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독서광이 되고자하는 초짜 독서가 (외로운 발바닥 서재) &gt; 늦깎이 대학생</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category/4538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길인지...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상엔 온통 모르는 것, 불확실한 것 투성이다.

삶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 독서만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난 책을 읽으려 한다. 몸이 맘을 따라가지 못하지만...</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25 May 2012 17:42:08 +0900</lastBuildDate><image><title>외로운 발바닥</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55720113281463.jpg</url><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category/4538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외로운 발바닥</description></image><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퍼온글] ‘인식’-‘재인식’의 대화 새역사로의 진보 되길 </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1063237</link><pubDate>Sun, 18 Feb 2007 1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1063237</guid><description><![CDATA[


‘인식’-‘재인식’의 대화 새역사로의 진보 되길

카의 정의는 ‘역사는 과학이다’ ‘역사는 진보한다’<BR>현재가 과거에 대해 대화 주도권<BR>미래의 새역사 목표로 과거를 극복 대상 삼는다<BR>‘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현재와의 대화 요구하지만<BR>진보가 아닌 보수를 위한 비판적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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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quo;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모습. E.H.카는 역사를 움직이는 건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 이름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보고, 역사는 발전하며 진보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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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noWrap colSpan=3><!-- Padding - Height --><!-- ### news option END ### --><BR clear=all>고전 다시읽기/E. H. 카 &lt;역사란 무엇인가&gt; 

누가 나를 역사가로 만든 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연코 E. H. 카의 &lt;역사란 무엇인가&gt;를 말할 것이다. 이 책은 나를 포함한 이 땅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거의 모든 역사학도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고 1980년대 우리사회 변혁운동에 온 몸을 내던졌던 청년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386세대를 키운 것도 바로 이 책이다. &lt;역사란 무엇인가&gt;는 1966년 길현모 교수에 의해 처음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이래 서점가에 10여 군데가 넘는 출판사의 판본이 나와 있다. 
&lt;역사란 무엇인가&gt;의 테제를 요약하면 크게 2가지다. 하나는 “역사는 과학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과학과 진보는 근대의 전형적인 거대담론이다. 탈근대 역사서술의 집중적인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2개의 거대담론이다. 탈근대에서 &lt;역사란 무엇인가&gt;의 핵심을 이뤘던 테제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요구되고 있다면, 이제는 카의 근대 역사학을 넘어서는 역사의 새로운 정의가 나와야 한다. 
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어떤 식으로 역사의 과학성과 진보를 논증했는지부터 고찰해야 한다. 역사가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치명적인 약점은 역사라는 말 자체가 과거사건(Geschichte)과 그에 대한 기록(history)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전자의 의미에 강조점을 두었던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드 폰 랑케는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단지 그에 관한 흔적으로서 단편적인 사료들만이 존재하는 현재에서 과거 그대로를 재현하는 역사를 어떻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지”는 결국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면, 역사가의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역사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현재의 역사가는 자신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과거의 사실들만을 역사로서 서술할 뿐이며, 그래서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인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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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 AD kisa banner include 시작-->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정의는 위의 양극단적인 입장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기 위한 시도였다. 역사가의 과거와의 대화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그가 ‘왜’라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카는 ‘왜’라는 역사가의 질문에는 언제나 ‘어디로’라는 또 다른 질문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마치 마르크스가 “문제 안에는 해답이 내재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결국 목적 없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란 성립하지 않는다면, 카는 그 목적은 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 대한 최종적인 정의를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에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수정 보완했다. 과거를 해석하는 목적이 미래의 목표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미래가 과거 해석의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란 실재이고 역사란 그것의 현재적 의미라면, 카는 그 의미와 무의미를 나누는 범주, 곧 역사인식의 패러다임을 진보로 규정했다. 곧 그는 진보를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전제”로 설정함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역사’와 ‘진보로서의 역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진보를 구체적으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라고 정의했다. 그는 모든 문명사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세대가 희생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진보라는 역사의 대의는 중세에서 신의 섭리와 같은 종교적 명분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카는 이처럼 역사의 진보를 하나의 신앙처럼 믿었던 전형적인 근대주의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생태계 파괴의 문제에 직면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확대”가 과연 진보인지를 회의하며,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갖고 혁명을 통한 사회적 실험을 함으로써 초래됐던 역사의 재앙들을 반성한다. 지난 20세기는 홉스봄의 말대로 역사의 진보에 대한 가장 큰 믿음을 가졌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을 맞이했던 ‘극단의 시대’였다. 혁명의 시대로서 근대가 급진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앤서니 기든스가 &lt;좌파와 우파을 넘어서&gt;에서 말했던 것처럼 “역사에 내재한 가능성을 믿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가능성을 믿어야 역사가 진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식으로 그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이다. 진보란 과거와 현재를 미래의 인질로 삼는 방식으로 하는 역사의 대화이며,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가 아니다. 
카는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사실’과 대화한다는 점을 토로했다.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에만 발언권을 주고, 또 발언순서까지를 결정한다면, 과거와 현재사의 평등한 대화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근대 경험론의 시조인 베이컨이 자연이 숨기고 있는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을 통해 자연을 고문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카는 과거와의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실제에서는 역사의 진보라는 명분을 갖고 과거를 문초하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에서 현재와 과거의 대화 방식은 진보라는 1가지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4가지가 있다. 먼저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는 현재보다 과거에 중점을 두는 대화 방식을 지향했다. 니체는 이러한 전통적 역사담론을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로 구분했다. ‘기념비적 역사’란 과거를 현재의 모범으로 삼는 방식이다. 서구에서는 이것을 “역사란 생의 교사다”라는 말로,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의 거울(鑑)”이라는 비유로 표현했다. ‘골동품적 역사’란 전통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의 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오래됐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의 시금석을 통해 검증된 것이기 때문에 골동품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 역사의 담론적 효과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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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대화방식으로 생산 담론을 

위의 전통적 역사담론과 다르게 근대 역사담론은 현재가 과거에 대해 대화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 역시 2 가지 대화형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니체가 ‘비판적 역사’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과거를 극복대상으로 삼는 방식으로, ‘과거청산’이라는 역사담론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두 번째는 ‘생성적 역사’다. 비판적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를 생성하는 것, 곧 새역사 창조다. 이러한 새역사에서 역사라는 말의 의미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새역사 창조란 미래로서의 역사, 곧 역사의 진보를 요구하는 담론이다. 
최근 &lt;해방전후사의 재인식&gt; (이하 &lt;재인식&gt;)이라는 한권의 책이 우리사회를 역사의 내전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 책은 1980년대에 출간된 &lt;해방전후사의 인식&gt; (이하 &lt;인식&gt;)을 과거로 보고, 2006년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의 재인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화의 방식이 카와 같은 진보를 위한 ‘비판적 역사’가 아니라 반대로 보수를 위한 ‘비판적 역사’라는 점에 있다. 역설적인 사실은 현실의 진보가 이념의 보수화를 낳음으로써,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 과거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진보’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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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quo; 김기봉/경기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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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우파로 불렸던 시장경제주의자들이 좌파로 지칭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우파로 불리는 가치의 전도가 일어났다. 따라서 이제는 진보 개념도 더 이상 좌파의 전유물이 되지 않는 탈근대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탈근대의 조건 속에서 &lt;인식&gt;에 대한 &lt;재인식&gt;은 필요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lt;인식&gt;과 &lt;재인식&gt; 사이의 역사논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현상은 우파들이 그 역사논쟁을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lt;인식&gt;과 &lt;재인식&gt; 사이의 역사논쟁은 한국사회를 분열시키는 내전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의 사회적 기억을 합의하고 우리역사의 미래 방향을 정하는 생산적인 담론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1가지 대화 방식이 아니라 4가지 대화 방식이 상호 교차하는 역사담론의 장이 열려야 한다.]]></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퍼온글]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1057676</link><pubDate>Fri, 09 Feb 2007 1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1057676</guid><description><![CDATA[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워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금요일자 '18도'를 챙겨두기 위해서인데 몇 안되는 일간지가 편의점에는 딱 한 부씩만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오후에 가보면 간혹 없을 때가 있다(물론 이런 수고를 하는 건 오늘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씨 이야기가 '한국의 글쟁이'의 18번째 연재로 실려 있다.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 대표적인 '탐서주의자'에 대해선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궁리닷컴을 방문한 지가 꽤&nbsp;오래됐군). 나도 간혹 '책벌레'란 소리를 듣긴 하지만, 이 '국민 책벌레'에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시대에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를 통해서 엿보기로 한다. 한겨레의 기사와 함께 지난달 중앙일보에 게재한 표정훈의 칼럼을 같이 옮겨놓는다(아래 작업실 사진을 내 방구석이 지저분하다고 구박하는 아이나 아이엄마가 봐야 하는데!.. 둘러보니 내가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군^^;).

한겨레(07. 02. 08)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BR><BR>아주 아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부모를 조르는 게 일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참고서보다 교양서를 즐겨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을 구획 나눠 차례대로 정복해 들어가는 사람. 심지어 우리말 책만으로는 성이 안차 궁금한 책이 있으면 원서라도 사서 읽고(물론 자기 전공도 아닌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 책만 읽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런 책벌레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BR><BR>표정훈(38)씨는 그 답을 보여주는 책벌레다. 10여년 전만해도 표씨 같은 책벌레들을 위한 똑떨어지는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책벌레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출판 칼럼니스트’ 또는 ‘출판 평론가’란 직종이다(*내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 등의 직함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이다. 같은 지면에 나란히 실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에서 가령 이권우씨는 언제나 '도서평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범위의 문제인가?). 
취미가 직업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벌레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다. 물론 책벌레가 아니면서 출판 평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출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표씨는 알아주는 책벌레다. 또한 이권우, 박천홍, 최성일씨 등 요즘 활발히 글을 쓰는 다른 출판 칼럼니스트들이 대부분 출판관련 저널리스트 출신인데 견줘 표씨는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책벌레로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출판 글쟁이가 된 이다.<BR><BR>학창시절을 책과 보낸 표씨는 대학 졸업 후 새내기 번역가가 된다. 때마침 불어온 인터넷 바람 속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책 이야기로 입소문을 탔다(*그게 궁리닷컴이다 http://www.kungree.com/). 한 일간지에서 가볼만한 사이트로 그 홈페이지를 소개했고, 이어 책관련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표씨는 물만난 고기처럼 책벌레다운 글솜씨를 보여주었다. 그 뒤 여러 매체에서 책과 출판에 대한 글요청이 몰려들면서 표씨는 자연스럽게 이른바 ‘출판칼럼니스트’란 직업을 갖게 되었다.<BR><BR>표씨는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지만 저술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글쟁이에 가깝다. 책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글로 쓰기 때문에 &lt;한겨레&gt;부터 &lt;조선일보&gt;까지, 매체의 분야에 상관없이 글 부탁을 받는다(*'한국의 글쟁이'로 이미 소개됐던 역사학자 이덕일씨도 그러하다). 쓰는 글은 서평이 주류를 이루지만 책, 그리고 독서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우리 출판계에서 책문화 전도사로도 활동해왔다. 책과 출판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도 여러차례 맡았다. 삼성출판박물관, 아단문고 전시회를 기획했고, 2005년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여기에 꾸준히 번역을 하는 동시에 여러가지 책 기획에 참여해왔다(*해서 들은 바로는 표씨가 언제나 큰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것. 출판사들에서 얻은 책들을 잔뜩 담아서).<BR><BR>이 넓은 활동폭이 가능한 것은 모두 그가 ‘책벌레’인 덕분이다. 표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은 일주일에 3~4권, 3분의 1 정도 읽는 책이 대여섯권이다. 1만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고, 월 5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같은 책벌레로서 잠시 견주어보니, 나보다 많이 읽지만&nbsp;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nbsp;그가 주로 많이 읽는 역사서들을 나는 그다지 읽지 않는다. 아니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리고, 1만여권의 책을 갖고 있다면 나보다는 약간 많은 수치일 듯하다. 도서구입비 월 50만원은 비슷한 듯하다).<BR><BR>책벌레들의 특징이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점을 감안해도 표씨의 지식은 넓이 면에서 도드라진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갖게 된 비결은 꼬리를 물며 책을 이어가는 독서습관이다. “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모든 조사과정이 지식으로 쌓이는 셈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적어도 대학원생 이상이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최소한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BR><BR>여기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장기인 인터넷 검색능력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검색의 노하우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찾느냐고 묻자 답은 맥빠지게도 “책을 읽어라”였다. 그 다음이 표씨가 ‘열쇳말 그물짓기’라고 부르는 검색과정이다. 역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대신 집요한 추적 의지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니콜라스 루만이란 독일 사회학자를 찾은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루만은 사회학 석학이지만 동시에 지식과 정보를 잘 관리, 편집해서 많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학자다. 표씨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사람의 지식관리법. 문제는 단순히 루만의 이름만 검색어로 치면 사회학 업적만 건조하게 화면에 뜰 뿐이다(*나의 관심은 보다 고리타분해서 루만의 '지시관리법'보다는 그의 대저 &lt;사회체계들&gt;에 가 있다.&nbsp;아직까지 번역/소개되지 않는 게 사회학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닌가, 의혹을 품으면서). 

표씨는 흔히 다작하는 저술가들이 활용하는 도구인 ‘인덱스 카드’ 등을 독일어로 추가해 다시 검색한다. 그래도 역시 원하는 지식관리법은 여전히 안나온다. 다음은 영어로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와 ‘관리’란 뜻의 ‘management’를 검색어로 보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검색어를 더해가며 찾아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이렇게 찾아낸 정보들 가운데 원하는 항목들을 모아가며 계속 연관개념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해오면서 쌓인 지식량, 그리고 노하우가 아니라 정보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유추해내는 ‘노웨어’(know-where)가 표씨 스스로 꼽는 자산이자 강점이다(*그의 책들을 아직 안 읽어봐서 얼만큼의 '강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lt;탐서주의자의 책&gt; 정도는 읽어둘 법한데, 책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됐었다).<BR><BR>이는 글을 쓰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고 독자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니만큼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믿는다.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글이 그의 지향점이자 특징으로 갖춰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표씨는 200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출판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하는 능력, 그리고 원서를 직접 읽고 기획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과 기획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필자로 꼽혀왔다. 

그동안 표씨가 펴낸 책은 크게 두가지. &lt;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gt;(2003)나 &lt;탐서주의자의 책&gt;(2004) 같은 책과 독서에 대한 지적인 교양 에세이, 그리고 &lt;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gt; 류의 가벼운 실용교양서다. 저술한 책은 그닥 양이 많지는 않다. 주된 분야는 역시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고급스러운 에세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BR><BR>그런 면에서 표씨는 그동안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해오는 대신 저술의 측면에서는 받아온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 대한 에세이 &lt;탐서주의자…&gt;와 &lt;책은 나름의…&gt;가 고급 에세이로 호평을 받았지만, 두 책 모두 짧은 글모음이란 점에서 이제는 표씨가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책을 내주기를 출판계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저기 이것저것 분산되게 쓰고 있는 재능을 이제는 한 분야에 집중할 단계라는 충고도 나온다.<BR><BR>표씨 역시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 폭을 줄이고 출판평론성 글, 각종 에세이 등 토막글을 고사하면서 단행본을 쓰는 데 집중하기로 승부수를 걸고 있다. “당장은 딜레마죠.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토막글이고, 이런 글들이 시간도 적게 들구요. 하지만 글쟁이로서 제가 생산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길어야 15년 정도일 것을 감안하면 에너지를 집중해서 호흡이 긴 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출판평론가의 정년은 55세인가?)&nbsp;
그래서 표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실용서도 써보려구요. 독자들과 비슷한 비전공자이지만 교양 분야에 대해 연구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글 구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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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07. 01. 12) 자성의 목소리 없는 출판계
불철주야 책 만들기에 여념 없는 출판인들에게 출판계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대체로 심심하다. 각종 사건들로 바람 잘 날 없는 정치권이나 연예계와 비교해보라. 그런데 이 심심한 동네가 '내일은 또 무슨 일이?'라는 걱정을 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번역 의혹, 한젬마씨 저서 대필 논란, 마광수 교수의 제자 시(詩) 도용 혹은 표절 파문, '인생수업' 표지 사진 표절 혐의, 독서단체를 빙자한 책 사재기 대행 웹사이트 의혹….<BR><BR>책에 표시된 저자 혹은 번역자, 대리번역자와 대필작가, 출판사, 그리고 독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책임론이 사뭇 분분하다. 관행을 방패 삼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책을 많이 팔려는 출판사의 상략(商略)이 문제다. 번역과 저술에서 실제로 맡은 구실이 미미하거나 사실상 없으면서도 제 이름을 걸어놓은 사람들이 문제다. 대리번역자나 대필작가가 지금 와서 나서는 게 볼썽사납다. 유명인이 쓴 책이나 베스트셀러에만 몰리는 독자들이 문제다.<BR><BR>그런 책임론에 대해 출판계 차원의 솔직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쉽다. 출판인도 아닌 필자가 결례를 무릅쓰고 대신 자성하고 싶다. 첫째, 다매체 환경에서 출판의 위상 문제다. 정지영씨는 방송인으로서의 명성을 발판 삼아 번역자(?)가 되고 한젬마씨는 저자(?)로서의 권위와 유명세에 힘입어 방송인으로 입신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영상매체 친화적인 브랜드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더 인기 있는 다른 매체에 기대려는 출판의 초라해진 자화상을 반성하고 싶다.<BR><BR>둘째, 출판기획의 본말(本末) 문제다. 책도 치밀한 '기획'을 거쳐 시장에 내놓는 '상품'이며 출판업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활동이다. 그러나 영리 추구 목적의 출판기획에도 본과 말이 있다. 오로지 팔릴 것만을 생각하는 게 그 근본인 것 같지만 책의 존엄에 대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근본이다. 근본을 살피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싶다.<BR><BR>셋째, 베스트셀러의 맹점이다. 베스트셀러 집계의 기술적 공정성과는 별도로 애당초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교묘한 사재기 상술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한, 베스트셀러 순위는 신뢰하기 힘들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베스트셀러의 요인을 분석하는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만일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사재기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라면 그 요인 분석은 고의가 아니었을지라도 거짓의 공범 구실을 한 셈이니,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고 반성하는 바이다.<BR><BR>넷째, 겉으로는 고급 문화인 행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진작부터 고쳤어야 할 해묵은 관행을 계속 끌고 가는 이중성을 반성하고 싶다. 출판은 마땅히 지원받아야 할 부문이라며 물적.제도적 지원을 요구할 때는 한껏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출판인과 출판계가 먼저 스스로 개선해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고치는 노력에는 인색하지 않았는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릴 때다.<BR><BR>'삼국지'의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이하 황석영 '삼국지'(창비)에 바탕을 둠). "이 책은 우리 촉땅에서는 삼척동자도 다 외우고 있는데, 새로 지은 책이라니 무슨 소리요? 이 책은 전국시대에 어느 무명씨가 지은 것이오. 조 승상은 도적질에 능하니 그를 표절해 자신이 지은 것처럼 그대를 속인 것이오." 사신으로 파견된 장송이 조조가 지었다는 '맹덕신서'를 한 번 훑어보고 외운 뒤 조조의 신하 양수에게 한 말이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조조는 언성을 높여 "옛 사람 생각이 나와 우연히 들어맞았던 게지!"하고 즉시 '맹덕신서'를 찢어 불살라버리라 명했다. 저자이자 발행인인 조조가 보여 준 최소한의 자존심이 차라리 그립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2. 09.

P.S. 참고로, '출판평론가'의 자녀교육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성동아'(2006년 5월호)의 기사를 참조해보시길(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2006/05/08/200605080500037/200605080500037_1.html).]]></description><image><url>http://photo-media.hanmail.net/200702/09/hani/20070209051106.769.0.jpg</url><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1057676</link></image></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퍼온글] 베끼고 또 반복하자!  -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1040443</link><pubDate>Mon, 15 Jan 2007 12: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10404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985145&TPaperId=104044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7/43/coveroff/899098514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985145&TPaperId=10404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a><br/>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07월<br/></td></tr></table><br/>소설가인 나의 知己 P언니는 습작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BR>"필사"라고 했다. <BR><BR>신인작가상을 탄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봐도 습작 시절의 "필사" 얘기를 많이 한다. 선배 작가들의 좋은 소설을 여러 번 베껴 썼다고. <BR><BR>&lt;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gt;에서 이승우도<BR>"베껴 쓰기"를 "느리게 읽기"의 한 방법으로서 추천하고 있다.<BR><BR>작년 9월 암스테르담 출장 때, <BR>시간을 쪼개 "Van Gogh Museum"에 갔었다. <BR><BR>Van Gogh의 초기 습작들을 보면서 난 큰 충격을 받았다. <BR>왜냐? <BR>밀레의 작품들을 "필사"한 것이 몇 점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BR><BR>그러니까 밀레의 드로잉을 베낀 다음에(똑 같이!)<BR>페인트 연습을 한 작품이 몇 개나 있었다. <BR><BR>난 그 앞에서 오랫 동안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BR>"아.....고흐 같은 천재도 필사를 했구나!"<BR><BR>고흐의 밀레 필사는 내게 정말.....큰 충격이자 깨달음(?)이었다. <BR>뭐든 혼자 뚝딱 만들어지는 건 없구나! <BR>천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구나! <BR><BR>왜 자꾸 필사 얘기를 하냐면, <BR>좋은 문장이나 그림을 베끼고 또 반복하는 건 <BR>공부에 있어서도 기본이기 때문이다. <BR><BR>쩍 팔리지만 내 사례를 들자면.... <BR>고등학교 때 성문종합영어 20번 봤다. <BR>그 덕에 "토종"임에도 불구하고 <BR>넘쳐나는 교포와 유학파들 사이에서 잘(?) 버티고 있다. <BR><BR>강유원도 이 책 &lt;몸으로 하는 공부&gt;에서 <BR>"베끼기"를 "공부하는 방법"으로 강추하고 있다. <BR><BR>"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lt;서양철학사&gt;(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BR>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플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BR>(중략)......<BR>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 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BR>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lt;철학의 제문제&gt;(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주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중략)......<BR>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중략)..... <BR>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중략).....<BR>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p181~184)<BR><BR>이 책을 읽으며 힐쉬베르거의 &lt;서양철학사&gt;를 50번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쭉~ 읽어보겠다고 결심했다. 불끈! <BR><BR>아쉬운 건 &lt;철학의 제문제&gt;도 읽어보려고 결심했는데, <BR>절판되었다는 거다. <BR>인터넷 헌책방을 몇군데 검색해 봤는데도 없고, <BR>동네 도서관에도 없다. <BR>이런....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에 찬물을 끼얹다니! <BR><BR>강유원의 &lt;몸으로 하는 공부&gt;는 사실 그닥 기대하지 않고 읽은 책인데, <BR>일단 강유원의 시니컬한 글쓰기 스타일 자체가 재미있었고, <BR>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 유용한 tip을 많이 얻었다. <BR><BR>새해를 맞아 공부 한번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BR>]]></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57/43/cover150/899098514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985145</link></image></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리더쉽에 관하여...</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92063</link><pubDate>Thu, 29 Dec 2005 23: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92063</guid><description><![CDATA[&nbsp;
이 내용은 우리 사단장님이 강연하신 것의 요약이다. 
벌써 강연을 들은지는 몇 달이 지났는데 당시 대충 적어 두었던 것을 정리하려 했으나, 
본인의 게으름 때문에 지금에서야 정리하게 되었다. 
&nbsp;
○ 4방향 리더쉽 
4방향 리더쉽이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위로는 '상관', 좌우로는 '동료', 아래로는 '부하'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군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간에도 기타 사회 생활에서도 이것은 똑같이 적용된다. 
4방향 리더쉽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선망의 대상이 되라. 윗사람에게는 먼저 베풀어라. 
- 책임은 자신이 떠맡고 공은 부하나 상관에게 돌려라. 
&nbsp;
&nbsp;○&nbsp;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nbsp;시간은 바로 지금 이순간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현재, 바로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구상이나 과거에 대한 반성은 무용지물이다.
언젠가 할 일이면 바로 지금 하라. 바로 이 순간의 적극적인 행동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ex) 밥만 먹고 공부하자 → TV만 보고 → 잠만 자고 내일 일찍 깨서 → SHIT!!! 
&nbsp;
<BR>
○ 열정을 가져라 
긍정적, 적극적이 되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도 성공가능성은 50%다. 
실패를 두려워말라.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4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지금 이순간의 생각이 -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할 것인지, 무엇인가를 얻어갈 것인지 - 
나의 미래를 좌우한다. 
]]></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How to get Alive - 2005. 5. 16. Time</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30154</link><pubDate>Sun, 28 Aug 2005 17: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30154</guid><description><![CDATA[미국인들의 삶은 9.11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질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9.11테러는 미국인들의 삶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았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심장부에 테러리스트의 여객기 자체가 미사일처럼 꽃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을 어떻게 미국인들이 잊을 수 있을까? 물론 9.11테러 자체의 조작가능성을 주장하는 견해들도 많고(대표적으로 마이클 무어의 ‘Hey, Dude. Where's my country?' 등..) 개인적으로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의 극우세력들이 미국인들의 공포심을 악용하여 테러를 방지한다는 미명하에 전 사회적인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건이 자작극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9.11 테러 현장 또는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사건은 정말 충격적이고 아마 평생 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삶의 패턴을 바꿔 놓을 것이다.
논의가 약간 벗어 났는데 9.11 테러나 역사적인 화재나 비행기 참사의 경우 반응할 여유도 없이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대피할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여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한다. 타임지의 이 기사는 9.11 테러를 중심으로 바로 그러한 대참사의 순간에 살아날 기회가 있는 경우에도 사람들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고 그 결과 처참한 결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9.11 테러 당시 제1타워 73층에 있던 제대뇨씨는 폭발소리를 들었고 건물이 흔들리며 쓰러져버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대뇨씨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지만-그녀가 본능적으로 재빨리 빠져 나온다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내심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하지마. 그건 니가 착각한 거야.’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한 반응은 9.11 테러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제대뇨씨는 건물 밖으로 재빨리 대피하라는 동료의 고함소리를 듣고 건물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의 삶에서 9.11 테러나 큰 화재사건은 지극히 비일상적인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그런 극히 예외적인 불행이 닥쳐올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리 없어.’라는 생각으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의심하고 부인하려는 반응을 보인다. 이것을 정상상황선입견(normalcy bias)이라 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사람들이 화재 등의 경우 건물에서 재빨리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흔히 발생한다. 
예상치 못한 재난 상황에서 10-15%의 사람들은 냉정을 유지하고 재빨리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한다. 또 다른 15% 정도의 사람들은 냉정을 읽고 울거나 비명을 지르면서 대피를 지연시킨다. 나머지 70-75%의 사람들은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두뇌는 새로운 상황, 특히 그런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고 상황에 대처하는데 있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인간행동 전문가의 말처럼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경우에 훨씬 더 적절하게 행동한다. 따라서 화재나 테러와 같은 예상치 못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런 돌발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어떻게 할 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 
화재와 같은 재난상황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지하철을 타고 있던 중에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고 치자. 처음에 연기가 발생하면서 매쾌한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섣불리 소리를 치거나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격이 소극적이라서 먼저 그런 행동을 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불길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이 대피하는 등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단순한 기계 고장이겠지. 뭐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이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다. 그런데 그렇게 낭비한 몇 분 또는 몇 십초에 내 생사가 갈릴 수도 있는 것이다. 
조그만 연기나 싸이렌 소리에도 극단적인 공포심을 느끼면서 과도한 반응을 보이거나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현재 미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보고 있노라면 세계를 선도하는 민주국가 미국이 맞는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러나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사건, 수많은 화재 참사 사건을 겪은 우리 나라의 경우 그러한 참사를 겪으면서 실질적으로 어떠한 개선책이 마련되었는가 의문이다. 형식적인 소방규정의 강화 외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예상치 못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개개인이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지 교육을 하고 실제로 훈련을 하게 하는 것 아닐까. 전국민에게 공포심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미국에서와 같은 전문적인 연구나 그에 따른 학교와 현장에서의 교육을 기대하기는 불가능 하지만, 적어도 그런 시각에서의 연구와 교육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재난 상황에 놓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할지...<BR>]]></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LG 그룹 CEO 들의 추천도서</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0132</link><pubDate>Tue, 28 Jun 2005 22: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700132</guid><description><![CDATA[예전에 신문에서 오려둔 것인데, 읽지는 않고 오려둔 쪽지만 계속 굴러다녀서...여기 기록해본다.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 - 데니스 NT 퍼킨서
CEO 칭기스칸 - 김종래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 루이스 거스너/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 - 제임스 콜린스 외
드골의 리더십과 지도자론 - 이주흠/ 살아있는 신화:스티브 발머 - 프레데릭 맥스웰
실행에 집중하라 - 래리 보시디 외/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 - 혼다 켄/ 도요타 무한성장의 비밀 - 히노 사토시
중국 3천년의 인간력 - 모리야 히로시/ 바보의 벽 - 요로 다케시
숨겨진 힘:사람 - 찰스 오레일리
Deep Change or Slow Death - 로버트 E 퀸
언제 다 읽지? -.-;;]]></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미국의 이중성</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99234</link><pubDate>Sun, 26 Jun 2005 23: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99234</guid><description><![CDATA[미국은 참 불가사의한 나라다. 세계 유일의 최강대국이고, 남북분단 이후 미국의 지속적인 원조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받은 우리나라에게는 남북한 대치 상황의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크나큰 은혜를 준 나라라는 인식과 함께 신제국주의적 침략자, 독재권력의 비호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혼재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대사를 논하면서 미국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기에, 냉전시대와 군부독재시대를 겪으면서 미국의 이미지는 위와 같이 극단적으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시대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잘 적응, 내지는 교화된 사람 중에는 미국을 '지고의 선' 또는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기회의 땅'으로 굳게 믿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그 시대의 어두운 면을 경험한 사람 중에는 미국을 민족 통일을 반대하는 제국주의적 국가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꽤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내가 자라나던 환경이 그랬고,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막연히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나는 한국인이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두 나라를 꼽으라면 한국에 이어 미국을 꼽았을, 그런 정도의 동질감과 호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머리가 좀 굵어지고 노암 촘스키의 글을 읽고, 마이클 무어의 영화와 책을 접하면서&nbsp;조금씩 미국이란 나라가&nbsp;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선하고 우리가 지향해야할 사회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걸프전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겠지만, 그런 생각을 결정적으로&nbsp;강화시킨 것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석유자원 확보를&nbsp;노린 전쟁이라는 등 여러가지 비판이 있었고 그에 대해 미국은 이라크에서 후세인의 폭정에 고통받는 이라크인들을 구해내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는&nbsp;듣기에도 그럴듯하지도 못한 이유를 내세워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고, 결국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이라크를 점령했다. &nbsp;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미국이 내세우는 이유를 그대로 믿는 단세포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믿는다. 후세인의 폭정은 비난받아 마땅하고,&nbsp;이라크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어떤 나라에 독재자가 있다고 해서 다른 나라가 침공을 해서 무수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떤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누가 미국에게 그러한 권력을 주었는가? 물론 국제사회에서는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순수하게 이라크 국민들을 위해서 였다고 할지라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이라크 침공에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경우에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라크인들의 삶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끔찍하다. 후세인 치하에서의 삶도 결코 행복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무차별적인 폭탄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모든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차별적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 자들은 미치광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동포에 대한 공격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라크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나쁜 쪽으로의)를 가져온 것은 미국임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의 이라크침공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명분이 없는 것 같다. 후세인이 가지고 있다던 대량살상무기도 결국은 찾아내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기사를 종합해보면 그것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작은 구실이었고 그나마도 조작된 것이었다. 결국 조작된 정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전쟁은 이미 시작되어 이라크는 점령되었고, 정보의 보고와 판단에서 실무자의 실수가 있다고 덮어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nbsp;2005년 6월 20일자 Time에서는 사실상 법치주의의 사각지대인 관타나모 기지의 수용자에 대한 심문을 다루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등지에서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전쟁포로에 준하여 - 그러나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은 준수되지 않고 있다 - 감금하고 미국의 안위를 지킨다는 명분아래 온갖 학대와 가혹행위, 비인간적인 심문이 자행되고 있는 곳이다. Time에서는 그 곳의 수용자 063으로 불려지는 Mohammed al-Qahtani를 어떻게 조사관들이 심문하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대해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al-Qahtani는 심문받을 것에 대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조사관들에게도 무척 반항적이었다. 그러나 고도로 연구된 심리적 방법들이 동원되면서 결국은 조사관들에게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조사관들이 사용한 방법은 소설 '1984'에나 나올 법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여 피조사자를 미치광이로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잠을 안재우고 물을 강제로 수건에 적셔서 먹이는 것은 기본이고 피조사자가 공포심을 느끼는 것을 연구하여, 예컨대 무서운 개를 이용하여 공포심을 조장하는 방법, 911테러 희생자들의 사진을 몸에 붙이게 하고 미국 애국가를 강제로 들려주며, 용변을 통제하여 바지에 그대로 싸게 만든다든지, 이슬람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상실케하는 방법 등 상상하기에도 끔찍한 고문방법들이 소개되었다. 전세계에 민주주의를 퍼뜨리겠다는 미국이 이런 말도 안되는 인권 침해를 자행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Time지가 수용자 063에게 어떠한 심리적 방법이 사용되어 그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정작 미국에서 그러한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관타나모 기지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해 비판이 있다는 내용도 있었으나 그것은 두세 단락에 불과했다.
미국은 최강대국이고 사회, 문화적으로도 선진국으로서 우리가 배울 점이 많은 나라다. 그러나 요즘 미국의 행보를 보면, '저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반역사적인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고 -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주한 미군의 존재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 거기에 우리나라가 처신하는 데 있어 딜레마가 있는 것 같다. <BR>]]></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퍼온글] '사고  착오' 또는 '사고의 게으름' ? -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65519</link><pubDate>Mon, 25 Apr 2005 21: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655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35065&TPaperId=66551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4/80/coveroff/897013506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35065&TPaperId=6655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a><br/>구춘권 지음 / 책세상 / 2005년 03월<br/></td></tr></table><br/>저자에 따르면 &lt;9.11&gt;과 같은 &lt;메가테러&gt;란 &lt;충격과 공포&gt;를 극대화하여 
미국 사회 내부에서 미국 정부의 패권 전략 수정을 요구하는 
압력이 일어나는 것을 노린다고 한다. 
정말 그런 걸까 ? 
&nbsp;
부시 정부는 플로리다 주의 부정선거를 통해 
더우기 미국 정치사상 보기 드문 대법원 판결에서 한표 차이로 대통령이 되었기에 
치명적인 정통성 위기를 안고 있었다. 
&nbsp;
게다가&nbsp;&nbsp;냉전이 끝난 후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nbsp;미국경제의&nbsp;호황이 
한갓 분식회계로 치장한 거품경제로&nbsp;드러나는 파국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nbsp;&nbsp;&nbsp;&nbsp;&nbsp;
&nbsp;
바로 그때&nbsp; &lt;9.11&gt;은&nbsp; 부시를 한순간에 미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지도자로 돌변시겼다.&nbsp; 
그는 유례없는&nbsp;지지율을 만끽하며 두 차례에 걸친, 아무 근거도 없는 침략 전쟁을 
자행하고는 지난 해 또 다시 의혹에 쌓인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하기에 이르렀고&nbsp; 
&nbsp;( http://www.peacemaking.co.kr/news/news/view.php?papercode=PEACE&amp;newsno=1085&amp;pubno= )
&nbsp;
절박했던 미국 경제의 구조 개혁은&nbsp;&lt;국가 비상사태 &gt;에 휩쓸려&nbsp; 실종되었다.&nbsp;&nbsp;&nbsp;
&nbsp;
&lt;9.11&gt;은 미국의 패권 전략 수정을 강요하는 압력이 되기는 커녕 
부시 정부를 정통성 위기에서 구출하고 미국의 고질적인 정경 유착과 권력 남용에 
면죄부까지 던져 주었다.&nbsp;&nbsp; 
&nbsp; 
&lt;9.11&gt; 이후에 미국 밖에서 벌어진, &lt;알카에다&gt;가 꾸몄다고 알려진 테러도 마찬가지다. 
아랍권에 대한 반감을 조장하고 이라크 파병에 대한 동맹국(영국, 호주, 한국, 일본 등등)의 
지지 여론이 일어나는 데 한 몫을 했다. 
<BR>
저자의 분석이&nbsp;현실에 어긋나는 이유는 무얼까 ? 
&nbsp;
저자는 &lt;9.11&gt;같은 사건을 벌일 능력이 있는 반미 테러조직이 실재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nbsp; 
&nbsp;
그렇게 믿다 보니 '&nbsp;이 사건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라고 묻고 범인을 추적하는 
극히 상식적인 '수사 절차'를 밟는 대신에
&nbsp; 
'오사마는 왜 그에게 돌아갈 비난을 무릅쓰고 &lt;9.11&gt;을 감행했을까'라고 묻게 되고 
여기서&nbsp;실제 현실과는 무관한 저자의 '희망사항'이 '정답'으로 제시된 것이다.&nbsp;
&nbsp;&nbsp;&nbsp;&nbsp;&nbsp;
"&lt;9.11&gt;이 반미 테러조직의 작품'이라는&nbsp;믿음은 저자로 하여금&nbsp;
&nbsp;
&nbsp;&lt;9.11공식 버전&gt;의 진위를 가리는 정밀한 고증작업에 눈을 감게 만든 대신&nbsp; 
&lt;오사마 빈 라덴 &gt;이 이끄는 '알라바마의 도적들'이 신출귀몰하는 것은&nbsp;&nbsp;&nbsp;
미국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는 유연한 조직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이라는,&nbsp; 
마치 미국 중앙정보국의 발언을 연상케 하는 해설을 하게 만들었고 급기야&nbsp;&nbsp;&nbsp;&nbsp;
'국제 정세의 현 시기는 &lt;메가테러&gt;와 미국의 패권 전략이 충돌하는 시기'며 
미국이 패권 전략을 포기하지 않으면 반미 테러 역시 지속될 거라는 
지극히 피상적인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nbsp;&nbsp;&nbsp;
저자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nbsp;&lt;9.11&gt;을&nbsp; 분석하는 작업은 
전세계의 비판적 지식인과&nbsp; 언론인
(&nbsp;http://www.blessedhopebaptists.or.kr/trumpet/terror.mht&nbsp;)
&nbsp;
그리고 &lt;9.11&gt; 희생자 유가족들 (&nbsp;http://www.911citizenswatch.org/&nbsp;)에 의해 
사건 직후부터 맹렬히 진행되었다.&nbsp;&nbsp;
&nbsp;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저자가 말하는) &lt;메가테러&gt;가 사실은 
&nbsp;
‘위기에 처한 권력이 그들의 숨겨진 정치 경제적 목적 (Secret Agenda)을 
관철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조작하는 심리전의 기술’이다. 
&nbsp;
( 자세한 내용은 http://www.911truth.org&nbsp;: 
&nbsp;&nbsp; http://globalresearch.ca/articles/CHO409D.html&nbsp;)&nbsp;
&nbsp;
여기서 &lt;정치 경제적 목적&gt;이라 함은 
&nbsp;
권력이 처한 매 시기의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nbsp;
허약한 정통성의 보강, 경제위기의 폭력적 해결, 권력의 재창출, 
대외 침략 전쟁 따위를 말한다.&nbsp; 
&nbsp;
이러한 목적 실현에는 대중의 사고력을 마비시켜&nbsp; 
자발적 지지와 동의, 참여를 유도하거나 
대중의 저항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사회 심리적&nbsp;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lt;충격과 공포의 극대화&gt;가 달리 필요 하겠는가 ?
&nbsp;
어떤 권력이든 그것이 한 사회의 소수 과두 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한, 
다수의 동의와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 공학적 기술이 필요한데 
&nbsp;
그 권력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면 
그 정치 공학적 기술 또한 대단히 비열하고 잔인해지기 마련이다.&nbsp; 
<BR>
멀리 갈 필요도 없다. 
&nbsp;
최근에야 ‘이제는 말할 수 있다’(MBC)나‘ 
&nbsp;
그것이 알고 싶다’(SBS)같은 영상매체를 통해서 드러난 
&nbsp;
&lt;육영수 피살 사건&gt;이나 &lt;김현희/KAL 858기 실종 사건&gt;을 예로 들어 보자. 
&nbsp;
사건의 배후에 &lt;국가 속의 국가 권력&gt;이 개입해 있고 
&nbsp;
모든 언론이 권력이 건네주는 공식버전을 받아썼다는 거 
&nbsp;
이젠 상식이 되었다. 
&nbsp;
그런데 이같은 정치공학이 유독 한국에서만 일어난 걸로 
착각하는 지식인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BR>
시야를 넓혀보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널려 있다.&nbsp;&nbsp; 
&nbsp;
예를 들면 지난 60년 대 부터 
유력한 정계, 경제계 요인들에 대한 암살 사건. 폭파 사건이 줄을 이었다.&nbsp; 
&nbsp;
미국의 J.F. 케네디 대통령,
&nbsp;
이탈리아 기민당 당수 모로, 
&nbsp;
독일 드레스덴 방크 총재 폰토,&nbsp; 
&nbsp;
도이체 방크 총재 헤어하우젠
( http://peacemaking.co.kr/news_view.php?no=277&nbsp;)
&nbsp;
독일 신탁관리청 대표 로베더는 
&nbsp;
&lt;정치 테러&gt;의 전형적인 희생자들이다.
&nbsp;
케네디 암살은&nbsp; 일개 정신불안자의 단독 범죄로 
또 유럽에서의 사건은 극렬 좌익 테러단의 범죄로 알려져 있으나&nbsp; 
&nbsp;
희생자들은 예외 없이 투기&nbsp;금융자본의&nbsp; 이해를 거스르고 있었고 
&nbsp;&nbsp;
그들이 제거된 후 국제 정세에는 전쟁과 경제 불황이 엄습했다. 
&nbsp;
&lt;9.11&gt;은&nbsp; 사건 현장이 CNN을 통해 전세계에 실황 중계되었다는 점에서 유별나지만 
각본의&nbsp;기본 골격은&nbsp;앞에 열거한 사건과&nbsp;큰 차이가 없다. 
&nbsp;
2천 명이 넘는 불특정 다수를 무차별 살상하는 테러를 
특정 개인을 제거하는 테러와&nbsp; 같은 유형으로 보는 데에&nbsp;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겐 
&nbsp;
육영수 개인의 피살과 민간 여객기 (KAL 858기) 승객의 무차별 희생이라는 두 사건의 
공통점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nbsp;
네로 황제가 로마를, 히틀러가 국회의사당을 불지르고 
정적을 제거한 후 '천년 왕국'의 야욕을 불태우다가 거꾸러진 역사도 떠올려 보면 좋겟다.&nbsp;
&nbsp;
많은 지식인들이 &lt;9.11 공식 버전&gt;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nbsp;&nbsp;
&nbsp;
그들이 '제국의 가신'이 아니라면&nbsp; 
&nbsp;
국제 정치테러의 역사와 그 실체에 대한 인식이 빈약하거나 
&nbsp;
권력과 언론이 유포하는 화두와 가상 현실 (virtual reality)의 이면을 
투시하는 감각이 부족해서 
&nbsp;
또는 미국의 정치/금융&nbsp;권력의 위기구조와 그들의 생존전략에 대한&nbsp; 이해가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nbsp;
다시 &lt;육영수 피살&gt;과 &lt;김현희 사건&gt;을 예로 들면 매 단계 권력이 직면했던 
위기와 관련해서만 이 사건을 정확하게&nbsp;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nbsp;
독일에서 공부한 저자가&nbsp;&nbsp;&lt;9.11공식 버전&gt;을 뒤집는 독일에서의&nbsp; 연구 성과 
(&nbsp;http://peacemaking.co.kr/news_view.php?no=1348&nbsp;)나 
&nbsp;
유럽에서 보도된 대단히 중요한 기본 정보를 외면하고 있는 것도 아쉽다.
&nbsp;
예를 들면&nbsp;&lt;9.11&gt;을 두 달 앞두고&nbsp;&lt;오사마 빈라덴&gt;이 두바이 미군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현지 미 중앙정보국 요원 &lt;래리 미첼&gt;의 방문을 받은 후 파키스탄 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보도다.
&nbsp;
프랑스 신문 &lt;르 피가로&gt;와 프랑스 국영 국제 방송이 현지 외교 정보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한 이 사실은 러시아 &lt;프라우다&gt;,&nbsp; 독일 &lt;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gt;,&nbsp;&nbsp;
이탈리아&nbsp;&lt;라 레푸블리카&gt; 등 16개 국의 주요 언론에서&nbsp;인용 보도했다.&nbsp;&nbsp;
(&nbsp;http://peacemaking.co.kr/news_view.php?no=102&nbsp;) 
&nbsp;
정치 테러의 본질을 정확히 보는 것은 한 사회의 위기와 
국제 정치 동학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자에겐 외면할 수 없는 과제이지만&nbsp;
자칫 &lt;사고의 착오&gt;나 &lt;사고의 게으름&gt; 에 빠지면 
알게 모르게 권력의 심리전을 대리 수행하는 병사가 될 수도 있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허 광 (전 시사저널 독일 주재 편집위원) 

&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54/80/cover150/897013506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35065</link></image></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헌책방 동호회 (숨어있는 책)</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34318</link><pubDate>Thu, 03 Mar 2005 22: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634318</guid><description><![CDATA[<BR><BR>www.freechal.com/booklover
우연히 이사준비를 하다가 2004년 9월호 주간한국을 읽게 되었고 그 중에 헌책방 동호회를 소개한 글이 있어 간략히 옮겨 본다. 이제껏 나중에 다시 보려고 스크랩 해두거나 한 가지 기사를 보관하기 위해 잡지 전체를 버리지 않고 두기도 했는데 기사 내용을 간단히 옮겨 적고 잡지를 버리기 위해 새로운 방식의 스크랩을 시도해 본다. 
기사의 제목은 '발품 팔면 마음이 부자되죠' - 책갈피에 담긴 타인의 열정 엿보며 공유의 즐거움 누려-다.
헌책방...무언가 구수한 추억이 서려있을 것 같고, 책을 읽던 사람들의 손때나 삶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일 것 같긴 한데 기사에서 나온 것처럼 요즘에는 워낙 출판 문화가 발달해 있고 알라딘과 같은 인터넷 서점을 통해 책을 싸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선뜻 찾게되지 않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헌책방 동호회는&nbsp;&nbsp;헌책방 다니기를 즐겨하던 김민성씨가 다음에 카페 '숨어있는 책'을 개설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애칭으로 '숨책'이라고도 불려지는 이 공간은 헌책방과 책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점차 알려지면서부터 헌책방 동호회로 성장했다. 
아직 숨책에 방문하기 전에 이글을 쓰는 나로서는 그곳에 가면 어떤 정보들이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기사에서는 초보들에게 요긴한 '헌책방 땅그림 - 김민성씨가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그린 헌책방 지도', 헌책방마다의 성격, 가격대 등의 정보를 구할 수 있는 '헌책방 날적이', 헌책 표지 손질법에서부터 책꽂이 만드는 법 등을 알 수 있는 '나의 책 사랑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외국어 전용 헌책방으로 "한남동 이슬람 모스크 근처의 '애비스 북누크'와 녹사평역 근처 '포린 북 스토어'"를 추천하는 글이 눈에 띈다.
동호회 회원들에게 헌책을 찾는 것은&nbsp;단지 저렴하게 많은 책을 사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절판돼 버린 책을 혼자만의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찾아낸다든지 책 한귀퉁이에 쓰여 있는 끄적거림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만화매니아 박지수씨는 절판된 로봇물 패러디 만화 '출동!! 먹통 - X'를 복간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작가와의 인터뷰를 추진하는가 하면 400명의 예비독자를 모으며 출판사와 협상을 한 끝에 마침내 복간을 성사시키기도 한 에피소드도 가지고 있다. (참 대단한 열정이다.)
책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아직까지 새 책의 깨끗함을 좋아하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썼고 병균이 있을지도 모른다(-0-)는 헌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선뜻 헌책방에 가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책에 대한 사랑을 키우려면, 그리고 삶에 대한 여유를 느껴보려면 헌책방에 들러 헌책을 뒤적거려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헌책동호회의 회원들처럼 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책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어 나만의 풍성한 서재를 가질 날을 꿈꿔본다.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5572011391256.jpg</url><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634318</link></image></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퍼온글] 원희룡-시대의 아픔과 역사적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589558</link><pubDate>Tue, 14 Dec 2004 23: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589558</guid><description><![CDATA[시대의 아픔과 역사적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 체험! 삶의 현장!&nbsp; 2004/12/14 06:42&nbsp; <BR>&nbsp;<BR>http://blog.naver.com/wonheeryong/100008517133&nbsp;<BR>&nbsp;<BR>원희룡(국회의원)&nbsp;
먼저, 이미 재판이 끝나고, 이제는 사면복권까지 이루어진 이철우 의원을 놓고 <BR>근거도 없이 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는 <BR>지금의 우리 한나라당의 행동은 도가 지나친 행동입니다.
이철우 의원과 관련한 이번 일들은 과거 재판을 받아, 그에 따른 대가를 치룬 사안입니다. <BR>동시에, 이철우 의원 스스로 현재는 이념이나 생각을 바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BR>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불행한 시대상황 속에서 이뤄진 행위에 대해 <BR>이념과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지금의 진실공방은 <BR>종교재판에 다름 아니며, <BR>이는 마치 공안검사가 피의자를 취조하는 격입니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과거 공안검사의 취조실로 변조시키는 <BR>지금의 이런 공방에 국민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BR>.<BR>.<BR>이철우 의원 사건은 우리가 껴안고 나아가야 할 시대적 아픔의 한 부분입니다.<BR>굴곡이 심했던 한국 현대사는 <BR>건국 당시의 좌우 대립과 산업화 시기의 소외를 거쳐 <BR>민주화 시기의 격렬한 반독재 투쟁에 이르기까지 <BR>많은 시대적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우리의 질곡의 역사 속에는 소외되고 고통받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건국시기에 좌우 이념 대립 과정, 산업화 과정, 민주화 과정에서 생긴 <BR>시대의 아픔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엄연한 현실입니다.<BR>이번 이철우 의원을 둘러싼 공방은 <BR>우리 한나라당에게 이같은 시대와 역사의 아픔, <BR>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말합니다.<BR>.<BR>.<BR>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치유해야만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BR>따라서, 우리 한나라당은 단순한 진실공방에서 벗어나 <BR>시대적 아픔을 치유하겠다는 역사적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한나라당은 이런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BR>온 몸으로 껴안고자 노력해야 합니다.<BR>우리 한나라당은 대승적 견지에서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을 <BR>국민 통합의 과정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나라당은 이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BR>우리 역사의 미래의 동력으로 삼는 새로운 리더쉽을 국민 앞에 보여줘야 합니다. <BR>.<BR>.<BR>저는 국내에 주체사상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BR>“강철 서신” 김영환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었습니다. <BR>학생운동 시절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BR>저는 당시 그가 주장했던 "수령론" 등의 주체사상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김영환에게 <BR>주체사상에 근거한 운동은 옳지 않다고 만류했었습니다. <BR>그때 그랬듯이, 저는 지금도 주체사상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BR>주체사상에 경도된 사람들이 일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역사와 삶의 경험 속에서 <BR>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그들의 말을 믿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한때 주체사상에 경도되었지만, <BR>이제는 우리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새로운 선택과 노력을 하고 있는 <BR>이들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포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BR>.<BR>.<BR>한나라당은 자유민주주의를 제 1의 가치로 삼고 있는 정당입니다. <BR>한나라당은 다양성과 다원성을 인정하고, <BR>서로 다르지만 서로 공존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BR>바로 자유 민주주의적 리더십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한나라당이 말하는 <BR>"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리더쉽임을 <BR>우리는 인식해야만 합니다. <BR>&nbsp;
PS : 이 글은 이철우 의원과 관련한 지금의 공방이 시작된 지난 8일 이후,<BR>9일 있었던 한나라당 최고의원 비공개 회의를 시작으로 수요모임, <BR>어제 있었던 한나라당 비공개 의총에 이르기까지 <BR>한나라당내 모든 공식적인 회의 자리에서 <BR>제가 그동안 계속적으로 일관되게 발언했던 내용입니다.
그동안 블로그에 아무런 덧글도, 포스트도 올라가지 않았던 점에 대해<BR>많은 이웃분들이 왜 침묵하고 있느냐? <BR>장고의 시간에 빠진 것이냐? 등의 질문들을 해 오셨습니다.
아울러, 이같은 저의 일관된 문제제기 역시 <BR>그동안의 당내 회의가 모두 비공개로 열린 관계로<BR>언론에게 제가 이번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져<BR>그동안 언론으로부터 침묵하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 저의 블로그는 <BR>원희룡의 진실한 속마음을 가감없이 적어 놓을 수 있는 <BR>저만의 조용한 공간을 가지고 싶었던 <BR>저의 애초의 소망과는 달리, <BR>포스트는 물론이거니와 <BR>심지어 덧글 하나 하나까지 언론에 기사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 사안의 중대성을 비추어 볼 때, <BR>언론에 먼저 이야기하기 보다<BR>당내에서 뭇매를 맞는 한이 있어도,<BR>당내 모든 공식 회의 기구에서 먼저 이야기하고,<BR>우리 스스로의 반성과 변화를 호소하고, 또 촉구하고 싶었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인해 그동안 포스트를 작성하지 못했고,<BR>여러분들의 글에 답변 글을 달아 드리지 못했습니다..<BR>이 점에 대해 이웃들의 양해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이번 이철우 의원과 관련한 저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BR>어제 의총으로 인해 당내 공식적인 회의 기구에서 <BR>저의 입장 표명과 문제제기를 충분히 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내 공식적인 회의 기구에서 <BR>이번 사안에 대한 저의 입장을 충분히 밝혀왔고,<BR>또 충분한 설명과 문제제기를 진행한 이상,<BR>이제는 더이상 언론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BR>한나라당은 원희룡 최고위원을 출당조치한다고 밝혔다.<BR>한나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아무리 소장파의 대표격이라 해도 자당에 이런 막말을 한 것은 지나친 해당행위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지도부의 숙의 끝에 원의원을 출당조치키로 결정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nbsp; <BR>&nbsp;<BR>불쌍하다! 한나라당...]]></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최장집교수)</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568228</link><pubDate>Tue, 09 Nov 2004 00: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568228</guid><description><![CDATA[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br/>최장집<br/>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br/><br/><br/>I.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사회경제관<br/><br/>오늘의 한국현실에서 대다수 일반 시민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생활의 질적 저하와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적, 인간적 피폐화만큼 큰 문제는 없다. 고실업, 고용불안정, 노동시장의 내부분화에 의한 이른바 대규모 비정규직 노동자의 누적,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가계파산에 의한 신용불량자의 양산, 빈곤층의 확대 등 오늘날 한국의 노동시장 상황을 나타내는 양상들은 IMF개혁패키지를 통해 급격하게 전개된 한국경제의 구조변화를 특징짓는 중심 내용들이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가 초래하는 사회해체 효과는 더 파괴적인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살인 및 강력범죄의 급증, 가족동반자살이라는 비극적 형태를 포함하는 자살률의 급증, 세계 최고수준의 이혼율과 거꾸로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 등의 지표들은 사회해체의 급격함과 그 심각함의 일단을 드러낸다. <br/><br/>빠른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온존되고 있었던 전통사회적 구조와 인간관계의 공동체적 연계들, 사회안정에 기여했던 잘 발달된 중산층이 중심이 된 계층구조, 높은 경제성장의 지속 등은 그 동안 한국사회의 안정화와 공동체성의 유지를 가능케 했던 요소들이었다. IMF위기의 충격효과와 더불어 이러한 구조들이 해체되면서, 급속히 팽창한 사회저변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계층구조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의 문제는 그만두고라도 변화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회적 격변이 우리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종국적으로 어떤 한국사회로 귀결시킬지, 그것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게 될 것인지, 과연 이런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대체 어떤 내용을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갖는 지식의 한계는 크다.<br/><br/>오늘의 노동문제가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노동운동의 한계 즉 노동운동이 서 있는 기반의 협애함이라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환경과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조건에서도 한국경제의 생산체제는 과거 권위주의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중심축이 재벌중심의 대기업생산체제라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재벌기업과 그 하청업체의 위계구조하에 중소기업이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고용문제에 있어서나 노동운동에 있어서나 그 중심적 이슈가 비정규직 문제라는 것은 두루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비해 현격하게 낮은 임금, 높은 고용불안정, 낮은 조직률, 기업복지 및 노동보호입법으로부터의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정규-비정규직 차이는 단순한 차이를 넘는 의미를 갖는다. 공공부문의 노동자도 수혜의 정도에 있어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범주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과 그 전투성은 그들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대규모 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운동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서있는 기반의 협애함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재벌중심의 경제체제와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제어하는 영향력을 조직하는 데 큰 한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br/><br/>한국의 노동문제가 전체 생산체제와 사회적 역할에 있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기업 및 조직에서의 노동문제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로의 한국경제의 급속한 재편은 기존의 사회계층구조를 새로운 형태로 양극분해하고 있고, 국가정책에 의해 지원되었던 ‘지식기반산업화’ 역시 이러한 경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기존의 안정적 대기업군, 자산소득자, 경영 및 지식산업 분야의 전문가들이 새로운 사회구조의 상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동안, 중소기업과 영세산업, 서비스산업 등 주변적 산업부문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노동자집단은 분명 보다 절실한 노동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들 주변적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여성이나 파견직 노동자, 중소 영세산업의 저학력 고령노동자, “계급 이하의 계급”으로 범주화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임금, 고용 및 노동조건은 실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즉 실업자와 취약계층, 그리고 신빈곤층으로 분류된 신용불량자들의 경우는 주변적 노동자집단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노동시장으로부터의 퇴출과 진입이 유연하고, 열려있는 미국이나 서구에서의 노동시장과는 달리, 시장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극히 폐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구조에서, 그리고 열패자들에게 가혹한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이들은 실로 소외와 궁핍, 사회적 차별과 천시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br/><br/>경제의 생산체제가 어떤 구조와 내용으로 변하든, 예나 지금이나 재벌중심 생산체제의 중심적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한 나라의 경제성장, 한 정권의 경제적 업적이 실제로 이 재벌기업의 투자와 업적에 의존하게 될 때, 정부의 성장정책은 곧 이들 기업의 투자인센티브와 투자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전환의 직접적 결과로 재편된 현재와 같은 노동시장구조에서, 이러한 정책이 갖는 한계는 수출이 호조를 띠고 기업이윤이 증가되고 경제 전체의 성장률이 상승한다하더라도 고용의 증대와 아울러 이들 주변적 노동자집단의 권익증대, 노동조건의 향상을 결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고용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그리고 바로 경제의 호전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고용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다가오는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아마 저조한 고용증대는 테크놀로지 향상에 따른 노동력의 대체효과일 수도 있고, 국제경쟁력 약화로 인해 미국국내의 고용수요가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콜럼비아대학의 글라시엘라 치칠니스키(G. Chichilnisky) 교수가 강조하듯이, 튼튼한 중소기업의 발전이 고용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Financial Times 04/05/14). 중소기업의 고용효과에 관한 한 한국경제도 미국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소기업의 발전이 중요한 이유는 거시적으로 볼 때 재벌기업보다 더 큰 고용을 포괄한다는 것과, 광범한 주변적 노동자군이 이 허약한 중소기업부문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컨대 오늘의 한국경제 문제는 재벌기업의 노사가 민주적 틀 내에서 어떠한 공존협력관계를 설정하느냐, 어떻게 중소기업 발전이 가능한 생산체제를 만드느냐, 어떻게 재벌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다이나믹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시장구조를 창출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광범한 중소기업부문이 재활성화되지 않는 한 주변적 노동자집단의 ‘2등 노동자화’의 경향은 억제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보편적 기반은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다. <br/><br/>II. 대안적 사회경제정책 없는 민주주의의 취약성<br/><br/>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뤄져야 할 실제 문제(real issue)는 절대다수의 노동인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매우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며,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정책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일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없다면, 사회적 불만이 확대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의 기반도 약해질 것이다. <br/><br/>이러한 관점은 오늘의 한국경제의 위기와 그로 인한 사회적 효과들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IMF위기라는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충격에 의한 결과일 뿐 아니라 이에 대응했던 민주정부들에 의한 주체적인 정책적 대응이 빚어낸 복합적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만약 민주주의가 평등한 정치참여의 권리를 통해 실현되고, 시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밖으로부터 주어진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은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역량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IMF개혁패키지로 대변되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경제개혁이 한국의 민주정부를 매개로 어떻게 관철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정부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면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IMF충격의 효과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전면적 확대가 엄청난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민주정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br/><br/>하나의 중대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부정책의 의제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정치적 이슈 내지는 정치적 사안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우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사회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정치의 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그 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적 내용과 이를 실천할 정책적 수단을 마련하도록 하는 제도적 힘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는 실제 이슈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학자 바크라크와 바라츠(Bachrach &amp; Baratz)는 다원주의적 권력 개념을 비판하면서 ‘비결정’(non-decision)이라는 개념으로 이 문제를 설명했다. 그들은 먼저 ‘결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원주의적 권력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이나 이익들이 표출되고,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모든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은, 만약 그것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정치경쟁의 장에서 이익집단이나 정당을 매개로 표출되고 선거를 통해 대표되고 종국에는 정책으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 경우 실제의 정책은 이러한 이슈를 둘러싸고 이해당사자들이 경쟁하고 타협한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때 이러한 정치과정을 우리는 정치세력과 갈등들의 다원적 경쟁 내지는 다원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의 결정이 곧 사회적 갈등과 힘 관계의 정직한 반영이라고 한다면, 정책결정 수준에서의 정치적 다이나믹스와 정책의 산출은 사회갈등의 축약이며 정치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사회경제적 현실과 정치 간의 매개가 순기능적으로 작동된다면,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용이하게 정치적으로 해소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고, 사회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낙관적 사회발전의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 정치관에 도전하는 비결정의 개념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관찰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정책과 그 결정은 전체 정치과정과 권력관계의 다만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중대한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을 마땅히 이슈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이유는 이슈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슈화하지 않는 또는 못하게 하는, 다시 말해 정책결정의 사안으로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힘 또는 영향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즉 이 관점은 이 비결정의 영역/수준이야말로 보다 더 중요한 정치과정이요, 권력관계라는 사실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br/><br/>이 문제는 민주주의에 있어 논의되는 이슈/사안의 범위와 성격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회의 중요 문제에 대한 시민개개인들의 계몽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루 알다시피 정치참여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슈의 범위와 계몽적 인식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상적으로 지나쳐 버린다. 한국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유권자 개개인이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올바른 이해에 근거한 판단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참여가 아무리 확대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발전을 도모하기 어려우며, 역으로 한 사회의 중대문제는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민주정부의 무능력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무관심, 냉소주의, 투표율의 하락현상이 보여주는 정치참여의 저조함은, 사회의 중대이슈를 의제의 범위 밖으로 밀어내고 덜 중요하고 나아가서는 하찮은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정치가 왜소화되고 타락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정치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br/><br/>정치권에서의 정치적 대립이 아무리 격렬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높고, 시민들의 시민운동에의 참여가 아무리 열성적이라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중대문제가 정치사안으로부터 배제되고, 쟁점으로 떠오르지 못할 때 민주주의를 통한 집단적 결정의 내용은 민주적 가치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뭐든 참여의 확대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계몽적 이해로 뒷받침된 중대사안이 이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할 때, 새로운 영역으로의 정치참여는 다른 분야에서의 참여를 오히려 떨어뜨린다는 ‘참여적 다원주의의 역설’이 나타나기 쉽다(Dryzek 1996, 7). 바꾸어 말하면 정당간의 경쟁이든, 시민사회의 운동이든 잘못된 이슈, 중요하지 않은 이슈에 열정을 쏟는다면 정작 중요한 이슈에 대한 참여를 제약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은 사회의 중대사안을 정치영역에서의 중대사안과 병행시키는 일을 통해 민주정부의 효능을 창출할 수 있었는가? 그럼으로써 체제로서의 민주정부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는가? 이 문제들은 우리 모두의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br/><br/>그 동안 민주정부들의 경험을 통해, 여야당간의 갈등이 첨예하였던 정치적 이슈영역은 대체로 네 가지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정당간의 정치경쟁의 규칙을 어떻게 제도화하는가 하는 정치의 제도개혁을 둘러싼 이슈이다. 집권정당은 어떻게 권력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야당은 어떻게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다음 선거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쟁투로 정치는 요란했다. 둘째는 역사, 이념 및 가치, 정서적 문제를 둘러싼 이슈영역이다. “역사 바로세우기”, “지역감정 극복”, “과거사 진상규명”, “용공 전력조사” 등은 모두 민족주의, 반공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가치, 또는 지역정서의 동원이 중심이 되는 이데올로기적, 감정적, 상징적 이슈영역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데올로기나 집단적 열정을 쉽게 동원하게되어 정치를 극한적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현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새로운 중요이슈가 된 행정수도 이전 및 이른바 “지역혁신체제”의 추진과 같은 지역개발정책 분야이다. 그러나 정책추진자들이 중앙집권화의 폐해와 분권과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안, 그것이 과연 주장하는 대로의 바람직한 효과를 낳게 될지, 정말 모든 지역이 자립적 발전모델을 갖는 사회가 될 것인지에 대한 우리사회의 확신은 더욱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넷째는 사회경제적, 정치경제적 이슈영역이다. 이 문제는 그간 정치적 이슈로서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분명 현실적 삶의 세계에서 중심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슈영역의 우선순위가 있다면, 네 번째 사회경제적 이슈가 최우선 순위에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최소한 서구민주주의에서의 상황은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현실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문제가 제일의 우선순위를 갖는 정치사안이 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중요 의제로 부각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정치의 제도개혁, 이념대립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상징적 이슈 또는 삶의 현실적 문제와는 거리가 먼 지역개발주의적 사안들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자리잡았다. <br/><br/>물론 기존의 지배적 담론을 당연시하면서 정치에 있어서도 경제문제가 최대 이슈라고(또는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문제인식에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이슈를 곧 경제성장의 문제와 동일시한다. 고용확대, 노사관계, 경제적 불평등의 완화, 복지의 증대, 빈곤문제 등을 포함하는 모든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성장이 창출하는 넘쳐흐르는 효과(trickle-down effect)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정부의 가장 중심적 정책은, 나아가 정치의 핵심적 역할은 모두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시장의 작동과 자본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든 정책이나, 행위는 부정시된다. 이러한 일면적 경제성장관이나 독트린은 과거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통해 신화가 되었고, IMF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적 논리 기반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 사실상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대안적 경제성장관이나, 재벌중심 생산체제의 거버넌스 문제와 같은 정치경제적 문제 혹은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가 가져온 여러 사회정책적 문제들이 중대이슈로 자리잡을 여지는 별로 없다. <br/><br/>권위주의적 관치경제 시기로부터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만큼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그간 경제정책에 대한 민주정부들의 개혁레토릭이 어떠했든, 혹은 정부 내 이른바 개혁파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언표화되는 주장들이 얼마나 개혁적이든, 반대로 민주정부의 경제관이 급진적 또는 반시장적이라는 주류언론들의 우려가 어떠했든 민주정부에서조차 실제의 경제정책은 민주화 이전과 그 차이를 실감하기 어렵다. 가장 변하기 어려울 것 같아 보였던 냉전반공주의의 구조조차 민주화 이후, 특히 “햇볕정책” 이후 크게 변화했고 또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확실히 경제영역에 관한 한 일면적 경제성장의 독트린은 어떠한 대안적 도전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경제문제, 또는 경제정책 사안을 둘러싼 이슈들이 국회에서의 정당간 논쟁에서, 신문의 지면에서 언제나 가장 빈번하게 가장 중요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성장의 방법론을 둘러싼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결정’의 수준에서, 거의 의식화(儀式化) 되어버린, 그리하여 사태를 변화시키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익숙한 주제에 불과할 뿐이다.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고 있으며 정치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br/><br/>따지고 보면 기득이익이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영역은 냉전반공주의도 아니고, 친일파청산 문제와 같은 역사적 가치의 문제도 아닌, 경제와 관련된 이슈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의 이론가 시리아니(C. Sirianni)는 여성운동의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한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 이 새로운 정의는 그 동안의 전통적인 사회관계에서는 전혀 이슈가 될 수 없었던 부부관계를 포함하는 가부장적 가정 내의 관계나 가사노동과 같은 사적관계의 영역으로까지 여성운동을 확대할 수 있는 이론화에 기여했다. 같은 논리로 “경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또는 “시장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정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경제나 시장이 성장을 추동하고, 경쟁과 같은 자연스런 본성적 인간행위가 필연적으로 효율성을 창출한다는 신화가 아닌, 성장이든 시장효율성이든 그것은 사회의 힘의 관계와 가치가 반영된 정치적 결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이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포괄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경제를 향한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통합의 효과를 가짐으로써 정치안정화에 기여하며, 일의 윤리, 일에 대한 헌신을 높이고, 갈등적 노사관계를 보다 민주적이며 협력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며,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통해 기업의 투자의욕을 높일 뿐만 아니라, 수요의 증대를 통해 성장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br/><br/>여기에서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온 한국 정치의 한 속성이 드러난다. 정치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중심적으로 대면하고, 그 영역에서의 갈등을 해소해 가는 과정에서 정치의 제도개혁 이슈나 역사적 정서적 이슈를 흡수통합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후자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몰두하면서 전자를 방치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후자의 비정치경제적 이슈들이 과도하게 정치화되고 결과적으로 정치는 이데올로기적 쟁투의 장이 되는 동안, 전자의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탈정치화된다. 선거를 통해 사회로부터의 요구를 위임(mandate)받은 것과는 무관하게 정부가 된 민주파의 경제정책은 권위주의적 성장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정책은 그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유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과거 권위주의적 관치경제를 주도하고 운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정책은 관료의 수중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그간 여야 정당은 상호 공존이 가능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적 담론과 감정으로 충돌해왔다. 정치인들과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짧은 사이클로 순환하면서 파노라마처럼 명멸하였고, 국회의원 교체율이 세계 최고임을 자랑할 만큼 매 선거마다 대규모 퇴출이 계속되었다. 여러 수준과 여러 정책영역에서 수많은 전문가집단의 참여가 확대되었고 뭔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한 인상과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정책 영역에 관한 한 변한 것은 없다. 어찌보면 여야간 정치적 갈등의 격렬함은 실제로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가 배면에서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실제 이슈에 있어서는 극히 좁은 갈등의 범위에 한정되어 다퉈야 하는 협애한 정치적 대표체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br/><br/>그렇다면 누가 사회경제적 이슈를 전면으로 끌어낼 것인가? 그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투표자 다수의 지지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부가 일차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치 않다. 사회경제적 이슈는 갈등의 정도와 폭이 가장 큰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이슈를 전면으로 끌어내는 데는 부와 권력에 있어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갖는 기득이익들의 도전이 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많은 정치적, 사회적 힘들이 투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은 이 영역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정당은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선출된 민주정부로 투입되는 통로이고, 정부의 정책결정이 사회로 전달되는 정치의 조직망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좁고 얕은 사회적 기반을 갖고, 협애한 이념적 스케일로 정당간 차별성이 적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집단이 과다대표되고 있으며, 제도화의 수준도 낮고 정체성도 약한 정당들이 정책적 대안을 유능하게 조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문제는 아직도 지난한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민사회로부터의 운동의 힘들이 투입될 필요가 있다. 그 정책이슈를 지지하는 많은 사회적 힘이 투입되지 않고서는, 즉 대통령이나 최고 정책결정 수준의 결정자나 정치엘리트들의 의지라든가, 개혁마인드라든가 하는 것만으로는, 많은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정치적 이슈의 전면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정책사안이 중대할수록, 이해당사자들의 갈등의 정도가 클수록 특정의 정책은 그 정책에 대한 사회적 힘의 투입 없이는 실현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안을 조직하는 문제에 있어, 헤게모니의 영역 밖에서 사고하고 행위하는 지식인들의 역할 또한 필수적이다.<br/><br/>III. 현실적 대안의 중요성<br/><br/>그렇다면 노동과 복지문제를 포괄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대면하고 주요 정치적 사안으로 이슈화함에 있어서 어떤 대안적 처방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검토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의 제안이기보다도 정치인, 지식인, 대의(大義)추구적 사회운동, 노동 및 민중운동 등 여러 사회집단들 사이의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한 정치적, 사회적, 지적 노력이 진지하게 이루어낸 결과물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대안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대안의 성격, 방향 및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대안형성의 방법론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권위주의시대 이래의 경제정책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배제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현실에서 기존의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는 경제정책 노선에 수정을 가하기 위해서는 그 대안은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하고, 그럼으로써 넓은 범위의 콘센서스를 창출할 수 있고, 그리고 집행 가능한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실현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면 대안으로서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진지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결의라기보다는 단지 “나의 이념은 이것이다,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것을 천명하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운동의 한 타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br/><br/>‘비결정’이 만들어지는 데는 양 측면이 존재한다. 하나는 개혁의 외적 제약이다. 민주정부의 어떤 개혁적 의지, 비전, 정책은 헤게모니의 제약으로 인해 정치적 이슈로 전환되지 못하고 보다 강력한 외부적 힘에 의해 좌절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개혁의 내적 제약이다. 민주정부를 포함하여 개혁을 만드는 사람, 세력이 실현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한계 때문에 정치이슈화하지 못하고 개혁적 대안이 내부로부터 소멸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문제보다도 두 번째 문제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민주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적 요구들이 투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권위주의시대의 정책이 지속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일 수 있기 때문이다.<br/><br/>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가 민주적 시민/시민역할에 대해 두 가지 구분되는 개념, 즉 ‘긍정적/적극적’인 것과 ‘부정적/소극적’인 것의 개념 구분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논의와 맥락을 달리하지만 시사하는 바 크다. 긍정적인 시민권 개념에서는 특정의 집단이나 조직들이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발전시키고, 이익을 공유하면서 정부정책에 자신들의 요구를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독자적으로 형성한다. 반면 비판과 불평을 중심으로 하는 부정적 시민행위는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묻고, 이들의 공적 사적 도덕성을 통해 정치인들에게도 강력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 부정적 시민행위는 정치란 기본적으로 엘리트들의 일이고 시민은 관중이나 감시자의 역할에 만족하는 수동적 관점을 견지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이들을 감시감독하기 위해 정치계급에 대해 극히 공격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창의적 에너지를 대변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시민권의 역할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들 두 측면이 모두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부정적 행위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은 우려할만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맥락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운동이 중심적 동력을 제공하는 민주정부는 당연히 긍정적 시민의 역할이 중심이 되고 그러할 때 그 에너지를 통해 많은 대안정책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민주정부 내의 개혁적 정책결정자들과 시민사회로부터의 운동과 지식인들에 의한 개혁의 비전과 정책의 입안은 개혁적이되,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br/><br/>현재 한국사회에는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한편에는 권위주의적 관치경제에 그 연원을 갖는 국가-재벌연합의 견인차가 중심이 된 ‘신자유주의적으로 변용된 성장정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민주화운동 및 노동운동에 기반을 갖는 ‘신자유주의 반대’, ‘사회민주주의의 길’이라는 방향이 있다. 그러나 두 방향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테제와 안티테제를 한국적 현실에서 실현가능할 수 있도록 취합하는 설득력을 갖는 대안적 정책비전이며, 그 틀 안에서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의 수준에서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민주세력들에게 민주정부의 수립과 아울러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희망과 기획을 실현할 기회가 부여되었을 때, 현실적 대안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기보다 쉽게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가져온 무책임한 관성적 결과물일 수 있다. 즉, ‘긍정적’ 시민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여전히 ‘부정적’ 시민으로서의 역할에 안주하는 모습이라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br/><br/>오늘의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이론적 수준에서, 가치와 신념의 차원에서 그리고 운동의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의 정책적 대안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싫든 좋든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사회의 부문, 수준, 그리고 집단, 계층들에 있어 어떤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인 것이다. 혹자는 영미식의 신자유주의형 경제모델에 대비되는 유럽식 복지국가모델 혹은 일본형의 조율된 자본주의형과 같은 어떤 비자유주의적 자본주의경제(non-liberal capitalism)를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정부는 후자의 비자유주의적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현실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세계화라는 조건에서 무엇보다 먼저 이론적으로 케인지언적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포함한 비자유주의적 경제이론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가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현실적으로 추진된다고 가정할 때 현재와 같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무역자유화를 포함하는 세계화라는 국제환경적 압력과 조건, 현재와 같은 재벌중심의 경제적 생산체제의 특성, 그 정책을 위한 정치적 지지의 동원, 신자유주의적 및 성장이데올로기, 사회적 힘의 관계 등, 여러 측면과 여러 힘들이 연관되어 작동되는 조건하에서 정치적으로 취약한 민주정부가 이러한 대안적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검토해야 하고, 없다면 이를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br/><br/>노무현 정부는 2만불성장시대라는 성장의 목표와 가치를 천명하였는데 그러면서 한편으로 정부 내 개혁파들은 간헐적으로 사회정의, 사회복지, 분배의 가치실현을 언명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하나는 진정한 정책적 목표, 내용과는 무관하게 분배와 복지를 요구하는 지지세력에 부응하는 슬로건 내지는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 복지,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2만불의 성장목표를 달성하기도 어렵고 또 달성한다 하더라도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경우이다. 만약 후자를 진지하게 추진한다고 할 때, 그것은 마치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 Przeworski)가 ‘전환의 계곡’이라고 말하듯, 구조개혁이 진행되는 일정한 기간동안 저성장이라는 계곡을 지나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와 같은 생산체제가 획기적인 구조전환을 해야 할 것이고, 이를 감당할 만한 정치적, 정책적 역량이 존재해야 하며,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한 투자자, 기업가집단의 동의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본의 투자회피, 해외로의 자본도피, 해외투자의 확대 등으로 인해 ‘전환의 계곡’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경제는 공동화되고 사회는 커다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이러한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요컨대 정부 내 개혁파들의 노동, 복지, 분배정의에 대한 강조는 정책적 진정성으로 뒷받침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br/><br/>혹자는 기업의 안정적 투자유인, 고용안정, 노동, 복지의 실현을 위해 영미식의 자유경쟁시장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독일식의 ‘이해당사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존과 협력의 노사관계도 발전시키지 못하는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노조의 조직이나 활동도 어려운 조건에서, 이해당사자들이 목소리를 갖고 결정에 참여하는 유럽식의 생산체제로의 비약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독일식 모델은 노사의 극한적 대립이 파시즘과 2차대전을 초래했다는 파멸의 역사적 경험, 전후 반노동자적 자세로부터 친노동자적 자세로 전환한 기독교의 변신, 이 과정에서 노사화합을 가능케 한 기독교 박애정신, 이를 당의 이념으로 한 기민당의 존재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 등,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독일식 모델을 진지하게 정책대안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단순한 천명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한국적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br/><br/>요컨대 하나의 정책대안을 만들기 위해 논의되어야 할 문제의 차원은 복합적이다. 먼저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기존의 어떤 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면 이를 대체할 대안적 처방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그 가운데서도 필수적인 문제들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어떤 모델이 우리의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준거가 될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검토한 후에도 따져봐야 할 문제들은 많다. 그것은 개혁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은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나? 개혁자들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나? 민주정부는 국가 행정기구들을 통솔하고, 새로운 개혁안을 수행할 능력을 갖고 있나?<br/><br/>IV. 우리는 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적이지 못하나?<br/><br/>민주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일련의 제도적, 절차적 요건들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시민권, 일인 일표의 투표권에 의한 정치참여의 권리,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주기적 실시와 이를 통한 정부의 선출,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의 자유로운 조직과 이들간의 상호경쟁과 협력 등이다. 그러나 이렇듯 단순하게 보이는 정치체제를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실제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다이너믹스는 제도나 절차로서 이해하는 민주주의보다 훨씬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br/><br/>정의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다중의 보통사람들의 힘이 체제의 중심에 자리잡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군부권위주의라든가, 군주정, 귀족정과 같은 다른 경쟁적인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체제보다 보 <br/>통사람들의 삶의 질의 개선을 포함하는 시민권의 확대와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경제 또는 시장의 영역에서 약자이며 소외된 보통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방법을 통하여 시민권을 획득, 확대하고 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을 때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절차적 방법을 통한 실질적 문제의 해결 또는 개선이 그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절차적, 형식적 내용과 실질적 내용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체제이며 따라서 일차원적인 것이 아닌 복합적인 구조와 과정을 갖는 것이다.<br/><br/>평등의 원리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불평등을 창출하는 자본주의와 항상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 양자간의 긴장관계와 갈등은 민주주의 자체를 제약하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의 갈등은 크건 작건, 민주주의는 건설적인 타협을 통하여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 바 컸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갖는 커다란 제약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문제해결의 공간을 갖는 것이고, 그것은 민주정부의 능력의 함수이기도 하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이러한 가능성을 기대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와 신뢰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 중심적 지지세력으로부터 괴리되기 시작하는 민주주의는 그 취약함으로 인하여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혹은 민주주의와 갈등관계를 갖는 힘들에 의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br/><br/>시민생활의 실질적 향상에 기여하도록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민주정부의 책무라고 할 수 있음에도 오늘의 민주정부들이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들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대표-책임의 연계고리로부터 상당정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중산층과 서민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의 정책적 책임성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IMF위기 이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악화시켜온 부정적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민주정부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우리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비전, 의지, 정책대안의 부재를 반영하듯, 오늘의 민주정부는 이렇다할 경제정책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하여 민주정부들이 세계화의 조건하에서 보통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더 악화시키는 데 앞장선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도,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br/><br/>결과는 사회양극화의 급속한 심화이다. 한편에서는 세계화로 재구조화된 시장경제 경쟁에서의 승자들, 거대기업들, 정치인들, 사회엘리트와 지식인 그리고 주류신문을 통하여 익숙하게 소개되는 이들의 세계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시장경쟁의 열패자 내지 탈락자들, 사회계층구조의 하층에 위치하면서 점차 생산과 소비의 중심영역으로부터 주변화, 배제되고 있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가 광범하게 존재한다. 우리사회에서 이 두 세계 사이의 격차와 분리는 그간 심화될대로 심화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정치인들, 언론들이 ‘사회통합’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인 듯이 강조하는 소리를 듣는 데 익숙해있다. 통합을 강조하는 정치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듯 분리되어가는,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적 권리를 통하여서도 대표되고 보호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와 정책을 말하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br/><br/>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투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br/><br/><br/>참고문헌<br/><br/>Bachrach, Peter and Morton S. Baratz. 1970. Power and Poverty: Theory and Practice. New York: Oxford U. P.<br/>Chichilnisky, Graciela. 2004. “Think Small If You Want to Create More Jobs.” Financial Times(May 14).<br/>Crouch, Colin. 2004. Post-Democracy. Cambridge: Polity Press.<br/>Dryzek, J. S. 1996. Democracy in Capitalist Times. New York, Oxford: Oxford U. P.<br/>Przeworski, Adam. 1991. Democracy and the Market.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 P.<br/>]]></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퍼온글]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진보적이 된다. </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524678</link><pubDate>Sat, 28 Aug 2004 14: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524678</guid><description><![CDATA[&nbsp;나의 친한 벗이 말하기를, 자신이 살아온 나날 중에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등 학교 다닐 적 어느 선생님의 우연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거나 그런 인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BR>
친구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시는 인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우직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접고 서울로 상경하시었었다. 배움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 공사장 막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셨지만, 부지런하시고 정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 정도로 일갈하는 선생님에게 친구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BR>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기분이 퍽 가라앉음을 느꼈다. 이 글은 전태일 자신인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 대해 고(告)함이다. 전태일은 독자인 나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태일에게, 그리고 이 평전을 기술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영래의 사랑과 투쟁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BR>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인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nbsp; 
&nbsp;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눌린자는 계속 눌리어 살아가는가? 
&nbsp;
여기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고통에 찬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 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 정신의 싹은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nbsp;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한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nbsp;
장기표 씨의 후기에서 “인간이 명석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nbsp;&nbsp;&nbsp; 
&nbsp;
전태일을 보면서 민주화를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조영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실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BR>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 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 문제일 것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민중 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nbsp;
&nbsp;
밑줄 그은 문장 
&nbsp;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BR>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것일세. <BR>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BR>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BR>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BR>
&nbsp;&nbsp; -재단사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태일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인부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BR>&nbsp;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페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nbsp;&nbsp;&nbsp;&nbsp;&nbsp;&nbsp; -268쪽&nbsp; 
<B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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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tem><item><author>외로운 발바닥</author><category>늦깎이 대학생</category><title>[퍼온글] 지젝 읽기: 당신의 지젝을 즐겨라!</title><link>http://blog.aladin.co.kr/lonelysole/485853</link><pubDate>Fri, 25 Jun 2004 01: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lonelysole/485853</guid><description><![CDATA[지난 1월에 다음카페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에 연재했던 글을 여기에 옮겨둔다... 
우리말로 번역된 지젝의 단행본 저작은 모두 7권이다(아마도 내년까지는 4-5권이 더 번역돼 나올 듯하다). 그 중 5권이 2001-3년 사이에 나온 것들이다. 이 정도면 지젝 ‘르네상스’는 아니더라도 푸코나 들뢰즈의 경우처럼 일종의 ‘붐’은 형성할 수 있을 터인데, 현재의 사정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여러 차례 지적된 바대로,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함량 미달인 탓이다(그것은 상대적으로 푸코나 들뢰즈 번역의 경우 오역이 없지는 않더라도 ‘찬물’을 끼얹을 정도는 아니라는 반증도 된다). 이 번역의 수준은 책의 판매량과 직결돼 있는데(그만큼 독자들의 안목이 예리하다는 의미도 된다), 알라딘 통계를 기준하여 순위를 매기면([ ]안은 원저의 출판년도), <BR><BR>1. &lt;삐딱하게 보기&gt;(김소연 외, 1995)[1991] <BR>2. &lt;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gt;(이수련, 2002)[1989] <BR>3. &lt;당신의 징후를 즐겨라&gt;(주은우, 1997)[1992] <BR>4. &lt;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gt;(김종주, 2003)[2002] <BR>5. &lt;환상의 돌림병&gt;(김종주, 2002)[1997] <BR>6. &lt;향락의 전이&gt;(이만우, 2001/2)[1994] <BR>7. &lt;믿음에 대하여&gt;(최생열, 2003)[2001] <BR><BR>이다. 물론 판매량을 결정하는 요인에 출판년도도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신통찮은 번역의 경우에 절판되는 것이 예사이므로, 오랫동안 팔리고 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대략 그 번역의 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순위에 동감한다. 이 7권에 대해서 일부분이라도 대략 원저와 대조해 본 결과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lt;이데올로기&gt;를 빼면, 잘팔리는 두 권의 ‘영화책’은 지젝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이전에 번역된 저작이라는 점이다. <BR><BR>대개의 경우 그렇겠지만, 나는 지젝의 이름을 영화학도에게서 처음 들었는바,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화학을 하는 사람들 간의 입소문에 의해 지젝은 처음 우리의 ‘지식장’ 혹은 ‘지식시장’에 편입됐다.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바, ‘현대이론’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영화이론을 공부하는 영화학도에게서 숭배하건 무시하건 간에 라캉과 정신분석학은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라캉에 대한 열정을 보라). 요즘은 아무리 무식한 영화학도라고 해도 ‘라캉’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없이 영화과를 졸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교수가 덩달아 무식하지 않는 한). 그런데 그 (신화적이면서도 난삽하기 짝이 없는) 라캉이론의 영화에 대한 개입(방식)을 가장 쉬우면서도 현란하게 보여준 이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 ‘지적 영웅’ 지젝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앞으로 나올 또다른 ‘영화책’ &lt;들뢰즈와 결과들 Deleuze and Consequences&gt;(2004)의 번역이 영화학도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아울러 기대해 볼 만하다). <BR><BR>물론 지젝의 ‘영화책’들이 읽기 쉽다는 것은 순전히 상대적인 의미에서일 뿐이다. 당연히 지젝을 읽는 것은 라캉을 직접 읽는 것보다 10배는 쉽다. 그리고 그의 ‘영화책’들은 현재 번역/교정중이라는 &lt;불안정한 주체 The Ticklish Subject&gt;(1999)나 &lt;부정성과 함께 머물기 Tarrying with the Negative&gt;(1993) 등의 ‘철학책’(독일관념론을 다룬다)보다는 3배쯤 쉽다(물론 이들 ‘철학책’들에도 영화 얘기가 들어가 있긴 하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비교적 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에게 그냥 만만하게 읽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나는 &lt;삐딱하게 보기&gt;나 &lt;당신의 징후를 즐겨라&gt;를 재미있게 완독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BR><BR>해서, 지젝을 처음 접하는 이들이 우리말로 지젝을 읽고 즐길/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다소 ‘계몽적인’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거창한 것은 아닌바, 비교적 읽을 만한 우리말 번역본을 같이 읽으면서 중요한 핵심을 정리/이해하고, 일부 오역들은 교정해 나가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년쯤인가(혹은 2002년에) 나는 &lt;향락의 전이&gt;에 대해서, 이러한 방식을 시도해 보고자 했는데, 워낙에 견적이 안나오는 번역서라 그걸 교정하면서 함께 읽는다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내가 조금 게으르고 다른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그래서 정한 원칙은 우선 읽을 만한 번역을 읽자는 것이다. <BR><BR>그래서, 내가 정한 커트라인은 &lt;당신의 징후를 즐겨라&gt;이다. 그게 허리인바, 나머지 4권은 차라리 없으면 더 좋을 허리이하적인 번역서들이다(이런 번역서들은 각자의 골방에서 사적으로만 음미하는 게 좋겠다). 내가 권장하는 것은 그나마 있어서 다행인 번역서 3권을 한달에 한권씩이라도 독파해 보시라는 것이다. 그 읽을 순서는 좀 임의적이지만, 나는 &lt;당신의 징후를 즐겨라&gt;에서 &lt;삐딱하게 보기&gt;로, 그런 후에 &lt;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gt;으로 전이해 가겠다. (가령, 쿤데라님처럼) 영화를 안 좋아하는 분들은 그냥 &lt;이데올로기&gt;로 바로 들어가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이겠다. <BR><BR>&lt;당신의 징후를 즐겨라&gt;의 원제(Enjoy your symptom!: Jacque Lacan in Hollywood and out)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라캉 정식분석학의 핵심개념들을 헐리우드 안팎의 영화들을 소재로 하여 설명하고 있는 ‘계몽적인’ 책이다. 딜런 에반스가 쓴 &lt;라캉 정신분석 사전&gt; 같은 류의 책들이 보다 직접적인 용어설명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지젝의 영화책들은 그 추상적인 용어 혹은 개념들에 ‘실감’이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비유컨대, &lt;사전&gt;이 비타민이나 영양제(라캉 캡슐)라면, 지젝의 책들은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라캉 식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한 식탁이라면, 누구라도 충분히 즐길만하지 않을까?.. <BR><BR>(예고) 다음번에 다룰 내용은 &lt;당신의 징후를 즐겨라&gt;의 2장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얘기와 함께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를 설명하고 있는(동시에 데리다에 대한 라캉주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는) 1장은 내가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내 기억에 평이하게 읽혔던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간다(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는 있겠다). 혹 읽으신 분들이 질문이나 문제제기를 하실 경우에는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description></item></channel></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