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포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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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의 영화 <새>를 본 뒤로 내 지옥의 풍경은 또렷해졌다. 용암이 들끓고 끝없는 비명이 터져나오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런 곳.


 (내가 쥐스킨트를 오래 전부터 좋아해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ㅜ.ㅜ)

 

비둘기들로 가득한 산 마르코 광장은 공포-호러물이 내게 안기는 인상과도 겹쳐진다. 낯선 방향에서 번들거리는 수천 개의 시선들. 지상의 것이 아닌 듯 아찔한 색과 현란한 패턴들. 게다가 그들의 운동은 예고도, 복선도 허락지 않는다. 언제 휙 방향을 꺾어 다가올지, 언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를지 알 수 없다. 해서 어떤 이에게는 자신만 아는 정보와 논리를 지니고 돌진하는 공포가 일종의 반칙처럼 여겨질 수밖에. 


하긴 그 알 수 없음으로 인해 비로소 공포가 가능한지도 모른다. 두려움이나 공포란 결국 몰이해의 만화경 같은 것인지도. 그러니 모른다는 것. 어쩌면 공포의 근원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익숙한 얼굴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내 욕망과 갈증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조이스 캐롤 오츠의 《악몽》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다가 어제야 다 읽어냈다. 전작 《좀비》와 《대디 러브》에 비해 꽤 마음이 고단했는데, 아마도 그건 저마다 다른 인물과 악몽에 익숙해지느라 그랬던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과 중편 분량의 소설을 포함 무려 일곱 편에 등장하는 이 녀석, 저 녀석들을 한 날 한 시에 감당하기란 아무래도 조금 버거운 일일 테니까. 끊지도 화해하지도 못할 더블로 인해 끝내 파멸하는 이야기 〈화석 형상〉〈알광대버섯〉은 썩 닮은 구석이 있었고, 〈베르셰바〉는 충격 여파가 오래 갈 듯한 단편이었다. 앞으로 누군가 풀린 운동화끈을 매준다거나 바짓단의 먼지를 털어준다고 다가오는 순간, 흠칫 발을 뒤로 빼게 될지도. 그렇게 기묘한 인상의 소녀 이미지를 간신히 삼킨 다음, 며칠이 지나서야 〈머리 구멍〉을 펼쳤는데 또 한 차례 "옴마야……" 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는 인간의 두개골이 모든 자연물질 중에서 가장 내구성이 높고 광물처럼 딱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뚫자면 제대로 된 드릴, 톱, 억센 힘이 필요했다. 의대 해부실에서 그는 그런 드릴로 실습을 해봤지만, 지금 이 머리는 살아 있는 머리이고, 두개골 속에 든 뇌는 살아 있는 뇌라고 생각하자 공포가 차올랐다. 이 사실만큼이나 두려운 사실은 그가 환자를 안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 환자를 면담했고, 걱정하는 남자를 잘 달랬다. 이제, 잔학한 만화책의 고문 장면처럼 이 남자는 앉은 자세로 자리를 잡았고, 죔쇠로 고정됐다.

(중략)

신경외과의는 그 위에 주황색 형광펜으로 그가 뚫어야 할 자리를 표시해놓았다. “해봐.” 선임자가 반복했다. 환자의 두피를 가르자, 피가 제멋대로 흘러서 닦아냈다. 이어서 두피를 뚜껑처럼 젖히자 두개골-뼈-이 드러났다. 루커스는 자신이 차분하다고, 차분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전동 드릴을 뼈에 댔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머뭇대자 선임자가 짜증스레 재촉했다. “계속해.” (pp. 132-133) 


“계속해.” “해봐.” 도드라진 저 명령어들이 소설 속에서 수술을 집도하던 레지던트에게 하는 말인지, 나처럼 심약한 독자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을 만큼 오츠 여사는 집요하게 전진한다. 이웃 님 블로그에서 본 바, 핑크빛 블라우스를 입고 햇살 환한 집에서 집필을 하시더만 어째 이렇게 캄캄하고 서늘한 세계에 골몰히 능하신지. 카프카에게서 공포스러운 것을 농담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자신을 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다(《작가란 무엇인가 V. 2》p. 163)는 이 수줍음 많고 가냘픈 소설가의 세계를 좀 더 또렷이 납득하고 싶어서 얼마 전 사둔 《작가의 신념》을 책장에서 꺼내놓고는 나머지 단편들을 읽어나갔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아무도 내 이름을 몰라〉), 타인을 내 바람대로 읽는 것의 함정(특히 상심과 외로움으로〈도움의 손길〉)을 거쳐 마지막 소설 〈옥수수 소녀〉에 다다르자 그제야 조금씩 소설이 제대로 읽히기 시작한다. 주드라는 이름의 이 기괴하고 거친 인물에 선뜻 공감이 가는 건 아니지만 왜 소설의 부제가 '사랑 이야기'여야 했는지도 납득이 갔다. 흔히 떠올리는 남녀 간의 사랑말고도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으니 그것은 때로 집착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잃고 난 뒤에야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자리에 놓여 있었는지를 실감케 되기도 할 테니까. 뿐인가. 시간적으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도 있다. 



기괴한 논리 끝에 다다른 자신의 결론에 탐닉하며 앞으로 몇 발짝을 더 떼는 인물들, 그 순간 진입하게 되는 악몽의 풍경들은 그래서 어느 순간 서늘한 계시처럼 마음에 남기도 한다. 오츠 여사의 폐색과 공포를 기꺼워하지 않으면서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읽게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야말로 우리가 듣지 못하고 꿈으로만 꾸었던 이야기, 그 진짜 같은 악몽의 서늘한 욕망과 어리석은 바람마저 이해하는 작가이니까. 오십 편 가량의 장편소설과 천 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쓰면서 어떤 길은 버리고 어떤 길은 스스로 닦아나갔을 그 양적인 분투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의일 수도 있고. 게다가 다행히도 오츠 여사는 이 악몽들에 집어삼켜지거나 그녀 자신을 "찢어버리지"는 못할 만큼 삶, 기술과 예술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글을 쓴다는 것은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은 인간 상상력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며, 첫눈에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분석에서도 기이하고 신비로우며 손쉽게 해석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영감의 무아지경에 지배받는 순간 고독의 최고 예술가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한다. "백열 상태에 있는 영혼을 본 적이 있나요?" 그리고 "나를 찢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거대한 세계"를 산문으로 바꾸어 그 세계의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밤새 작업하며 첫 소설 《소송》을 고투 속에서 쓰고 있는 젊은 프란츠 카프카를 생각한다. 


- 《작가의 신념: 삶, 기술, 예술》(은행나무, 2014. 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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