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다
민규동(영화감독)
안녕, 나의 커피진주.
조용히 네게 속삭이기 시작한 지 벌써 2주가 지났구나. 그 사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가 지병으로 죽었고, 또 병약하고 가난했던 한 영화인이 세상을 떴고, 또 압제에 맞선 수백 명의 죽음을 승화시킨 이집트의 혁명 소식이 전해졌어. 하루하루가 한 개인의 역사가 정점을 맞이하고 있고, 세계사도 못지않게 클라이맥스 챕터를 기록하고 있어. 신의 프리즘으로 지금 이 지구 상 인생들의 빛들을 분해해 본다면, 어떤 인간에겐 맑은 피 한 방울이 시급하고, 어떤 이는 밥 한 숟갈과 김치 한 점에 만족하고, 또 어떤 이는 마지막 자유의 공기 한 모금 가쁘게 들이마시며 뜨거운 불꽃 속에 산화하고 있겠지. 미시와 거시를 오가는 이 숨 막히는 싸움 속에서 어쩌면 또 많은 이들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을 거야. 그것이야말로 당장 목숨을 내놓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확신한 채 말이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절박하지 않은 순간이 있을까. 스스로 목숨을 놓는 순간조차도 살아야 할 이유를 절박하게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오늘 얘기하려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속에도 그런 사적으로 빛나는 역사적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남자가 등장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남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젊은 날의 특별한 기억을 털어놓는데, 그 기억 속엔 압도적으로 매력적인 여인 지나이다가 등장하고, 그 주변엔 절대복종하는 여러 남자들이 있어. 카리스마 넘치는 지나이다는 그 남자들을 맘껏 조롱하지만, 의문의 한 남자에겐 헌신과 희생의 모습을 보이는데, 그 의문의 사내가 실은 그토록 냉정하고 엄격했던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에 빠져 ‘사랑'과 '열정'의 의미를 되묻게 돼.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방에 살고 있는 내 영혼은 너무도 격렬하게, 작은 맥박 소리에도 마음을 털어놓고 부들부들 떨었다. _ 단테.
갈라를 처음 본 순간,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운명의 여인, 필생의 여인임을 확신했다. _달리.
여느 아티스트들의 기본적인 포트폴리오처럼 투르게네프도 강렬한 첫 경험의 인상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해.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첫사랑은 꼭 ‘첫눈에 반한다’는 우연과의 한판 전쟁을 치른 후에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처럼. 어때, 넌? 너도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니?
문득 너에게 반했던 그 순간이 떠올라. 벚꽃이 마구 흩날리던 봄날, 산기슭 오솔길 사이로 한 여인을 봤는데, 소설 『태백산맥』 한 권을 옆에 끼고, 긴 머리 바람결에 흐트러뜨리며, 사뿐한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고 있더라. 오징어 다리 한 가닥 질근거리며, ‘몸에 열이 많아서 옷을 얇게 입어야만 해…….’라고 투덜대는 듯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블라디미르처럼 이런 한 문장이 떠올랐었어.
“뭐든지 줄 수 있다…….”
그리곤 속으로 이런 결심을 했어. 저 난데없는 여인을 앞으로 두 번 더 보게 된다면, 그땐 말을 건네리라. 우연이 운명으로 화학적 변이를 거치려면 ‘최소한 세 번의 반복은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으니까. 그렇게 운명을 확인해 왔었으니까. 기다리기로 했어.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나쁜 사상을 몰래 공부하는 지하 동아리 연합 합숙에서 믿기 어렵게도 너랑 세 번째 조우를 하게 됐어. 그런 시공간에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너의 등장에 깜짝 놀란 난, 초점이며 후각, 청각, 주파수, 초능력까지 모든 감각을 밤새 너에게 집중했었어. 뭘까, 도대체 저 여인은. 왜 나의 영역에서 자꾸 맞닿을까……. 어찌어찌하여 그날 새벽, 우린 북한산 중턱 어느 바위에 둘만 나란히 앉아 있게 됐어. 새벽까지 깨어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북한산 정상을 올랐다가 길이 엇갈리고 우리만 남은 거지. 그래, 너는 내 운명!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사이에 “내게 정말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가 나타나기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꼈어. “이렇게 나는 그녀 앞에 앉아 있다. 나는 그녀와 알게 되었다……. 행복하다, 세상에, 이런!” 정말 블라디미르처럼 “내 안의 피는 늘 방황했고, 심장은 달콤하면서도 간지럽게” 죄어들었으니까. 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넘칠 듯 꽉 찬 우물처럼,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거라는 예감이 “내 마지막 피 한 방울에까지 스며 혈관을 따라 흘러들었다”라고 기억해. 넌 결국 “그 아름다운 손가락이 내 이마도 건드려주기만 한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소년을 송두리째 함락해 버렸어. 지나이다가 블라디미르에게 그랬듯.
이런 현상을 두고 어떤 학자는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같은 화학 물질이 신경 중추인 편도핵을 자극해서이다, 혹은 DNA에 잠재적인 감정 지수가 예민하게 내장된 본능적인 유전인자의 속성 때문에 이성을 압도한 ‘감정의 이성 납치 현상’에 걸려든 것이라고 우기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마법을 그저 생물학적인 반응으로 폄하해서, 우린 어떤 위로를 받게 될까? 신화를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속마음이 뭘까. 실제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부족하고 또 경험이 부재한 자들의 질투 아닐까?
나는 가만히 앉아서 주의를 둘러보고 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그 어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 넘쳐흐른다. 그 속에는 우수도, 환희도, 미래에 대한 예감도, 희망도, 삶의 공포도, 그 밖에도 온갖 것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이런 것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내 마음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어떤 것에도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혹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이름, 즉 지나이다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너도 예상할 수 있듯, 이 소설에서 내 이목을 끈 사람은 단연, 지나이다야. 아킬레스건을 가진 팜므 파탈이지. 지고한 여성, 부서질 듯 파멸로 이끌려가며, 현명하면서도 생기 있는, 우스우면서도 비극적인, 자유로우면서도 고고한 충동적 욕망을 끝까지 좇는 여성상이야. 문득 누가 생각나네……. 너, 커피진주.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여자야.
나는 내가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하는 그런 남자를 사랑할 수 없어요. 내게는 나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하고 맞닥뜨릴 것 같지는 않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죠! 난 누구의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이런 무서운 여자에게 반한다면 누구든 이런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걸요.” 이렇듯 야심만만한 지나이다는 뭇 남성 숭배자들 사이에서 끝까지 여왕의 자세를 지키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소년의 아버지 앞에선 한낱 여자로 전락해. “그래요. 나는 꼭 가겠어요. 내가 그분에게로 가려고 하면 어떠한 힘도 나를 막을 수는 없지요. 나는 그분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그분과 함께 정원의 어둠 속으로,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분수의 물소리 그늘 아래로 자취를 감추고 말 거에요…….” 멋지지? 원한다면 진정으로 욕망의 포로가 되는데 주저함이 없는 여자야. 내 스타일! 그래 그런 틈바구니조차 없는 여자라면 여행하는 새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이름 없는 돌부처만 못한 존재일 테니까.
“나는 한 작품만을 만족스럽게 되풀이해 읽곤 한다. 그것은 『첫사랑』이다. 『첫사랑』에는 어떤 가식도 없으며 오직 사실만 그려져 있어서, 다시 읽을 때마다 여러 인물이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는 이렇게 강조했어. 실제로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는 기병 장교였는데도, 도박에 방탕한 생활로 파산하는 바람에, 못생기고 포악한 여섯 살 연상의 부유한 지주와 결혼해. 돈을 노리고 한 결혼이니 당연히 부부 싸움이 끝없이 이어졌지. 어쩌면 불행한 결혼 생활이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를 더욱 추하고 모난 여자로 만들었을 거 같아. 그런 과거사 탓인지, 작가의 주장대로라면 자신은 ‘여성성이 가득한’ 남성이고, 사랑에 의한 ‘존재의 채움’을 경험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해. 또 ‘매 번의 사랑이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폭풍우나 회오리바람 같고, 그 회오리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믿었어. 음…… 이쯤이면 귀엽다고까지 할 만한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투르게네프가 결혼은커녕, 평생 짝사랑의 고통만 겪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야.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져. 반추해 보면 감추고 싶은 과거일 수도 있는데, 투르게네프가 굳이 이 소설을 그렇게까지 아껴 자전이라고 널리 알린 이유가 뭘까.
지금 떠오르는 소설이 있는데, 너도 봤을 거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라고. 그 작가는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작품 세계를 정의하면서, 자기 작품도 ‘소설’이라고 안 부르고 ‘진실한 이야기’라고 불렀어. 그래서인지 그 소설을 읽을 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게 돼. 상상력과 리얼리티의 경계는 읽는 자의 경험치에 따라 삼투되는 방식이 달라지는 거잖아. 투르게네프도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상실과 그로 인한 평생의 결핍에 너무 힘드니까,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을 제발 껴안아 달라고 독자에게 위안을 구했던 게 아닐까. 여자에 대한 불신과 배신을 통해 「흡혈귀」 같은 작품을 그렸던 뭉크처럼 말이야. 이쯤 되면 그토록 소심한 투르게네프에겐 “사람들은 내가 여자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생각해봐야 할 것 중 그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죠?”라고 되묻던 로댕의 뻔뻔함을 선물하고 싶어져.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보면,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지독한 자린고비였던 아버지 덕에 돈에 대한 제대로 생각을 갖추지 못한 채 성장하고, 훗날 어떻게 평생 돈과 얽혀 헉헉대며 살았는지를 알게 돼. 어린 시절 기이한 첫사랑을 경험했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살아간 투르게네프도 그에 빗대어 『투르게네프, 사랑을 위해 펜을 들다』라고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서문에 이렇게 쓸 수 있겠지. “나는 그런 심정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생애에 한 번도 그런 감정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는 자신을 불행하게 여겼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사랑이 베르테르만큼 원숙하고 헌신적이지는 않지만, 나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추억에 빠져들게 돼. 그리고는 노곤해진 마음 위로 같은 제목의 괴테의 시가 떠올라.
첫사랑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의 그때를.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시절의
다만 한 토막이라도.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버린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의 그 즐거운 때를.
어때?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너도 기억하고 있니? 아직 네 얘길 들어보질 못했어. 언젠가 꼭 들려주길 바라. 네가 나의 첫사랑을 묻는다면, 잠시 주저하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순간이 있어. 일곱 살 때, 빨간 내복을 입고 강가에서 잡은 새끼 가물치의 화형식을 지켜보며 울먹이던 은심이. 그리고 다음 초등학교 시절, 여름이면 속옷 없이 흰 블라우스만 입고 단추 하나를 풀어놓고 다니던 노처녀 담임선생님. 또 텅 빈 복도에 외나무 학다리처럼 서서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순식간에 날 매혹시켰지만, 결국 털북숭이 야구부 친구를 좋아했던 말라깽이 소녀. 그리고 끊임없이 집 앞을 헤매며 뭐라도 훔쳐보려 애썼던 F단지 147호의 새침데기 반 친구. 고교 시절 내내 사제를 꿈꾸며 신학대학으로 가더니 목사 오빠랑 순식간에 결혼해 버린 소울 메이트 꺽다리. 반에서 밥을 가장 오랫동안 먹던 재수학원의 식탐녀. 전경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구해달라고 전화를 해 밤새 을지로역을 헤매게 했던 신입생 후배. 불타는 탱고를 함께 소화해낼 수 있었던 유연한 허리 소유자였던 내 공연팀 멤버. 종아리가 열무 같았던 탓에 열무김치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작가 지망생 등등.
난 내 이십 대 초까지 펼쳐진 첫사랑의 프롤로그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얘기할 수 있어. 왜냐고? 어떤 영화엔 이런 낙서가 나와. ‘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다.’ 맞아. 사랑도 진화를 한다고 믿는 난, 내 생애 최초의 사랑이 첫사랑이 아니라, 내가 그 상대에게 열정을 품는 순간, 헌신의 각오를 하는 순간, 그리고 자기희생조차도 감미로워지는 순간, 그 대상과 겪는 첫 번째 사랑이 첫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 처음 시작된 사랑이 시간이 지나도 퇴화하지 않고 끝없이 성장을 거듭할 때, 그리고 매 번의 도약 때마다 돌이켜보는 그 사랑의 실체가 오로지 진심이었음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때, 그제야 첫사랑은 하나의 신화가 되고, 영원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거니까.
내 아들아, 여인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라…….
하지만, 아버지가 죽음 직전에 블라디미르에게 남긴 이 잠언처럼, 그래 어쩌면 이 소설은 결국 성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기. 그것을 달콤하게만 상상하는 것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겠어.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라는 영화가 떠올라. 그 영화는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위로 화염병이 서서히 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돼. 그리고는 이런 내레이션이 흐른단다.
마천루에서 떨어진 남자의 이야기를 아니? 한 층 한 층 떨어지면서 자신에게 타일렀대.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하고. 그런데 중요한 건 어떻게 떨어지느냐가 아냐. 중요한 건 착륙이야.
맞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순수했던 시절을 가르며 성인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추락하는 게 아니라 착륙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발을 딛느냐가 중요한 거야. ‘뇌우에 맞긴 했지만 아주 멀리서 일어난 것이어서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겪는 사랑이 무엇인지 느낄 새도 없었지만, 첫사랑, 그것이 끝나는 순간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제대로 깨물어볼 수 있다면, 그래서 정상적인 삶으로의 귀환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다음도 버티어 낸다면, 두 번째 사랑, 세 번째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결국, 삶은 강렬한 순간들 속에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지속되는 시간 속에 있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할게. 블라디미르의 첫사랑은 지나이다고, 지나이다의 첫사랑은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아버지에게도 첫사랑이었을까? 책을 덮으면서 나는 그게 문득 궁금해졌어. 단언컨대, 이 소설을 두 번 읽는다면 재미가 남다를 수 있어. 하지만, 그땐 이렇게 약속을 해야 해. 블라디미르가 쓴 첫사랑을 읽는 게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쓴 첫사랑을 읽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을 남다르게 즐길 수 있고 투르게네프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버전이라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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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이반 투르게네프 / 최진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