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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녀 털에 꽃을 꽂고

  
민규동 (영화감독) 

 

 저번 주엔 허리가 아파서 몸져 누웠었어. 사실 지금도 거의 누워 있단다. 너의 생명력 예찬에 잠시 고무되었었지만, 실은 고백하는데, 젊을 땐 ‘황금허리’였지만, 지금은 ‘ 고철허리’거든. 녹슬고 무거워져 삐걱거리다가 가끔씩 주저앉는 허리. 이 십자가를 안고 골고다를 오르는 하루하루의 힘겨움에 덜커덩 좌절하고 보니, 다시 제자리로 굴러떨어진 바윗돌에 깔린 시시포스가 된 거 같구나. 이렇게 갑자기 육체적으로 불능 상태가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 사람이 떠올랐어. 미스터 클리퍼드 채털리. 그리고 그의 부인, 미시즈 채털리도 말이야. 

 30여 년 전, 하얀 살결의 쓰나미로 한반도를 역습한 영화 「엠마뉴엘」로 전설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린 실비아 크리스텔이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라는 영화에도 나온다고 알려지자, 이 영화는 제대로 된 감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본격 ‘에로’ 영화로 인증을 받았었어. 덕분에 짐짓 고상한 품위를 이고 사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이 차타레의 도발에 대해 언급할 수가 없었고, 야한 영화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살색 향연의 그저 그런 영화로 기억된 채 지나가 버렸지. 훗날 내가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만, 실비아 크리스텔의 헤어스타일만 기억이 나.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위로 번지던 물방울. 그런 거. 그건 엠마뉴엘 시리즈를 모두 보고 난 후에도 스토리도, 이미지도, 하나도 기억 못하고, 오로지 여배우의 머리 모양만 기억하고 있는 반응과 비슷해.

 내가 소설을 읽게 된 건 그 시절이 한참 지난 후야. 그땐 포르노 잡지를 지니는 게 퇴학을 무릅써야 할 남학생들의 불법적인 행위라면, 삽화 하나도 없이 야한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하이틴 로맨스물은 조숙한 여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합법적인 유행의 물결을 타는 것이었고, 로렌스 하면 로맨스라는 엉뚱한 통념의 시대였어. 난 ‘여자애 같다’는 말을 듣는 게 너무 큰 스트레스였으므로, 어떻게든 멀리하려고 애썼던 거 같아.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로렌스의 장이 있는데, 그 부분을 보고서야 소설을 읽게 됐었어.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소설의 이 첫 문장이 아직 혀끝에서 맴돌아. 그래, 하물며 시대의 비극에도 무감해지는데, 내 개인의 비극 따위를 읊어봐야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느냐만, 한껏 우울해진 탓에 평소와 달리 클리퍼드의 입장으로 급선회해서 이 이야기를 다시 노려봤어. 그는 평상시에 이런 생각을 가진 남자야. ‘섹스는 단지 우연하고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고, ‘볼품없는 자세로 고집스레 지속되고 있는, 이상하고 낡아빠진 신체 기관의 여러 과정 중 하나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이런 사소한 행위와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 이런 것들은 지나가 버리고 말아. 그것들이 지금 어디에 있지? 작년에 내린 눈이 어디에 있느냐고? 평생에 걸쳐서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지. 익숙해지는 것이 어떤 흥분보다 더 중요한 거 같아.’ 다시 말해서, ‘긴 인생의 필수적인 여러 가지 일에 비하면 성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다. 어때? 너무나 맞는 말 같지 않니? 내가 앞으로 영영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기 때문에 미리 나의 처지를 옹호하려는 옹색한 주장이 아냐. 조금 헷갈리지만, 어쩌면 난 평생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어. 누워 뒹굴뒹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확실히 육체적 사랑은 품위가 없어 보여. ‘이 어이없는 엉덩이의 율동, 초라하기 짝이 없는 축축하게 젖은 조그마한 페니스가 시들어가는 바로 이 신성한 사랑…… 결국 여기에 경멸감을 느낀 현대인은 옳은 것이다.’라는 웅변에 즉각적으로 감정이입 돼. ‘섹스 그리고 한 잔의 칵테일, 이 둘은 거의 비슷한 시간 동안 지속되고 똑같은 효과를 내며 거의 똑같은 결과에 이를 뿐이다.’라는 냉소에 마구 박수를 날리게 돼. 

 하지만, 육체의 욕구를 경멸해 보는 것, 이것이 왜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 걸까? 실은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도 불구가 되어 있던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나.

      “육체적 삶이란 것은 그저 동물적인 삶에 불과해.”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의 삶보다 좋아요.”      

 채털리 부인은 전쟁터에서 하반신 불구가 돼서 돌아와서도 부르주아의 자부심을 가득 안고 기계 문명을 예찬하며 살아가고 있는 남편에게 조금씩 저항하기 시작해. 휠체어에 의존한 채 관념으로 압도해 온 남편이랑 진정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그러니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기가 넘치는 실재하는 세상과 접촉을 상실했다’고 느껴.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한 남자의 몸을 살짝 훔쳐보게 돼.

      그녀는 볼썽사나운 바지가 깨끗하고 섬세한 하얀 허리 아래로 미끄러지듯 걸쳐져서 약간 드러난 엉치뼈를 보고 고독하다는 느낌, 정말 순수하게 고독해 보이는 한 인간에 대한 생각에 압도되었다. 내면까지 깊이 고독한, 고독하게 홀로 사는 한 인간의 완전하고 고독한 하얀 나체.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순수한 한 인간이 지닌 어떤 아름다움. 아름다운 사물도 아니고, 아름다운 육체도 아닌, 어떤 불꽃의 흔들림. 그것은 우리가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형체에 담긴 단 하나의 생명이 스스로 드러내 보여 주는 따스하고 하얀 불꽃이었다. 하나의 육체였다!      

 이게 채털리 부인에겐 환상적인 충격이 돼. 그걸 자궁 깊숙이 받아들이고는 ‘피를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해주는 건강한 인간의 관능’ 을 깨닫게 돼.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그런 화학적 전이가 가능했을까. 거대한 짐을 지고도 잘 버티던 낙타가 지푸라기 한 올에 무너질 수도 있듯, 억압의 정점과 무의미한 삶의 극단에 서 있던 탓에, 그 작은 몸짓에도 새 세계로의 접촉이 가능했던 거야. 남자의 몸을 발견하고 돌아온 날,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봐. 인생에는 이런 순간이 한 번은 존재해. 타인의 시선으로 투영된 내 육체가 아니라 내 시선으로 내가 느끼는 나의 몸. 이제 막 눈을 뜬 여자의 설렘에 나도 두근거렸어. 욕망이 소통되자 그들에겐 계급이 사라지고 평등이 찾아와. 이건 영화 「오감도」에서 내가 그렸던 에로스의 관계랑 맞닿아. 이 관능의 세계는 ‘이 세상에 남은 가장 좋은 것’이고, ‘당신 속에 들어갈 수 있으니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진리가 돼. 번잡한 그 성행위로부터 ‘우아하고 힘찬 육체의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야.

      “당신이 똥을 싸고 오줌을 눠도 나는 좋아유. 나는 똥도, 오줌도 쌀 수 없는 여자는 원치 않아유.”      

 멜로즈의 말처럼, 몽테뉴도 여자도 방귀를 뀌고 똥을 싼다고 힘주어 역설했어. 이것은 아주 뻔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쉽게 깨달을 수 없는 영역이야. 여자의 생리적 욕구를 공공연히 언급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 모두 엄연하게 터부시됐으니까.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실은 여자도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잖아. 여자도 남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교육받으니까. 아주 긴 세월, 우리 몸의 ‘더러운’ 부분을 가리키면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감추고 부끄러워할 것으로 교육받아 왔으니까. 거울 속의 자기 몸을 돌아보며, 자신에게도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할 때, 그 별것 아닌 순간에 감동이 시작돼. 몽테뉴는 자연스러운 것들을 자꾸 배제하려는 인간들을 꼬집으면서 이렇게 질문했어.

      이 세속의 감옥에 사는 동안 우리 인간에게는 순전히 육체적이거나 순전히 영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존재를 둘로 가르는 것은 해로운 짓이라고 말하면 모욕적일까?      

 이렇게 로렌스는 불륜 치정극을 표방한 문명비판서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우주적 낙천주의를 표방했어. 전쟁과 문명의 추잡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다정다감한 섹스다!’라고 말야. 핵무기를 몰래 품고 있던 일본의 원전 사고가 세계의 민폐로 퍼지고 있는 이 시점, 하루하루 번지는 이 세상 모든 부조리를 해체시키기 위해 우린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가 따뜻한 섹스의 소통을 추구해야 할 때야. 거기서부터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이 시작될 거야. 그렇게 믿자. 이렇게 생각해 보니, 도무지 아무런 출구를 찾아볼 수 없는 암흑 같은 현실에 한 줄기 빛이 보이지 않니?

‘말테는 나의 정신적 위기에서 태어난 인물이다.’라는 릴케의 말에서 말테가 릴케의 자화상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이 소설도 ‘로렌스의 수기’라고 볼 수 있어. 로렌스는 애가 셋이나 있는 연상의 유부녀 프리다에게 반했고, 둘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 끝에 2년 만에 결혼에 골인해. 채털리 부인을 뒤흔드는 멜로즈라는 남자는 직업적 배경이나 생김새의 묘사를 볼 때 작가 자신이 지나치게 투영돼 있어. 또, ‘가학 피학성 음란증 놀이, 즉 일반적인 싸움을 초월하는 깊은 무언가를 공유’했다던 로렌스와 부인의 이야기도 이 소설에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그런데, 실제의 삶은 정반대였어. 실제 둘의 성생활은 나이, 민족, 계급, 성격 차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엄청난 불화에 시달렸거든. 그의 소망과는 달리, 프리다는 죽어가는 로렌스 옆에 있지도 않았어. 그가 죽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랑 결혼해 버리기까지 해. 우습지? 생명의 찬가, 성의 묵시록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얘기도 실은 작가의 패배적 콤플렉스를 반영한 거야. 아마 그가 만족스럽게 살았다면 이런 명작이 탄생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겪는 이 육체적 고통도 결국 내 영화로 승화될까? 아, 이것도 위로가 못 돼.

그가 죽고 30년 후, 1960년, 런던의 법정에서 외설 시비의 재판이 열렸어. 피고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 원고 측 증인들은 귀부인과 하인의 사랑이 타락한 거라고 맹공했어. 피고 측은 외설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참다운 성찰이 배어 있다고 맞섰어. 어쨌든 배심원은 무죄 평결을 내려. 19세기의 법이 20세기의 내면 세계를 구속할 수 없다는 게 증명된 거지. 전쟁 영화 속에서 폭격에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가는 풍경보다, 음모에 꽃을 꽂고 킥킥거리는 모습이 훨씬 사회에 위협적이라는 생각들. 그것은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성은 모든 접촉 중에서 가장 밀접한 접촉이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접촉이지요.”      

 이건 섹스의 솔직함과 자연스러움 대 얌전 빼는 태도와 성적 무지의 대결사인데, 비슷한 구도를 떠올릴 수 있는 『테레즈 라켕』도 너무 비난을 많이 받아서 에밀 졸라가 서문에다가 작품 해명까지 달아야 했어. 또 『쥐스틴』, 『쥘리에트』의 사드도 감옥 생활을 했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조이스의 『율리시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도 오랫동안 판금됐어. 뭐, 예를 들자면 끝도 없겠지. 영화도 다를 바 없었어. 「감각의 제국」도 정작 일본에선 개봉 못했어. 여배우는 비난을 너무 받아 다음 해 자살했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개봉되자마자 시비가 들끓었고, 감독은 감옥에 잡혀 갔지. 지금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난리였을까. 그런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로댕의 조각상 「애무」는 왜 애초에 외설이 아니었을까. 100여 년 전엔 동학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이 죽창을 든 채 ‘과부의 재가를 허하라’고 외쳤었어. 한 시대의 혁명적 강령이 지금엔 당연한 진리야. 간통죄라는 구닥다리 법이 아직 한국에선 유효해. 얼마나 갈까. 곧 각종 섹스 경연 프로그램과 섹스 스포츠 산업이 미래의 유망주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어. 「섹스 앤 더 시티」나 「위기의 주부들」이 번듯이 오락 영화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걸맞은 음란함의 기준이 뭘까. 왜 음란한 것은 불온한 것일까. 시대는 변하고 옛 도덕에 맞서는 새로운 도덕이 태어나겠지. 결국 우리가 받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윤리들 대부분이 결국 상대적이고 불안정한 미완성의 기준들 아닐까. 그런 것들에 얽매여 움츠려 사는 건 바보 같은 거 아닐까. 변하지 않을 도덕이 있다면 무얼까. 그것을 움켜쥔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가장 깊은 것을 생각하는 자는 가장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한다.” _ 에른스트 블로흐      

  훗날 「애마 부인」과 「개인교사」류의 시리즈 등에서 끝없이 구현된 성적 불만족에 빠진 안주인과 건장한 하인의 포르노그래피적 클리셰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숲이라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남다른 의미를 획득해. 채털리 부인의 쾌감은 숲과 인간의 교감에서 얻은 자연인으로서의 자각이거든. 그 시절 우리를 휘어 감았던 「블루 라군」이나 「파라다이스」에서처럼, 촉촉한 풀밭을 더듬고 내리쬐는 햇살을 만지며, 물컹물컹한 진흙 위를 뒹굴고, 강물 소리에 신음 소리를 섞고, 빗물에 젖은 숲을 휘감듯 상대의 몸에 접촉할 때, 이 공감각적 심상들 속에서 채털리 부인은 몸을 발견하고, 자연을 발견하고, 삶을 발견해. 로렌스는 그 모든 것에 필수적인 촉각을 설파해. 접촉이 없다면 친밀감도 없고, 친밀감이 없다면 육체적 삶도 없고, 육체적 삶이 없다면 순수한 관능도 없다는 로렌스 교주님의 말씀. 아멘.

그 숲엔 이런 꽃들이 있어. 물망초, 참매발톱꽃, 패랭이꽃, 선갈퀴, 인동덩굴, 블루벨, 패랭이꽃, 좀가지풀, 선갈퀴아재비꽃, 히아신스…… 다들 뭔지 아니? 그래, 이 소설의 백미는 광산보다 꽃을 택했던 두 사람의 놀이에 있어. 이 꽃들을 몸에 난 여기저기의 털에다 꿰고, 성기에 감고, 배꼽에 붙이고, 몸의 모든 구멍에 꽂아놓고 놀아. 궁극적인 적나라함을 나누며, 은밀한 곳 중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오래된 수치심, 죄 의식, 마지막 불안감까지 모두 불태워 버리는 관능을 체험함으로써, 사생활에서 영원한 미성년자일 뻔했던 채털리는 드디어 어른이 돼.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에로스를 다루고 있지만, 이토록 특별한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었어. 커피진주, 너와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난다면, 우리도 한번 꽃놀이를 해보자꾸나.

아, 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봤어. 멜로즈가 자신의 부인에 대해 얘기할 때, 미쳐 날뛰는 욕망처럼 그녀의 부리로 찢어발기고 물어뜯고 쪼아대는 바람에 자신의 성기가 너무 아프다고 했던 거, 여자가 아프면 아팠지 어떻게 남자가 아플 수 있느냐고 물었었지. 남자도 마찬가지야. 마음 없는 행위에 의미 없는 사력을 다할 경우, 남는 건 통증과 허탈감뿐이라는 거. 성행위가 의사소통 행위라는 로렌스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난) 동의해. 정서와 호감이 전제된다면 날씨나 잡다한 것에 대한 수다를 나누듯 그저 육체적 대화를 하는 것. 만약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당연히 고통뿐이라고 봐.

참, 너에게 육체를 가르쳐준 그 남자는 누구니? 성모 마리아와 베아트리체 같은 너에게서 이브와 키르케의 모습을 찾아낸 그 남자 말이야.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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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털리 부인의 연인> 

   D. H. 로렌스  / 최희섭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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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유하기     처녀 털에 꽃을 꽂고    민규동 (영화감독)     저번 주엔 허리가 아파서 몸져 누웠었어. 사실 지금도 거의 누워 있단다. 너의 생명력 예찬에 잠시 고무되었었지만, 실은 고백하는데, 젊을 땐 ‘황금허리’였지만, 지금은 ‘ 고철허리’거든. 녹슬고 무거워져 삐걱거리다가 가끔씩 주저앉는 허리. 이 십자가를 안고 골고다를 오르는 하루하루의 힘겨움에 덜커덩 좌절하고 보니, 다시 제자리로 굴러떨어진 바윗돌에 깔린 시시포스가 된 거 같구나. 이렇게 갑자기 육체적으로 불능 상태가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 사람이 떠올랐어. 미스터 클리퍼드 채털리. 그리고 그의 부인, 미시즈 채털리도 말이야.   30여 년 전, 하얀 살결의 쓰나미로 한반도를 역습한 영화 「엠마뉴엘」로 전설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린 실비아 크리스텔이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라는 영화에도 나온다고 알려지자, 이 영화는 제대로 된 감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본격 ‘에로’ 영화로 인증을 받았었어. 덕분에 짐짓 고상한 품위를 이고 사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이 차타레의 도발에 대해 언급할 수가 없었고, 야한 영화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살색 향연의 그저 그런 영화로 기억된 채 지나가 버렸지. 훗날 내가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만, 실비아 크리스텔의 헤어스타일만 기억이 나.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위로 번지던 물방울. 그런 거. 그건 엠마뉴엘 시리즈를 모두 보고 난 후에도 스토리도, 이미지도, 하나도 기억 못하고, 오로지 여배우의 머리 모양만 기억하고 있는 반응과 비슷해.  내가 소설을 읽게 된 건 그 시절이 한참 지난 후야. 그땐 포르노 잡지를 지니는 게 퇴학을 무릅써야 할 남학생들의 불법적인 행위라면, 삽화 하나도 없이 야한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하이틴 로맨스물은 조숙한 여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합법적인 유행의 물결을 타는 것이었고, 로렌스 하면 로맨스라는 엉뚱한 통념의 시대였어. 난 ‘여자애 같다’는 말을 듣는 게 너무 큰 스트레스였으므로, 어떻게든 멀리하려고 애썼던 거 같아.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로렌스의 장이 있는데, 그 부분을 보고서야 소설을 읽게 됐었어.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소설의 이 첫 문장이 아직 혀끝에서 맴돌아. 그래, 하물며 시대의 비극에도 무감해지는데, 내 개인의 비극 따위를 읊어봐야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느냐만, 한껏 우울해진 탓에 평소와 달리 클리퍼드의 입장으로 급선회해서 이 이야기를 다시 노려봤어. 그는 평상시에 이런 생각을 가진 남자야. ‘섹스는 단지 우연하고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고, ‘볼품없는 자세로 고집스레 지속되고 있는, 이상하고 낡아빠진 신체 기관의 여러 과정 중 하나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이런 사소한 행위와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 이런 것들은 지나가 버리고 말아. 그것들이 지금 어디에 있지? 작년에 내린 눈이 어디에 있느냐고? 평생에 걸쳐서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지. 익숙해지는 것이 어떤 흥분보다 더 중요한 거 같아.’ 다시 말해서, ‘긴 인생의 필수적인 여러 가지 일에 비하면 성적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다. 어때? 너무나 맞는 말 같지 않니? 내가 앞으로 영영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기 때문에 미리 나의 처지를 옹호하려는 옹색한 주장이 아냐. 조금 헷갈리지만, 어쩌면 난 평생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어. 누워 뒹굴뒹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확실히 육체적 사랑은 품위가 없어 보여. ‘이 어이없는 엉덩이의 율동, 초라하기 짝이 없는 축축하게 젖은 조그마한 페니스가 시들어가는 바로 이 신성한 사랑…… 결국 여기에 경멸감을 느낀 현대인은 옳은 것이다.’라는 웅변에 즉각적으로 감정이입 돼. ‘섹스 그리고 한 잔의 칵테일, 이 둘은 거의 비슷한 시간 동안 지속되고 똑같은 효과를 내며 거의 똑같은 결과에 이를 뿐이다.’라는 냉소에 마구 박수를 날리게 돼.   하지만, 육체의 욕구를 경멸해 보는 것, 이것이 왜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 걸까? 실은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도 불구가 되어 있던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나.       “육체적 삶이란 것은 그저 동물적인 삶에 불과해.”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뚱이는 죽은 시체의 삶보다 좋아요.”        채털리 부인은 전쟁터에서 하반신 불구가 돼서 돌아와서도 부르주아의 자부심을 가득 안고 기계 문명을 예찬하며 살아가고 있는 남편에게 조금씩 저항하기 시작해. 휠체어에 의존한 채 관념으로 압도해 온 남편이랑 진정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그러니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생기가 넘치는 실재하는 세상과 접촉을 상실했다’고 느껴.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한 남자의 몸을 살짝 훔쳐보게 돼.       그녀는 볼썽사나운 바지가 깨끗하고 섬세한 하얀 허리 아래로 미끄러지듯 걸쳐져서 약간 드러난 엉치뼈를 보고 고독하다는 느낌, 정말 순수하게 고독해 보이는 한 인간에 대한 생각에 압도되었다. 내면까지 깊이 고독한, 고독하게 홀로 사는 한 인간의 완전하고 고독한 하얀 나체.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순수한 한 인간이 지닌 어떤 아름다움. 아름다운 사물도 아니고, 아름다운 육체도 아닌, 어떤 불꽃의 흔들림. 그것은 우리가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형체에 담긴 단 하나의 생명이 스스로 드러내 보여 주는 따스하고 하얀 불꽃이었다. 하나의 육체였다!        이게 채털리 부인에겐 환상적인 충격이 돼. 그걸 자궁 깊숙이 받아들이고는 ‘피를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해주는 건강한 인간의 관능’ 을 깨닫게 돼.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그런 화학적 전이가 가능했을까. 거대한 짐을 지고도 잘 버티던 낙타가 지푸라기 한 올에 무너질 수도 있듯, 억압의 정점과 무의미한 삶의 극단에 서 있던 탓에, 그 작은 몸짓에도 새 세계로의 접촉이 가능했던 거야. 남자의 몸을 발견하고 돌아온 날,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봐. 인생에는 이런 순간이 한 번은 존재해. 타인의 시선으로 투영된 내 육체가 아니라 내 시선으로 내가 느끼는 나의 몸. 이제 막 눈을 뜬 여자의 설렘에 나도 두근거렸어. 욕망이 소통되자 그들에겐 계급이 사라지고 평등이 찾아와. 이건 영화 「오감도」에서 내가 그렸던 에로스의 관계랑 맞닿아. 이 관능의 세계는 ‘이 세상에 남은 가장 좋은 것’이고, ‘당신 속에 들어갈 수 있으니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진리가 돼. 번잡한 그 성행위로부터 ‘우아하고 힘찬 육체의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야.       “당신이 똥을 싸고 오줌을 눠도 나는 좋아유. 나는 똥도, 오줌도 쌀 수 없는 여자는 원치 않아유.”        멜로즈의 말처럼, 몽테뉴도 여자도 방귀를 뀌고 똥을 싼다고 힘주어 역설했어. 이것은 아주 뻔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쉽게 깨달을 수 없는 영역이야. 여자의 생리적 욕구를 공공연히 언급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 모두 엄연하게 터부시됐으니까.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실은 여자도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잖아. 여자도 남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교육받으니까. 아주 긴 세월, 우리 몸의 ‘더러운’ 부분을 가리키면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감추고 부끄러워할 것으로 교육받아 왔으니까. 거울 속의 자기 몸을 돌아보며, 자신에게도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할 때, 그 별것 아닌 순간에 감동이 시작돼. 몽테뉴는 자연스러운 것들을 자꾸 배제하려는 인간들을 꼬집으면서 이렇게 질문했어.       이 세속의 감옥에 사는 동안 우리 인간에게는 순전히 육체적이거나 순전히 영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 있는 존재를 둘로 가르는 것은 해로운 짓이라고 말하면 모욕적일까?        이렇게 로렌스는 불륜 치정극을 표방한 문명비판서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우주적 낙천주의를 표방했어. 전쟁과 문명의 추잡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다정다감한 섹스다!’라고 말야. 핵무기를 몰래 품고 있던 일본의 원전 사고가 세계의 민폐로 퍼지고 있는 이 시점, 하루하루 번지는 이 세상 모든 부조리를 해체시키기 위해 우린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가 따뜻한 섹스의 소통을 추구해야 할 때야. 거기서부터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이 시작될 거야. 그렇게 믿자. 이렇게 생각해 보니, 도무지 아무런 출구를 찾아볼 수 없는 암흑 같은 현실에 한 줄기 빛이 보이지 않니? ‘말테는 나의 정신적 위기에서 태어난 인물이다.’라는 릴케의 말에서 말테가 릴케의 자화상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이 소설도 ‘로렌스의 수기’라고 볼 수 있어. 로렌스는 애가 셋이나 있는 연상의 유부녀 프리다에게 반했고, 둘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 끝에 2년 만에 결혼에 골인해. 채털리 부인을 뒤흔드는 멜로즈라는 남자는 직업적 배경이나 생김새의 묘사를 볼 때 작가 자신이 지나치게 투영돼 있어. 또, ‘가학 피학성 음란증 놀이, 즉 일반적인 싸움을 초월하는 깊은 무언가를 공유’했다던 로렌스와 부인의 이야기도 이 소설에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그런데, 실제의 삶은 정반대였어. 실제 둘의 성생활은 나이, 민족, 계급, 성격 차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엄청난 불화에 시달렸거든. 그의 소망과는 달리, 프리다는 죽어가는 로렌스 옆에 있지도 않았어. 그가 죽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랑 결혼해 버리기까지 해. 우습지? 생명의 찬가, 성의 묵시록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얘기도 실은 작가의 패배적 콤플렉스를 반영한 거야. 아마 그가 만족스럽게 살았다면 이런 명작이 탄생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겪는 이 육체적 고통도 결국 내 영화로 승화될까? 아, 이것도 위로가 못 돼. 그가 죽고 30년 후, 1960년, 런던의 법정에서 외설 시비의 재판이 열렸어. 피고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 원고 측 증인들은 귀부인과 하인의 사랑이 타락한 거라고 맹공했어. 피고 측은 외설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참다운 성찰이 배어 있다고 맞섰어. 어쨌든 배심원은 무죄 평결을 내려. 19세기의 법이 20세기의 내면 세계를 구속할 수 없다는 게 증명된 거지. 전쟁 영화 속에서 폭격에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가는 풍경보다, 음모에 꽃을 꽂고 킥킥거리는 모습이 훨씬 사회에 위협적이라는 생각들. 그것은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성은 모든 접촉 중에서 가장 밀접한 접촉이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접촉이지요.”        이건 섹스의 솔직함과 자연스러움 대 얌전 빼는 태도와 성적 무지의 대결사인데, 비슷한 구도를 떠올릴 수 있는 『테레즈 라켕』도 너무 비난을 많이 받아서 에밀 졸라가 서문에다가 작품 해명까지 달아야 했어. 또 『쥐스틴』, 『쥘리에트』의 사드도 감옥 생활을 했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조이스의 『율리시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도 오랫동안 판금됐어. 뭐, 예를 들자면 끝도 없겠지. 영화도 다를 바 없었어. 「감각의 제국」도 정작 일본에선 개봉 못했어. 여배우는 비난을 너무 받아 다음 해 자살했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개봉되자마자 시비가 들끓었고, 감독은 감옥에 잡혀 갔지. 지금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난리였을까. 그런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로댕의 조각상 「애무」는 왜 애초에 외설이 아니었을까. 100여 년 전엔 동학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이 죽창을 든 채 ‘과부의 재가를 허하라’고 외쳤었어. 한 시대의 혁명적 강령이 지금엔 당연한 진리야. 간통죄라는 구닥다리 법이 아직 한국에선 유효해. 얼마나 갈까. 곧 각종 섹스 경연 프로그램과 섹스 스포츠 산업이 미래의 유망주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어. 「섹스 앤 더 시티」나 「위기의 주부들」이 번듯이 오락 영화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걸맞은 음란함의 기준이 뭘까. 왜 음란한 것은 불온한 것일까. 시대는 변하고 옛 도덕에 맞서는 새로운 도덕이 태어나겠지. 결국 우리가 받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윤리들 대부분이 결국 상대적이고 불안정한 미완성의 기준들 아닐까. 그런 것들에 얽매여 움츠려 사는 건 바보 같은 거 아닐까. 변하지 않을 도덕이 있다면 무얼까. 그것을 움켜쥔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가장 깊은 것을 생각하는 자는 가장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한다.” _ 에른스트 블로흐         훗날 「애마 부인」과 「개인교사」류의 시리즈 등에서 끝없이 구현된 성적 불만족에 빠진 안주인과 건장한 하인의 포르노그래피적 클리셰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숲이라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남다른 의미를 획득해. 채털리 부인의 쾌감은 숲과 인간의 교감에서 얻은 자연인으로서의 자각이거든. 그 시절 우리를 휘어 감았던 「블루 라군」이나 「파라다이스」에서처럼, 촉촉한 풀밭을 더듬고 내리쬐는 햇살을 만지며, 물컹물컹한 진흙 위를 뒹굴고, 강물 소리에 신음 소리를 섞고, 빗물에 젖은 숲을 휘감듯 상대의 몸에 접촉할 때, 이 공감각적 심상들 속에서 채털리 부인은 몸을 발견하고, 자연을 발견하고, 삶을 발견해. 로렌스는 그 모든 것에 필수적인 촉각을 설파해. 접촉이 없다면 친밀감도 없고, 친밀감이 없다면 육체적 삶도 없고, 육체적 삶이 없다면 순수한 관능도 없다는 로렌스 교주님의 말씀. 아멘. 그 숲엔 이런 꽃들이 있어. 물망초, 참매발톱꽃, 패랭이꽃, 선갈퀴, 인동덩굴, 블루벨, 패랭이꽃, 좀가지풀, 선갈퀴아재비꽃, 히아신스…… 다들 뭔지 아니? 그래, 이 소설의 백미는 광산보다 꽃을 택했던 두 사람의 놀이에 있어. 이 꽃들을 몸에 난 여기저기의 털에다 꿰고, 성기에 감고, 배꼽에 붙이고, 몸의 모든 구멍에 꽂아놓고 놀아. 궁극적인 적나라함을 나누며, 은밀한 곳 중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오래된 수치심, 죄 의식, 마지막 불안감까지 모두 불태워 버리는 관능을 체험함으로써, 사생활에서 영원한 미성년자일 뻔했던 채털리는 드디어 어른이 돼.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에로스를 다루고 있지만, 이토록 특별한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었어. 커피진주, 너와 다음 생애에 다시 만난다면, 우리도 한번 꽃놀이를 해보자꾸나. 아, 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봤어. 멜로즈가 자신의 부인에 대해 얘기할 때, 미쳐 날뛰는 욕망처럼 그녀의 부리로 찢어발기고 물어뜯고 쪼아대는 바람에 자신의 성기가 너무 아프다고 했던 거, 여자가 아프면 아팠지 어떻게 남자가 아플 수 있느냐고 물었었지. 남자도 마찬가지야. 마음 없는 행위에 의미 없는 사력을 다할 경우, 남는 건 통증과 허탈감뿐이라는 거. 성행위가 의사소통 행위라는 로렌스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난) 동의해. 정서와 호감이 전제된다면 날씨나 잡다한 것에 대한 수다를 나누듯 그저 육체적 대화를 하는 것. 만약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당연히 고통뿐이라고 봐. 참, 너에게 육체를 가르쳐준 그 남자는 누구니? 성모 마리아와 베아트리체 같은 너에게서 이브와 키르케의 모습을 찾아낸 그 남자 말이야. 궁금해.  ------------------------------------------------------------------------       <채털리 부인의 연인>     D. H. 로렌스  / 최희섭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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