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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가 끝난 뒤>
즐거운고전읽기  2011/07/04 10:21

 

  무도회가 끝난 뒤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잔인한 동쪽별! 나에게 퀴즈를 내다니. 그것도 부족해서 쉽게 풀 수 있을 거라고 하다니. 너, 살면서 내가 정답을 맞히는 걸 본 일이 있니? 내 눈엔 네 퀴즈가 난수표 암호처럼 보이고 식욕을 잃었어. 내가 세계 평화를 원한다 해도 난 암호 해독을 못 해서 첩보원이 될 수 없을 거야. 내가 정의를 위해 탐정이 된다 해도 나는 곧 해고되고 굶주리고 쓸쓸하게 죽어갈 거야.

 사실 난 정답인 줄 알았던 것이 오류고 오류인 줄 알았던 것이 참인 세상에 매력을 느껴. 나쁜 놈인 줄 알았던 놈이 알고 보니 착한 놈인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착한 놈인 줄 알았던 놈이 알고 보니 나쁜 놈인 이야긴 진짜 무서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나도 퀴즈를 하나 낼까 해. 내 문제는 이거야. 너는 우연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환경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이야기가 있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지금 여러분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모든 게 환경에 달렸고 환경이 인간을 해칠 수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우연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사건이 제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들려 드릴까요. (……) 제 인생은 전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전혀 다른 뭔가에 지배당했지요.      

 이렇게 말한 사람은 이반 바시리예비치야.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이야기를 더 하길 권했겠지. 그 자리가 있기 수십 년 전인 1840년대에 그는 B라는 이름의 여자를 사랑했어. 아주 뜨겁게 사랑했어. 그녀의 용모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어. 훤칠하고 늘씬하고 어느 여왕 못지않게 기품 있었어. 온몸에서 매력과 젊음이 뿜어져 나왔어. 당시 그는 활발하고 재치 있는 대학생이었어. 돈도 많았고. 그는 저녁 파티와 무도회를 좋아했어. 어느 무도회 밤 B는 장밋빛 허리띠를 맨 하얀 드레스를 입고 새끼 염소 가죽으로 만든 흰 장갑을 끼고 이반을 사로잡아버렸어. 둘은 그날 밤 지치지도 않고 함께 춤을 추었어. 이반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았어.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어. 천상에라도 있는 것처럼 행복했고 죄악 따위는 모르고 오직 선한 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어. 그 무도회장에는 B의 아버지도 있었어. 아주 잘생기고 훤칠한 노인이었어. 빛나는 미소는 딸과 꼭 빼닮았고 가슴은 군인답게 앞으로 도드라져 나와 있었어. 노인과 딸은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무도회장의 모든 사람이 숨죽이고 지켜볼 정도로 우아했어. 이반은 뭉클한 감동에 사로잡혔어. 춤이 끝나자 B의 아버지인 대령은 이반에게 B를 데려다 주었어. 이반은 너무나 행복해서 뜻하지 않은 불길한 일이 그 행복을 깨트릴까 두려울 지경이 되었어. 무도회가 끝나고 나서 이반은 집에 돌아왔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아버지와 춤추던 B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던 거야. 이반은 밖으로 나와 B의 집 쪽으로 산책을 갔어. 그런데 새벽빛 속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어. 이반이 가까이 가서 보니 시커먼 것은 검은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었어. 그들은 도망가려는 타타르인을 매질하는 중이었어. 허리춤까지 벌거벗겨진 어떤 남자가 묶여 있었고 그 옆에는 어쩐지 낯익은 키 큰 군인이 있었어. 타타르 남자는 양쪽에서 쏟아지는 매질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형제들 자비를 베푸세요, 형제를 자비를 베푸세요.’하고 흐느꼈는데 그때마다 쏟아지는 곤봉세례만 받았어. 타타르인의 몸은 살이 터지고 얼룩덜룩 끈적끈적해졌어. 그런데 그 옆에 있던 키 큰 군인은 시종일관 단호한 걸음걸이로 걷기만 하다가 한마디 했어.  

“대신 네놈을 손봐줄까? 계속 그런 식으로 할 텐가?”

그리고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병사의 얼굴을 가격 했어. 그 병사가 타타르 남자의 새빨간 등을 곤봉으로 충분히 세게 내려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키 큰 군인은 고개를 돌리다가 이반과 눈이 마주쳤어. 그런데 키 큰 군인이 누구였을 것 같니? 바로 B의 아버지인 대령이었던 거야.

 이반은 생각했어. '그들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하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은 모르고 군인들은 아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어. 결국, 그는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서도 자릴 찾지 못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게 돼버렸어. 그러면 사랑은 어떻게 됐나요?” 사람들이 물었겠지.

      사랑은 그날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평소처럼 웃음 띤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으면 나는 곧바로 들판에서의 대령이 떠올랐고 그러면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식어갔습니다. 자, 이제 살다 보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고 또 그 때문에 한 인생이 송두리째 변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셨겠지요. 그런데도 당신들은 말하기를…….”      

 이렇게 이 이야기는 끝나. 톨스토이의 『무도회가 끝난 뒤』라는 작품이야. 어때, 네 생각은 어떠니? 인간을 지배하는 게 우연이니? 환경이니?

 나는 네 대답이 아니라 네 행동을 짐작할 수는 있어. 아마도 그런 일이 너에게도 일어났었다면 네 사랑 역시 식고 말았겠지. 그리고 먼 훗날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어요, 란 말을 후회도 비탄도 없이 말하게 되었겠지. 이 작품은 폭력에 대한 저항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잃어버리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겠지. 우리가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기막힌 우연은 정말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동쪽별.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할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우연이 발생하게 된 필연성을 미처 알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우연을 말할 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고백을 하는 것 아닐까? 난 현실이 되어버린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셜록 홈즈라면 내 생각에 동의할 거야. 그의 추리 세계에 우연은 없으니까.

 가끔 이런 생각도 들어. 필연이란 게 눈앞에 난 필연적이야! 라고 말하며 등장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하고? 수만 개의 우연이 모여서 필연이 되지.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이 바로 우리 삶 아닐까? 그러니 필연은 먼 훗날 돌이켜 다시 생각할 때 여전히 떠오르는 우연이 옷을 바꿔 입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러니 우리의 자유, 우리의 존재, 우리의 우리됨, 우리의 인간됨, 이것들은 항상 떨고 흔들리며 불완전하게 좁은 길을, 그냥 좁은 게 아니라 몹시 좁은 길을 뚫고 나가며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나는 오늘 밤 무더위 속에서 내가 사랑했으나 잃어버렸던 것들을 헤아려보고 싶다. 윤동주의 서시처럼. 난 오늘 밤 너무 조심스럽구나. 난 오늘 밤 바람 한 줄기가 너무 그립구나. (퀴즈는 그립지 않고)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보들레르의 에세이 한편이 떠올랐어. 그 이야긴 다음 주에 해줄게. 이 글을 쓰는 지금 너무 더우니. 그리고 이 무더운 여름밤에 너에게 시를 읽어주고 싶으니 우선 이번 주는 시로 내 대답을…….

     

너무나 그들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 몇 가지가 여기 있어요.
한 사람은 긴 속눈썹을 광대뼈 쪽으로 떨구는 수법을 잘 썼죠.
아주 뛰어난 가리개를 만들어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척했어요.
다른 사람은 여름에 두 팔로 원을 만들어 더운데도
망가진 울타리 양쪽으로 떨어지는
야생 살구를 주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한쪽에서만
주울 수 있었어요.
한 사람은 야심이 많아, 얼굴이 상기되곤 했었죠.
빗장뼈까지 말이에요. 몸매가 좋은 겁쟁이였어요.
한 사람은 운모 조각처럼 날카롭고 반짝거렸죠
도톰한 입술을 가졌지만, 속은 텅 비었었죠.
한 사람은 위험을 즐기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였을 때 이미 도망갈 길을 마련해 놓았다가
사라져 버렸답니다.
한 사람은 몽유병에 걸려 순수함에 대한 꿈을 꾸면서
물 마른 협곡에 담배를 던져버리고
특권이라는 버팀 다리 위를 걷곤 했죠. 
                                 참 순수한 행위였죠. 
 

                                      -『가장자리에서 불 비추기』 에이드리언 리치-

     

 에이드리언 리치는 ‘어둠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너로 하여금 보게 한다는 데 있다’고 다른 시에서 말하고 있어. ‘어둠의 아름다움은 너로 하여금 보게 한다.’ 나는 사랑하고 싶었지만 결국 사랑할 수 없게 되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어둠 속에서만 보였던, 아니 차라리 어둠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던 진실들을 생각하며, 사랑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으나 나중에 사랑하게 되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계속 이 시를 떠올려. 사랑을 하는 동안에 누구보다도 사랑을 잘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계속 이 시를 떠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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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도회가 끝난 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박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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