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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냄새

 

메멘토 모리

  
민규동 (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너의 감기 소식만으로도 덜컹하는 한 주야. 이반 일리치는 옆구리의 작은 타박상 때문에 3개월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됐으니까. 걱정돼. 빨리 나았다는 소식 전해주길 바라. 시한부 하니까 슬픈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 작년 여름, 췌장암을 앓던 한 대학 때 친구가 세상을 떴어. 6개월 시한부 투병 소식을 뒤늦게 듣고 놀라 전화를 했을 때, 이렇게 담담히 얘기하더라. “바쁘잖아.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듣고서야 눈물이 뚝 떨어졌어.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살아남을 자를 우선 감싸주다니. 순간 돋보인 내 무심함에 스스로 치를 떨었었어. 병문안을 가끔 갔을 때마다, 각종 연예인 가십을 풀어놓으며 농담을 구사하는 게, 곧 죽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프로 야구와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덕에 버틴다고 명랑하게 웃었지만, 실은 병이 그 낙천적인 성격까지도 갉아먹고 있었을 거야. 점점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워졌는지, 방문객도 더 이상 반기지 않게 됐어. 모든 걸 놓아버린 친구의 참혹한 얼굴을 떠올리다 못해, 난 하이킥에 나오는 한 여배우에게 부탁했어. 그냥 개인 팬 미팅이라고 생각하고 병문안을 함께 가자고. 죽어가는 낯선 친구에게 선물해달라고. 천사 같은 그 배우는 기쁘게 동행을 허락했어. 내 얼굴도 잘 못 알아보던 친구가 그 배우는 단번에 알아보더라. 방문 인증이라며 배우의 손수건과 거울도 빼앗고 장난치며 놀더니, 끝내는 (10년 뒤에 있을지 모를) “결혼식장에 갈게요. 그때 봐요”라며 갑자기 마지막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거야. 깜짝 놀랐었어. 어떤 위로가 그를 방긋 웃게 한 걸까. 죽음을 며칠 앞두고 풀죽은 그에게 무엇이 그토록 희망이었을까.

 그때 난, 중학교 때 백혈병에 걸려 돌아가신 외삼촌과의 마지막 조우를 떠올렸어. 그날, 어른들은 잘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직감으로 마지막 인사라고 느끼고 있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다가 그때 내가 건넨 말은, 처참하게도, “곧 나으실 거예요. 걱정 마세요”였어. 이반 일리치가 증오해 마지않던 그 가짜 위로였던 거야! 자신이 죽는다는 걸 인정하고, 죽어가는 사람으로 대우해 주길 바라던 일리치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사람들한테 공공연히 부인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해. 돌멩이가 하늘에 떠 있다면 뉴스거리가 되지. 하지만, 달이 떠 있는 건 뉴스가 안 되잖아? 죽음도 마찬가지로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탓에, 직접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 이벤트의 주인공이 되고 말아. 내 말은 전혀 위로가 안 됐을 거야. 결국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건네는 헛된 위로는 실은 “난 이런 일을 겪을 리도 없고, 또 나한테 일어날 리도 없어”라는 추한 안도감일 뿐일 테니까.

 그렇게 ‘다행히도 난 죽음을 연기하는 주연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야’라고 자신을 다독여도, 우리 대부분도 결국 일리치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돼. 잘 봐봐. 그 과정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를 거쳐. 첫째, 부정의 단계야.

      “그는 키제베터의 논리학에서 배운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유명한 삼단논법의 일례가 카이사르에게나 해당하는 진리였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 자기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닐뿐더러 일반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이반 일리치에게 자기 자신은 언제나 아주 특별한, 일반적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그런 존재였다. (…)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지닌 바로 나에게는 죽음이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죽는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처음엔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는 바로 둘째, 분노의 단계로 접어들어. 왜 하필이면 자신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가족, 의사, 신에게까지 뻗치면서 주위를 힘들게 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 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결국 죽음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모욕을 느끼는 거지.  



 그리고는 셋째, 협상의 단계로 들어서. 자, 이젠 어떻게든 죽음을 미루려고 해. 착하게 돌변하거나, 특별한 헌신을 맹세하거나, 등등 처절하게 발악하는 거지.

      “신이여,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어째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나를 이렇게도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파고들면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 스스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을 하며, 또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눈을 감아야 하는 거라면 그땐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향해 절박하게 매달리게 돼. 
 


 하지만, 결국 넷째, 우울의 단계로 접어들고, 더는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지 못하게 돼.

          “난 내가 조금씩 산에서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랬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산을 오르는 것이었지만, 실은 정확히 그만큼씩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무서운 깨달음이야. 그토록 절박했던 인생의 자취들이, “죽음의 정반대 편에 서서 죽음을 향해 점점 거리를 좁혀왔던 거”에 불과하다니, 극도의 상실감과 우울증은 당연한 도착점이겠지.  



 마지막으로, 수용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런 깨달음의 순간에는, 주변 사람의 동정 어린 시선마저도 이렇게 진실을 들려줘.

      “전에는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일, 즉 자기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문득 떠올랐다. 사회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그가 반대하려고 했던 극히 희미한 마음의 움직임, 그가 항상 곧 몰아내자, 몰아내자고 했던 극히 희미한 마음의 움직임, 오직 그것만이 진짜이며 나머지 것은 모두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직무도, 생활도, 가정도, 사교나 업무의 흥미도, 모두가 가짜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자신을 위해 변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이 변호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취약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변호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그는 그런 것들 중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생활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모두 가짜이며, 삶도 죽음도 덮어 가리고 있는 무섭고 또 거대한 기만이란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생각의 탄생』에 이런 말이 있어. “가장 완벽한 이해는 우리가 ‘자신’이 아니고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 될 때”이다. 그래, 맞아. 죽음의 롤러코스터를 탄 일리치도 자신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죽음 자체를 이해하게 됐을 때야 비로소, ‘헛되게 살아온 삶을 유의미했다고 애써 정당화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삶을 옥죄는 것이었다’라는 통렬한 깨달음을 얻게 돼. 그걸 본 우리는 죽음만이 줄 수 있는 이 선물에 응당 고개를 끄덕이게 돼. 그런데 여기서 하나, 묻게 되는 게 있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죽음’이라는 통과 제의의 심경에 우리가 유독 쉽게 본능적인 직관을 발휘하며 감정이입 되는 비결이 뭘까? 친구의 모습, 외삼촌의 모습, 일리치의 모습 모두가, 그저 잠시 유예된 우리 미래의 한 단면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사실. ‘나는 죽는다’라는 냉정한 비밀 말이야.

  『좁은 문』도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결국 이 죽음의 문턱에서야 깨닫는 사랑의 진리를 헤집고 있잖아. 그래서인지 난 『좁은 문』을 읽으면서는 다른 뭣보다 죽음을 놓고 나누는 두 남녀의 사랑 맹세가 인상 깊게 남아. 제롬이 알리사에게 ‘우릴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라고 하자, 알리사는 반대로 ‘오히려 죽음이 살아 있는 동안 떨어져 있던 둘을 더 가깝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해.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선이 보이지? 너는 어느 쪽이니? 궁금해. 넌 알리사 같은 금욕주의자는 딱 질색일 거 같아. 왜냐면, 알리사가 빠진 사랑의 환상은 기독교의 신이 배타적으로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목적을 완성하려는 데 있으니까. 죽음마저도 ‘사랑보다 더 소중한 무엇’인가를 향한 자기희생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다니. 이런 자학형 행복추구자에게 말론 브랜도는 삐딱하게 한 마디 던지겠지.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고독한 존재야.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굉장히 바보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알리사의 일기 마지막 문장은 가슴을 사무치게 해.

      지금, 빨리,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기 전에 죽고 싶다.      

 똑같은 고독 속에 죽어갔지만, 일리치는 정반대의 영역에 있었어. 관습의 규율에 크게 어긋남 없이 세속의 모든 욕구를 지당하게 쫓아오다가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소리쳤거든.

      무엇 때문에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도대체 왜 저를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를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겁니까?”      

 톨스토이가 인생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던 40대 초에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었던 거 알지? 그때 쇼펜하우어에 경도됐었다고 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대작에도 쇼펜하우어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어. 어찌나 염세적인지, 행복한 사람도 슬프게, 또 슬픈 사람이라면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독설 가득한 행복론은 생의 유한성을 막 깨닫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을 거야. 쇼펜하우어는 겁에 질린 사람에게 태연히 이렇게 묻거든.

      우리가 죽음으로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는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아. 태어난 후에야 죽음이 존재할 수 있지. 즉, 죽음은 삶의 꽁무니에 태어난 이면일 뿐이고, 결국 원래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돌아가는 회귀일 뿐이라는 거야. 삶이 어차피 고통밖에 없고, 또한 불가능한 만족을 위한 무의미한 노력의 연장일 뿐이라면, 죽음은 환영해야 할 해방으로 반겨야 한다는 거지. 그의 말에 수긍한다면, 생명과 죽음이 맞닿은 형상은 빛과 그림자의 원리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우리 몸에 빛을 비추면 그림자가 생겨. 빛을 거두면 그림자도 상실돼. 하지만, 정말 그림자가 생겼다, 사라진 걸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이 닿는 순간, 몸이 빛을 막고 그림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이 보이는 것일 뿐. 그림자는 애초에 없고, 빛이 사라지면 주변에 생성됐던 존재들이 사라지면서, 모두 애초의 ‘무’에 해당하는 그림자가 되어버리는 것이잖아.

 그래, 이렇듯, 죽음은 모든 철학과 예술을 전통적인 소재면서도, 실은 우리가 마주치는 가벼운 일상적인 주제고, 동시에 먹이사슬이라는 생태계의 균형요건이고, 보험 업계부터 화환업체까지 수많은 기업의 생명줄이고, 각종 영화의 오락거리이기도 해. 나도 최근 ‘김인희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파 영화를 찍었어. 이런 죽음을 다룬 많고 많은 작품 중에 하필이면 이 작품을 놓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히 해답을 건넬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한 보르헤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걸까. 내가 보기엔 톨스토이는 ‘잘못 산 인생이 편안한 죽음에 장애가 된다’라는 묘한 교훈을 깊게 던져주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 소설이 삶의 노선을 재정비하자는 단순한 계몽극이라고 볼 수는 없어. 그건 어차피 비현실적인 계도일 테니까. 음, 이런 거 아니었을까? ‘메멘토 모리’ (프랑스 수도원의 수도사들 사이에서 한 때 인사로 쓰였던 말인데, 내 데뷔작의 영문 제목이기도 해.)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 이 라틴어를 암송하다 보면, 즉,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떠올리다 보면, 우린 모두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 소설은 이 ‘생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 그 거창하고도 소박한 철학적 소망을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일로 삶을 유예하는 것, 그것은, ‘인생이 무한하다고 믿는 오만함’이거나 혹은 ‘지금 조건으로 다시 한 번 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착각’이라고 속삭여주는 게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난 이 소설에서 다뤄진 죽음의 정의를 ‘마지막 성장=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로 내리고 싶어. 영화 「버킷리스트」의 이 대사처럼 말이야.

      숨을 거두는 순간 두 눈은 감겼지만, 가슴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커피진주, 너도 언젠가 결국 죽는 거니? 상상할 수가 없구나. 100년 전 시골 기차역에서 맞이한 톨스토이의 허망한 죽음은 그가 평생 상상하지 못한 이미지였을 거야. 내가 죽을 땐,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져. 그게 무엇이든, 그 상상하는 방식만 아닌 그 어떤 것일 거라는 불온한 본능 때문일까? 죽은 후 내 자취가 결국 모두에게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허망함, 그 총체적 망각이라는 두 번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무서워. 불안해져. 피가 혼탁해져. 내털리 포트먼 주연의 「블랙 스완」을 보면 알게 돼. 불안이 어떻게 영혼을 잠식하는지. 잠식당한 영혼이 예술혼으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겐 가속화된 육체의 파괴까지 남겨주지. 지난주 자살로 삶을 마감한 배우 故 이은주의 6주기 추모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의 사망자수’를 가르쳐주는 전광판을 봤어. 0명이라는 통계에 한숨이 놓여. 하지만, 통계의 엄격함이 무서워. 하루에 몇 명이 죽는다는 통계상 평균을 맞추려면, 오늘의 0명 탓에 내일은 평균 두 배의 사망자수가 필요하다는 걸 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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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박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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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닐뿐더러 일반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이반 일리치에게 자기 자신은 언제나 아주 특별한, 일반적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그런 존재였다. (…)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지닌 바로 나에게는 죽음이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죽는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처음엔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는 바로 둘째, 분노의 단계로 접어들어. 왜 하필이면 자신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가족, 의사, 신에게까지 뻗치면서 주위를 힘들게 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 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결국 죽음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모욕을 느끼는 거지.    그리고는 셋째, 협상의 단계로 들어서. 자, 이젠 어떻게든 죽음을 미루려고 해. 착하게 돌변하거나, 특별한 헌신을 맹세하거나, 등등 처절하게 발악하는 거지.       “신이여,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어째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나를 이렇게도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파고들면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 스스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을 하며, 또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눈을 감아야 하는 거라면 그땐 정말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향해 절박하게 매달리게 돼.     하지만, 결국 넷째, 우울의 단계로 접어들고, 더는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지 못하게 돼.           “난 내가 조금씩 산에서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랬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산을 오르는 것이었지만, 실은 정확히 그만큼씩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무서운 깨달음이야. 그토록 절박했던 인생의 자취들이, “죽음의 정반대 편에 서서 죽음을 향해 점점 거리를 좁혀왔던 거”에 불과하다니, 극도의 상실감과 우울증은 당연한 도착점이겠지.    마지막으로, 수용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런 깨달음의 순간에는, 주변 사람의 동정 어린 시선마저도 이렇게 진실을 들려줘.       “전에는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일, 즉 자기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문득 떠올랐다. 사회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그가 반대하려고 했던 극히 희미한 마음의 움직임, 그가 항상 곧 몰아내자, 몰아내자고 했던 극히 희미한 마음의 움직임, 오직 그것만이 진짜이며 나머지 것은 모두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직무도, 생활도, 가정도, 사교나 업무의 흥미도, 모두가 가짜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자신을 위해 변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이 변호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취약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변호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그는 그런 것들 중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생활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모두 가짜이며, 삶도 죽음도 덮어 가리고 있는 무섭고 또 거대한 기만이란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생각의 탄생』에 이런 말이 있어. “가장 완벽한 이해는 우리가 ‘자신’이 아니고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 될 때”이다. 그래, 맞아. 죽음의 롤러코스터를 탄 일리치도 자신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죽음 자체를 이해하게 됐을 때야 비로소, ‘헛되게 살아온 삶을 유의미했다고 애써 정당화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삶을 옥죄는 것이었다’라는 통렬한 깨달음을 얻게 돼. 그걸 본 우리는 죽음만이 줄 수 있는 이 선물에 응당 고개를 끄덕이게 돼. 그런데 여기서 하나, 묻게 되는 게 있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죽음’이라는 통과 제의의 심경에 우리가 유독 쉽게 본능적인 직관을 발휘하며 감정이입 되는 비결이 뭘까? 친구의 모습, 외삼촌의 모습, 일리치의 모습 모두가, 그저 잠시 유예된 우리 미래의 한 단면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사실. ‘나는 죽는다’라는 냉정한 비밀 말이야.   『좁은 문』도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결국 이 죽음의 문턱에서야 깨닫는 사랑의 진리를 헤집고 있잖아. 그래서인지 난 『좁은 문』을 읽으면서는 다른 뭣보다 죽음을 놓고 나누는 두 남녀의 사랑 맹세가 인상 깊게 남아. 제롬이 알리사에게 ‘우릴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죽음뿐’이라고 하자, 알리사는 반대로 ‘오히려 죽음이 살아 있는 동안 떨어져 있던 둘을 더 가깝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해.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선이 보이지? 너는 어느 쪽이니? 궁금해. 넌 알리사 같은 금욕주의자는 딱 질색일 거 같아. 왜냐면, 알리사가 빠진 사랑의 환상은 기독교의 신이 배타적으로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목적을 완성하려는 데 있으니까. 죽음마저도 ‘사랑보다 더 소중한 무엇’인가를 향한 자기희생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다니. 이런 자학형 행복추구자에게 말론 브랜도는 삐딱하게 한 마디 던지겠지.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고독한 존재야.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굉장히 바보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알리사의 일기 마지막 문장은 가슴을 사무치게 해.       지금, 빨리,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기 전에 죽고 싶다.        똑같은 고독 속에 죽어갔지만, 일리치는 정반대의 영역에 있었어. 관습의 규율에 크게 어긋남 없이 세속의 모든 욕구를 지당하게 쫓아오다가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소리쳤거든.       무엇 때문에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도대체 왜 저를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를 이다지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겁니까?”        톨스토이가 인생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던 40대 초에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었던 거 알지? 그때 쇼펜하우어에 경도됐었다고 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대작에도 쇼펜하우어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어. 어찌나 염세적인지, 행복한 사람도 슬프게, 또 슬픈 사람이라면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독설 가득한 행복론은 생의 유한성을 막 깨닫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을 거야. 쇼펜하우어는 겁에 질린 사람에게 태연히 이렇게 묻거든.       우리가 죽음으로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는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아. 태어난 후에야 죽음이 존재할 수 있지. 즉, 죽음은 삶의 꽁무니에 태어난 이면일 뿐이고, 결국 원래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돌아가는 회귀일 뿐이라는 거야. 삶이 어차피 고통밖에 없고, 또한 불가능한 만족을 위한 무의미한 노력의 연장일 뿐이라면, 죽음은 환영해야 할 해방으로 반겨야 한다는 거지. 그의 말에 수긍한다면, 생명과 죽음이 맞닿은 형상은 빛과 그림자의 원리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우리 몸에 빛을 비추면 그림자가 생겨. 빛을 거두면 그림자도 상실돼. 하지만, 정말 그림자가 생겼다, 사라진 걸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이 닿는 순간, 몸이 빛을 막고 그림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이 보이는 것일 뿐. 그림자는 애초에 없고, 빛이 사라지면 주변에 생성됐던 존재들이 사라지면서, 모두 애초의 ‘무’에 해당하는 그림자가 되어버리는 것이잖아.  그래, 이렇듯, 죽음은 모든 철학과 예술을 전통적인 소재면서도, 실은 우리가 마주치는 가벼운 일상적인 주제고, 동시에 먹이사슬이라는 생태계의 균형요건이고, 보험 업계부터 화환업체까지 수많은 기업의 생명줄이고, 각종 영화의 오락거리이기도 해. 나도 최근 ‘김인희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파 영화를 찍었어. 이런 죽음을 다룬 많고 많은 작품 중에 하필이면 이 작품을 놓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히 해답을 건넬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한 보르헤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걸까. 내가 보기엔 톨스토이는 ‘잘못 산 인생이 편안한 죽음에 장애가 된다’라는 묘한 교훈을 깊게 던져주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 소설이 삶의 노선을 재정비하자는 단순한 계몽극이라고 볼 수는 없어. 그건 어차피 비현실적인 계도일 테니까. 음, 이런 거 아니었을까? ‘메멘토 모리’ (프랑스 수도원의 수도사들 사이에서 한 때 인사로 쓰였던 말인데, 내 데뷔작의 영문 제목이기도 해.)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 이 라틴어를 암송하다 보면, 즉,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떠올리다 보면, 우린 모두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 소설은 이 ‘생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 그 거창하고도 소박한 철학적 소망을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일로 삶을 유예하는 것, 그것은, ‘인생이 무한하다고 믿는 오만함’이거나 혹은 ‘지금 조건으로 다시 한 번 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착각’이라고 속삭여주는 게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난 이 소설에서 다뤄진 죽음의 정의를 ‘마지막 성장=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로 내리고 싶어. 영화 「버킷리스트」의 이 대사처럼 말이야.       숨을 거두는 순간 두 눈은 감겼지만, 가슴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커피진주, 너도 언젠가 결국 죽는 거니? 상상할 수가 없구나. 100년 전 시골 기차역에서 맞이한 톨스토이의 허망한 죽음은 그가 평생 상상하지 못한 이미지였을 거야. 내가 죽을 땐,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져. 그게 무엇이든, 그 상상하는 방식만 아닌 그 어떤 것일 거라는 불온한 본능 때문일까? 죽은 후 내 자취가 결국 모두에게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허망함, 그 총체적 망각이라는 두 번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무서워. 불안해져. 피가 혼탁해져. 내털리 포트먼 주연의 「블랙 스완」을 보면 알게 돼. 불안이 어떻게 영혼을 잠식하는지. 잠식당한 영혼이 예술혼으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겐 가속화된 육체의 파괴까지 남겨주지. 지난주 자살로 삶을 마감한 배우 故 이은주의 6주기 추모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의 사망자수’를 가르쳐주는 전광판을 봤어. 0명이라는 통계에 한숨이 놓여. 하지만, 통계의 엄격함이 무서워. 하루에 몇 명이 죽는다는 통계상 평균을 맞추려면, 오늘의 0명 탓에 내일은 평균 두 배의 사망자수가 필요하다는 걸 뜻하니까. --------------------------------------------------------------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박은정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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