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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몇 번이라도 좋다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보고 싶어. 그대가 휴가를 떠나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움이 어느 때보다 더하구나. 로마의 풍경은 어떠니. 아씨씨의 향취는 어떠니. 한가로이 시에스타를 즐기고 있니. 얇고 짭짤한 피자 조각을 음미하고 있니. 어떤 사물에 낯설어하고 있고, 어떤 사연에 잠 못 이루고 있니. 돌아올 때 그곳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기 한 움큼이라도 내게 전해줘. 그때까지 난 네가 쓴 『여행 혹은 여행처럼』의 책 커버를 확 펼쳐놓은 채 가상의 여행을 하고 있을게.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 호처럼 태양을 등지고 우주의 심연으로 떠나는 상상을 해 볼게. 내 보잘것없는 인생의 조각들을 무중력의 공간으로 둥둥 띄워놓고 넉넉히 관조해볼게. 나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여행지가 되는 순간을 찾아보고 있을게. 언젠가 단 한 번 본 널, 한번 보고 매혹됐으나 다시는 보지 못한 여행지의 풍경처럼 그리워하고 있을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서? 어디로? 어디서?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아, 벗들이여, 나의 내면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저녁이다.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된 것을 용서하라!      

 자, 오늘도 니체가 말한 저녁이 되었어. 난 하루의 여행이 끝나갈 저녁 무렵이면 고개를 떨구고, 나의 인생이 왜,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이 되어 버렸는지, 나만이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 질문에 또 귀 기울여봐. 매번 내게 돌아오는 그 깊은 침묵은 늘 나의 인내를 시험해. 난, 결국 ‘모든 게 헛되구나!’라고 탄식하며 하루를 마감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힘겹게 버티는지 몰라. 그나마 우리가 잠시 함께 했던 이 고전 여행 덕에 난 얼마나 즐거이 버티었는지 몰라. 하지만, 네가 너무 바빠진다고 하니, 한동안 힘겨웠지만, 오늘 저녁, 이젠 널 놓아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단다. 어떻게 그게 쉽게 가능했느냐고? 오랜만에 니체를 찾아 지혜를 여쭤본 게 도움이 됐어. 현재의 동행을 과거로 마무리 짓고, 새로운 미래의 여행을 꿈꿔야 할 때, 차라투스트라의 설교만큼 짜릿한 게 또 있을까.

 아, 먼저 내가 언제 니체를 처음 만났는지 이야기해 줄게. 20년 전에 본 영화인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이런 장면이 나와. 유인원이 뼈 무더기에서 굵은 뼈다귀를 골라내. 어떤 깨달음 때문인지, 분노인지, 환희인지, 그의 포효는 점점 거세져서 뼈 무더기를 마구 내려쳐. 그런 와중에 하늘로 치솟아 오른 뼈 하나가 우주선으로 연결돼. 인류의 기원에서 미래로 단번에 연결되는 놀라운 비약의 순간이야. 그때, 먼 지진의 울림처럼 현들이 떨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어두운 오르간 소리 위로, 금관과 팀파니의 강렬한 난타가 이어져. 그 절정의 화음 속에서 여러 단계의 진화를 체험하는 인간의 운명!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그 찬란한 이미지에 전율했었어. 하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면, 내 감각의 저편 구겨진 주름을 쿵쾅쿵쾅 펴줬던 건, 실은 조숙했던 천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음악 때문이었어. 난, 그 당시 난 마르크스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있을 때였어. 유물론자가 아닌 철학자라면 오로지 경멸의 목적으로만 들여다보던 시절이었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샛길 한 귀퉁이로 일찌감치 밀쳐놨던 그 기묘한 철학가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 영화와 음악에 맞닿아 내 인생으로 깊숙이 침투하는지, 난 그 숨은 연결 고리를 찾아내고 싶어 안달이 났었어. 난 그렇게 우연히 니체를 만났고, 고백하자면, 금세 감전돼 버렸어.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고정희,「고백」

     

 난, 니체의 책들이 교과서에나 나오는 낡은 고전에 다름없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와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알게 됐어. 그 책 속에 숨은 불명예스러운 곰팡이 냄새는 누군가의 모함이란 걸. 그의 책이 ‘모든 사상가는 자기 시대의 아들’이라는 전형의 감옥에 갇혀 있는, 특정 시대만 대표하는 늙다리 고전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를 함께 되짚어나갈 때, 실시간 채팅처럼 전혀 시차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젊고 건강한 책이란 걸 알게 됐어.

 헌데 우린 왜 니체를 떠올리자마자 겁을 먹을까. 왜 그는 우리에게 예외적인 위험인물로 자리 잡고 있을까. 그가 평온하게 인습에 길들어 있는 우리를 순식간에 전복시킬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언제든 틈만 나면 궂은살로 살짝 막아놓은 안일한 사고의 정곡을 향해 비수를 날리기 때문 아닐까. 맞아. 그는 언제든 우릴 불편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 왜냐면, 그는 현재의 생각을 뒤집으라고 얘기하거든. 지금의 가치를 전복시키라고 얘기하거든. 정해진 답에 꿰맞춰 진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예리한 의문 부호를 들이밀고, 그 두려운 미지수 속으로 우릴 끌어들이고, 정답 없는 삶의 지도 위로 우리를 밀어버리거든. 두렵다고? 귀찮다고?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인생의 정답이 만약 오답이라면 어떡하지. 아니 아예 정답도 오답도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어떡하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저녁마다 찾아오는 이 질문에 대답이 될 수 있는 일말의 비밀이라도 엿듣고 싶다면, 난, 니체를 읽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어.

 난 언젠가부터 책상 위에 니체의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놔. 괜한 공상에 젖은 사이 바람결에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내버려둬. 컴퓨터를 부팅할 때 그 지겨운 기다림의 시간 틈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 마치 시집을 열어볼 때처럼, 내켜지는 페이지가 보여주는 임의의 문장들에 날 링크시켜 봐. 아, 멋진 문장들! 난 그가 시인이라는 걸 금방 알아챘었어. 평생 두통에 시달린 미치광이 시인. 짝사랑의 실패 후 벼락같은 영감을 얻었던 시인. 그래. 여느 시처럼 특별한 맥락 없이 내 마음대로 접속하고 반응하기. 난 이게 니체와 나누는 가장 편안한 대화법이라고 생각해.

 만약, 그를 오해하고 싶다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방식을 쓰면 돼. 자, 문제 나갑니다. 칸트는 정언 명령,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 스피노자는 범신론,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그렇다면, 니체는? 혹은 골든벨을 울려볼까. 니체는 자신의 작품 『차라투스트라』에서 인간의 정신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빈칸에 들어갈 말은? 낙타→사자→[   ]. 아니면, 하겐다스의 철자가 방송국 입사 시험의 단골 메뉴였던 시절처럼, 니체 이름을 원어로 쓰시오! 라고 시험 문제를 내 볼 수 있어. 니체가 궁금해 한때 전문가의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어. 이렇게 얘기해주더라. 차라투스트라의 핵심 개념은 5가지로 정리돼요. 뭐냐면……. 아, 제발 그의 사상을 다이제스트해서 암송하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해. 다들 그를 제대로 이해 못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해. 어차피 니체는 다 알고 있거든. 우리가 오해할 것을.

      나에 관해 무언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 자신의 상으로서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고 있을 뿐이다.      

 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 맨 뒤에 니체의 글 한마디를 인용했었어. 그때 한 평론가가 나에게 냉소를 보내면서 이러더라. “당신은 니체를 몰라!” 니체가 들었으면 한바탕 웃었을 거야. “넌 날 얼마나 아니?”라고 말이야. 난 니체라는 식단이 올라올 때마다 그를 더 잘 안다고 우기는 미식가들을 자주 봐왔어. 하지만, 니체는 자신이 한 곳에 고여 썩은 내를 풍기는 경전이 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어했을 거야. 오히려 자신을 마음껏 뜯어 먹고 각자의 피 속에서 제멋대로 체화시키길 바랐을 거야. 난 이렇게 생각해. 니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야, 감흥의 대상이지.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니체의 피는 무엇으로 생겨났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그게 궁금하다면 그의 남다른 생애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어. 슈트라우스의 음악처럼 난해한 격정의 리듬을 갖춘 생애. 실은 너무 이질적인 조성으로 가득해서, 어떤 종류의 음악이라고 한 마디로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생애. 니체는 종종 자신의 글 속에서, ‘난 바그너다.’라고 말해. 혹은 ‘쇼펜하우어다.’라고도 말해. 또 ‘볼테르다.’라고도 말해. 비제, 괴테, 스탕달, 디오니소스, 예수까지 그의 라이브러리는 참으로 다채로워. 니체를 어느 한 인격으로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이 복합체의 특성이 그를 어려운 존재로 만들어버려. 하지만, 실은 단순한 거야. 말하자면, 니체는 이런 식이었던 거야. “난 끊임없이 변신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날 니체로만 알고 있잖아. 난 여러 인격을 다중적으로 살면서, 내 변신을 끝없이 알려주고 싶다고!” 니체는 스스로 여러 번 태어나고 여러 번 죽었다고 말했어. 예를 들면, 독일적인 미덕에 대한 저항의화신이라고 믿었던 바그너를 흠모했지만, 결국 독일 제국의 우상이 되어버리자, 이내 그를 혐오하게 됐어. 그 순간, ‘바그너의 니체’는 죽어버린 거지. 그토록 존경했던 쇼펜하우어의 부정이, 결국 극도로 피곤한 자가 내뱉는 절망의 신음이라는 걸 알아버리자, 이내 ‘쇼펜하우어의 니체’도 죽어버린 거지.

 니체도 이렇게 보통 사람들처럼 자신을 대변해줄 예술가와 철학자들을 필요로 했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 타인의 정체성이라는 가면을 벗고 누구의 이름도 갖다 붙일 수 없는, ‘니체의 니체’가 돼. 자신이 생각이 남의 작품과 개념을 통해 표현되기엔 너무 커져 버린 거야. 『차라투스트라』의 집필을 앞두고 고유의 니체가 되는 엄청난 도약을 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뭐였을까.

 니체는 독일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특히 그 배후에 자리한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았어. 현세의 삶을 헛된 것으로 부정하고 내세를 꿈꾸게 하는 기독교, 그 연장선상에서 기존 가치와 관습을 맹종하는 위선적인 도덕군자들을 극복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돼. 그래서 이런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게 돼.

      모든 가치를 뒤바꿔 버릴 수는 없을까? 혹시 선이란 악이 아닐까? 신이란 단지 악마의 발명품이거나 악마를 더욱 정교하게 해놓은 게 아닐까?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거짓이 아닐까?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문에 이렇게 썼어. 뭔가 단단한 윤리적 기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식으로 우리의 불안감을 파고드는 종교, 편협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국가,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선과 악,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나약한 기대심리 등, 니체가 보기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심각한 염증을 느껴. 그리고는 이런 기성의 가치들과 혹독한 전쟁을 치러.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끄떡없이 버티는 저 현실의벽에 부딪혀 깨지고는, 출구 없는 비관에 허덕이다가 지쳐, 다 헛되다며 고개 젖는 허무주의자로 전락하기 쉬울 텐데, 혹은 결국 진리는 ‘저 너머 세계’에 있다며 거짓된 신앙에 굴복하기 쉬울 텐데, 그는 이 오류에 빠지지 않는 놀라운 항해술을 보여줘. 여기엔 참으로 특이한 비결이 있는데, 그 속에 평생 불운에 떨었던 니체가 남달리 특별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어.

      내 침대 위에서 내가 본 것. 그것은 바로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숨이 찬 듯 그렁그렁 거리고 낮은 신음을 냈다.      

 이게 열네 살짜리 소년이 쓴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거야. 근데, 맞아. 니체는 평생 병마에 시달렸어. 열두 살 때부터 두통과 눈의 통증에 시달렸고, 군대에선 말에서 떨어져 가슴을 다쳤고, 나중에 이질과 목 디프테리아를 앓았고, 끝내 치료되지 않은 매독균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몸이 안 아플 때도 늘 조울증과 발작에 시달렸었어. 그렇게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그가 앓던 병의 성격에 뭔가 큰 변화가 생겨. 그것은 기분뿐만 아니라, 성격, 행동, 표현, 문체, 작품까지 변하게 해. 스스로 그 차가운 전투에서 더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고 훨씬 사랑스러운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고 느껴.

      자유정신의 방식으로 병에 걸려 오랜 세월을 앓다가 그 후에 더욱 건강해지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에 대한 근본적 치료법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중병을 앓고 있던 어느 시기도 ‘결코 병적이지 않았고 그때만큼 기쁜 적이 없었다.’고 말해. 왜냐면, 병이 습속을 바꿀 권리를 주고, 망각을 허용하고, 조용히 누워 여가를 갖게 하고, 기다림과 인내의 필요성을 일깨워줬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니체는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새로운 사유의 기회로 활용했던 거야. 본성인 척 자리 잡은 ‘나’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나서게 하고, ‘나’와 ‘나’의 전면전을 펼친 거야. 그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표현한 긍정의 사상들은, 그의 말에 따르자면, 바로 이런 ‘위대한 건강’의 산물이었어.

      너는 너 자신을 멸망시킬 태풍을 네 안에 가지고 있는가?      

 그는 병에 걸리자, 카오스의 태풍을 만들어냈어. 카오스란 게 길의 ‘소멸’이 아니라 길의 ‘과잉’이잖아. 그러니까, 특정 시각의 맹목성을 지우고, 수많은 대립적 사유에 길을 내주는 치유의 체험을 한 거야. 이 아주 위험한 특권을 제대로 활용한 니체는, 스스로 환자이면서도 의사로서, (더 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더 작은) 병에 걸리는 독특한 삶의 지혜를 발휘한 거야. 의사들은 조울증의 일반적인 증세라고 치부했지만, 실은 니체는 철학의 수단으로서의 질병과치유의 반복적 체험을 했고, 비관론자에서 낙관론자로 점프하는 뛰어난 예술적 수완을 발휘했던 거지.

 그러던 어느 날,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거닐다 ‘영원회귀’라는 영감이 벼락처럼 그에게 떠올라. ‘사상이란 게 원할 때 아니라 그것이 원할 때 찾아 온다’는 말처럼 운명의 섬광이 스친 거야. 니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적인’ 질병을 앓지 않는 ‘초인간적인’ 상태로의 변신을 체험하게 돼. 어떤 의미로 너무나 건강해진 니체는, ‘나의 삶이고, 나의 천재성’이라고 표현한 비장의 모토를 찾아내게 돼. 그건 바로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사적 혁명의 방법론이야. 니체는 이에 따라 낡은 세계를 가차없이 쳐부수는 용기를 발휘해. 그것도 분노나 원한, 불평이 아니라 선물과 복음의 형태로 말이야. 그러니까, 단순한 부정을 넘어서는 긍정의 파괴 행위, 그것도 웃음과 춤, 놀이의 형태를 띠는 유희의 방식으로 말이야. 어느 순간, 그의 육체는 의미 없는 식물인간으로 초라하게 스러져 갔지만, 실은 훨씬 전부터 그는 치유되어 있었어.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점이 이거야. 자세히 보면 여기엔, 진정 우리가 걸린 심각한 병이 무엇인지, 그 치유법은 또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애타게 찾는 보물지도가 숨겨져 있으니까.

 니체는 그 폭풍 영감을 풀어헤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장문의 시를 휘갈겨 써 내. 그리곤 대만족했어.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라는 낯간지러운 제목의 글을 쓰고, “누군가 내 책 중의 하나를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면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드문 존경의 하나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말이야. 여기 우리가 니체의 삶과 니체의 글을 따로 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 “나와 내 작품은 별개다. (…) 난 내가 다른 사람들과 혼동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심지어 나 자신에 의해서도.”라고 얘기했어. 그러니까, 니체는 늘 이런 얘길 하고 싶어 했던 거야.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나서, 나의 생애에 대해 얘길 듣는다면, 그건 또 하나의 작품을 더 읽은 셈이다.’라고 말이야. 그래서 난, 그의 여러 변신 중의 하나인 『차라투스트라』를 살펴보기 전에, 그 모든 변신의 기록이 담긴 또 다른 한 작품으로서의 『니체』를 먼저 살펴보고 싶었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출현은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다.      

 니체는 물론 자신의 생각이 당대에 쉽게 파악될 거라고는 믿지 않았어. 실제로 니체는 다양하게 해석됐어. 모든 억압과 구습의 타파를 외치던 극단적 개인주의자부터 자본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의 옹호자를 넘어 여성 혐오주의자까지. 죽은 지 30년 만에 ‘사상가 니체, 행동가 히틀러’라는 등식으로 나치들에게 우상이 되기도 했었는데, 그 돌아가는 꼴을 봤다면 무덤 속의 니체는 한참이나 시큰둥해했을 게 분명해.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정치적 초상화는 여러 재해석 속에 의미 있는 변화를 거듭했어. 물론, 니체는 “최소한 300년을 기다리지 못한다면 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미리 여유 있게 투덜거렸어. 하지만, 300년까지나 기다리지는 않게 해주고 싶은 니체의 열혈 팬으로서 분명하게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그는 안타깝게도 ‘먼저 와 있었지만, 아직 오지 않았던 존재’였다는 사실, 또, 몇 시대를 건너뛰어야만 비로소 들릴 수 있는 그의 속삭임들이 분명히 우리 시대의 복음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이야!

 자, 오늘도 니체가 말한 밤이 되었어. 『차라투스트라』의 아름다운 몇 소절로 인사하면서, 니체를 읽지 않으면서도 니체의 독자가 되는 방법. 니체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니체의 팬이 되는 방법에 대해선 다음 편지에서 더 이야기해 볼게.

      밤이구나.
샘솟는 샘물은 소리가 더 커지네.
내 영혼도 샘솟는 샘물 같아서.

밤이구나.
사랑하는 연인들 노랫소리만 깨어 있네.
내 영혼도 사랑하는 연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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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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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유하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몇 번이라도 좋다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보고 싶어. 그대가 휴가를 떠나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움이 어느 때보다 더하구나. 로마의 풍경은 어떠니. 아씨씨의 향취는 어떠니. 한가로이 시에스타를 즐기고 있니. 얇고 짭짤한 피자 조각을 음미하고 있니. 어떤 사물에 낯설어하고 있고, 어떤 사연에 잠 못 이루고 있니. 돌아올 때 그곳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기 한 움큼이라도 내게 전해줘. 그때까지 난 네가 쓴 『여행 혹은 여행처럼』의 책 커버를 확 펼쳐놓은 채 가상의 여행을 하고 있을게.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 호처럼 태양을 등지고 우주의 심연으로 떠나는 상상을 해 볼게. 내 보잘것없는 인생의 조각들을 무중력의 공간으로 둥둥 띄워놓고 넉넉히 관조해볼게. 나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여행지가 되는 순간을 찾아보고 있을게. 언젠가 단 한 번 본 널, 한번 보고 매혹됐으나 다시는 보지 못한 여행지의 풍경처럼 그리워하고 있을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서? 어디로? 어디서?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아, 벗들이여, 나의 내면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저녁이다.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된 것을 용서하라!        자, 오늘도 니체가 말한 저녁이 되었어. 난 하루의 여행이 끝나갈 저녁 무렵이면 고개를 떨구고, 나의 인생이 왜,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이 되어 버렸는지, 나만이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 질문에 또 귀 기울여봐. 매번 내게 돌아오는 그 깊은 침묵은 늘 나의 인내를 시험해. 난, 결국 ‘모든 게 헛되구나!’라고 탄식하며 하루를 마감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힘겹게 버티는지 몰라. 그나마 우리가 잠시 함께 했던 이 고전 여행 덕에 난 얼마나 즐거이 버티었는지 몰라. 하지만, 네가 너무 바빠진다고 하니, 한동안 힘겨웠지만, 오늘 저녁, 이젠 널 놓아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단다. 어떻게 그게 쉽게 가능했느냐고? 오랜만에 니체를 찾아 지혜를 여쭤본 게 도움이 됐어. 현재의 동행을 과거로 마무리 짓고, 새로운 미래의 여행을 꿈꿔야 할 때, 차라투스트라의 설교만큼 짜릿한 게 또 있을까.  아, 먼저 내가 언제 니체를 처음 만났는지 이야기해 줄게. 20년 전에 본 영화인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이런 장면이 나와. 유인원이 뼈 무더기에서 굵은 뼈다귀를 골라내. 어떤 깨달음 때문인지, 분노인지, 환희인지, 그의 포효는 점점 거세져서 뼈 무더기를 마구 내려쳐. 그런 와중에 하늘로 치솟아 오른 뼈 하나가 우주선으로 연결돼. 인류의 기원에서 미래로 단번에 연결되는 놀라운 비약의 순간이야. 그때, 먼 지진의 울림처럼 현들이 떨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어두운 오르간 소리 위로, 금관과 팀파니의 강렬한 난타가 이어져. 그 절정의 화음 속에서 여러 단계의 진화를 체험하는 인간의 운명!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그 찬란한 이미지에 전율했었어. 하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면, 내 감각의 저편 구겨진 주름을 쿵쾅쿵쾅 펴줬던 건, 실은 조숙했던 천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음악 때문이었어. 난, 그 당시 난 마르크스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있을 때였어. 유물론자가 아닌 철학자라면 오로지 경멸의 목적으로만 들여다보던 시절이었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샛길 한 귀퉁이로 일찌감치 밀쳐놨던 그 기묘한 철학가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 영화와 음악에 맞닿아 내 인생으로 깊숙이 침투하는지, 난 그 숨은 연결 고리를 찾아내고 싶어 안달이 났었어. 난 그렇게 우연히 니체를 만났고, 고백하자면, 금세 감전돼 버렸어.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고정희,「고백」        난, 니체의 책들이 교과서에나 나오는 낡은 고전에 다름없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와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알게 됐어. 그 책 속에 숨은 불명예스러운 곰팡이 냄새는 누군가의 모함이란 걸. 그의 책이 ‘모든 사상가는 자기 시대의 아들’이라는 전형의 감옥에 갇혀 있는, 특정 시대만 대표하는 늙다리 고전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를 함께 되짚어나갈 때, 실시간 채팅처럼 전혀 시차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젊고 건강한 책이란 걸 알게 됐어.  헌데 우린 왜 니체를 떠올리자마자 겁을 먹을까. 왜 그는 우리에게 예외적인 위험인물로 자리 잡고 있을까. 그가 평온하게 인습에 길들어 있는 우리를 순식간에 전복시킬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언제든 틈만 나면 궂은살로 살짝 막아놓은 안일한 사고의 정곡을 향해 비수를 날리기 때문 아닐까. 맞아. 그는 언제든 우릴 불편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 왜냐면, 그는 현재의 생각을 뒤집으라고 얘기하거든. 지금의 가치를 전복시키라고 얘기하거든. 정해진 답에 꿰맞춰 진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예리한 의문 부호를 들이밀고, 그 두려운 미지수 속으로 우릴 끌어들이고, 정답 없는 삶의 지도 위로 우리를 밀어버리거든. 두렵다고? 귀찮다고?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인생의 정답이 만약 오답이라면 어떡하지. 아니 아예 정답도 오답도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어떡하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저녁마다 찾아오는 이 질문에 대답이 될 수 있는 일말의 비밀이라도 엿듣고 싶다면, 난, 니체를 읽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어.  난 언젠가부터 책상 위에 니체의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놔. 괜한 공상에 젖은 사이 바람결에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내버려둬. 컴퓨터를 부팅할 때 그 지겨운 기다림의 시간 틈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 마치 시집을 열어볼 때처럼, 내켜지는 페이지가 보여주는 임의의 문장들에 날 링크시켜 봐. 아, 멋진 문장들! 난 그가 시인이라는 걸 금방 알아챘었어. 평생 두통에 시달린 미치광이 시인. 짝사랑의 실패 후 벼락같은 영감을 얻었던 시인. 그래. 여느 시처럼 특별한 맥락 없이 내 마음대로 접속하고 반응하기. 난 이게 니체와 나누는 가장 편안한 대화법이라고 생각해.  만약, 그를 오해하고 싶다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방식을 쓰면 돼. 자, 문제 나갑니다. 칸트는 정언 명령,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 스피노자는 범신론,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그렇다면, 니체는? 혹은 골든벨을 울려볼까. 니체는 자신의 작품 『차라투스트라』에서 인간의 정신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빈칸에 들어갈 말은? 낙타→사자→[   ]. 아니면, 하겐다스의 철자가 방송국 입사 시험의 단골 메뉴였던 시절처럼, 니체 이름을 원어로 쓰시오! 라고 시험 문제를 내 볼 수 있어. 니체가 궁금해 한때 전문가의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어. 이렇게 얘기해주더라. 차라투스트라의 핵심 개념은 5가지로 정리돼요. 뭐냐면……. 아, 제발 그의 사상을 다이제스트해서 암송하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해. 다들 그를 제대로 이해 못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해. 어차피 니체는 다 알고 있거든. 우리가 오해할 것을.       나에 관해 무언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 자신의 상으로서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고 있을 뿐이다.        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 맨 뒤에 니체의 글 한마디를 인용했었어. 그때 한 평론가가 나에게 냉소를 보내면서 이러더라. “당신은 니체를 몰라!” 니체가 들었으면 한바탕 웃었을 거야. “넌 날 얼마나 아니?”라고 말이야. 난 니체라는 식단이 올라올 때마다 그를 더 잘 안다고 우기는 미식가들을 자주 봐왔어. 하지만, 니체는 자신이 한 곳에 고여 썩은 내를 풍기는 경전이 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어했을 거야. 오히려 자신을 마음껏 뜯어 먹고 각자의 피 속에서 제멋대로 체화시키길 바랐을 거야. 난 이렇게 생각해. 니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야, 감흥의 대상이지.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니체의 피는 무엇으로 생겨났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그게 궁금하다면 그의 남다른 생애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어. 슈트라우스의 음악처럼 난해한 격정의 리듬을 갖춘 생애. 실은 너무 이질적인 조성으로 가득해서, 어떤 종류의 음악이라고 한 마디로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생애. 니체는 종종 자신의 글 속에서, ‘난 바그너다.’라고 말해. 혹은 ‘쇼펜하우어다.’라고도 말해. 또 ‘볼테르다.’라고도 말해. 비제, 괴테, 스탕달, 디오니소스, 예수까지 그의 라이브러리는 참으로 다채로워. 니체를 어느 한 인격으로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이 복합체의 특성이 그를 어려운 존재로 만들어버려. 하지만, 실은 단순한 거야. 말하자면, 니체는 이런 식이었던 거야. “난 끊임없이 변신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날 니체로만 알고 있잖아. 난 여러 인격을 다중적으로 살면서, 내 변신을 끝없이 알려주고 싶다고!” 니체는 스스로 여러 번 태어나고 여러 번 죽었다고 말했어. 예를 들면, 독일적인 미덕에 대한 저항의화신이라고 믿었던 바그너를 흠모했지만, 결국 독일 제국의 우상이 되어버리자, 이내 그를 혐오하게 됐어. 그 순간, ‘바그너의 니체’는 죽어버린 거지. 그토록 존경했던 쇼펜하우어의 부정이, 결국 극도로 피곤한 자가 내뱉는 절망의 신음이라는 걸 알아버리자, 이내 ‘쇼펜하우어의 니체’도 죽어버린 거지.  니체도 이렇게 보통 사람들처럼 자신을 대변해줄 예술가와 철학자들을 필요로 했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 타인의 정체성이라는 가면을 벗고 누구의 이름도 갖다 붙일 수 없는, ‘니체의 니체’가 돼. 자신이 생각이 남의 작품과 개념을 통해 표현되기엔 너무 커져 버린 거야. 『차라투스트라』의 집필을 앞두고 고유의 니체가 되는 엄청난 도약을 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뭐였을까.  니체는 독일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특히 그 배후에 자리한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았어. 현세의 삶을 헛된 것으로 부정하고 내세를 꿈꾸게 하는 기독교, 그 연장선상에서 기존 가치와 관습을 맹종하는 위선적인 도덕군자들을 극복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돼. 그래서 이런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게 돼.       모든 가치를 뒤바꿔 버릴 수는 없을까? 혹시 선이란 악이 아닐까? 신이란 단지 악마의 발명품이거나 악마를 더욱 정교하게 해놓은 게 아닐까?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거짓이 아닐까?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문에 이렇게 썼어. 뭔가 단단한 윤리적 기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식으로 우리의 불안감을 파고드는 종교, 편협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국가,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선과 악,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나약한 기대심리 등, 니체가 보기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심각한 염증을 느껴. 그리고는 이런 기성의 가치들과 혹독한 전쟁을 치러.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끄떡없이 버티는 저 현실의벽에 부딪혀 깨지고는, 출구 없는 비관에 허덕이다가 지쳐, 다 헛되다며 고개 젖는 허무주의자로 전락하기 쉬울 텐데, 혹은 결국 진리는 ‘저 너머 세계’에 있다며 거짓된 신앙에 굴복하기 쉬울 텐데, 그는 이 오류에 빠지지 않는 놀라운 항해술을 보여줘. 여기엔 참으로 특이한 비결이 있는데, 그 속에 평생 불운에 떨었던 니체가 남달리 특별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어.       내 침대 위에서 내가 본 것. 그것은 바로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숨이 찬 듯 그렁그렁 거리고 낮은 신음을 냈다.        이게 열네 살짜리 소년이 쓴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거야. 근데, 맞아. 니체는 평생 병마에 시달렸어. 열두 살 때부터 두통과 눈의 통증에 시달렸고, 군대에선 말에서 떨어져 가슴을 다쳤고, 나중에 이질과 목 디프테리아를 앓았고, 끝내 치료되지 않은 매독균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몸이 안 아플 때도 늘 조울증과 발작에 시달렸었어. 그렇게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그가 앓던 병의 성격에 뭔가 큰 변화가 생겨. 그것은 기분뿐만 아니라, 성격, 행동, 표현, 문체, 작품까지 변하게 해. 스스로 그 차가운 전투에서 더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고 훨씬 사랑스러운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고 느껴.       자유정신의 방식으로 병에 걸려 오랜 세월을 앓다가 그 후에 더욱 건강해지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에 대한 근본적 치료법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중병을 앓고 있던 어느 시기도 ‘결코 병적이지 않았고 그때만큼 기쁜 적이 없었다.’고 말해. 왜냐면, 병이 습속을 바꿀 권리를 주고, 망각을 허용하고, 조용히 누워 여가를 갖게 하고, 기다림과 인내의 필요성을 일깨워줬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니체는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새로운 사유의 기회로 활용했던 거야. 본성인 척 자리 잡은 ‘나’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나서게 하고, ‘나’와 ‘나’의 전면전을 펼친 거야. 그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표현한 긍정의 사상들은, 그의 말에 따르자면, 바로 이런 ‘위대한 건강’의 산물이었어.       너는 너 자신을 멸망시킬 태풍을 네 안에 가지고 있는가?        그는 병에 걸리자, 카오스의 태풍을 만들어냈어. 카오스란 게 길의 ‘소멸’이 아니라 길의 ‘과잉’이잖아. 그러니까, 특정 시각의 맹목성을 지우고, 수많은 대립적 사유에 길을 내주는 치유의 체험을 한 거야. 이 아주 위험한 특권을 제대로 활용한 니체는, 스스로 환자이면서도 의사로서, (더 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더 작은) 병에 걸리는 독특한 삶의 지혜를 발휘한 거야. 의사들은 조울증의 일반적인 증세라고 치부했지만, 실은 니체는 철학의 수단으로서의 질병과치유의 반복적 체험을 했고, 비관론자에서 낙관론자로 점프하는 뛰어난 예술적 수완을 발휘했던 거지.  그러던 어느 날,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거닐다 ‘영원회귀’라는 영감이 벼락처럼 그에게 떠올라. ‘사상이란 게 원할 때 아니라 그것이 원할 때 찾아 온다’는 말처럼 운명의 섬광이 스친 거야. 니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적인’ 질병을 앓지 않는 ‘초인간적인’ 상태로의 변신을 체험하게 돼. 어떤 의미로 너무나 건강해진 니체는, ‘나의 삶이고, 나의 천재성’이라고 표현한 비장의 모토를 찾아내게 돼. 그건 바로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사적 혁명의 방법론이야. 니체는 이에 따라 낡은 세계를 가차없이 쳐부수는 용기를 발휘해. 그것도 분노나 원한, 불평이 아니라 선물과 복음의 형태로 말이야. 그러니까, 단순한 부정을 넘어서는 긍정의 파괴 행위, 그것도 웃음과 춤, 놀이의 형태를 띠는 유희의 방식으로 말이야. 어느 순간, 그의 육체는 의미 없는 식물인간으로 초라하게 스러져 갔지만, 실은 훨씬 전부터 그는 치유되어 있었어.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점이 이거야. 자세히 보면 여기엔, 진정 우리가 걸린 심각한 병이 무엇인지, 그 치유법은 또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애타게 찾는 보물지도가 숨겨져 있으니까.  니체는 그 폭풍 영감을 풀어헤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장문의 시를 휘갈겨 써 내. 그리곤 대만족했어.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라는 낯간지러운 제목의 글을 쓰고, “누군가 내 책 중의 하나를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면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드문 존경의 하나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말이야. 여기 우리가 니체의 삶과 니체의 글을 따로 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 “나와 내 작품은 별개다. (…) 난 내가 다른 사람들과 혼동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심지어 나 자신에 의해서도.”라고 얘기했어. 그러니까, 니체는 늘 이런 얘길 하고 싶어 했던 거야.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나서, 나의 생애에 대해 얘길 듣는다면, 그건 또 하나의 작품을 더 읽은 셈이다.’라고 말이야. 그래서 난, 그의 여러 변신 중의 하나인 『차라투스트라』를 살펴보기 전에, 그 모든 변신의 기록이 담긴 또 다른 한 작품으로서의 『니체』를 먼저 살펴보고 싶었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출현은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다.        니체는 물론 자신의 생각이 당대에 쉽게 파악될 거라고는 믿지 않았어. 실제로 니체는 다양하게 해석됐어. 모든 억압과 구습의 타파를 외치던 극단적 개인주의자부터 자본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의 옹호자를 넘어 여성 혐오주의자까지. 죽은 지 30년 만에 ‘사상가 니체, 행동가 히틀러’라는 등식으로 나치들에게 우상이 되기도 했었는데, 그 돌아가는 꼴을 봤다면 무덤 속의 니체는 한참이나 시큰둥해했을 게 분명해.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정치적 초상화는 여러 재해석 속에 의미 있는 변화를 거듭했어. 물론, 니체는 “최소한 300년을 기다리지 못한다면 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미리 여유 있게 투덜거렸어. 하지만, 300년까지나 기다리지는 않게 해주고 싶은 니체의 열혈 팬으로서 분명하게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그는 안타깝게도 ‘먼저 와 있었지만, 아직 오지 않았던 존재’였다는 사실, 또, 몇 시대를 건너뛰어야만 비로소 들릴 수 있는 그의 속삭임들이 분명히 우리 시대의 복음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이야!  자, 오늘도 니체가 말한 밤이 되었어. 『차라투스트라』의 아름다운 몇 소절로 인사하면서, 니체를 읽지 않으면서도 니체의 독자가 되는 방법. 니체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니체의 팬이 되는 방법에 대해선 다음 편지에서 더 이야기해 볼게.       밤이구나. 샘솟는 샘물은 소리가 더 커지네. 내 영혼도 샘솟는 샘물 같아서. 밤이구나. 사랑하는 연인들 노랫소리만 깨어 있네. 내 영혼도 사랑하는 연인의 노래.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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