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조엘 디케르는 내가 극찬하는 작가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체를 지닌 탑 5 작가 중 한 명이다. 전작에서는 작가로써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었고, 그 당시에는 한참 리뷰 쓰는 데에 몰두했던 터라 많은 공부가 되었었다. 이번 작품은 소설가가 글을 쓰는 원동력에 대해서 짧게 짧게 나오는데 마침 나 또한 요즘 소설을 쓰고 있어서 참고하며 읽었다. 주인공 직업이 작가로 나오는 작품들은 이래서 좋다. 데뷔작 ‘해리 쿼버트‘에서 나온 주인공이 이번에도 나온다. 그러면 마커스 골드먼도 시리즈인 걸까? 전혀 그런 느낌은 없는데 말이지. 전작은 주인공이 성인 된 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했고, 이번 책은 주인공의 유년시절을 다루고 있다. 알록달록한 표지와는 다르게 골드먼 일가의 몰락이라는 비극적인 내용이었다.


골드먼 일가는 살고 있는 지역명을 따라 큰아버지네 볼티모어 골드먼과, 주인공네 몬트클레어 골드먼, 두 이름으로 불렸다. 주인공은 자기 집보다 잘 사는 큰아버지 집에 늘 붙어살다시피 했다. 큰집 사촌은 학교에서 늘 왕따를 당했었고, 소년원 출신의 우디가 그를 보호해주다가 큰집 볼티모어 골드먼의 가족이 된다. 그리고 두 사촌과 주인공은 세상 절친한 사이가 되어 행복을 만끽한다. 운동 천재인 우디는 훗날 풋볼 선수가 되었고, 두뇌 천재인 사촌은 큰아버지를 따라 변호사의 길로 간다. 잘난 게 없는 주인공은 조금씩 열등감에 젖기 시작한다. 그러다 세 명이 동시에 좋아한 여자를 주인공이 쟁취하면서 이들의 우정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 볼티모어의 가족과 친구들은 한 명 한 명씩 일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와장창 무너지는 꿈과 행복들. 과연 볼티모어 일가에게 닥친 태풍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옛날 유럽의 고전영화 필름을 보는 기분이다. 세피아 필터가 들어간 느낌의 화질 낮은 영상이 눈에 보인다. 전작에서 보여주던 시원시원하고 힘 있는 필력이 아니라, 차분하고 느긋한 문체로 썼더라. 아마도 과거의 회상을 기록하다 보니 천천히 곱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체를 바꾼 게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가독성은 여전히 좋아서 대충 휘리릭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된다. 나도 이렇게 읽기 수월하면서 적당한 템포와 무게를 가진 필력을 배우고 싶다. 이런 사람들은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제외하고 평생 글 쓰도록 만들어야 함. 


골드먼 집안 남정네들은 전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고집이 엄청 센 것. 자신의 능력을 너무 믿는 나머지 남의 조언과 도움은 절대 받으려 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쾅 하고 추락해 버렸다. 둘째는 질투와 시기심. 이것 때문에 모든 평화는 산산조각이 난 건데 재미있는 건, 질투하고 사과하길 여러 번 반복하면서도 지난 일들로 어떠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너 없인 못 살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열등감으로 가득 차서 서로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있는 아이러니함.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긴 세월을 함께 하는 동안 질투심은 차곡차곡 쌓여왔고, 그것을 감춘 채 서로를 대해 오다가 오해들만 쌓였다. 그래서 공든 탑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사춘기가 늦게 오면 이렇게나 무섭다.


마침내 혼자 남은 주인공은 소설가가 되어 지난 일들을 작품으로 만들어내었다. 내가 읽는 책도 그 작품이며, 작품 속에서 탄생한 책도 그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과거의 내용을 기록한 기념비 같은 작품이라 숨 막히는 전개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작품 해설에 나와있듯이 주인공은 작가 본인의 분신과도 같은 캐릭터이다. 그래서 마커스 골드먼을 통해 작가의 생애와 철학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되고 난 이후의 삶에 대한 책들은 많으나, 작가가 되기 이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들은 많지 않은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희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단순 기록을 넘어 하나의 이야기를 창조해내었으니까. 다음 작품은 또 어떤 매력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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