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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썅마이리딩-천의 얼글

 

 

페이스북 페이지 ‘자유주의 – Liberalism’는 왜곡된 정보와 편향된 주장이 난무하는 세상을 비춰주는 자유주의의 등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중립적인 사실을 그럴듯하게 전달한다.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보기 좋게 포장한 글을 보면 페이지 관리자 혹은 게시물을 만드는 필자의 지적 수준이 의심된다. 논리력이 결여된 내용을 들먹이면서 자유의 가치를 표방한다. 자유주의의 의미를 페이스북 페이지 게시물로 이해하려는 아이들이 있을까 봐 우려스럽다. ‘자유주의’ 페이지 게시물들은 사진과 짤막한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려운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한 파워포인트 발표용 자료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이슈를 깊이 이해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날로 먹듯이 공부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간단한 이념이 아니다. 이런 간결한 근거 자료를 사람들은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근거 자료를 비판하는 정제된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사회문제를 편향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자유주의’ 페이지는 자신의 주장이 유리하도록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견강부회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주에 ‘<진격의 거인>의 정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본 적이 있다. 이 게시물은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의 글을 토대로 만들었다. 한 위원은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을 예로 들면서 감성에 휩쓸리는 무지한 대중을 저격했다. 그러면서 거인을 ‘반이성 집단주의’로 비유하여 자유를 위해 이성을 지키려는 합리적 개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그림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거인』 그리고 『잠든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줄여서 ‘잠든 이성’이라고 하겠다)를 소개하면서 고야를 계몽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만화 속 거인을 무조건 이성을 거부하는 무지한 대중 또는 이를 몽매하게 만드는 여론으로 비유한 것을 적절하지 않다. 거인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합리적 인간’이라면 주인공 엘렌 예거가 거인으로 변신하는 줄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엘렌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가득한 캐릭터다. 그가 자유를 위협하는 거인을 조종하는 힘을 가진 상황은 역설적이다. 나는 <진격의 거인>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게시물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지 못했다면 만화 줄거리를 그럴듯하게 끼워 넣은 한 위원의 주장에 수긍할 뻔했다.

 

한 위원의 글에 비판받을 대목이 또 하나 있다. 한 위원은 만화에 나오는 거인의 디자인을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에서 기원했으며 사투르누스를 ‘무지한 시간’으로 해석했다. 또 고야를 학살과 폭력의 광기에 맞서는 자유주의자라고 치켜세웠다. 고야의 거인 그림만 봐도 우리는 만화 <진격의 거인>이 저절로 연상된다. 그러나 이 유명한 거인 그림이 고야가 그리지 않은 것으로 판명났다. 2009년에 『거인』을 소장하고 있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은 『거인』을 그린 화가를 고야가 아닌 그의 조수 어센시오 훌리아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거인』은 에스파냐를 호시탐탐 노렸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혹은 에스파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체제 권력으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명확하게 통일된 해석은 나오지 않았다. 에스파냐를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해석도 있다.

 

 

 

 

 

 

 

 

 

 

 

 

 

 

 

 

 

『잠든 이성』은 흔히 이성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진리의 침묵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성의 힘이 상실된 무지한 몽매의 경고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해석은 고야의 의도와 상반된다. 『잠든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는 판화집 《변덕》의 49번째 작품이다. 책상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사나이 뒤쪽에 부엉이와 박쥐가 날아든다. 그림 왼편에 보면 책상에 앉아서 펜을 쥔 부엉이 한 마리가 있다. 전통적으로 부엉이는 부정적인 동물로 전해내려 왔다. 어둠, 꿈, 어리석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부엉이가 무조건 흉조로만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로마 신화에서 부엉이는 지혜의 신 미네르바(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테네)와 함께 다니는 신성한 새로 여겼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과 함께 나타난다’라고 언급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완전히 밤이 되기 전에 이미 어둠의 도래를 확실히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미래의 예측은 정확해진다. 밤은 이성이 잠에 취하는 무지한 시간이면서도 예술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의 시간이다. 고야가 활동했던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자들은 꿈을 이성의 반대라고 생각했지만, 고야는 꿈과 이성의 조화를 통한 예술을 강조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했지만, 한편으로는 공상에 대한 동경을 강하게 느꼈던 낭만주의자였다. 고야는 『잠든 이성』 밑에 그림을 독자에게 설명하는 의미심장한 문장을 써넣었다. ‘상상이 이성과 만나면 예술의 어머니가 된다.’ 이 문장은 고야가 낭만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린다. 이성이 잠들면 공상은 인간의 악마적 본능, 삶의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광기로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고야의 부엉이는 낭만적인 황혼 위를 날다가 감성이 메마른 척박한 땅으로 내려와 잠든 사나이를 깨우려고 한다. 사나이가 일어나면 예술적 영감을 알려줄 것이다. 

 

고야의 그림 속에는 온통 괴물과 광기, 참혹과 전율로 가득하다. 그의 그림은 감상자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고야는 세상의 추악성을 화폭에 그대로 담아 폭로했다. 그래서 고야를 정치와 사회문제에 관해서 비판정신이 투철한 화가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고야의 예술을 아울러 본다고 할 수 없다. 청력이 상실한 만년의 고야가 그린 그림에는 살육, 광기, 마법 같은 어두운 주제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추악하고 끔찍한 세상의 진실을 너무나도 가까이 봤던 탓일까. 고야는 누구보다 먼저 무지한 몽매에서 깨어났지만, 그의 눈은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원초적 광기가 자세히 들여다볼 정도로 너무나도 예민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고야를 ‘슬픔의 끝까지 알았던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 고야가 자신의 그림이 정치색으로 덧칠되어서 제멋대로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슬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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