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뉴 이어! <크리스마스 캐럴> 마지막 이야기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이제 곧 한 해가 가네. 올해는 어땠니? 이런 생각할 겨를 없이 바쁜 거니? 언제나처럼 조금 슬프게 조금 썰렁하게 조금 유머러스하게 자학 유머를 구사할 거니? 쓸쓸한 미소와 함께.
난 며칠 전에 엄마랑 통화했던 걸 자꾸자꾸 생각하게 돼. 우리 엄마가 계신 농장엔 펑펑 함박눈이 내렸다고 해. 우리 엄마는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구제역이 염려되어서 농장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는대. 펑펑 쏟아지는 눈 한 번 보고 소 눈망울 한 번 보고 특히 임신해서 배가 볼록한 소 한 번 보고 일주일 전에 태어난 송아지 한 번 보고 나면 이 세상에 아직도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야. 그리고 소들은 엄청난 덕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거지. 나는 엄마가 눈을 실어 나르는 공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상상이 되었어.
‘뱃속에 아기가 들어있단 걸 잊지 마세요.’
소들이 엄청난 덕성의 소유자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죽어야 할 이유까지는 모르겠지? 나는 농장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우리 엄마와 아빠가 소들의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 쌍의 슬픈 천하대장군같이 느껴졌어. 눈은 어디서 떨어 지는 걸까? 하늘에 올라간 소의 눈망울에서? 지상의 우리는 그 눈을 맞으며 삶을 계속하겠지. 앙드레 지드 자서전의 제목이 갑자기 생각나네. ‘과일이 죽지 않으면 홀로 남는다’ 이 눈은 오늘 밤 내게 어떤 말을 걸고 있는 걸까?
그러나 우선 우리는 이제 『크리스마스 캐럴』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구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 영감은 유령의 옷자락인줄 알고 붙잡고 늘어진 것이 침대 기둥이었단 걸 알자 크게 기뻐하지. ‘오! 악몽이었어!’라거나 ‘오! 개꿈이었어!’라고 하지 않았어. 그는 지금껏 살면서 저질러온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가장 기뻐해.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날은 꿈이었고 꿈에서 깨어난 바로 이 순간부터 꿈속의 엄중 경고를 잊지 않고 살기로 맘먹은 사람처럼 말이야. 스크루지의 기쁨은 나에게 도 고스란히 전해져. 내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지. ‘내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있어!’ 이런 외침이 귀에서 쟁쟁 울리는 것 같아서 나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져. 스크루지는 살아 있는 동안 남에게 많은 선물을 베푸는 사람이었고 두 번 다시 유령을 만나진 못했어. 누구든 스크루지로 불리기를! 그것이 찰스 디킨스가 우리에게 주는 크리스마스의 축복이었어. 그런데 너 혹시 스크루지의 유령들이 너무 교훈적이고 유머 감각이 떨어져 서 좀 심심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니? 하지만 스크루지의 유령은 우주가 계속되는 한 결코 변함없는 진리를 우직하게 말하고 있어. 살아 있는 한 우린 다른 사람의 영혼에 선하게 개입해서 같이 모험을 떠나야 한다는 것 말이야.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나는 자꾸 한 가지 고민을 하긴 해.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라고 해도 자신의 다짐이 현실과 만나는 수많은 날 내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 마음속 최초의 환희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점 말이야. 이를테면 스크루지가 사기꾼이나 끝없이 다른 사람의 선의를 이용이나 하려 드는 정치인들을 만났다고 상상해 봐. 그는 기껏해야 속여 먹기 쉬운 사람 정도로 취급되어 오히려 누군가의 탐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서 몹시 상심한 다음에 다시 예전의 스크루지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난 이 고민에 관한 한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에 감정이입해. 레빈은 난 도대체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태어났나 끝없이 고민하는 사람이야. 소설의 마지막에서 레빈은 한 농부와 이야기 하다가 영혼을 가진 농부에 대해 듣게 돼. 그때 그는 문득 큰 깨달음을 얻어. 그리고 그는 선(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해. 만약 선이 원인을 갖는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다. 만약 선이 결과를, 보수를 바란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선은 원인과 결과의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해.
(레빈을 세계에 대해 좀 더 고민하는 참여적이자 철학적인 스크루지라고 상상하고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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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전체의 행복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민중 전체의 행복에 다다르려면 그저 각자에게 제시되어 있는 선의 법칙을 엄격하게 이행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만은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갈등 없이 현실과 만나진 못해. 그것을 레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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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감정은 내가 공상했던 것처럼 나를 변화시키지도, 행복하게 만들지도, 갑자기 밝게 해주지도 않았다. 꼭 내 아들에 대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경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신 앙인지 신앙이 아닌지 뭐가 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이 감정은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 어느 틈에 내 영혼 속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든든하게 뿌리를 박아버린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역시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논 쟁을 하기도 하고 부적절할 때에 내 사상을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내 영혼의 지극히 거룩한 곳과 남들의 영혼 사이에는, 심지어 아내의 영혼과도 장벽은 쌓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야 내 삶은, 내 온 삶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 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나는 그 감정을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에필로그에 썼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에필로그를 쓸 때의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에 부끄러워도 인용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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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브로흐는 우리 일생을 닫힌 고리, 그리고 완성을 향한 무한한 노정이라고 표현했다. 닫힌 고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을 향해 나가는 그 길 사이에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하는 우리 의 마음이 하나의 동경으로,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시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은총의 예감도 은총이라고 했다. 은총의 예감도 은총이라면, 세계가 두 번 진행될 수 있다는 예감도 세계를 두 번 진행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지금보다 고귀한 어떤 다른 차원의 삶을 그리워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그 그리움이 삶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꿈꾸는 동안에도 여전히 똑같은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 맘속의 어느 부분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가치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마음의 근원을 이룰 것이다.
동쪽별! 스크루지 영감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은총을 받았을까? 나는 그가 무척 부럽고 그의 이야기를 잊고 싶지 않아. 우리 모두가 함께 믿고 기뻐할 만한 이야기로 영원히 기억할 거야. 만약 이런 이야기들을 믿는 마음이 우리에게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슬픈 이야기에 따라서만 살려고 들 거야. 그리고 동시에 레빈의 이야기도 잊고 싶지 않아. 떨면서 가장 멀리 날아가려고 한밤중에 세상 위를 나는 새들의 이야기로 말이야.
그런데 너 이런 비유 들어봤니? ‘가능성의 밤에서 현실성의 낮으로 옮겨가는 존재.’ 이 표현이야말로 새로운 인간이 세상 속에 탄생되어 가는 과정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 주지 않니?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책상 뒤편 하늘에도 눈이 내려. 난 이 눈을 올 한 해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한 경고이자 새로운 지혜의 눈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지금은 깊고 고요한 가능성의 밤이구나! 혹시 은총은 아니더라도 은총의 예감이 밀려들고 있지 않니? 해피 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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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찰스 디킨스 / 이은정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