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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에어> 나는 고아다

  
민규동(영화감독) 

 

 안녕, 방사능 빗속에서 길을 잃을 뻔한 나의 상냥한 당신. 고독하고 가련한 그대의 동쪽별이 시름시름 앓으며 그 빛을 잃어가고 있을 때 변함없이 내 어깨에 손을 살짝 얹어주는 달콤한 당신. 그대가 편지를 보내줬기 때문에 난 겨우 버틸 수 있었어. 이번 주엔 허리에 이어 미칠듯한 두통까지 날 덮쳤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들어 가장 복잡한 순간들을 뚫고 나가야 했어. 시사회를 하고, 또 어지럼을 무릅쓰고 겨우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사이, 널 그리워하던 시간들이 우수수 부서지고 있었어.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목련이 피어 있더구나. 요즘은 기후가 변해서 시간이 지나도 꽃잎들이 다 떨어지지 못하고 몇몇 꽃들은 가지에 매달린 채 겨울까지 난다고 해. 저 나무에 피기 시작한 하얀 꽃들은 다들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 궁금해져. 어쨌든, 봄이 왔단다. 믿기니? 매번 찾아오는 계절인데도, 매번 새로운 느낌이 드는 거, 게다가 매번 다른 추억을 불러 일으켜주고, 매번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가버리는 거, 신기하지 않니? 마치 우리의 사랑처럼, 인생처럼 말이야. 창 밖 목련을 넋 놓고 보고 있자니, 어떤 기억이 떠올랐어. 나랑 참 안 어울리는 군대에 끌려가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에 물건처럼 던져진 채, ‘이곳의 운명이 너의 운명이다.’라고 선언 받던 그 시절 말이야.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자그마한 창틀 사이로 새로 돋은 풀꽃을 찬미했듯, 시선조차 맘대로 허용되지 않는 억압 속에 놓였었지만, 틈만 나면 눈을 돌려 내게 찾아온 봄을 느끼려고 애썼던 기억. 조금이라도 내 운명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억 말이야.

      “새로운 예속! 그래, 그런 삶에도 뭔가가 있을 거야.”      

 이렇게 제인 에어처럼 스스로를 달래면서 말이야. 제인이 그 악몽 같았던 숙모집을 탈출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은 로우드 자선원이야. 이곳은 일종의 고행의 미덕을 가르치는 곳인데, 거기엔 가끔 꿀꿀이죽을 먹는 것조차, 사치와 탐닉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내의 코스라고 우기는 교장이 있어. 마치 ‘옛날엔 나도 소방호스를 입에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힘들게 공부했었다.’라고 우기는 어떤 대학총장 같은 사람이야. 어딜 가나 이런 파쇼들을 만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거지. 고아가 되어 삼촌집에 맡겨졌다가 숙모에게 신데렐라처럼 핍박받았었던 (물론 맞고 조용히 풀죽어 지내지만은 않았지만) 제인은 다행히도 이미 지옥 같은 더부살이의 경험 덕에 자선원의 물리적인 고행 정도는 거뜬히 견디어내. 하지만, 그런 강인한 제인과는 달리, 흐드러지게 핀 목련을 채 보지 못하고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4명의 카이스트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우리가 결코 이해해주지 못할 고통의 끝에서, 그리고 그 외로움의 끝에 섰을 그들 대신이라도, 저 목련을 더 뚫어지도록 바라보게 돼. 사실 난 그들을 연약하다 비난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코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없다’’라는 낙담에 대한 마지막 저항으로 자신의 운명을 거두는 주체적 흔적을 남긴 것이니까. 제인에겐 묘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그 힘겨운 여정에서도 어떻게 버티어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줬던 헬렌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얼마 전 세상을 등진 그 젊은 영재들 곁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쩌면 좀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떨어지는 목련을 보며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어차피 피할 길이 없다면 참는 게 네 의무일 거야. 어쩔 수 없이 참는 게 네 운명인 일을 ‘난 못 참아.’라고 말한다면 그건 나약하고 어리석은 짓이야.” 헬렌은 힘겨워하는 제인에게 이런 말을 해줬어. “증오심을 가장 잘 이겨내는 건 폭력이 아니야. 그리고 상처를 가장 확실히 치유해 주는 건 복수가 아니야.” 또래의 10대 아이가 어쩜 이렇게 조숙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내 생각엔 우리 인생은 원한을 키우거나 그릇된 학대 행위를 마음에 새기고 살기엔 너무 짧아.” 이렇게 인생의 깨달음 몇 단계 중 거의 꼭대기에 올라선, 거의 소크라테스의 현현처럼 보이는 헬렌의 메시지들. 특히, ‘고통을 참을 것, 그러면 행복이 따를 것이다.’라는 그 달콤한 종교적 메시지는 제인을 크게 감화시키지만, 실은 제인은 그녀의 온화한 격려를 온전히 받아들이진 않아. 왜냐면, 그녀는 타고난 반골기질의 고아였고, 운명에게 지고는 못 견디는 저항아였단 말이지.

      “내가 나 스스로를 보살필 거야. 더 외로울수록, 홀로 남겨질수록, 의지할 이가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길 거야.”      

 이렇게 헬렌의 잠언을 재해석하며 운명을 헤쳐나가는 올리버 트위스트 캔디 제인의 매력적인 세계관은 어디서 탄생했을까.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이렇게 말해. .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 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이다.      

 제인은 그 홀로 남은 자신의 학교에서 삶이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견뎌야 할 것이란 걸 배워. 그녀는 총명한 지성을 갖게 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키웠어. 그녀는 정직함, 다정함, 겸손함을 갖췄고, 동시에 옹고집에 외골수가 돼. 그녀는 자신을 절대 속이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아. 그리고 다른 누구의 욕구에도 흔들리지 않아. 악전고투에는 강한 의지력으로 맞서고, 감정 억제엔 타고난 자제력을 발휘해.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하고, 이성이 감정보다 앞선다고 믿어. 비굴하게 길들여진 순종을 거부하고, 대신 가난과 고난을 용기 있게 받아들여. 유혹 앞에 쉬 체념치 않는 건전한 분별력을 가졌고,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남자의 종속물이 될 만큼 어리석지 않아. 가진 것도 없으면서 동등한 반려자가 아니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우기고, 결국 결혼은 필요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자발적인 포용이라고 주장해.

 나는 이토록 스스로 배워 훌륭히 익힌 제인을 보며, 매 순간의 갈등에 극도로 눌려, ‘죽어버린다면 이 고통이 지나가 버릴 텐데…’라고 속삭이게 될 때, 그 유혹을 이겨내는 힘은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깨닫게 돼. 어떤 궤적으로 스쳐왔든, 지금 이 순간, 땅에 딛고 선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조차 내가 올바른 신념으로 선택한 인내심의 결과라고 믿음 말이야.

 비극의 영원한 조건이란 게, ‘인간의 삶보다 가치가 월등히 높은 이상이 존재한다’는 거라고 보면, 제인의 이데올로기는 끝없는 비극의 꼬리표를 달고 다닐 수밖에 없는 세계관이기도 해. 채털리 부인의 극단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지. 제인에겐 관능의 체험 같은 건 제 신념의 저 발톱 끝에 묻은 먼지 정도의 위안거리니까.

      행복해지겠다는 적절한 대의명분이 있어요. 그러니 분명히 행복해질 거에요.      

  붉은 방에 갇혀 ‘Let me out’이라고 외쳐대며 행복한 삶을 향해 ‘Let me in’이라고 아우성을 치던 어린 제인 에어한테서 결국 그렇게 멋진 여자로 성장할 거라는 암시를 받지는 못했어. 하지만,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에서처럼, 그녀는 성장할수록, 고난을 겪을수록, 아름다워져.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바로 이 시에 이 소설이 시대가 흘러도 끊임없이 영화로 재탄생 되는 이유가 담겨 있어. 예쁘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지만, 한 번 반해버린 이상, 이 특별한 소녀를 다시, 또 다시 목격하고 싶어 안달하게 되어 있거든. 생애 첫 사랑을 버리게 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따르고, 또한 생명의 은인과 함께 한 두 번째 강렬한 사랑을 맞이한 순간에도 자신을 굽히지 않아. 보통 얘기하는 밀고 당기기 수준의 값싼 심리 싸움이 아니라, 남자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설복할 수 없는 정당 명료하고 단호한 이유로 돌아서 버리는 그녀의 팜므 파탈적 행동에 반해버리지 않을 수 없어. 이 예상을 뒤엎는 딜레마 속 선택 때문에 결국 우린 그녀의 지독한 홀로서기에 연민을 느끼고, 그 정직함에 감동하게 돼.

      내 자존심과 상황이 그래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난 혼자 살 수 있어. 행복을 사기 위해 내 영혼을 팔 필요가 없어. 내겐 타고난 내면의 재물이 있다고. 외부의 모든 낙이 내게 거부되거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가격으로 제공된다 할지라도, 그 재물이 내가 살아가게 해줄 거야.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 지금에서도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넘치는 개성에도, 결국 망가진 첫 남자를 행복하게 맞이하는 이 소설의 예상치 못한 해피엔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꽤 될 거야. (결국은 로맨스가 삶의 궁극적인 위안이 된다는 역설이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할 얘기가 없어. 내게 더 맞는 스타일은 여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언해피엔딩이니까.)

  나 또한 로체스터, 이 남자가 그토록 사랑할만한 남자인가, 라고 질투심 실어 물어보고 싶어. 그는 다시 돌아온 제인을 두고 ‘안 돼, 돌아가. 더 멋진 제대로 된 남자를 찾아 떠나.’라고 강력히 밀어내지 않아. 대신 파렴치하게도 “아아, 내 인생도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으로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녀가 내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어. 그러니까… 왜? 이 처녀는 거만하고 냉정한데다 망가져 버린 그의 곁에 머물게 될까. 인간성에 실망하고 인생을 조롱하며 낭비했던 허무주의자 곁에 말이야. 혹시 지저스 콤플렉스를 건드린 게 아닐까. 그토록 망가진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고 스스로의 최면에 넘어간 게 아닐까?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을 꼽으라면 두 개가 있어. 로체스터가 떠나려는 제인을 설득하는 장면이야. 또 하나는 신 존이 역시 떠나려는 제인을 설득하는 장면이야. 내가 왜 당신과 결혼해야 하는지, 당신은 왜 나랑 결혼해야 하는지를 웅변하는 장광설 프러포즈 장면 말이야. 킥킥대면서도 멈칫, 이런 생각을 했어. 그 해, 그때, 그곳에서, 네가 나에게 그 기회를 줬더라면, 나의 웅변이 너에게 닿을 수 있도록 조용히 귀를 열어 주기만이라도 했더라면, 지금은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하는 위험한 생각을 말이야. 우리 인생에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웅변이라도 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예언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렇게라도 다그쳤을 텐데…

      몇 마디 말로 증명해 보이지. 아가씨가 춥다는 건 아가씨가 외롭기 때문이야. 누구와 접촉해도 아가씨 마음속에 불을 붙여 주지 않아. 아가씨가 아프다는 건 사람에게 주어진 감정 중에서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달콤한 감정이 아가씨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아가씨가 멍청하다는 건 그렇게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도록 손짓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또한, 그 감정이 자기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가씬 그걸 마중하기 위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      

  4월 21일은 샬럿 브론테의 생일이고, 19번째로 리메이크된 <제인 에어>의 개봉일이고, 내 영화도 개봉하고, 네가 꼭 본다던 <상실의 시대>도 개봉하고, 여러모로 풍성한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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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 류경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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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로맨스가 삶의 궁극적인 위안이 된다는 역설이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할 얘기가 없어. 내게 더 맞는 스타일은 여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언해피엔딩이니까.)   나 또한 로체스터, 이 남자가 그토록 사랑할만한 남자인가, 라고 질투심 실어 물어보고 싶어. 그는 다시 돌아온 제인을 두고 ‘안 돼, 돌아가. 더 멋진 제대로 된 남자를 찾아 떠나.’라고 강력히 밀어내지 않아. 대신 파렴치하게도 “아아, 내 인생도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으로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녀가 내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어. 그러니까… 왜? 이 처녀는 거만하고 냉정한데다 망가져 버린 그의 곁에 머물게 될까. 인간성에 실망하고 인생을 조롱하며 낭비했던 허무주의자 곁에 말이야. 혹시 지저스 콤플렉스를 건드린 게 아닐까. 그토록 망가진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고 스스로의 최면에 넘어간 게 아닐까?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을 꼽으라면 두 개가 있어. 로체스터가 떠나려는 제인을 설득하는 장면이야. 또 하나는 신 존이 역시 떠나려는 제인을 설득하는 장면이야. 내가 왜 당신과 결혼해야 하는지, 당신은 왜 나랑 결혼해야 하는지를 웅변하는 장광설 프러포즈 장면 말이야. 킥킥대면서도 멈칫, 이런 생각을 했어. 그 해, 그때, 그곳에서, 네가 나에게 그 기회를 줬더라면, 나의 웅변이 너에게 닿을 수 있도록 조용히 귀를 열어 주기만이라도 했더라면, 지금은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하는 위험한 생각을 말이야. 우리 인생에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웅변이라도 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예언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렇게라도 다그쳤을 텐데…       몇 마디 말로 증명해 보이지. 아가씨가 춥다는 건 아가씨가 외롭기 때문이야. 누구와 접촉해도 아가씨 마음속에 불을 붙여 주지 않아. 아가씨가 아프다는 건 사람에게 주어진 감정 중에서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달콤한 감정이 아가씨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아가씨가 멍청하다는 건 그렇게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도록 손짓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또한, 그 감정이 자기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가씬 그걸 마중하기 위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         4월 21일은 샬럿 브론테의 생일이고, 19번째로 리메이크된 <제인 에어>의 개봉일이고, 내 영화도 개봉하고, 네가 꼭 본다던 <상실의 시대>도 개봉하고, 여러모로 풍성한 날이네.  ---------------------------------------------------------------------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 류경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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