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지킬, 난 하이드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일본의 지진 소식 때문에 어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는 시간이야. 이 현실이 잘 믿기지 않는데, 그건 내가 세상을 그저 그럴듯하게 예측대로 잘 굴러가고 있다고 온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조금씩 예외가 있지만 그래도 늘 나아지고 있다고 최면을 걸며 살아왔지만, 이젠 도무지 자신이 없어지는구나. 크게 보면 어쩔 수 없이 재난 영화에 출연한 단역들로서 이 불확정성의 시대에 걸맞은 우리의 눈높이는 어떤 걸까 고민하게 돼. 이런 와중에, 트위터에는 이웃에 덮친 재앙을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들 뒤로 놀라운 멘션들이 넘쳐나고 있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다.’ ‘한반도를 안전하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한다.’ ‘한류 열풍에 타격이다.’ ‘한국 기업에 반사 이익이다.’ 어처구니가 없지? 인류 공영과 사랑의 전도를 외치는 예의 바른 한민족의 얼굴 뒤로 이런 배타적이고 매몰찬 이기심이 숨어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그걸 드러내놓고 표출해내는 지독한 뻔뻔함이 더 놀라워. 오랫동안 우릴 괴롭혀온 우월한 경쟁자로 일본을 보고 있기에, 틈만 나면 위치의 전복을 꿈꾸는 극우주의자들, 또 상대적으로 선교사의 희생이 심했고 그 때문에 서구 종교가 차지한 자리가 비좁은 일본에 대해 개신교도들이 가진 열등감, 질투심이 발현된 거야. 마오쩌둥이 ‘역사는 증상이고 인간이 질병’이라고 했었지, 아마. 이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이중성이 실제 재앙보다 더 몸서리치게 무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오늘 아침에는 최승자 시인의 <어떤 아침에는>이라는 시를 펼쳐봤어. 병든 나와 병든 세계와의 이 미묘한 관계는 결국 둘 사이에 어떤 새로운 윤활유의 존재를 필요하게 돼. 많은 영화들이 이 중간 존재를 다뤄왔어. <헐크>, <사이코>, <드레스 투 킬>, <엔젤 하트>, <프라이멀 피어>, <카인의 두 얼굴>, <마스크>, <아이덴티티>, <파이트클럽> <솔라리스> 등등, 이 익숙한 영화들의 공통점이 뭐게? 바로 도플갱어나 야누스 또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인 다중 인격을 다룬 영화들이야. 이 영화들의 주요 테마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탄생한 것이라면 믿을 수 있겠니?
내가 얘기하려는 작품은 ‘괴혈병’이나 ‘럼주’라는 단어를 가르쳐줬던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야. 낮에는 자선사업가 지킬, 밤엔 살인범 하이드. 말하자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 성추행범 목사, 밀수꾼 경찰, 아동학대범 유치원교사등등. 그래 이런 간단한 이미지로 정리할 수 있지만, 나 또한 어려서부터 많은 버전의 영화를 봤고, 패러디를 보았기에 문득 진짜 줄거리는 헷갈리기도 해. 그래서 저번 주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다시 한 번 찾아봤어. 동성애자처럼 그려진 소설과는 달리, 지킬은 성녀를, 하이드는 창녀를 사랑하고 있는 뮤지컬의 설정이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였어. 이 얘기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틀에 갇힌 좁은 상징이 아니라, 욕망의 억압과 폭력적 분출이라는 당대 관습과 제도에 대한 냉소적 비판으로 확장돼 보였거든. 이 소설이 이렇게 영화로, 뮤지컬로 끝없이 각색되는 이유가 뭘까.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처럼 그가 찾아낸 ‘이중인격’이라는 개념이 순식간에 집단 무의식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가 뭘까. 사람은 행동보다는 의식의 영역이 훨씬 넓고 깊고, 또 거기엔 정상보단 비정상적인 요소가 훨씬 더 많이 내포돼 있어. 결국, 거시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투시할 때 보이는 그 복잡한 비극적 양상, 즉, 인류가 받은 저주인 ‘선과 악’이라는 쌍둥이의 극과 극의 갈등을 최초로 그려냈기 때문 아닐까.
이런 갈등에 눌린 채 어떻게 탈출할까,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던 지킬은 어느 날 ‘두 본성을 분리하는 기적’에 도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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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이 무서운 획책은 자신의 악이 완벽한 명분을 얻고 양심의 가책 없이 마음껏 펼쳐지기를 원하는 마음이야. 약물 한 병이면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이토록 편리한 면죄부가 있을까?
넌 내가 죽도록 사랑하며 살라고 했지. 그래 어쩌면 너라도 마음껏 욕망하고 싶구나. 하지만 밤새지킬의 어린 시절 고백처럼 마음껏 쾌락을 탐닉하고, 다음날 아침 카다피에게 학살당한 리비아의 시민을 애도하는 점프컷을 그린다면, 이 비약에서 오는 균열감 때문에 나는 온전히 스스로 쾌락을 추구할 수도, 당연한 인류애를 맘껏 펼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질 거야. 네 말대로 겉으로는 쑥맥이고 속으로는 쾌락주의자인 내가 약품 하나로 또 다른 아바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하이드로 태어난 난 거침없이 달려가 불길처럼 널 휘감을텐데. 지킬 그대로 고귀하게 남은 난 사심 없이 지구의 평화를 목놓아 기원할텐데. 이런 뻔뻔한 면책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자가 있을까?
하덕규의 노랫말처럼, 대부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다들 어떤 게 나인지 모른 채 번민에 휩싸여 살고 있을 거라 믿어. `권태'와 `광기'의 충돌 가운데 끝없이 절망하고 허무의 나락에 빠졌던 전혜린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이런 편지를 남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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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도 흐르고 그런 강렬한 자극이 얻고 싶다. 비정상적인 일을 하고 싶어 죽겠다. 무엇에든지 편집증적 강박을 일순이라도 가져보고 싶다. 후회의 극치까지를 행위로 구명해보고 싶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씨일 수밖에 없었어. 적어도 때때로는......
이렇게 질문해 볼까? 마음속에 또 다른 내가 있고 그 마음이 몸을 갖고 태어난다면 누가 진짜 나일까? 둘 중 나의 본질적인 모습은 어떤 걸까? 루 메리노프는 <철학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고쳐 말해. 결국, 어떻게 보여지고 평가받느냐가 존재의 본질일 수도 있다는 얘기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인식하는 내 본질은 겉모습과 속 모습 중 어느 것일까?
내 대학시절 별명이 ‘신림동 황금 허리’였다는 걸 알 거야. 내가 허리를 튕기면 근방 200미터 내의 여인들이 모두 쓰러졌던 전설도 알 거야. 항상 맨 뒤 창가를 선호하고, 나서는 걸 싫어하며, 구석과 그림자에 집착하며 말이 없던 내가 어느 날 수백, 수천의 대중들을 휘어잡는 춤꾼으로 거듭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니? 내 안에 그런 광대로서의 유전자가 있는지는 나도 몰랐던 일이니까. 사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내 인생의 궤적들과 현재의 지표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그렇다면,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일까.
오늘 외신을 보면서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어. 저 카다피가 그 카다피인가. 미국의 야욕이 아랍을 비극에 빠뜨렸기에 외세에 결탁해 부패한 자본가들을 내몰고 정의를 위해 자신들은 광신도가 됐다고 일갈한 그 카다피가 지금 저 학살자인가. 지금과 과거 중 누가 지킬이고 누가 하이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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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 속에는 서로 갈등하고 있는 두 개의 본성이 있으며, 비록 내가 그 중 어느 한 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양쪽 모두이기 때문이다.
지킬은 자기 몸에 실험을 감행하며, 이렇게 대답해. 인간은 결국 어느 한 쪽으로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이중적이다고 말이야.
어리석음, 잘못, 죄악, 탐욕이
우리 정신을 차지하고 육신을 괴롭히며,
또한 거지들이 몸에 이와 벼룩을 기르듯이,
우리의 알뜰한 회한을 키우도다.
보들레르도 <악의 꽃>에서 선이 없으면 악도 존재할 수 없다고 얘기해. 흙탕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언어학에서 유사성과 차이를 동일 개념으로 보는 것처럼. 이렇게 그 대립을 두 인격 혹은 선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선 여러 분할된 욕망의 대립이라고 보자면, 도스토옙스키의 <이중인격>, 스탕달의 <적과 흑>, 헤세의 <지와 사랑>에서부터 <플래툰>의 번즈 중사와 일리어드 상사까지 이 주제는 우리의 역사와 일상 속에서 무한히 반복 재현되고 있어.
스티븐슨이 연구했던 이 ‘도덕적 정신이상’이 어느새 보편적 삶이 되어버린 세상. 이 기이한 이야기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이것이 전혀 기이하지 않다는 거야. 현대 사회는 말 그대로 하이드가 지킬을 구원하고 있는 세상이니까. 이번 주 故 장자연 리스트의 인물들은 한숨을 놓았어. 편지가 친필인지 조작인지의 소동이 결국 재수사를 하지 않는 결론에 도착했으니까. 하지만 자필 유서에서 호소했던 진실은 여전히 유효하잖아? 돈과 권력으로 젊은 사람의 꿈을 짓밟았던 그 위선자들은 자신의 부조리를 감내하기 위해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놓고 편하게 악행을 저지르기를 꿈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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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것은 어쨌든 하이드였고, 하이드 홀로이지 않은가.
이렇게 위로하면서 말이야. 한편 그들은 가족에겐 소중한 가장, 친구들에겐 명망 있는 지인일 테지.
사실 영화나 소설 속 하이드는 대부분 폭력적인 악당으로 그려져. 정신질환 탓에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는 이 고정관념은 그들을 격리의 대상으로 몰아세우는 왜곡된 시선을 은연중에 퍼뜨리지. 하지만 우리 안의 하이드, 그것은 꼭 흉악한 범죄자의 욕망을 일컫는 것만은 아냐. 언젠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기다려주지 않고 올라가 버린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진해서 결국 떨어져 죽은 사건에서처럼, 긴 세월 쌓아온 차별에의 울분.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끼어드는 새치기가 불러오는 살의. 소녀를 성폭행하고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가해자를 보고 그 부모가 시스템에 느끼는 울분과 복수심. 이렇듯, 평범하고 선량한 마음 뒤편에 법과 질서가 구원해주지 못하는 욕구와 본능들 또한 또 다른 하이드의 세포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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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원적이라는 말을 했다. 현재 나 자신의 지식수준으로는 그 이상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문제에서 혹자는 내 입장을 따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나를 능가하겠지. 그래서 감히 추측건대, 인간은 잡다하고 서로 모순되는 개별적 거주자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이 결국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그가 약품으로 또 다른 인격의 출아를 상상한 지 200년이 지나기 전에 사실상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가 와버렸어. 본성의 분리는 불가능하더라도, 육체의 재현은 가능한 시대 말이야. 게다가 언제든 생성 가능한 복수의 디지털 자아는 다중적인 아이디와 아이콘을 지닌 채 인터넷을 떠돌 수 있는 지위를 얻었고, 우리는 그 익명의 틈에 숨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네티즌이라는 하이드의 초상을 얻었지. 즉, 이중인격을 넘어선 다중인격의 개념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됐어. 우리는 컴퓨터 앞에만 앉아 아바타를 실행시키기만 하면 언제든 지킬과 하이드로 살아나갈 수 있게 된 거야. 물론 여기엔 중독과 혼동이라는 부작용이 따르고 있지.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24개의 인격체를 갖게 되는 바람에 자신을 스스로 치료하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 캐머론 웨스턴이라는 한 남자의 기록, <다중인격>이라는 책엔 이런 글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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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늘 나 자신이 한 조각의 인간에 불과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낡은 카펫에 흩어진 깨진 유리 조각들 중 한 개 말입니다. 내가 다른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고, 그 유리 조각들 중 일부는 나를 쳐다보지만 일부는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한 카펫 위에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더 가까워져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가 한데 모이면 화병 모양에 훨씬 가까워질 텐데… … 우리가 조각들을 연결해서 붙이면 말이지. 그런 상태로 있으면 누가 우리를 빗자루로 쓸어서 쓰레기더미에 버리진 않을 거야.
니체의 말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외부 세계의 대변자인 초자아가 양심의 가책 탓에 자기 학대에 찌든 모습으로 허덕이며 스스로를 쭈그러뜨리고 초라하게 만드는 사이에, 우리의 하이드가 하나둘씩 잉태되고 있는 거지. 그래도, 윤리와 양심의 굴레에 벗어날 수 없지만, 그 너머의 세계에서 '나쁘긴 하지만' 욕망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는 이 두 번째 자아 역시, 심약한 인간의 일부라고 이해해주는 게 '인간적인' 인간으로 사는 걸까? 아무튼 그는 인격체의 수와 인격체 간의 나이 차를 줄여가고 있대. 지금은 24개에서 어디까지 줄였을까?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에 나온 글이야. 한 인간이 여러 개의 인격체로 분열되며 각각의 욕망으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 법? 도덕? 관습? 이성? 사랑? 대답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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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박찬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