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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어 왕> 한진중공업의 리어 왕들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무더운 여름밤이구나.

 그래, 그 하숙집 살인 사건 나도 기억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다 보니 네 하숙집에 경찰차랑 구급차가 서 있었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 수군대고 있었고 나는 혹시 네가 다친 것이 아닌지? 가슴이 쿵쾅거렸어. 그 하숙집 학생들은 모두 다 곧 떠날 거라고 해서 내가 너에게 달려갔던 기억이 나. 하지만, 내가 너를 그날 만났는지 그 다음 날 만났는지는 기억이 안 나. 하여간 넌 날 보자마자 꼭 지금처럼 그때 하숙집 아줌마가 하숙비를 돌려준 이야기부터 했어. 그때 우린 그 대화를 길거리에 서서 나눴는데 네 얼굴에 비치던 자책하는 표정이랑 힘없는 걸음이 지금도 생각나는구나. 그때 왜 하숙비를 돌려주세요? 라고 네가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면 그 일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 우린 차마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못했던 거야. 

 그런데 그 일은 나에게도 잊히지가 않았어. 나중에 취직한 다음에 가정 폭력 문제를 취재할 때마다 그 일을 생각했었으니까. 나중에 그 하숙집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물이 뿌려져 있었던 게 기억나. 핏자국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 심성의 어둡고 고통받는 마음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을까? 언젠가 우리나라에 시집온 베트남 여인이 가정 폭력을 당하다가 살해당한 일이 있었어. 그때 그녀가 죽기 전에 남편에게 쓴 편지 같은 것을 본 일이 있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열심히 한국어를 배울 것이다. 당신과 많은 대화를 해보고 싶다. 나에겐 꿈이 있었다. 당신에게도 꿈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녀는 한국말을 채 익히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결국 단 한 번도 당신에게 꿈이 있느냐는 질문 따위는 던지지 못했겠지. 그래도 그녀가 좀 더 살아서 그런 질문을 할 수만 있었다면 그녀의 운명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 또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다.

 그때 하숙집의 아이들도 이제 많이 자랐겠구나. 마당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며 놀던 평범한 개구쟁이들이었는데. 내가 지나가면 나한테도 가끔 뿌리고. 그때 아이들은 아주머니의 친정집으로 간 것 같다고 들었어. 그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을까? 제발 잘 자랐으면 좋겠다. 리어 왕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 나중에 두 딸에게 버림받은 리어 왕이 역시 아들에게 버림받고 눈까지 잃는 글로스터에게 하는 말이야.

      우리는 울면서 여기까지 왔다. 처음 세상의 공기를 마시면서 우리가 앙앙 울어대며 온 것을 너도 알지 않더냐……. 우리가 태어나면 이 거대한 바보들의 무대로 나왔다고 울어대는 거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도 울면서 여기까지 왔지. 그래도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있으면 인생 살 만한 것이야, 라고 느낀다면 우리가 부도덕한 걸까? 

 동쪽별. 난 지난주에 이런 경험을 했어. 그 말 많은 희망버스에 탔던 사람 중 하나가 나야. 나는 85호 크레인의 사연에 대해서 약간 알고 있었어. 85호 크레인은 93년도에 정리해고 문제가 터졌을 때 한진 중공업 노조의 김주익 열사가 목을 매고 죽은 곳이야. 93년의 바로 그 크레인, 똑같은 크레인에 2011년에 또 다른 사람이 올라가서 김주익 열사보다 더 긴긴 날을 홀로 보내고 있었어. 부산 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인데 그녀는 버스안내양으로 시작해서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 되었고 나중에 해고되었어. 그녀는 김주익 열사가 죽은 후 미안함 때문에 팔 년 동안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살았어. 우린 한밤에 신영도 다리를 건넜어. 한진 중공업 정문은 용역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우린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곳에 앉아서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인사를 했어. 안녕하세요? 뭐 그런 말을 했지. 힘내세요! 그런 말도 했던가? 정리해고 멈춰라. 그런 말도 했어. 우리가 한번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녀가 저 위에서 팔로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인사를 했어. 그녀는 손에 손전등을 들고 있었어. 우리가 말하면 불빛이 한번 출렁이고 또 우리가 말하면 저 멀리서 불빛이 한 번 더 출렁이고 이걸 계속 하다 보니 마치 광활한 어둠을 배경으로 우린 모스 신호를 서로 나누는 사이처럼 느껴졌어. 한 사람이 그대로 거대하고 활활 타오르는 한 점 불빛으로 느껴지는 거야. 내장에서 빛을 토해내는 인간 반딧불이 같기도 했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크레인 위에 홀로 올라가 있는 것은 그녀이고 우리는 수도 많고 안전한데도 점차로 그녀가 등대고 우리가 바다에서 길을 잃은 조난자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위로하려고 간 것은 우리인데 위로받는 것이 우리인 것 같은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희망버스를 타고 오신 분은 인도로 올라가세요.' 라고 누군가 말했고 우리는 그렇게 했어. 그런데 인도는 한진 중공업 담벼락 옆에 있었어. 그런데 또 누군가 담을 넘읍시다, 그러는 거야. 물론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지. 담 높이가 삼 미터였거든. 그래서 우리가 좀 구시렁댔어. 제가 좀 체력이 약합니다. 다리가 좀 짧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저 어둠 속에서 사다리가 내려오는 거야. 차례차례, 하나하나. 몇 개나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어. 열 개 정도는 될 것 같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된 오누이 눈앞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와 그들이 해와 달이 된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내 앞에 그런 게 내려올 줄은 몰랐어. 우리는 얼떨결에 담을 정신없이 넘었지. 트로이 성벽을 넘은 그리스 병사들 같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야곱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이방인? 나는 너무나 가슴이 두근거렸고 긴장되었어. 뭔가 경계를 넘어서는 기분이 들었어. 내가 그날 넘은 담은 한진 중공업 담이 아니었어. 그 담을 넘을 때 나는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현실의 장애물들을 상상으로 넘어서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담을 넘고 보니 다들 표정이 아름답게 보자면 몽환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자면 넋이 나가고 얼이 빠져 있었어. 그리고 문정현 신부와 백기완 선생님, 그리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가 연설했어. 그런데 이분들이 흰 머리칼과 수염을 날리며 노구를 이끌고 그 어둔 밤 한진 중공업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만 폭풍 속의 리어 왕을 생각하고 만 거야. 폭풍 속의 리어 왕은 믿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하고 집도 절도 없이 반쯤 정신이 나가 폭풍 속에서 울부짖어.

      이 냉혹한 폭풍의 팔매질을 견뎌야 하는 불쌍하고 헐벗은 자들아. 어디에 있든지 간에 머리를 누일 집도 없이 굶주린 뱃가죽으로 그리고 구멍 뚫린 넝마를 걸친 채로 이토록 험악한 시절로부터 어찌 너희 스스로를 보호한단 말이냐? 오 그동안 내가 이것에 대해 너무 소홀했구나.! 치료를 받아라, 화려한 자여. 불쌍한 자들이 느끼는 바에 스스로를 노출하여 넘쳐 나는 것들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고 하늘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라.      

  타락한 두 딸에게 쫓겨나고 나서 리어 왕이 가난한 자들에게 처음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는 장면이야. 리어 왕의 전체 주제는 물론 포기에 관한 것이야. 리어 왕은 왕관과 재산을 포기하고 그 대신 모두들 자신을 계속해서 왕으로 대접해주길 바라. 그는 자신이 권력을 넘겨주면 남들이 그의 약점을 이용하리는 것을 꿈도 못 꾸는 거지. 우리가 뭔가를 그것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했다고 그것이 우릴 행복하게 해주진 않아. 리어 왕처럼 오히려 그 포기 행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어.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단호한 결론을 내린 사람은 조지 오웰이야. 조지오웰은 포기와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

      네가 원한다면 땅을 줘버리되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해지려고 하지는 마라. 행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남을 위해서 살 것이면 남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우회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그날 밤 네가 흰 수염 흰머리 날리는 늙은 선생님들을 보면서 리어 왕을 떠올렸다면 그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은 아니었을 거야. 셰익스피어가 리어 왕을 행복하게 그리고 싶었다면 유일하게 가능했을 모습. 그것이 바로 그날 밤 선생님들의 모습이었어. 편안한 잠, 무병장수, 쾌적한 여름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소중한 것들. 이런 것들 다 포기하고 달려와 하늘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그날 밤의 리어 왕들은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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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어 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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