ‘정체성을 극복하는 것으로만 정체성을 갖기’ 프로젝트인 셈이야.   결국, 다시 돌아가서, 세상에게 “왜?”라고 신성한 목적을 캐묻지 말자는 거야. 그냥, 그게 세상이 노는 방식이니까. 우리는 우울해할 필요가 없어. 태어난 게 ‘죄’고 죽는 게 ‘벌’이라는 말에 속을 필요 없어. 영원한 게 없다고 비통해할 필요 없어. 탄생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만들어내는 이토록 찬란한 다양성. 그곳에 무슨 도덕적 책임이 있겠니.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이 모든 게 하나의 유희라고 생각해보자는 거야. 세상엔 우리의 침울한 두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상의 행복이 있는 법이니까!       참된 철학자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비시대적이다.         니체는 자기 시대의 습한 공기와 접촉하는 한, 최소한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하므로, 위대함이란 바로 비시대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어. 즉, 시대에 순응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거스르는 자의 것이라는 거지. 사실 미쳤다는 건, 길들지 않았다는 뜻이잖아. 즉, 당대의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으면 그건 남들과 다른 시계를 차는 것일 뿐. 그 시대가 포착하지 못하는 광기, 탈주, 예외 등은 바로 시간상의 불일치라는 깨달음이 차라투스트라에겐 소중한 위로가 돼. 그에게 미래는,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와 있지만, 오해되는 시간이니까. 자기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시간, 때에 맞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니까. 물론, 이건 시대에 대한 반대, 즉, 반시대성은 아니야. 대립만으로는 넘어설 수가 없거든. 반시대 역시 결국 시대적이니까. “네가 아직도 적대 받는 한 너는 너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너의 시대가 너를 전혀 알아볼 수 없어야 한다.”   여기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타임머신의 비밀이 있어. “미래를 창조할 것, 이미 있던 모든 걸 (파괴라는 형식의) 창조로 구제할 것” 그러니까, 과거의 구원을 위한 수수께끼의 정답은 창조와 생성에 있다는 거지. 그게 시간 자체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거야. 이게 바로, 시간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을 갖게 되는 비밀. 그리고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되는 비밀.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 아닌가.”   니체의 단순한 비유는 여기서 빛이 나. 앞선 퀴즈의 답을 가르쳐 줄게. 차라투스트라가 제시하는 정신적 변화 방향의 단계야. 낙타―사자―[ ? ]. 빈칸은 ‘아이’야. 낙타는 무릎이 닳도록 복종에 익숙하면서도 반항 안 해. 그 착한 동물이 자기 삶에 얼마나 못된 고문을 가하는 걸까. 인생은 고되게 견뎌야 할 것이다, 라는 진리를 받들고 살고 있잖아. 사자는 낙타와 달리 강요되는 의무에 용기 있게 ‘아니오!’를 이야기할 수 있어. 그에게는 자유가 있어. 하지만, 싫어하는 걸 알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자유야.       어린 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자신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니체는 아무리 반복돼도 피곤해하지 않고 즐겁게 노는 아이들처럼,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도덕과 법률, 제도가 심판할 수 없는 행위를 하는 자. 즉, 도덕이 필요 없고, 갖고 있지도 않은 비도덕적인 존재, 그것도 웃으면서, 춤추면서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주장해. 그리고 이런 아이가 보고 싶거든, 낳아라. 자기 아이를 낳으려면 사랑해야 한다. 네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얘기해.       세상의 많은 것들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어. 고약한 냄새는 구역질을 나게 하지. 사람은 구역질 때문에 날개를 창조해 내는 거야. 사람은 구역질 때문에 ‘샘물을 찾아내는 능력’을 창조해 내는 거야.         세상은 헛된 거라고,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라고, 산다는 건, 자신을 불태우지만, 스스로는 따뜻해지지 못하는 격이라고, 고약하게 썩은 현세를 포기하라는 엉터리 신의 명령에 맞선 니체. 그는 대신 ‘삶의 친구들’을 늘 찾았어. 그건 삶을 사랑하는 동류의 인간들에 대한 지칭이야.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해. 즉, 삶을 아름답게 재창조하는 것, 그게 바로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거야. 니체는 이걸 ‘운명애(Amor Fati)’라고 불렀어. 이건 운명과 맞서 싸운다거나 그것에 복종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야. 거부도 순종도 아닌 예술적 창조에 대한 예찬이야. 단, 이 창조에 따르는 고통을 인정해야 해. 즉, 재창조를 위해 하나의 삶은 다음 삶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파괴가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범죄행위일 뿐이잖아. 새로운 창조가 한 번에 그친다면, 그것 또 어느새 낡은 기득권이 되어버리잖아. 그러니까, 끝없는 창조, 즉, “한 번 더”라는 영원한 생성에 대한 욕구가 중요해. 이건, 지금의 삶을 “그래!”라는 무한한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살게 돼도 똑같은 삶을 원하는 욕구 말이야. 나아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거지. 이 변형된 윤회에의 희구가 차라투스트라의 천로역정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야. 긍정, 또, 긍정의 축복.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동굴을 떠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마지막 굴레인 연민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초인으로 거듭나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 신은 바로 인간의 그림자야. 그림자가 사라지는 위대한 정오. 그림자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인간이 초인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의 예찬이야. 여기서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장면이 겹치지 않니?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그 장면은 인간이 초인으로 거듭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차원의 비약을 그려내고 있잖아!   그럼에도, 모든 결정적인 것은 ‘그럼에도’ 오고야 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극적으로 완성된 이 『차라투스트라』. 완벽한 멜로디를 구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하고 싶어 했던 니체는 정말이지 온화하고 미묘한 가락에서 귀를 찢는 듯한 팡파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역을 구사했어. 하지만, 너무 일찍 왔기 때문인지 독자들은 철저히 외면했어. 그래도 니체는 여유로웠어.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싯바늘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낚시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만인을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란 부제를 달았어. 만인을 친구로 삼고 싶었지만 아무나 친구로 삼지는 않는 책. 무슨 뜻일까. 이 책은 아무나 읽으라고 썼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만 읽어낼 수 있는 글이란 뜻 아닐까? “영혼의 운명은 바뀌고 바늘은 앞으로 움직이며 비극이 시작되리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무모하게 도전하는 독자에게 던진 말이야. 어때? 그에게 한 번 낚여 인생의 시곗바늘이 바뀌고 몰락을 경험할 용기를 내보는 건. 물론, 낚이지 않아도 돼. 왜냐면 그게 감수성이든, 용기든, 낙관이든, 긍정이든, 결국 제멋대로 소화하고 자기 삶에 응용할 수 있는 사람, 나아가 전혀 읽지 않고도, 전혀 지지하지 않고도, 삶을 긍정하고 아름답게 가꿔가는 사람이라면 이미 니체를 기쁘게 해줄 훌륭한 독자이며, 니체의 열렬한 팬이라고 생각하니까.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숨을 멈췄어. 하지만, 육체의 시계는 이미 멈춰져 있었어.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다 잊어버린 채 거의 식물인간으로 말년을 보냈으니까. 그를 동정해야 할까? 우리는 식물인간과 얼마나 다를까. 기존 관습이 억압하는 대로 정해진 길에 매달려 죽음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걸까. 수없이 질문을 던진 니체처럼 매 순간 주인으로 살아가는 걸까. 2011년 8월 25일이 되면, 111년이 돼. 그날엔, 저 매미의 절절한 외침이 울음소리가 아니라 노랫소리, 웃음소리로 들릴 거야. 또 그날엔, 비록 잠시 헤어지지만, 아직 우리에겐 더 많은 여행이 필요하다는 너의 속삭임이 어느 때보다 감미롭게 들릴 거야. 죽음에 대고, 삶에 대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깨달음을 찾기 위한 여행일 테니까.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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