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독서광이 되고자하는 초짜 독서가 (외로운 발바닥 서재) &gt; 독서노트</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category/585306</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길인지...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상엔 온통 모르는 것, 불확실한 것 투성이다.

삶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 독서만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난 책을 읽으려 한다. 몸이 맘을 따라가지 못하지만...</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25 May 2012 17:44:03 +0900</lastBuildDate><image><title>외로운 발바닥</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55720113281463.jpg</url><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category/585306</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외로운 발바닥</description></image><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바늘 - 고등학교 때 문학 공부하던 기억이 되살아나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962728</link><pubDate>Thu, 05 Oct 2006 10: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96272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6619&TPaperId=96272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0/51/coveroff/893643661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nbsp;&nbsp; 최근에는 인문, 사회학 쪽 책들을 많이 읽다보니 솔직히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다. 그나마 가끔 소설을 읽는다 하여도 베스트셀러 위주의 외국소설을 읽다보니 국내소설을 읽을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이름도 생소한 우리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사무실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며칠동안 같이 근무하게 된 김모군 때문이었다. 김군의 외모는 흡사 산적과 흡사하고 어깨는 딱 벌어지고 가슴은 바위처럼 두꺼워 나는 그를 처음 보고 필시 체육과 출신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와 대화를 하던 중 그가 문예창작과 출신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자신이 창작한 단편소설을 보여주었는데, 문학에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글솜씨가 있어 보였다. 적어도 일반인이 쓰는 글과는 달라 보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며칠을 함께 근무하며 소설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소설적인 묘사가 참 뛰어나다면서 그가 문득 내게 추천해준 책이 바로 천운영의 ‘바늘’이었다. 
<BR>
‘바늘’은 9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단편의 느낌은 어느정도 비슷하다. 그 내용은 서로 차이가 있더라도 오랜만에 이런 소설을 접한 내게 작가의 특색 있는 문체가 강하게 인상을 남겨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작가의 문체를 설명하면 이렇다. 비교적 구체적인 서술과 대화가 이어질 때는 별 무리없이 사건의 진행을 좇을 수 있었지만, 별안간 1인칭 화자의 심리서술이 나오면서 실제로 어떠한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혹은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화자 혼자만 생각한 것인지 애매하여 이해하기가 난해하게 되어 버린다. 또한 무언가 작가가 어떤 대상에(예컨대 바늘, 또는 숨 등)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무언가 잘 쓴 소설이라는 것은 느낌이 오는데(특히 직접 체험해 보고 쓴 듯한 이색적인 직업세계의 사실적인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막연히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어서 학창시절에 문학공부를 하면서 참고서에서 해설을 찾아 공부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BR>
각종 상을 수상한 역량 있는 작가의 소설집이니 소설이 이상해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고 내가 그런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할 수 없다는 뜻인데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되어 조금은 씁슬한 생각이 들었다. ^^;; 어쩌면 학창시절 이후 10여년간 벌써 머리가 문학과는 동떨어진 빡빡한 현실세계에 맞추어 굳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서평을 쓰려다가 결국은 소설이 난해하여 이해가 잘 안되었다는 넋두리가 되어 버렸다...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0/51/cover150/893643661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6619</link></image></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분단시대의 피고들 (1) - 한 진보주의자의 시련과 열망</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915087</link><pubDate>Sat, 15 Jul 2006 12: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915087</guid><description><![CDATA[6.25 전쟁 시기에 부모를 잃은 나는, 전쟁 후 너나 할 것 없이 몹시도 가난했던 그 시절에, 한참 먹성좋은 소년기를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게 보냈다. 부모를 잃은 외로움이나 무서움보다는 굶주림 때문에 더 외롭고 무서웠다. 오직 한번 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 중의 소원이었다. 남의 집살이,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의 급사, 고아원생활, 부잣집 가정교사 등등 해보지 않은 짓이 없이 살면서도 푼돈이 모이면 책을 샀고 밤이면 전기불이 켜져 있는 공동변소에 가서 냄새를 이기며 책을 읽곤 했다. 학교 급사시절 심부름을 다닐 때에는 길을 걸으며 책을 읽다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p136)
실제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소위 가난에 대한 '참무리'와 독서에 대한 열정이 느껴진다. 한편으로 지금 내가 정말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음에도 열심히 독서하고 있지 않다는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감옥의 죄수들에게도 저 야만적인 삼청교육대에서와 같은 '순화교육'을 시켰다. '교육'은 언제나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의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게양대에 오른 국기를 향해 일제히 차려 자세로 오른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낭송하게 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p140)
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충성'이라는 문구와 군대에서의 경례구호가 동시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해왔던 이 의식의 본질이 - 이 의식의 긍정적 기능이 일부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는 하지만 - 군국주의적 의식의 고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국가'가 '내 나라'로 여겨지고 '국익'이라는 말이 '내 나라의 이익'으로 되려면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첫째, 이른바 국익이 나와 내 가족의 안전과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사익과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둘재, 국가의 구성 및 운영 원리가 '민주주의, 정의, 복지, 평화'등 삶의 기본적 가치와 이념 또는 철학에 부합해야 하며, 셋째, 그 국가가 표방, 선전하는 문화 가치가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고유한 문화전통 및 생활정서를 존중하고 함양하는 것이어야 한다.(p141)
이 글을 쓴 필자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참 타당한 기준을 제시한 것 같다. 한미 FTA는 위 기준에 비추어 '내 나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한번 생각해 본다...]]></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문명의 공존</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862950</link><pubDate>Sat, 22 Apr 2006 13: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862950</guid><description><![CDATA[끔찍하기 짝이 없는 단순 이론가들의 피비린내나는 행태들과 비교하면 강대국 미국이 이제까지 취해온 태도는 분명 존경받을 만하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호의적이고 책임감 있게 약소국을 대해온 맹주는 세계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미국의 정치에 대해 아무리 비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점만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니교'는 미국의 정치 문명과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nbsp; 미국의 국부들은 의식적으로 미국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완고한 유럽, 종교 탄압과 내전으로 갈가리 찢긴 왕정 유럽과는 정반대되는 사회, 악의 세계 한가운데 들어선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설정했다. 정착민 대 원주민, 북부 대 남부, 자유로운 미국 대 보수적인 제국주의 권력 등 미국사의 중요한 단계마다 '우리 대 그들'의 도식은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력을 기울여 독일 황제와 싸우고 나니, 악마의 자식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 다음 상대로 떠올랐다. 미국민들은 이런 경험을 치르며 세계 지도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선'을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역사적 과제라고 믿게 되었다. (p33)
비록 최근 미국의 행태에 상당히 비판적인 나이지만, 과거 제국과 비교하면 미국이 상대적으로 점잖다는 저자의 지적은 새로우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리부동한 미국에게 실망을 넘어서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미국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일까?
세계 모든 종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성스러운 말이 언어로 전승되고 있으며 영원한 유효성과 보편성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성스러운 말은 그 시대에 엄격히 한정된 상세한 서술과 고도의 일반성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다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래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근본주의적 시도는 비극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다. 이 '본래성'은 예언자가 살고 활동했던 문명적, 사회적 맥락에서 밝혀질 수밖에 없다. 언어의 의미론은 언제나 역사적 배경과 묶여 있다. 의미는 동시대인들의 삶의 세계로부터 풀려날 수 없으며 수백 년 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운반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삶의 세계는 이미 흘러가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재구성은 모두가 불완전하다. 합리적인 논리를 근거로 여러 개의 해석들 가운데 사나에게 많은 점수를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관철은 오로지 신학 외적 수단, 다시 말해서 권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는 폭력적인 분열, 경찰력과 군사력에 의한 신자와 성직자의 분열이 이미 내재해 있다. (p195)
나는 포용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들, 그들이 추종하는 **주의에 대하여 강한&nbsp;거부감을&nbsp;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이 남에게 강요하는 교리 또는 사상이 수천년 전 예언자가 전한 말에 대한 누군가의 주관적 해석이라면 정말 무언가 주객이 한참이나 전도된 느낌이다. 물론 내가 비종교인이라서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천년이 된 텍스트의 문구에 지나치게 얽매인 해석과 그런 사상의 강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첨단을 걷는 현대에도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당연히 포함되지만...)]]></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나의 해방전후</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848683</link><pubDate>Thu, 30 Mar 2006 20: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848683</guid><description><![CDATA[창씨개명의 진실 
본래 성씨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심한 일을 두고 애국심의 발로라고 하는 것은 반듯한 지적은 아닐 것이다. 본래의 성씨에 대한 각별한 집착은 어디까지나 가문에의 집착이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의 성씨와는 무관한 일본식 성으로 고쳤다고 해서 그 집안을 친일 가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윤(尹)씨도 아니면서 '이토'로 한다든가 해서 완전히 일본식으로 고친 사례도 많았다. 또 창씨를 끝까지 거부했다고 해서 그 집안을 반일 가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친일 행위는 친일 행위대로 부족없이 이행하고 본래의 성씨를 고수한 사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창씨 문제가 당사자의 친일 성향이나 반일 성향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짐작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문제의 실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정보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순진한 학생이 윤동주 가문의 창씨를 알고 크게 실망하는 것은 당대 상황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p15)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학생들에게 대혁명이 시작된 날 파리 시민이 습격하였던 바스티유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은 대충 얼마나 되리라 생각하느냐고 묻는 상상력 놀이를 시험한 적이 있다....10만명, 5만명, 3만명에서 5천명에 이르는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답변의 공통점은 숫자를 매우 올려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1789년 파리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는데 바스티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은 40명의 스위스 용병과 80명의 퇴역병뿐이었고 감옥안에 수용되어 있는 죄수는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루이16세의 전제정치, 프랑스 대혁명, 분노한 파리 시민들의 공격 등이 상상력에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크고 벅차고 엄청난 것이다. 따라서 감옥도 죄수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막연히 추측하게 된다. 그래야 대혁명에 어울리는 규모가 되는 셈이다. 상상력이란 이렇게 기성적인 관념에 의해서 규정되고 예단되게 마련이다. (p17,18쪽)]]></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전쟁 - 한국전쟁의 기원</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90355</link><pubDate>Tue, 27 Dec 2005 00: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90355</guid><description><![CDATA[&nbsp;
내적 기원론 - 식민지 시기와 해방 직후 한반도 내에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난립하면서 좌우익이 대리한 것이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주장. 38선 이나은 우익을 대표하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장악하고 그 이북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장악했다는 상황에 비추어 한국전쟁은 우익과 좌익 사이의 전쟁이고, 그 기원은 식민지 시기 이후로 진행되어온 정치적 갈등과 대립에서 찾아야 한다고 함.(p51) 
<BR>
but ① 정치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은 어느 사회에나,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것이며 정치적 갈등과 충돌은 사회 불안이나 혼란을 조성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정책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면도 큼. ② 당시 정치세력들 사이에는 갈등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공통분모 - 당시 각 정치세력의 정강 등을 살펴보면 경제정책 등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우익에서도 사회주의적 강령이 많이 나왔음.) 좌익, 우익의 구분이 항상 고정적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음. ex) 조소앙, 이극로 같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비록 납북되기는 하였지만 북한에서 활동을 하였음. - 가 존재함. 
<BR>
외적기원론 
1. 전통적 해석 -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주의적 정책이 한국전쟁의 원인임. 한국전쟁을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꾀하고 있던 스탈린의 지시로 중국의 마오쩌둥과 북한의 김일성이 모의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봄. 이 논리는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소련에서 찾는 것으로 이어짐. 
<BR>
2. 수정주의 -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등장한 견해. 미국이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사회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세계를 수호하는 것이라는 관점의 전통적 해석을 비판하며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하에 제3세계 국가 등에 개입하여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관점에서 미국의 대외정책과 국제정치를 분석하는 입장. 수정주의는 비밀이 해제된 미정부 문서에 의하여 상당한 근거를 지님. 
<BR>
ex)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은 미국인 희생자를 줄이고 조기에 전쟁을 끝내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략 때문이었고(p64), 일본이 패망하기 전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미국의 제안으로 38선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분단이 이루어 진 것임. 
<BR>
but 수정주의는 제3세계 국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미국의 대외정책 및 국제정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한계를 지님. 중심부세계와 주변부세계를 도식적으로 구별한 것도 문제이고 주변부세계 자체의 주체적 동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 
<BR>
3. 외인론비판 
가. 오스트리아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패전국으로서 미국과 소련에게 공동점령 되었음. 그렇지만 국민의 자벌적 의지에 의해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신탁통치 기간 동안 통합된 국민적 힘을 유지하여 독립을 성취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음. 오스트리아는 1955년 영세 중립을 전제로 점령군이 철수하였고, 이후 냉전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다.(p78) 
<BR>
나. 베트남은 중국의 주변국가로서 프랑스의 식민지배(95년간)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무척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극복했다! 
<BR>
다. 검토 
오스트리아와 베트남, 그리고 한국을 비교할 때 남는 문제는 결국 내적인 요인일 수밖에 없다.(p78) 결론적으로 외세(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은 분단과 전쟁의 필요조건이었고, 내부에 그에 호응하는 세력 또는 힘이 충분조건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남베트남 군부는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인 동조가 없는 외부적인 지원에만 의존하는 정부였기 때문에 결국 몰락했다.) 
<BR>
오스트리아와 베트남과의 비교는 신선했다. 가장 최근에 통일을 이룩한 독일과 오만의 예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분명히 일제침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외부적 요인이 없었더라면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전면전의 발발은 없었겠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적대적 공범자들 (2); 책속에서..</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84592</link><pubDate>Wed, 14 Dec 2005 22: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84592</guid><description><![CDATA[&nbsp; 
기억의 정치학 - '사면은 좋으나, 망각은 거부한다.‘; 아담 미흐니크 
사실상 대중 독재의 과거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문제는 사법적 차원에서 죄의 유무를 추궁하는 문제를 넘어서, 그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죄의식과 수치심을 뼈아프게 자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의 정치성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드러냄의 대상이다.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하는 방식을 넘어, 과거를 드러내 살아 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때 비로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p242) 
<BR>
이등 국민과 비국민(p64) 
세습적 희생자 의식과 결합된 이 일등 국민의 지위에 대한 회한과 욕망은, 이등 국민인 자신이 만주와 동남아의 비국민에게 가한 ‘새끼 식민주의 sub-colonialism'적 억압에는 눈을 감고, 식민주의의 다층적 억압 구조를 일본인(일등 국민) 대 조선인(이등 국민)의 구도로 환원시키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 구도에서 비국민에 대한 이등 국민의 억압과 차별, 그리고 이등 국민이 일등 국민이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잠재적 식민주의에 대한 고려의 여지는 별로 없다.... 
<BR>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해방 직후 식민주의의 청산 논리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식민주의와 결탁한 소수의 친일파를 가해자로 규정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신생 ‘국민’은 식민주의의 피해자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한줌 친일파의 인적 숙청을 통해 식민주의가 청산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적지 않은 수의 식민지 조선인들이 가졌던 제국과 근ㄴ대에 대한 선망과 동경, 그리고 일등 국민이 되고픈 사회적 욕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닌가 한다. 
<BR>
고구려사 논쟁과 시대착오주의(p106) 
고구려사 귀속을 둘러싼 한중간 논쟁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대착오적이고 비역사적인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건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중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요. 있었던 것은 그저 고구려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2000년 전에 존재했던 고구려에 (근대 동아시아의 경우) 20세기에서야 등장한 근대 국민 국가라는 개념을 그대로 투영시켜 버리는 것이 지금의 논쟁 구도인데, 이건 시대착오입니다. 
<BR>
민족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개념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우리는 하나’라는 구성원 간의 동질감을 그 전제로 하는데, 신분제/반상제가 존재했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과연 그게 형성될 수 있었을까요?...임진왜란 때 오희문이 남긴 기록 중에 ‘쇄미록’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 보면 이런 한탄이 나옵니다.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저 아랫것들이 의병 모이라면 하나도 안 모이고, 일본군 환영해서 걱정이라는 것이지요. 그때 일본군 점령 정책이 동네마다 쌀 나눠주고 먹을 것 나눠주는 것이었거든요...(자신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착취나 하는 양반들이 물러가고, 갑자기 쌀 나눠주겠다는 놈이 들어온 건데 굳이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민족이 쳐들어올 때마다 관민이 일치단결해서 싸웠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서울의 궁성을 불태운 건 노비들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요. 이런 것들이 지킬 것이 있는 집단과 지킬 것이 없는 집단의 차이입니다.(p110) 
<BR>
적대적 공범관계 
-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민족주의 또는 빈 라덴과 부시가 서로 대립하는 것과 같은 외양을 띠면서도 사실은 서로의 존재에 의해 자신의 힘과 권위를 강화시키는 공범관계에 있다는 주장. 부시가 빈 라덴을 제거하려면 할수록 이슬람에서의 반미주의는 강화되고 이는 빈 라덴의 힘을 강화시켜 준다. 반대로 빈 라덴이 테러로 미국을 위협할수록 테러에 대한 전쟁을 주축으로 한 부시의 정책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BR>
민족혁명(p234) 
대중 독재의 체제적 성공과 효율성은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동원이 전제될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민족 공동체의 정치에 대한 국민적 참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보장한 ‘국민 주권’ 개념은 대중 독재 프로젝트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동원을 이끌어내는 사상적 기제였다....물론 이는 주권 독재가 대중 참여 민주주의를 현실로 보장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 참여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은 ‘대문자 현실’이 아니라 ‘인식된 현실’ 혹은 ‘사회적으로 해석된 현실’의 영역에서였다. 인민 주권론이 대중에게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민족 공동체에 소속되어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통해서였다...인간의 실천을 유도하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된 현실’이기 때문이다.(p235)...민족주의는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믿음이나 가치들을 구조화하고 위계를 만드는 대중 독재의 ‘메타 신앙’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한 배반감과 기대에 못 미치는 일상적 삶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불평, 불만에도 불구하고, 민족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유지되는 한, 체제에 대한 일반적 동의 수준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p237) 
<BR>
민중 없는 민중 사학(p294) 
민중 역사학이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올바른 결합이야말로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관건적 문제라고 파악하는 한, 그래서 민중의 내적 역동성을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변증법이라는 추상적 담론 속에 가두는 한, 그것은 민중 없는 민중 역사학으로 남을 위험성이 컸다.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맹목적 믿음,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변증법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추구, 해방의 거대 담론에 대한 집착 등은 사실상 역사적 행위자로서의 민중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엄격히 말하면, ‘민중을 위한 역사’는 있었지만 ‘민중의 역사’는 없었던 것이다. 이때 무엇이 민중을 위한 역사인가를 결정하고 보장하는 것은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변증법에 대한 과학적 이해였다. 과학적 인식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구성주의의 시각이 설 땅을 잃어버린다. 때때로 선험적 도식성과 경직된 획일주의가 논의와 해석의 다양성을 덮어버린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적대적 공범자들 (1); 개념정리</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84588</link><pubDate>Wed, 14 Dec 2005 21: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84588</guid><description><![CDATA[&nbsp;
대중의 국민화(p140) 
- 국가와 사회의 이분론의 전제에서 국가권력이 일반 대중을 국가권력의 통치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지원 및 참여하도록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것. 전쟁이나, 스포츠 경기를 통해 일반 대중이 국민으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되고 이것이 국가권력의 통치를 용이하게 한다. 국사도 대표적 도구이며 여기에서 국사의 태생적 한계가 도출된다. 
<BR>
열린 민족주의(p158) 
- 인종주의와 대비하여 다양한 계층, 인종, 종교를 포섭하는 것을 인정하는 민족주의. 그러나 열린 민족주의 역시 이런 다양한 집단을 포섭하여 ‘민족’이라는 카테고리의 하위에 위치시키고 민족개념은 결국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국가권력의 통치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하는 도구개념이라는 점에서 닫힌 민족주의 또는 인종주의와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BR>
집합적 유죄/ 세습적 희생자의식 
- 역사적 사실에서 가해민족 또는 국가, 그리고 그 국민을 집합적으로 유죄로 낙인찍고 그와 대비하여 가해자에 협조한 일부 배신자(친일파등)을 제외한 나머지 피해민족 또는 국가, 그리고 그 국민들을 희생자로 보는 것. 그리고 이러한 희생자의식이 대를 이어 세습되어 가해자 대 희생자의 구도로 인식하는 것. 이러한 집합적 유죄, 그리고 그와 연결된 세습적 희생자 의식은 희생자적인 측면의 일방적인 강조로 희생자가 가해자의 측면도 가질 수 있다는 복합적인 이해를 가로막는다. 
<BR>
기억의 정치학 
- 과거의 역사적 경험들을 사법적으로 단죄하기 보다는 이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널리 알려 과거의 역사적 과오들을 반성적 성찰의 기억으로 간직하는 것.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에서 사면을 전제로 가해자들의 진술을 받은 것이 한 예. 
]]></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9)-2; 함흥차사는 없다/ 조선최초의 반란</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9741</link><pubDate>Mon, 18 Jul 2005 18: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9741</guid><description><![CDATA[함흥차사는 없다(p 146~)
태조 이성계가 아들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쟁탈전에 회의를 느끼고 함흥으로 가서 태종이 보내는 사자를 활로 쏘아죽였다는 함흥차사 이야기는 유명하다.&nbsp;속담으로도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함흥차사는 뒷사람들이 무자비한 태종 이방원의 행동을 풍자하느라&nbsp;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성계는 사자들을 죽이지 않았으며&nbsp;함흥차사로 죽었다는 벼슬아치들은 그 뒤에도 조정에서 계속 활동하였다고 한다.&nbsp;<BR>&nbsp;<BR>조선 최초의 반란(p 143~)
태종대에 동북면을 중심으로 강비의 외가붙이인 조사의가 군사를 동원하고 함흥 주변의 여러 고을을 위협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반란군의 수는 7천을 헤아렸으며 여진의 우량하이의 군사까지 합하면 1만명이 넘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조정의 중앙군은 초기에는 반란군에게 밀렸으나 반란군에게 사로잡힌 김천우가 중앙군의 숫자를 4만명으로 불려 말하는 바람에 이에 겁을 먹은 반란군은 우왕좌왕하다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놀라운 점은 저자에 따르면 이 조선왕조 최초의 반란에 태상왕 이성계가 동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태상왕의 종적을 보면 그가 반란군을 따라다닌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태상왕의 행재소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그가 반란군에 동조한 사실도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새로운 왕조를 연&nbsp;태조 이성계가 &nbsp;자식들 간의 서로 죽이는 권력쟁탈전을 보고 오히려 반란군에 동조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닌지...]]></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9)-1; 홍무제의 변덕과 조선의 굴종</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9731</link><pubDate>Mon, 18 Jul 2005 17: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9731</guid><description><![CDATA[홍무제의 변덕과 조선의 굴종
明의 홍무제는 재위 30년 동안 나라의 기반을 다지면서 무수한 살육을 저지르고 신생 조선을 온갖 위협과 변덕로 못살게 굴었고, 조선은 이에 대해 비굴할 정도로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다하면서 굽실거렸다.
홍무제는 걸핏하면 조선이 명나라를 업신여긴다고 하며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위협하였고, 조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공물을 요구하고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위의 이유를 들어 조선을 힐난하였다.
그런 황제에 걸맞게 명나라 사신의 오만불손함도 하늘을 찌를 듯해서 어떤 사신은 조선에서 마련해준 옷을 술에 취한 채 갈기갈기 찢어 짓밟고 ' 이따위 너절한 옷을 입고 황제를 뵙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겠다.'며 제 목을 칼로 찌르려는 추태를 부린 경우도 있었다.(p 90)
조선은 명나라의 요구로 10개월 동안 9,880마리의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p 92)
조선에서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을 억류한 경우도 많았으며(p 98)
예물로 보낸 금안장에 '천(天)'자가 쓰여져 있다는 이유로 조선에 재앙을 내릴 것을 위협하며 말 2만마리(!)를 요구하기도 하였다.(p 99) ...
조선이 역성혁명을 통해 이룩된 왕조라서 중국을 통해 정통성을 확인받고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의도와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 '조선은 배알도 없나?'는 생각만 들며 짜증이 솟아오른다. 그런 모욕과 수탈을 당했으면서도 단지 직접 침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버이로 생각하며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명을 그리워하다니...옛 사람의 사고의 틀에 한계가 있었겠지만, 정말 또라이 같은 짓이 아닌지...
그 덕분에 우리가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과 달리 지금껏 독립된 국가를 이루고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 부분의 역사를 읽으면서 드는 씁슬함은&nbsp;어쩔 수 없는 것 같다. &nbsp;
&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8)-2; 위화도 회군</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6565</link><pubDate>Mon, 11 Jul 2005 23: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6565</guid><description><![CDATA[고토수복의 노력과 유익의 귀부
1370년 공민왕은 이성계를 보내 요동에 있는 동녕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성계는 크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지역의 사인테무르가 김백안과 공모하여 동녕부를 근거로 군사를 일으켰다. 고려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사방에 방을 붙여 요동일대가 고려의 땅임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말로만 밝히고 실제로 그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지는 않았는 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다.(p157)
저자는 이에 대해 왜구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지적이라고 반박하고 있으나 유익의 귀부와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는 비판을 같이 하고 있다.
유익의 귀부란 요양성의 행정 책임자인 유익이 고려에 귀부하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아무런 회답이 없어 유익이 관할 지역인 금주, 복주, 개주, 해주 등지를 명나라에 귀부하여 명나라가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지역을 손에 넣게 된 사건을 말한다.(예전에야 국토 개념이 희박했겠지만, 우리 조상들이 조금만 더 땅 욕심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위화도 회군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은근히 추구하였고 마침 명의 홍무제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요동 지역을 지배하려 함에 따라 철령 이북을 명에 내어 줄지 고려의 국토로서 수호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하게 추진하여 이성계를 지휘관으로 삼아 요동정벌에 나서게 했다. 
이성계는 소위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의사를 밝혔다. 즉,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 왜구들이 그 틈을 탈 것이다.
4. 여름비로 활에 입힌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돌 것이다.
는 이유를 들었으나 요동성이 텅텅 비어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쉽게 차지할 수 있다는 등의 좋은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고 '이소역대(以小逆大)'를 처음에 든 것에서부터 이성계의 사대성을 엿볼 수 있다. 이성계 일파는 결국 냇물이 많아 건너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고 위화도에서 의주로 회군하였고 거의 모든 군사를 요동정벌에 동원하였기 때문에 우왕과 최영은 반란을 진압할 수도 없이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은 간통과 놀이를 일삼으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하고 최영은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는 등으로 헐뜯어 기록했다.(헐뜯어도 그 정도밖에 흠잡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최영은 대단한 사람같다.)
명은 요동에 정요위를 두어 고려의 진출을 방해하고 북권과의 교류 통로를 막았다. 게다가 철령위를 세우려 하면서 한마디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참을 두고 군사를 배치하였다. 철령위 지방은 여진 또는 원과 피나는 싸움을 벌여 확보한 고려의 영토였음에도...또한 명은 고려가 도저히 따를 수 없을 정도의 무리한 요구를 많이 했다. 전략적으로도 요동성에 군사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도 해보지 않고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은 우리 역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p224..) 이성계 일파는 이와 같이 사대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진하여 '사이불복(事而不服)'의 외교 전통을 뭉개버렸다. 이러한 사대외교 노선은 조선이 멸망할 때가지 계속되었다.(p225) -0-;;]]></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8)-1; 공민왕의 개혁과 좌절</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6559</link><pubDate>Mon, 11 Jul 2005 22: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6559</guid><description><![CDATA[공민왕의 등장과 개혁의 불길
공민왕은 21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원나라에서 10년간 숙위 생활(볼모로 잡혀 있는 것)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변발에 몽골 옷 차림이었다. 그러나 이연종의 간언으로(사실은 오랜기간 동안의 결심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변발을 풀고 몽골 옷을 벗으며 고려 말기&nbsp;미완의 자주적 개혁의 서막을 알린다.(p31)
공민왕 시대에는 기철, 김용의 반란 등 수많은&nbsp;역모가 있었다.&nbsp;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반역을 겪으면&nbsp;정말 왕노릇 하기 싫겠다는 생각이&nbsp;계속 들 정도였다. 또한 원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간신들이 원의 순제와 그 주변의 환관과 기황후를 충동질하여&nbsp;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추대하게 한 일도 있었다. 원나라에서의 숙위생활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공민왕은 반원, 자주적인 사상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많은 난관과 위기가 있었으나 공민왕은 이를 잘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공민왕은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거절하고 선왕의 시호와 국가의 제사 의식을 원래대로 회복하는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변발을 금지하는 등 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힘썼다. 
구체적 개혁 (p56~)
기철 일당을 제거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단계인 1356년(공민왕 5년)부터 시작되었다.
1. 원나라의 지시에 따라 인사권을 행사하던 정방을 폐지.
2. 권문세가들이 자행한 토지 점탈의 비리를 척결
3. 조세부정 개혁
4. 무당, 부호들의 비리 근절. 홀아비, 과부, 고아 구제.
5. 군사제도 개선. 
신돈의 개혁정치
신돈의 원래 이름은 변조다. 
공민왕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구해주는 꿈을 꾸었는데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데려와 인사시켰는데 그의 용모가 꿈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한 승려와 똑같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공민왕은 신돈을 자주 불러 설법을 들었고 후에는 그를 사부로 삼고 국정을 자문하였다. 공민왕은 기득권의 반발을 우려하여 신돈을 전면에 내세워 개혁을 단행하였다. 당시 조정관료는 기득권을 누려온 권문세가의 자손과 공민왕이 등장시킨 신진과 유생, 대사찰과 연결된 불교세력, 그리고 외침으로 성장한 무장세력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p108) 신돈은 많은 이들의 비판과 견제를 받았으나 공민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수차례 개각을 단행하여 마침내 거의 왕권의 대행자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때 그의 정식 직함은 51자로 김부식이 받은 24자의 직함보다 훨씬 길었다. (p110) 
공민왕은 양민으로서 권문세가의 농노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형인추정도감을 한시적으로 설치하였으나 토지 문제를 도외시 하여 일정한 한계를 지녔다. 후에 형인추정도감은 신돈의 건의로 전민추정도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신돈은 스스로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의 농장의 무분별한 확대, 토지 및 농민 강탈, 부역 대상자의 은닉 등의 문제를 시정하려 하였다. 이 정책의 핵심은 농장에 부당하게 편입된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농장에 소속된 일꾼을 양인으로 환원하여 국가의 부역을 지우겠다는 것이었다.(p115) 
신돈은 또한 신진 유학세력을 등장시키고 과거제를 개선하는 정책도 폈다.(p122) 그리하여 몽골의 침략을 거치는 동안 기능이 거의 마비된 성균관의 건물 복구와 교육 내용의 개선을 맡기도 했다. 
공민왕과 신돈의 허망한 최후
신돈은 여자를 밝히고 급진적인 개혁을 폈기 때문에 정적이 많았고 좋지 않은 소문도 많았다. 그런 일들로 궁지에 몰리자 공민왕을 죽이고 반역을 꾀하려 하였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공민왕에게 잡혀 죽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조작의 냄새가 짙은 역모사건이라 하고 있다. 그 말에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오골계와 백마를 잡아먹고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에서 바로 궁지에 몰렸다고 넘어가는 것은 좀 비약이 심한 것 같다. 많은 사실이 생략되었겠지만 독자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한 이유는 무엇일까?(p128)
1. 신돈의 개혁정책으로 기득권의 상당부분을 상실한 권문세가와 무장세력의 반대를 더이상 억누를 수 없어 신돈을 희생량으로 삼은 것이다.
2. 신돈이 키운 신진 유학자들이 성장하여 공민왕에게 친정체제를 요구하여쓴데 신돈은 신진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성리학적 소양이 없었다.
3. 원나라가 연경에서 쫓겨났고 명나라가 새 제국을 선포하고 중국의 실체로 떠올랐는데 고려는 친명 외교 노선을 추구하였고 신돈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해가 잘 안간다.)
공민왕은 말년(?)에 자제위와 두리속고치를 두어 고위층 자제들 중 미소년을 선발하여 집단으로 남색을 즐기고 소년들을 폭행하고 술주정을 하는 등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공민왕의 폭행과 답답한 생활에 불만을 품은 최만생이라는 자제위 소속의 청년 등에게 살해 당하였다. (참 허망한 죽음이다.)
신돈개혁 정치가 실패로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토지와 노비 정책은 뒷날 전면적인 토지 개혁이 있었을 때 하나의 모델이 되었고, 노비의 대우가 개선되는 결정적인 단초를 열었다. 그는 불승들에게 아련한 신화를 남겨주었고, 민중들의 가슴에 정신적인 주인으로 아로새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은 역사에 막된 인물로만 기록되어 있다.(p128) 신돈은 간음을 즐겨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겉으로만 청렴한 척 한다는 등의 기록이 많고 공민왕도 나쁜 면이 부각되게 기록된 것이 많다. 이는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연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고 상당부분 공감이 간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세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불과 수십년 전의 일, 아니 현재의 일도 지배적 세력의 이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것이 사실처럼 굳어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인데 하물며 수백년 전의 일이야 어떠할까...]]></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귀로의 사색 (2)</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0628</link><pubDate>Wed, 29 Jun 2005 22: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0628</guid><description><![CDATA[교우
오늘은 또 늙어가는 아내 얘기도 나왔다. 
20대 시절의 아내는 애완 동물처럼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했다.
30대에는 아내가 기호식품 같다고나 할까. 하루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40대의 아내는 집 안에 없어서는 안 될 가구 같았다.
50대에 이르면 아내는 가보가 된다.
60대의 아내는 이미 지방 문화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70대에 도달하면 벌써 아내는 국보의 자리에 올라 존경의 대상이 돼 있다.
그러니 국보를 모시고 잘 살아야 한다며 한바탕 웃고 소주 한잔 혀에 깐다.(p206)
학산과 새벽산책
[오늘] - Thomas Carlyle
보라!
푸르른 새날이 밝아 오누나
그대, 생각하여라.
오늘을 어찌 헛되이 보낼 것인가
오늘은 영원에서 태어나 영원 속으로 
밤이면 묻혀 가리라. 
보라!
푸르른 새날이 밝아 오누나
그대, 생각하여라
오늘을 어찌 헛되이 보낼 것인가.(p109)]]></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귀로의 사색 (1)</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64359</link><pubDate>Sat, 23 Apr 2005 21: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64359</guid><description><![CDATA[감나무에 달린 잎새들
문득 파스칼의 명언이 생각난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은 천사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짐승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진작 부끄러운 몸짓의 사람은 내 자신이었던 것을. 위선의 갑옷을 하나하나 벗어 봐야겠다. 더러는 살점이며 피가 묻어 나오리라. 뭣인가에 얽매이고 갇힌 내 자신을 풀어 주고 열어 줘야겠다. 내 심혼 깊숙히 자리한 또 하나의 나에게 내 몫의 삶을 알아보고 본시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p48)
마음의 면류관
보여 주는 것이 어디 겉모습뿐이랴. 그 속에 숨어 있는 섭리의 묘리도 함께 보여 줘서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겸양 없는 권세, 하심 모르는 지위, 나눔 없는 부, 겸손 모르는 학식이 어느 날 갑자기 파멸했을 때 비로서 깨닫고 뉘우치고 통곡하는 개인과 단체와 권력도 많이 봐 왔다.(p63)
토굴가
권좌에 올랐다는 것, 재물을 태산같이 끌어 모았다는 것, 명성을 천하에 드날린다는 것....이것 또한 한고비 넘기고 돌아보면 옷자락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붙잡아 보는 것과 뭣이 다르랴.(p80)
연대암을 찾아서
뛰어난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면 무리들은 그가 존재함을 알 따름입니다[太上 不知有之]. 그보다 못한 지도자이면 무리들은 그를 친근히 여기고 그를 기립니다[其次, 親之譽之]. 그보다 못한 지도자이면 무리들이 그를 두려워합니다[其次, 畏之]. 그보다 못한 지도자이면 무리들이 그를 업신여깁니다&nbsp;[其次, 侮之]. 김거사님께서도 한 집단의 지도자이신데 지금 어느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참 지도자가 되려면 금욕이라는 무서운 칼 한 자루 가슴에 지니고 있어야 됩니다.(p107)
학산 새벽산책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열어 준다.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준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희망을 준다. 즐거운 말 한마디가 용기를 준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된다.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한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싹이 된다.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을 붕괴시킨다.(p112)
&nbsp;
&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7)- 2</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61816</link><pubDate>Tue, 19 Apr 2005 20: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61816</guid><description><![CDATA[삼별초 항쟁의 실체(p103이하)
삼별초는 원래 최이가 조직하였다. 최씨 무신정권 시기에 도둑떼와 농민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최이는 개경 경비를 위해 용사들을 뽑아 야별초를 조직하였다. 치안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자 최이는 야별초를 확대하여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강화도로 조정을 옮기고 몽골과 전쟁을 벌일 때 몽골에 잡혔던 장정들이 강화도로 들어왔는데 최이는 이들로 군대를 조직하여 신의군을 만들었다. 신의군과 좌별초, 우별초를 통틀어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는 선택된 군대로 국가에서 많은 봉급을 주었고 공을 세우면 죄인들의 재산을 나누어받는 등의 특별대우를 받았다. 삼별초는 1980년대의 육군보안사령부와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p104)
삼별초는 대몽항쟁 기간에 수백 명 단위로 출전하여 지방군과 농민군을 이끌고 몽골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으나 삼별초의 주력부대는 강화도에서 무신정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정권의 비호를 받는 이들은 다른 군사들에게 횡포를 부리기 일쑤였으며, 백성들을 침탈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따. 또한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하수인이었으나 주인을 내무는 일에도 동원되어 최이, 김준, 임연, 임유무를 축출할 때 중간 지휘자들은 삼별초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유무를 죽인 뒤 삼별초는 구심점을 잃었고 새로운 무신정권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에게 주어졌던 특권도 사라지게 되었다. 삼별초 지휘관들은 무신정권이 사라진 뒤에 그 하수인 노릇을 한 일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웠고 몽골군에 대항해 싸웠기 때문에 몽골에게도 자신들이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와같은 배경에서 삼별초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조정에서 개경환도를 결정한 뒤 강화도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배중손, 노영희 등은 '오랑캐 군사들이 대거 밀려와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은 구정으로 모이라.'고 선동하였고 이에 속아 모인 사람들을 강제로 강화도에 가두며 강화성을 지키다가 형세를 보고 배 1천 척을 모아 재물과 군사와 가족을 싣고 진도 쪽으로 향하였다.&nbsp; 삼별초군은 진도 일대에서 고을과 성을 점령하여 세력을 떨쳤다.&nbsp; 한때는 창원, 김해, 마산, 동래, 황해, 탐라 등을 석권하기도 하였으나 끝내는 고려와 몽골 연합 토벌군에게 밀려 진도에서 대패하여 위왕인 승화후와 배중손은 죽음을 당하고 김통정은 남은 세력을 이끌고 탐라로 가서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1273년 4월 28일 토벌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김통정이 자결을 함으로써 삼별초는 종말을 고했다. 
삼별초는 몽골에 반감과 원한을 지닌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세력 범위를 넓히고 민중들의 호응도 어느정도 얻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역량으로서는 강력한 몽골에 끝까지 맞설 수 없었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고려의 30년 대몽항쟁이 고려인의 의지와 정신을 드날렸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로 인한 피해는 그에 비례하여 높았고 삼별초의 항쟁도 그와 같았다. 삼별초의 항쟁은 민족 정신사에 남을 뿐 현재적 실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1970년대 군사 독재정권 아래에서 어용학자들은 무신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세력으로 높이 평가하고, 삼별초군의 활동을 국난극복 사례로 꼽았다. 이는 군사 독재 정권의 민족주의적인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역사 조작의 한 예이다. ]]></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7)</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61809</link><pubDate>Tue, 19 Apr 2005 19: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61809</guid><description><![CDATA[왜구에 대한 짧은 변명
'왜구'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 해안 지대와 한반도에 출몰하는 일본인을 해적 개념으로 받아들인 역사 용어이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와 일본 해적의 무리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일본 열도에 통일된 국가가 없어서 개념이 분명치 않았던 것이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대체로 일본과 왜구를 분리하여 기술하였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절이나 국서 등에는 일본으로 표기하고, 무리를 지어 노략질을 일삼는 일본인은 별도로 왜구라 하였다.(p180.)
일본에서 12세기 무렵 가마쿠라막부가 출연하였는데 막부의 기초가 된 하급무사들은 이후 일본에서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에 따른 상업자본의 축적과 화폐유통으로 경제적 기반이 점차 흔들렸고 영세 농민들은 몰락하였다. 몰락한 하층 무사들과 영세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해적으로 탈바꿈 하였고 이에 무장한 상인들이 합세하여 '왜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막부정권에서도 왜구를 외국 침략자와 똑같은 나라의 적으로 다루어 처단하였고 왜구의 침입에 고려가 강력히 항의하자 기타큐슈의 권력자인 쇼니가 고려 사신이 보는 앞에서 왜구 90인을 잡아 죽인 일도 있었다.
왜구는 13세기 초 김해에 침입한 것을 시작으로 간헐적으로 경상도 연안 고을을 침략했으며 고려가 왜구 소탕에&nbsp;나서면 한동안 조용히 있기도 하였다. 1263년에는 왜구 배 한척이 물도에 침입하여 생활도구까지 싹쓸이해간 일도 있었다. 그 후 고려, 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하던 기간에는 왜구의 출몰이 거의 없었으나 일본 정벌이 중지되자 왜구들은 1323년 군산도에서 조운선을 터는 등 약탈을 횡행하였다. 1350년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왜구의 약탈이 자행되었다. 
왜구는 한국 사람들에게 몽골인과 더불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야만과 포악'의 대명사로 굳어져 있지만 알고 보면 이들 역시 살아 남으려고 최후의 몸부림을 친 측면도 있다. (p186) 
전쟁의 발견에서 읽은 논지를 몽골의 침입 등으로 피폐해진 고려후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일본의 왜구는 노략질 하기에는 참 좋은 전략적 이점을 가진 듯하다. 물론 그것이 일본이 그 당시에는 문물의 발달이 뒤쳐져 있었다는 대전제에 바탕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박물관 (7)</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52650</link><pubDate>Sun, 03 Apr 2005 23: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52650</guid><description><![CDATA[고려인의 life style
고려의 국왕이 황제를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 대해 자주성과 자부심이 강한 사회였다.&nbsp; 
그리고 불교와 무속의 결합(불교의 역사가 깊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점집에 왜 불교의 만자가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이 신앙생활 및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였다. 그에 따라 사찰이 사회, 경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의 통치이념은 유교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도교적 풍수지리사상도 만연했다. 결국 유교, 불교, 도교에 민간 무속신앙까지 각각의 영역에서 고려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고려는 다원화되고 열린 사회였다. 
고려시대에는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으며 고려의 청자, 먹, 비단 등은 당시 세계적으로 수준 높은 공산품으로 인정받았다.]]></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6)-2 ; 무신정권 시대</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50956</link><pubDate>Thu, 31 Mar 2005 22: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50956</guid><description><![CDATA[무신정권시대 (p121 이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일이 불씨가 되었다가 20년 후 수박시합을 하다 늙은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치며 모욕을 가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00여년 간의 무신정권 시대가 시작됨. (1170년~1270년) 
1.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이고는 과대망상증에 걸려 왕인 명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려 했다가 이의방과 채원에게 제거당함. 
이의방은 그 후 실권을 잡고 승려 2천여명의 반란을 잔인하게 제압하며 권력을 휘두르다가 결국 정중부의 아들 정균(筠)과 승려 종참에게 살해됨. 그후 정중부 부자가 최고 권력을 잡게됨. 그러나 경대승에게 정중부 일가는 몰살당함. 
이의민은 수박의 명수로 그로 인해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된후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에서 공을 세워 권력을 잡게 됨. 의종을 수박기술을 이용해 살해하기도 함. 경대승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잠시 숨어 있다가 그가 죽은 후 권력을 잡고 세 아들들과 함께 전횡을 부리다가 최충헌에게 제거됨.
2. 경대승
청주출신으로 아버지가 상장군이어서 무관이 됨. 아버지로부터 부당하게 착취한 토지를 물려받았으나 군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줌. 호위병 허승, 김광립 등을 끌어들여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쟁취함. 그는 정균이 차지하고 있던 승선 벼슬을 문관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사양하고 100명이 넘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비를 서게 함. 그들이 머무는 곳을 도방이라 하는데 이전에 중방에서 정치가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도방은 정치기구는 아니었음. 무신세력을 평정한 뒤에는 벼슬 없이 집에서 지냈으나 큰 일이 있을 때는 궁궐에 나와 의사결정에 참여함. 도방의 군사들이 약탈을 하면 자신의 부하라도 서슴없이 제거함. 그렇게 5년을 지내다가 30의 나이에 병사함. 그는 무관이었으나 무신정권을 만들지 않았으며 문무관을 가리지 않고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을 제거함. 그 방법이 지나치게 과감하긴 하였으나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임금을 능멸하지도 않았으며 축재행각도 하지 않음.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길에 나와 통곡하였다고 함. (무신정권시대 중간에 등장한 인물들 중 유일하게 멋진 인물이다.)
3. 최씨일가 -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4대 62년)
동생인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음.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세움. 최충수가 왕에게 태자비를 내보내고 자신의 딸을 맞이하라고 강요한 일을 계기로 동생인 최충수와 대립을 하여 결국 최충수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함. 김준거, 박진재 등 많은 사람들이 반란을 꾀하였으나 모두 진압됨. 그는 벼슬을 돈으로 팔고 궁궐처럼 화려한 집에서 몇 천의 종을 거느리며 왕부럽지 않은 절대권력을 누리다가 1219년 71세의 일기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죽음. 
최이는 최충헌의 맏아들로서 최충헌의 권력을 승계함. 처음에는 좋은 정치를 펴려고 노력하는 듯 하였으나 곧 격구장을 위해 민가 수백채를 허는 등 만횡을 부림. 몽골이 침략하자 임금을 압박하여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하게 함. 몽골에 강경책으로 일관하였고 그의 눈치를 보느라 임금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유화책을 주장하지 못함. 몽골침략을 유발한 장본이라 할 수 있음. 강화도로 온 지 17년 만에 죽음.
최항은 최이가 기생으로부터 얻은 큰 아들로 최이가 죽은 뒤에 권력을 물려받음. 몽골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감. 축재와 공포정치를 일삼다가 8년만에 죽음.
최의는 최항이 절의 종에게서 얻은 아들로 최항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으나 권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임연 등이 이끄는 자신의 사병들에게 죽임을 당함. (1258년)
이후 임연 등 무신 잔당들이 권력을 휘둘렀으나 내부 분열을 거듭하다가 몽골의 후신인 원의 간섭과 지배를 받을 때인 1270년 종말을 맞이함. 
&nbsp;
&nbsp;]]></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6)</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9903</link><pubDate>Tue, 29 Mar 2005 22: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9903</guid><description><![CDATA[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실체 (p115 이하)
묘청의 반란사건의 성격을 두고 사대파와 자주파, 유교파와 불교파,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결로 평가하는 사가들이 있음.(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진 않다.)
개경세력 vs 서경세력 - 정지상 등 서경관료 또는 신진 관료는 서경 천도를 통해 중앙 정계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고자 했고 이는 개경 세력의 전통적인 권위와 우월의식에 도전한 양상이었음. (이 측면에서는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결이라는 평가는 어느정도 타당한 것 같다.)
불교파 vs 유교파 - 묘청으로 대표되는 불교세력과 유학자이자 개경 문벌 출신인 김부식의 유교세력이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불교세력으로 꼽을 수 있는 지도자는 묘청 한 사람뿐이었음. 절을 짓고 도량을 베푼 일도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특별히 불교적 이념을 내세운 적도 없다. 따라서 불교파와 유교파의 대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런지. (고려시대에 불교가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점을 감안한다면 묘청이 승려였다는 점만으로 불교세력과 유교세력의 대결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고려사회는 신앙과 사회 생활 면에서는 불교가, 국가의 통치와 지배이념,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유교가 지배한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불교보다는 오히려 서경천도을 기도할 때 풍수지리사상이 전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도교의 영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사대파와 자주파 - 자주를 내세우는 묘청의 금나라 정벌계획은 군사양성의 준비도 없고 제나라와 협공한다는 표방도 실체가 없는 등 구호만 요란할 뿐 엉성한 점이 많았음. 따라서 칭제건원의 자주성도 어느 정도만 인정할 수 있음. (예전에 어디에선가 묘청의 반란을 자주파의 반란으로 평가하면서 묘청의 난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 평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도 수백년 전의 한 사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글을 읽고 나니 그런 주장이 다분히 민족주의사관에 근거하여 단순한 권력쟁탈전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 역사해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당시 동북아의 실질적 패권자인 금나라를 정벌하려 했다면 금나라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었을 지 모를 일이다. 오히려 고려가 외교술로 금나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겉으로는 예를 갖추어 금으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은 부분을 읽으면서는 참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였다.&nbsp; 그리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벌을 주장한 것은 조선시대에 중국을 지극히 받드는 사대주의와 모순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묘청일파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서경 천도를 실현하여 기성세력을 꺾고 개혁을 추진하는데 목표를 둔 권력 쟁탈이 그 실체임.(by 저자)]]></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5)-3</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6223</link><pubDate>Wed, 23 Mar 2005 22: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6223</guid><description><![CDATA[고려의 토지제도 (p92이하)
역분전(役分田) - 태조가 940년 실시. 녹읍제의 폐지를 의미. 개인의 품성과 행실의 선악 및 공로에 따라 차등 지급함.(논공행상의 성격을 띔) 자손에게 물려줄 수 없었음.
녹봉제의 시초 - 광종 원년인 949년 공로자를 네 등급으로 가려 쌀 12/15/20/25섬을 정기적으로 지급.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 - 976년(경종 1년) 실시. 처음 정한 전시과라는 의미. 직관과 산관에게 논밭과 땔나무를 대는 산판을 지급한 제도. 인품에 의한 4색 관복제에 기초하면서 관품에 따른 구분도 반영. 이러한 수조권은 상속불가. 
훈전(勳田) - 전시과는 관료 중심으로 실시되었기에 새로 귀순한 세력이나 공신들에게 수조지를 지급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실시. 훈전은 상속가능.
개정전시과 - 998년(목종1년)&nbsp; 시정전시과를 크게 개정. 관직 반열의 상하만을 지급 기준으로 삼음. 무반을 문반보다 낮게 책정.
경정전시과 - 1076년(문종30년) 전시과 정비. 일반 관료와 구분하여 승려와 지사에게 별사전시과라는 수조권 토지를 지급. 향리, 여진의 추장 등 새로운 세력에게도 전시과 지급.
cf. 신라의 토지제도와 비교]]></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5)-2</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6218</link><pubDate>Wed, 23 Mar 2005 22: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6218</guid><description><![CDATA[고구려, 발해 계승의 역사의식 (p46이하)
이승휴의 제왕운기 -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하였을 때 같은 갈래인 고려로 귀화한 사실을 들어 발해를 고구려의 계통을 이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국가로 봄.
이규보의 동명왕편 - 신라의 시조 혁거세편을 쓰지 않음. 이것은 고려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임.
왕건은 발해를 고려의 친척 국가로 칭하면서 발해를 멸한 거란과는 국교수립 거부. 요가 942년 사신 30여명과 함께 낙타 50마리를 보내며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왕건은 사신일행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개경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함. 이와 같은 왕건의 확고한 의지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고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데에 왕견이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고 볼 수 있음.(p58-60)
&nbsp;
과거제 개관 (p74이하)
과거제도는 958년(광종9년) 쌍기의 건의에 따라 처음 실시됨.
진사과(進士科) - 시부(운문)와 시무책(정책을 적어내는 논술고시)을 시험봄. 
명경과(明經科) - 주역, 서경, 시경, 춘추 등 기본 유교 경전을 시험봄.
잡과(雜科) - 의술, 지리, 율학, 산학 등을 시험봄.
진사과와 명경과는 대체로 중앙 관직자와 지방 향리의 자손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졌으나 후기에는 양인 모두에게 개방되었고 잡과는 처음부터 일반 서민들에게 개방됨. 다만 향, 부곡의 천민들은 잡과에도 응시할 수 없었음. 과거를 실시하는 시기도 매년, 격년, 4년에 한번(고려후기) 등 일정하지 않았음. 무관을 뽑는 과거는 실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등용함.
과거제는 귀족신분에게만 관직이 주어지던 관례를 깨고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는 제도임. 그러나 잡과와 같은 기술직을 천대하고 무과시를 치르지 않아 문무의 차별의식을 조장하는 등 인재 등용의 한계를 드러냄. 또한 시험과목이 유교 경전 중심이어서 국가 이념의 정신적 역할은 불교가, 정치와 교화는 유교가 담당하는 이원적 통치철학이 만들어지기도 함.]]></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황제와 왕의 차이</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5122</link><pubDate>Mon, 21 Mar 2005 23: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5122</guid><description><![CDATA[한국사 이야기(5) p49이하
황제라는 칭호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확립하면서 비롯됨.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제후들이 일어나 처음에는 '공'이라고 칭하다 후에는 '왕'이라 표방함. 서기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에서 황자와 제자를 따 황제라고 칭하였고 이때부터 황제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제후와 구분지어 붙임.
일본은 중국과 멀리 떨어진 탓으로 비교적 자주적인 호칭인 '천황'을 표방했고 우리의 삼국은 중국과 근접해 있어 황제도 왕도 아닌 '대왕'이라는 호칭을 주로 씀.
제후 나라는 황제 나라와 용어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했는데 이를 어기면 참칭이라 하여 제재를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명분에 충실한 후세 유가 사학자들의 비난을 면치 못함.
제후 나라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쓸 수 없고 중국 황제의 연호를 써야 한다. 그런데 왕건은 왕위에 올라 '천수'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 다른 의식에서도 황제에 걸맞은 용어를 사용함. 
ex) 왕이 자신을 부를 때 과인 대신 짐(朕)이라 했고, 신하들이 임금을 부를 때 전하(殿下) 대신 폐하(陛下)라고 했다. 임금의 명령을 전(傳)이나 교(敎)라고 하지 않고 조(詔)나 칙(勅)으로, 임금의 부모를 황고(皇考)와 황비(皇妃)로, 임금의 아내를 황후(皇后)로, 왕위를 이을 아들을 세자(世子)대신 태자(太子)라고 함.
특히 역대 임금의 시호에서 자주성을 분명히 알 수 있음. 제후 나라의 임금은 어디까지나 '왕'자를 넣어 시호를 지어야 하는데 삼국에서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모두 '왕'자를 붙임. 그러나 고려에서는 황제의 격식에 따라 조종(祖宗)을 붙임. 조는 국가를 세우거나 위기에서 구제한 임금에게 붙이고, 종은 수성한 군주에게 붙임. (ex) 태조, 광종 등. 이러한 시호는 원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이 상실되면서 충렬왕 따위로 대치됨. 사대적 명분에 충실했던 근세 조선에서도 조종의 시호만은 유지함. 
황제는 천명을 바아 등극하였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고 이것을 원구제라 하고 제사지내는 장소를 원구단이라 한다. 고려는 원구단을 만들었으나 신라는 설치하지 않고 근세 조선의 중기이후부터는 이를 거의 폐지함. 그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원구단을 설치함.
황제는 문장에 용을 사용하고 제후 왕은 봉황을 사용. 고려는 용을 상징물로 삼았는데 조선은 봉황을 상징물로 삼음. 청와대에서 봉황의 문장을 쓰는 것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제후에 해당한다는 것인지?
고려가 비록 황제의 의식과 제도를 따랐으나 왕전하게 황제국 행세를 한 것은 아니고 국제 정세에 따라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함.
cf. 사대의 예 - 1. 중국황실의 절일에 조공사 따위의 사신을 정기적으로 보내는 것.&nbsp;&nbsp; 2. 새 황이 들어설 때마다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것/ 그러나 이는 형식과 명분에 그치고 중국이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아니었음.
거대한 중국대륙을 통일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대국 앞에서 무수히 명멸을 거듭했던 유목민족과 같이 독립된 국가도 이룩하지 못한 채&nbsp;흡수되어 버리지 않고(물론 미래에는 지금 중국에 속해 있는 여러 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할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nbsp;독립된 국가를 이루기 위해 중국의 황실에 사대의 예를 갖춘 것은 어찌보면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사대의 예를 갖춘 조선보다 융통성 있게라도 황제를 칭한 고려를 접하면서 속이 시원해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그리고 지금 대통령의 문장으로 봉황을 쓰는 것은 단순히 근세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황제와 왕을 상징하는 문장으로서 용과 봉황이 갖는 의미를 고려한다면 과연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쪽팔리지 않는가?]]></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5)-1</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5099</link><pubDate>Mon, 21 Mar 2005 22: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45099</guid><description><![CDATA[후 삼국의 흥망의 원인(p30)
궁예 - 처음 후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움. 북쪽 지대 고구려 유민의 환심을 얻기 위함. 개성의 호족 출신인 왕건을 휘하에 두고 왕건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모든 정사를 맡김.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꾼 뒤에는 점차 포악해져 부하들이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축출함.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신라에 대해 무자비하게 대함. 결국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함.
진훤(견훤) - 상주 사람으로 신라의 비장 출신. 광주 지역에서 농민군을 이끌어 세력을 키우고 후백제 건국. 그 지역 주민들의 반신라 정서와 백제 유민의 정서를 의식함. 궁예와 마찬가지로 정복자로서 신라의 지도자들을 수없이 죽이고 약탈과 강간을 일삼음. 백제 유민들의 정서를 고려했다고는 하나 정치가로서의 판단력 부족. 특히 넷째 아들 금강을 총애하는 바람에 첫째 아들 신검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아들들에게 유폐당함.(저자는 신검이 진훤을 유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것을 단순한 패륜행위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와 반대로 진훤이 말년에 나태와 안일에 빠져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신검을 왕으로 추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견해를 제시.) 진훤은 갇혀 있던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고려로 투항,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앞장섬.(진훤의 처지가 참 아이러니하다...)
왕건 - 궁예 밑에서 무훈을 쌓은 뒤 궁예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무혈로 왕위를 얻음. 왕건은 궁예나 진훤과는 달리 신라를 정복한 다음에도 신라 왕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신라의 지배세력과 백성의 민심을 얻음. 고려는 신라와 전쟁을 벌인 적이 한번도 없으며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하여 나라를 헌납함.
&nbsp;
호족의 성격 및 귀족과의 차이점 (p37)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로 이루어진 귀족사회였으나 호족은 귀족과는 구별되는 신라 말기 사회의 중추세력임.
호족의 기원은 중앙에서 밀려난 진골 귀족이나 하급 벼슬아치인 6두품 세력이 지방세력을 이루기 시작한 것임. 특히 6두품 세력은 진골세력에 눌려 관등과 관직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이들이 주축을 이룬 도당 유학생들은 골품에 따른 차별이 없는 당의 제도를 접하고 신라사회의 모순에 더욱 비판적 태도를 지니게 됨(최치원, 최승우 등). 호족들은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지방의 문화적, 종교적 수준을 유지 또는 독점하면서 지방민 위에 군림. 호족들은 스스로 무장을 갖추기도 함.
호족들은 신라말기의 농민봉기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도, 반대도 않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함. 
왕건의 유명한 호족과의 중첩적 혼인관계도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호족들의 지방에 대한 지배권과 특권적 지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들을 형식상 의사일가로 만들어 포섭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임.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녀를 둠. (-0-;;) 그 덕분에 고려 왕가에 자신의 여러 딸을 2대에 걸쳐 왕비로 시집 보내는 일이나 항렬상 이모와 결혼하는 일까지 생김.
결론적으로 왕건은 지방세력인 호족들을 효과적으로 잘 이용하고 포섭하여 이들이 고려를 건국하고 나라의 기초를 다지는데 이바지하게 함. 그러나 호족들은 신라의 귀족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며 신라가 귀족사회였던 데 반해 고려는 문벌사회였고 문벌의 세력도 영속성이 제한되어 귀족사회와는 성격을 달리함.]]></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2)</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16576</link><pubDate>Mon, 31 Jan 2005 00: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16576</guid><description><![CDATA[임나일본부에 대한 여러 견해 (p325)
임나일본부란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반까지 김해지방에 두었던 일본의 기관을 말한다.
막연히 임나일본부를 가지고 일제가 일본이 예전에 한반도를 지배하였다는 논거로 삼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에 관련해 무수한 견해대립이 있었다. 학설 이름을 읽으면서 잠시 예전 공부할 때 학설대립과 판례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0-;; 저자가 마지막에 밝히고 있듯이 사실 그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논점은 아닌 것 같은데(학설대립에 비해서는) 일제(일본이라고 해야하나?)가 무리하게 그것을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점령해서 식민지로 삼았다는 근거로 삼으려고 시도하였고 그에 대해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반박하면서 치열한 학설대립이 발생한 듯하다. 간단히 각 학설의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기마민족설 - 스키타이, 흉노, 선비 등의 기마민족의 영향을 받은 부여족 계통이 마한 땅에 백제를 건설하고 김해지방에 진출해 있던 왜인들을 정복함. 그후 3세기말에서 4세기초 동아시아 민족이 대이동을 할 때 지배층이 왜국의 본거지로 옮겨갔고 이들이 왜세력을 정복하여 왜한연합왕국을 수립함. 이들이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기나이 지방에 세운 왕권이 야마토정권임. (천황의 뿌리가 한민족이라는 주장은 황국사관에서 보면 놀랄 일이지만 왜인들이 김해지방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도 함. 그래도 일본학자의 주장치고는 급진적인 것 같다.)
출선기관설 - 일본이 4-6세기 사이 한반도 남쪽을 근대 제국주의적 식민지와 같이 경영하였는데 그 중심기관이 임나일본부였음. (너무나 인위적으로 짜맞춘 듯한 느낌의 학설이다. 그 옛날에 근대 제국주의적 식민지와 같이 경영하였다니...)
분국설 - 삼한,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옮겨가 살면서 각기 자신들이 살던 나라와 같은 나라를 건국함. 히로시마 동부와 오카야마에 이르는 지역에 가야사람들의 임나국이 있었음. 임나국을 중심으로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분국이 각 존재했을 것임. &nbsp;임나일본부는 신라, 백제, 고구려, 왜국이 서로 차지하려 했던 곳으로 가야의 분국으로 봄. (출선기관설을 뒤집어 놓은 북한 학자의 주장. 멋지군~)
가야왜설 - 임나일본부는 가야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자치기관 성격을 띠는 요즈음의 영사관과 같은 기관. 임나일본부는 왜인이나 왜인과 한족 사이의 혼혈인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었을 것임. (문헌학과 고고학적 뒷받침이 부족하고 중국기록을 잘못해석한 약점이 있다고 함. 그런데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것이 좀 아쉽다. 그래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하고 저자도 결국 이 견해를 일부 따르는 듯하다.)
백제군사령부설 - 일본 대신 백제를 주체로 넣어 해석한 학설. 임나일본부는 이 학설에 따르면 백제가 가야지역을 점령하고 군사 목적으로 설치한 사령부와 같은 기관이 됨. (근데 왜 일본대신 백제를 주체로 넣지? 그렇게 하면 말이 잘 된다는 것만으로는 좀...)
왜교사절설 - 임나일본부를 임나지역에 파견된 왜국의 사절로 봄. 
검토 - 임나일본부의 관련 기록을 보면 정치군사적 지배나 조세징수, 부역 동원 따위의 통치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춘 외교 활동이 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신라가 가야의 나라들을 통합하였을 때에도 왜국이나 백제가 이에 맞서 직접적으로 군사활동을 벌인 기록이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는다.(p330) 가야의 나라들은 동부의 신라와 서부의 백제가 침략하거나 위협을 가해올 때 군사로 맞설 힘이 부족하므로 왜 또는 일본부를 이용하여 독립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는 가락국 또는 가야의 나라들 시각에서 보아야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일본이나 백제의 시각으로 보아 초점이 어긋났다.(p332)
&nbsp;무언가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이 있었다고 하면 현재와 같이 정비된 국가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 특히 통일국가도 이루고 있지 못하던 일본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근대 제국주의적 식민지기관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가야와 교류를 하던 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기관쯤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기관을 가야 입장에서는 신라와 백제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해 이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임나일본부의 군사활동에 관한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군사적인 면보다는 교역이나 왜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기관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결과적으로 저자와 유사한 견해를 취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0#
그냥 오래간만에 학설대립을 정리해보고픈 충동에서 한 번 정리해 보았는데, 역시 예전의 3년 경험에 내가 영향을 많이 받긴 받았나보군...]]></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독서노트</category><title>한국사 이야기 (1) </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09924</link><pubDate>Wed, 19 Jan 2005 00: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09924</guid><description><![CDATA[(고)조선 시대 - 고조선에서 '고'자가 근대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글자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새롭다. 최초의 조선에 거꾸로 뒤에 생긴 조선을 기준으로 '古'자를 붙이는 것은 작가의 지적처럼 옳지 않은 것 같지만 뒤에 생긴 조선은 무엇이라고 부를지...
중국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자 단군은 왕위를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런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도...(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은 너무 많으니 앞으로 이런 서술은 생략하겠다. -0-;) 그런데 우리 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이 굴러들어온 돌인 기자에게 순순히 왕위를 물려주고 은거했다니? 아무리 성인 군자라도 중국의 왕이 봉한 외래인에게 왕위를 순순히 물려준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작가의 지적대로 기자가 조선에 무리를 이끌고 이민을 왔다든지 구테타나 전쟁을 통해 왕위를 빼앗은 것을 중화의식으로 윤색하여 기록했을 것이란 추측이 합리적이 아닐런지. 
그와 함께 역사는 기록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역사의 기록은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스레 되새기게 된다. 그런 면에서 불완전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 고대사는 정말로 대부분의 조각들이 없어져 버린 퍼즐 맞추기 같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description></item></channel></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