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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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5 제임스 설터
제임스 설터의 책은 딱 한 권 봤다. 단편집 ‘어젯 밤’
문장은 눈부시고 시적이었다. 짧은 소설들이지만 장면들이 눈에 선하고 분위기가 와 닿았다. 이야기는 강렬했다. 아, 나의 꾸진 문장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여튼 좋았다.
그런 글을 쓴 사람이 이런 제목으로 책을 냈다면 궁금하다 싶었다. 책 정보도 안 보고 일단 샀다. 

결론은 낚였다. 

다 읽고 난 전체적인 소감은 책으로 만들어진 ‘제임스 설터 카달로그 또는 광고지’를 읽은 기분이다. 

책 날개에서 설터가 2015년 90세에 사망한 것을 처음 알았다. 이 책은 2016년 나왔고 우리나라에선 작년 말에 출판되었다. 
영어 원제는 Art of Fiction인데 밀란 쿤데라 L’art du roman도 생각나고 뭐 이것 저것 갖다 붙인 모양은 비스무레 해 보이지만 밀도도 분량도 한참 멀었다. 
일단 제목에 Fiction을 넣었는데 설터는 픽션이라는 말이 부적절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분명 본문(파리리뷰 인터뷰 부분)에도 나온다. 설터 생전에 낸 책이면 이런 제목 붙이는 걸 좋아했을라나 모르겠다. 그건 그렇다 치고.

2016년에 나온 Art of Fiction은 목차의 ‘소설을 쓰고 싶다면, 장편소설 쓰기, 기교의 문제가 아니에요’까지 실려 있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하면 딱 90여페이지. 
책 등에 ‘제임스 설터 산문’이라고 써 있었는데...그렇지 운문이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닌데, 에세이 같은 것 생각하면 오산이다. 읽고 나서 알았다. 한 챕터가 한 시간 정도 분량의 강연록? 강의록? 여튼 어디에선가 말을 하기 위한 원고임에 틀림 없다. (정작 어디서 어떻게 쓰인 원고인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물론 설터의 이야기는 빛이 나고, 소개해주는 작가들, 소설들, 자신의 쓰는 방식, 자신의 이야기, 다 재미있고 들을만 했다. 뭔가 그렇구나 싶은 부분도 있었다. 전적인 허구가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해 듣자 그렇구만 하고 뭔가 용기가 생겼고, 작가의 일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 거구나 쓰는 건 일도 아니구나 하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작가의 ‘가벼운 나날’과 ‘스포츠와 여가’는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처음 부터 끝까지 줄창 듣다 보면 아, 이거 왠지 진짜로 내 취향일 것 같은데, 오, 에로티즘의 혁신? 외설적이라고 뉴요커가 안 실어줘? 뽐뿌가 팍팍오는 느낌이었다. (그런면에서 두 책을 출간한 한국 출판사는 이 책을 낸 의도-설터 책을...재고를...마구 팔아 치우고 싶습니다…-를 어느 정도 달성했구만 싶었다. 흥!)
가벼운 나날은 원제 Light Years인데. Light Days도 아니고 나날이라 번역하는게 맞나 그냥 혼자 생각...가벼운 시절들? 빛나는 시절? 아마도 last night이 마지막 밤 어젯 밤 중의적인 것 마냥 이것도 그랬겠지… 는 영알못의 역시 혼자 생각...

아, 그런데 언제적 강연용 원고인지 몰라도 예시 드는게 줄창 옛 소설들이다. 어젯 밤(2005년 작인가)은 이 책 통틀어 한 번도 안 나온다! 아 그것도 그렇다 치고...

딱 거기까지면 되는데 굳이 1993년 파리 리뷰의 인터뷰를 덧붙였다. 이건 더더 옛날(저 때 태어난 애들이 이제 스물 여덟 이오.) 글이다. 게다가 작가의 강연 내용하고 자꾸 중복되고 겹친다. 물론 아주 약간 안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나보코프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엄청 까다롭고 엄청 위대한 양반이랑 녹음기도 메모도 없이 인터뷰 하고 술 더 마시자는  것도 뿌리치고 기차역에서 기차 놓쳐가며 기억 나는 내용을 죽어라 적어대는 설터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작가 목소리가 생생하니 역시 여기까지면 되는데 뒤에 40페이지 쯤 존 케이시라는 사람이 ‘나가며’하는 에필로그?같은 걸 붙여 놨는데 이건 뭐 평론도 해설도 아니고 앞에서 본 이야기를 전혀 새로울 것 없이 또 반복한다! 어조나 이런게 뭔 설터 죽고 나서 장례식에서 한 마디 하는 듯 한...내 친구를 기리며 어쩌고 저쩌고 하는 듯한...잘 읽히지도 않는다. 거기다 옮긴이 말까지 하면... 반복도 적당히 해야지. 설터의 깔끔한 소설과 너무 매치 안 되는 책 구성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군더더기들을 주렁주렁 달아 200페이지 넘게 만든 이유는...뭐 책 값을 그만큼 받아야 하니까. 90페이지 내고 책값 딱 반 잘라서 냈으면 충분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돈을 못 버니 그랬겠지...

​그래서 이 책을 거대한 카달로그 내지 광고지라고 한 거다. 마지막으로 뒷 표지 날개에 칼라풀한 설터의 책 표지까지 오밀조밀하게 달아 놨으니. 완벽하다. 

아, ‘가벼운 나날’과 ‘스포츠와 여가’는 꼭 볼 거다. 꼭 중고로 사 볼 거다. 어차피 내가 제 값 주고 사 봐도 그 돈 설터한테 못 간다. 남아 있는 엄한 놈들에게 간다. 설터는 죽었다. 소심한 복수다. 미안해요. 죽은 줄도 모르고 뒤늦게 읽어서. 죽기 전에 만나기엔 아저씨 나이가 너무 많았잖아요. 제가 영미 소설은 너무 몰라서 그랬어요. 

출판사랑 마음에 안 드는 책의 기획 흉은 충분히 봤으니 이제는 제임스 설터가 남긴 좋은 말들(문장들)을 옮겨 봐야겠다. 

닥치고 고쳐 임마+문체, 작가의 목소리.
“그들은 끊임없이 고쳐 씁니다. 바벨, 플로베르,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 말입니다. 그들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고쳐 써야 하는 형벌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쓰려고 했던 것은 그게 아니니까 말이에요. 혹은 쓰려고 했던게 잘못 생각한 것이었으니까요. 또는 고치면 더 좋아질 수 있을 테니까요. 너무 길거나 단조롭거나 요점을 벗어났거나 좀 엉성한 것 같아 보이니까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 작품은 언제나 그들이 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것이 그들의 문체입니다. 그들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니 인생 갈아서 써 임마.
“여러분은 자기 인생의 영웅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 만의 것이고 흔히 첫 번째 소설의 기초가 됩니다. 그 어떤 이야기도 자신의 이야기만큼 잘 쓸 수 있는 것은 없지요.” 사례-필립 로스’굿바이, 콜럼버스’, 볼테르’캉디드’, 시어도어 드라이저’시스터 캐리’

‘가벼운 나날’에 대한 작가의 말
“부부 생활의 닳아 빠진 돌 같은 것...평범한 모든 것, 놀라운 모든 것, 삶을 충만하게 만들거나 쓰라리게 만드는 모든 것...기차에서 보이는 것들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동물들은 죽고 집은 팔리고 아이들은 자라고 심지어 부부도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시가 남아 있습니다.”
처음 제목은 ‘네드라와 비리’

“우리가 글로 쓴 것들은 우리와 함께 늙어가지 않습니다.”

‘올댓이즈’의 처음 제목은 ‘토다’, 그 책의 제사
“모든 건 꿈일 뿐, 글로 기록된 것만이 진짜일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Q.등반과 관련하여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A.”그곳까지 와서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거에요.’난 할 수 없어. 난 이걸 할 수 없다는 걸 알아. 난 틀림없이 이걸 할 수 없어. 그렇지만 해야 해. 난 해야만 한다는 걸 알아.’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죠. 그러나 그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에요.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어쨌든 그 경험은 당신을 어떤 식으로인가 성장시키지요.”
등반에 대해 물었지만 등반에 대해서만 답한 게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 안다. 

Q.글을 쓰고자 하는 궁극적인 충동은?
A.”이 모든게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남아 있는 거라곤 산문과 시, 책, 그리고 글로 기록된 것들뿐이겠죠. 인간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책을 만들어냈어요. 책이 없다면 과거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에요. 우린 이세상에 벌거벗은 채로 있겠죠.” 

쓰지 않은 모든 순간은 사라진다고 한 것도 본 것 같은데 못 찾겠다. 꾀꼬리. 안 써 놨더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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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06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장바구니에서 슬쩍 뺐어요!!

반유행열반인 2019-01-06 01:10   좋아요 1 | URL
어 출판사에서 보낸 자객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요...ㅋㅋㅋ버닝더데이즈였나 자서전도 출간 예정이라던데 그거랑도 많이 겹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