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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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1 정용준

정용준을 읽어 보고 싶어 읽고 있다. 첫 인상은 하나 하나 힘들게 썼겠구나. 밤에 쓰는구나. 약간 어설프면서도 더듬대는 것 같으면서도 그런데 그게 어떤 정서가 있구나. 고민이 많았겠구나. 아주 조금 몇 프로 부족한 것 같은데. 그런데도 뭐 또 그냥 그런대로 읽는 맛은 있다. 나중에 나온 건 조금 더 매끈해졌으리라는 확신은 없다. 반복되는 기시감은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싫으면서도 좋으면서도 불편하면서도 편하다.
다 읽고 난 소감은 세상에 개 같은 아버지 결국 죽어갈 아버지는 왜 이리 많고 그 아래 망가진 자식은 또 왜 이리 많고 이미 다 써 버린 소설은 왜 또 많고 그런데 또 그렇게 잘 쓰면 어떡하냐. 몇 가지는 김기덕 영화 같은 걸 보는 것 같았고 그런데 이쪽이 훨씬 더 착한 사람이 쓴 것 같았다. 시 하나는 발췌 귀찮아 하는 내가 베끼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용준 팬 될 것 같다. 하하하.

미드윈터
어제 죽은 나는 어딘가에 도착해 눈을 떴다. 이곳이 천국인가 지옥인가. 삶에 대한 확신과 연구가 부족했던 나는 내 영혼이 어떻게 해석될지 알 수 없어 이곳을 판단할 수 없다. 나는 걷는다. 집 근처를 산책하는 사람처럼 걷는다. 낯선 역에 도착한 여행자처럼 걷는다. 오랜 투병으로 지친 병자처럼 걷는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도시에 영원히 지지 않는 태양이 떠오른다. 도시는 멸망의 기운을 내뿜으며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몰락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녹는 건물과 크고 작은 거리들. 나는 오늘 죽는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혹은 자신감 있게 도시를 걷는다. 도시는 비어 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도망갔거나 모두 죽었으리라.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경계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에는 마녀가 앙상한 팔을 휘저으며 새처럼 날아다니고 있다. 언덕에 십자가처럼 서서 도시를 바라보는 하얀 곰들. 어느새 나는 아주 작은 아이처럼 작게 녹아 울면서 걷고 있다. 빈 집의 깨끗한 창문 너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태양이 지지 않아 이토록 환한 낮에 내 얼굴을 양초처럼 모두 녹아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는 둥근 바위가 된다. 눈 없는 얼굴로 울면 온몸은 눈물로 채워지네. 빗물이 고인 오래된 수조처럼 오늘 죽은 자들은 영원하고 아름다워. 한낮. 한밤. 그리고 춥고 어두운 한겨울에.

474번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미드윈터. 오늘 죽는 사람처럼
개들
이국의 소년
안부
내려
새들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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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3-22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에 정용준의 <정릉 산책>을 읽고 좋았거든요. 그래서 단편집을 하나 손에 들었는데 그 책에 실린 첫 작품이 <떠떠떠, 떠>였어요. 그거 읽고 정말 폭풍오열을 하였드랬구요. 그래서 정용준에 대한 호감과 선망이 극에 치달아 있었는데 그게 다른 단편들과 장편들을 통해 차근차근 식어왔다는.....-_ㅠ

반유행열반인 2019-03-22 10:02   좋아요 0 | URL
선릉 산책인데 정릉 산책이라 하니까 뭔가 연작 같잖아요ㅋㅋㅋㅋㅋ제가 읽은 소설집이 비교적 근작이던데 그 전 것들은 식게 하는군요...제대로 빠지면 역순으로 읽으며 ‘그렇지 그렇지 점점 나아졌구만!’하고(작년에 장강명 전작 보며 그랬고) 반대의 경우엔 근작을 읽을 수록 ‘갔네 갔어 한물 갔어...’(이 경우는 작년에 읽은 김영하ㅋㅋ)할 듯 합니다ㅋㅋ 정용준은 아직 모르겠어요.

syo 2019-03-22 10:10   좋아요 1 | URL
선릉이었어??ㅋㅋㅋㅋㅋㅋㅋ
재밌는 거 알려드릴까요?? 심지어<정릉 산책> 저거 검색해본 제목이에요..... 예전에 다른 친구한테 ˝그거 봤어?? <선릉 소풍>? 되게 좋아.....˝ 이랬다가 비웃음을 샀던 적이 있었거든요 ㅋㅋㅋㅋㅋ 그래서 저 댓글 달기 전에 검색을 해봤어요. ‘소풍‘인지 ‘산책‘인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ㅋㅋㅋㅋ 아니 근데 세상에..... 정릉이 구멍이었어??😣

반유행열반인 2019-03-22 10:25   좋아요 0 | URL
제가 예전에 엄마가 시터하며 돌보던 아기와 선릉 산책을 한 적이 있어서 기억했을 뿐이에요ㅋㅋ검색 결과를 작성한 사람은 정릉을 산책했던 분이 아닐지...syo님은 소풍을 가고 싶었던 게 아닐지...제목 지은 용준이가 잘못했네...

반유행열반인 2019-04-11 11:56   좋아요 0 | URL
책꽂이 맨 위칸을 구경하다 계시처럼 어,2011 젊은작가상 책이 있었네,하고 뽑으니 맨 마지막에 어, 떠떠떠,떠 가 있었어요. syo님을 폭풍오열 시킨 소설이라니 읽어야지! 하고 방금 읽고 왔습니다. 엄청 슬프기도 한데 이걸 엄청 스윗한 사랑 얘기잖아, 하고 보는 제 정서는 뭘까요ㅋㅋ 덕분에 잘 읽어서 감사 인사 드려요. (다른 단편 장편 한권씩 중고로 마련해 놨는데 식을까 봐 묵히는 중...뭐 읽죠 ㅠㅠ)

syo 2019-04-14 12:30   좋아요 1 | URL
맞아요 ㅎㅎㅎㅎ 딴엔 또 엄청 스윗한 사랑이야기라서 저도 좋았던 거 같아요 ㅋㅋㅋ 제가 또 그런 취향이라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