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서 만난 직장 상사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여성이었다.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고 업무 수완도 좋았던 그녀는 출산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었다. 박봉을 받으며 아이 돌보는 사람을 쓰느니 직접 아이를 돌보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두 번째 직장에서 만난 직장 상사도 여성이었다. 그녀는 리더십이 뛰어나고 일처리가 시원시원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른 직장으로 옮기라고 충고했다. 지금 직장은 여성 직원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고위직에 기용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어렸을 때는 사람들 앞에서 다소곳하게 행동해야 한다거나 밤늦게까지 밖에서 나돌지 말고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웠다면, 이제는 취업이나 승진, 경력 관리 같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한스럽다. 협동조합 롤링다이스가 기획 및 주최한 대담을 엮은 책 <여성의 일, 새로고침>에는 나처럼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사는 문제로 고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의 고민을 듣는 역할은 곽정은, 김희경, 김현정, 장영화, 은수미가 맡았다.
"취업에 계속 실패할 때, 그리고 이혼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죠. 누워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니까 죽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던 어느 순간, 책장이 보이더라고요. 저기 있는 책만 다 읽고 죽어도 더 나은 사람으로 죽는 것이지 생각했고, 내가 가진 환멸의 에너지를 가지고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곽정은)
지금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이들에게도 힘든 시간은 있었다. 작가 곽정은은 자기보다 학점이 낮고 스펙도 부족한 친구들이 오직 남성이라는 이유로 취업이 잘 되는 것을 보며 한국 사회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죄라면 당장이라도 죽어버리자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를 붙든 건 다름 아닌 책이었다. 저 책들만 다 읽고 죽어도 더 나은 사람으로 죽는 것이라는 생각에 죽음 대신 책을 택했고, 그 결과 글로 밥벌이하는 프리랜서 작가가 되었다.
18년간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고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한 김희경은 오랫동안 '명예 남성'이었다고 고백한다. 명예 남성이란 '나는 여성이지만, 일반 여성들과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여성을 지칭한다. 남성의 방식을 익히려고 애쓰면서 흔히 여성적 속성이라고 일컫는 약한 것이나 부드러운 것을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사의 여성 후배가 국회의원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희롱을 당한 일을 용감하게 고백한 후배를 보며 그는 자신도 과거에 성희롱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일이 있었는데도 참고 넘어간 것이 부끄러웠다. 남성 위주의 조직과 명예 남성이 되기 위해 애썼던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은 결국 그를 조직으로부터 떠나게 만들었고, NGO와 작가라는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CBS PD이자 앵커인 김현정은 <김현정의 뉴스쇼>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첫 여성 앵커의 길을 열었다. 그는 방송국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의 PD와 앵커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를 모두 해내고 있다. 겉보기엔 영락없는 슈퍼우먼인데 정작 그는 '내려놓기'가 비결이라고 말한다. 일과 가정을 양립하면서 완벽하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다. '어린' 혹은 '여자'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내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지 말고 대신 뒤에서 칼을 갈라고 조언한다. 상대에 대한 환멸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교육 스타트업 OEC의 대표 장영화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즐거움에 대해, 19대 국회의원 은수미는 여성 문제를 넘어 청년, 비정규직, 장애인, 자영업자, 이주민 등 이 사회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이들과 연대하는 길에 대해 소개한다. 세상에 대한 환멸, 삶이 주는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에너지로 바꾼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감동적이다. 나는 5년 후, 10년 후에 여성 후배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