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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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에게 “그건 네 말도 맞아”하고 말하는 거라고 했던가. 독자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소설을 읽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첫 문단 혹은 첫 페이지에서 누군가를 소개받는다. 줄곧 그를 지켜보며 그의 어법과 행동 패턴을 익혀간다.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에서 작동되는 성향과 충동을 챙기고, 그의 경험, 그가 지나온 사건들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모든 이해가 일종의 오독이란 점을 감안해도 처음 50페이지는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왜?”라는 물음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그럴 수밖에 없겠지”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것 또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이 성공적이었다면, 남은 건 수월한 오르막길을 따라가는 일뿐이다. 아니면 내리막을 따라 줄달음치거나. 그리고 어쨌든 그렇게 100페이지마저 통과했다면 그 소설은 끝까지 읽힐 가능성이 높다.

 

그에 비해 《이노센트》는 100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이 “왜?”가 해결되지 못한 채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레너드는 왜 저기서 고스란히 모욕을 당하고 있는 거지? 왜 성을 내는 대신 고개를 외로 꺾고 마는 걸까? 어쩌면 저렇게 경솔할까, 어쩌다 저런 판타지를 품게 된 걸까? 그래, 뭐 쪽지 한 장을 건네기 위해 수십 장을 썼다 버리는 일이야 누구나 한번은 겪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만 그녀에게 쪽지를 전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후반에 배치된 광기어린 장면들을 생각하면 그는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 무슨 일에든 쉽게 흔들리는 캐릭터라야 세계의 격렬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도 하지 않던가. 뿐만 아니라 레너드의 그 서툶, 우왕좌왕하는 흔들림이야말로 ‘이노센트’한 시절의 어떤 속성이라 할 만하다. 이제 막 어른의 세계에 들어선 이십 대 청년이다. 당연히 인정받고 싶어 하며, 때로는 “솔직하게 발산되는 의기양양한 힘”(p. 34)에 매혹될 수밖에.

 

연인 마리아가 있는 아파트 꼭대기 층과 첩보 활동이 벌어지는 지하 터널 사이. 레너드는 그 두 세계를 수직으로 오가면서 각각의 공간에서 비롯된 감정을 이쪽과 저쪽에 투사하는데, 갈등이 고조되고 파국의 기미가 축적되는 부분도 영민하게 배치되어 있어 짜임새를 더한다.  탁월한 문장들 덕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따라가는 일도 어렵진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언 매큐언인 것이다. 초중기작이든 후기작이든.  

 

완독 후 기시감에 사로잡힌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노센트》를 덮고, 얼마 전 읽었던 《지평》을 다시 꺼내 읽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가.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다른가. 공교롭게도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 또한 베를린에서 재회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결말을 열어놓고 있다. 《이노센트》가 베를린 아달베르트 가 84번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면, 《지평》은 베를린 디펜바흐 가 16번지에 살고 있다는 마르가레트를 만나기 위해 보스망스가 걸어가는 장면으로 맺음한다.

 

레너드와 그의 연인 마리아(《이노센트》), 보스망스와 그의 연인 마르가레트(《지평》). 전자는 삼십 년만의 만남이고, 후자는 성사된다면 무려 사십 년이 지난 뒤의 재회다. 심지어 이 두 커플의 관계를 위협하는 제3자가 여자 쪽을 쫓아다니는 남자라는 점마저 비슷하다. 다만 《이노센트》의 제3자 ‘오토’가 맞는 최후에 비해 《지평》의 제3자 ‘부아야발’의 경우, 그의 슬픔과 체념까지도 넌지시 짚어진다는 점이 다를 뿐.

 


베를린, 디펜바흐 가 16번지와 아달베르트 가 84번지 사이에는 이만한 거리감이 있다. 한쪽에서는 편지가 날아와 서로의 속사정이 장황하리만치 낱낱하게 밝혀지는 반면, 다른 한쪽은 오직 흐릿한 기억에 의지해 상대를 떠올리고 저 혼자 길을 찾는다. 예컨대 《지평》의 경우,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인데, 정작 이 비워진 이야기의 반쪽은 보스망스가 디펜바흐 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차 희망적인 톤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거듭 힘주어 말하는 남자, 폐허 더미에서 피어난 라일락을 유심히 눈여겨보는 남자, 보스망스의 행동들 때문이다.


 

너무 많이 걸었더니 피로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평온한 느낌과 함께, 그가 어느 날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시계의 두 바늘이 정오가 되면 하나 되어 만나는 것처럼. 

(《지평》 p. 184)

 

이야기의 톤은 다르지만 《이노센트》의 결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다. 레너드 역시 멈춰진 시계를 언급하며 중단된 시간을 이어가리라 다짐한다.

 


미리 알리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실패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 떡갈나무 사이 그늘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햇살 환한 잔디밭을 가로질러 흰 깃대를 지나서 현관으로 갈 것이다. (……) 두 사람은 탁상시계를 다락방에서 꺼내와 태엽을 감고 다시 돌아가게 할 것이다. (……) 그들은 베를린으로 함께 돌아오리라.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으니. 

(《이노센트》 p. 416)

 

어떤 연인들의 시간은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누군가가 예순 개의 눈금을 지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고작 한 개의 눈금을 지날 뿐이지만 그 혹은 그녀가 몇 시에 위치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때 그들을 있게 했던 비밀, 현재까지도 유효한 그 비밀에 묶여 있다면 길을 잃는 것이 두려움만은 아닐 테니. 그러므로 모디아노의 말은 옳다. “모든 첫 만남은 상처”인 동시에 언젠가는 다시 한 점에서 만나리라는 모호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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