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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냄새

 

  동쪽별과 커피진주의 책읽기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지난주 아주 추운 밤에 촬영 중이었다고 들었어. 네가 영화를 준비하고 찍는 동안 네 자신이 영화 만드는 기계가 아니란 걸 잊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이 있을까,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상상해 봤어. 어쩌면 너는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네가 인간임을 숨기려고 애쓰는 쪽일 수도 있을까? 난 요새 편집실에 많이 앉아 있어. 그런데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가끔 모니터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나를 발견해. 엄밀히 말하면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한 인간의 음성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게 맞겠지만 더 따지고 들면 그것도 틀린 것 같아. 어쩌면 말로 표현되지 못한 것. 들리지 않는 것에 말을 걸고 있다는 쪽이 더 맞는 것 같아.나는 사람들이 잃어버리려고 말하는 건지 되찾으려고 말하는 건지 가끔 궁금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빠른 톤의 말, 높은 톤의 말. 느린 톤의 말, 낮은 톤의 말, 그것들이 병원 환자용 모니터의 심장 박동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져. 뭔가 움직인다는 건 날 늘 안심시켜. 주파수, 신호들. 이런 것들이 날 안심시켜. 모니터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헛된 움직임은 없는 것만 같이 느껴지고, 또 모든 움직임은 단 하나의 욕망, 즉 살아 있으려는, 존재하려는 공통된 욕망을 표현하는 것같이도 느껴져. 가끔 편집실에서 모니터의 파동들을 지그시 눌러봐. 내 손가락 끝에서 파동들은 명멸하면서 파르르 약하게 떨려. 그러면 누군가에게 손가락 하나 대는 일도 엄청난 무게로 다가와. 

  그런데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둘이나 남았으니까 서둘러야겠지. 우리 뚱뚱보 험프티 덤프티는 허리인지 목덜미인지에 벨트인지 넥타이인지를 매고 있지. 당연히 앨리스는 그게 넥타이인지 벨트인지 나처럼 아리송해하지. 그래서 자상하고 친절하고 다소 뻐기기 좋아하는 험프티 덤프티는 이렇게 설명하지.
   
“넥타이란다. 얘야. 하얀 왕과 하얀 여왕이 선물한 건데
안생일 선물로 주신 거란다.”
앨리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뭐라고요?”
“난 화 안 났는데..”
“제 말은요. 안생일 선물이 뭔가요?”
“당연히 생일이 아닌 날에 주는 선물이지.”
“전 생일 선물을 제일 좋아해요.”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구나. 1년에 며칠이 있지?”
“물론 365일이 있죠.”
“그리고 생일이 며칠이나 있지?”
“하루요.”
“365일 중에 하나를 고르고 나면 며칠이 남지?”
“364일이 남죠.”
험프티 덤프티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종이에 써서 보는 게 낫겠다”
앨리스는 공책을 꺼내면서 슬그머니 미소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계산을 했다

                       365
                          1
                      -------
                        364
험프티 덤프티는 공책을 받아들더니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대로 한 것 같은데.”
그가 입을 열었다
“거꾸로 들고 계시잖아요.”
앨리스가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아 그렇군……. 그러니까 계산할 걸 보면 안생일 선물을 받을 날은 364일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엉뚱한 것으로 치자면 험프티 덤프티가 그 옛날의 너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지.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어린 시절의 이데아 같은 것이 엿보여서일까? 그렇다기 보다는 이 장면은 나에겐 생일과 선물 각각의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아. 오늘은 생일에 대해서만 말할게. 우리는 생일이라 하면 일 년 중 단 하루만을 생각해. 그렇지만 우린 다른 생일도 상상해 볼 수 있어. 『이웃』이란 책에 나오는 이런 문장을 너에게 말해 주고 싶어
    
“자연적인 출생일은 개별성의 운명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 날이다. 왜냐하면 보편성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 그것을 바탕으로 특수한 것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이날은 어둠속에 감춰져 있다. 자기의 출생일은 인격의 출생일과 동일하지 않다. 자기뿐 아니라 성격 또한 그 자신의 출생일이 있다. 어느 날 그것은 무장한 인간처럼 인간을 급습하여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성취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세계의 한 파편. 심지어 그의 고유한 의식 이전의 존재이다.”(『이웃』 중에서)

  우리의 인격, 성격에도 출생일이 있다는 생각 혹시 해본 적 있니? 도저히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날이 너에겐 있니? 깨달음의 파도가 널 덮친 날이 있니? 새로 태어난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니? 그런 식으로 너에게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제2의 생일 아침, 그런 빛이 있니? 괴테는 여행자로서 로마에 처음 들어가던 날을 제2의 생일이라고 명명했어. 제2의 생일이란 제2의 탄생, 즉 재탄생을 의미하는 거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은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이고 절박한 이야기 같아. 나는 인간과 책의 공통점을 궁금해하듯이 인간과 기계,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어쩌면 기계에게는 ‘안생일’이 없을지도 몰라. 한번 태어난 기계에게 남은 운명은 재탄생이 아니라 마모됨와 수리됨, 처리됨뿐일지도 몰라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몇 개의 제2의 생일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가끔 눈을 꼭 감고 제2의 생일들을 과거의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해 보곤 해. 제2의 생일들과 그날의 이야기들은 해가 갈수록 선명해져. 그리고 그때마다 “음! 시작은 나쁘지 않았군.”이란 기쁨과 함께 내 인생(내가 편의상 운명 내지 운명적이라고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해서)은 나에게도 많은 것이 달려 있다는 꽤 대단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돼, 그리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과 맘속 깊은 곳의 자유 같은 걸 느껴.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한 바퀴 같이 도는 것같이 느껴진다고도 할 수 있어. 그러고 나서 눈을 뜨고 나면 뭔가 시작해 볼 결심 같은 것도 하게 되곤 했어. 일 년 364일 안생일 선물을 받으려는 험프티 덤프티의 이 황당함은 ‘의지’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어느 날  아침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려는 의지 말이야. 해산을 마친 어머니의 고통과 기쁨과 함께 다른 고통과 기쁨도 느끼려는 의지 말이야. 

  그런데 생일날 자기 자신에게 최고의 선물을 준 사람을 하나 알고 있는데 짧게라도 소개해도 되지? 까뮈의 스승이기도 했던 장 그르니에야. 그 사람은 자신의 생일날 자신에게 바캉스를 줘. 그때의 바캉스는 휴가의 바캉스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일체의 행동이나 생각, 의사의 교환, 오락, 유흥 들을 하지 않는 완전한 무, 중단된 시간을 말하는 거야. 장 그르니에는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몽롱한 몽상의 시간이라고도 하고  공백의 시간이라고도 말해. 그런데 그는 왜 생일을 그렇게 보내고 싶어 했던 걸까? 그에겐 이런 일이 있었어. 그는 생일날 알제의 바다를 보려고 아랍인들 동네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어. 날씨가 나쁜데도 그는 엄청난 정적을 느꼈어. 마치 우리가 오늘 같은 함박눈 속에서 정적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건지도 몰라. 그는 그냥 걸어갔어. 그런데 그건 무를 향한 발걸음이 아닌걸 알게 되었어. 왜냐하면 눈앞에 보이는 장밋빛과 흰빛의 바둑판무늬 같은 아랍인들 마을, 중학교의 직사각형 교사들, 군데군데 쪽빛으로 짙어지는 푸른 바다가 장 그르니에를 저희들의 존재에 참여시켜 준다고 느꼈던 거야. 의지가지 없는 존재들끼리 서로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처럼. 그래서 장그르니에는 그때의 감정을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절대적 통일을 실감했다’고 말해. 장그르니에의 이 문장을 읽어보렴.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히 공백 상태는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이 있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삶을 얻어서 나에게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지 않는 일이다.” (『섬』 중에서)

  그런 생일을 보내고 장 그르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자신’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게 돼. 나는 장 그르니에야말로 매해 자신의 생일을 재탄생의 날, 제2의 생일로 만들었을 거라고 믿어. 아침 꽃을 저녁 꽃과 만나게 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기분이었겠지?

  내가 널 실망시킬 때마다 ‘무상으로 얻은 내 삶을 내 사소한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지 않기 위해’ 란 말을 나에게 또박또박 들려줘. 나는 다시 삶과 가까워질 거야. 다시 인간과 가까워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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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롤 지음, 존 테니억 그림, 이소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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