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shington Square, New York, 1954, by Andre Kertesz, 
ⓒ Estate of Andre Kertesz/Higher Pictures



늦은 오후, 여기에도 눈이 내렸어. 아니, 비라고 해야 옳을지도. 가까스로 영상을 유지한 대기 속에서 눈은 금세 추적추적 발밑을 적셨으니까. 밤이 되면 기온은 더 떨어질 테고 길은 그대로 빙판이 될 테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 어딘가에는 그 잠깐의 빗물이 스며들어 한 점 푸른 그늘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아마도 거기,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바깥에서 얼마간 시간은 지체되기도 한다는 것.

 

이야기를 읽을 때, 나 또한 그렇게 지체되고 유예되는 순간을 경험하곤 해. 습기는 습기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때론 어둠이 어둠을 밝히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궁금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어지지 못하고 덜컥 끊겨버리는 일화들”, “스치듯 지나가버린 만남들”, 하여 “이름 없는 얼굴들”(《지평》 p. 9). 그들이 겪을 다음 순간, 다음 국면의 이야기들이. 그건 오래된 내 탈주 습관이기도 했지. 

 

이야기 바깥의 그들. 그래, 내가 궁금한 건 그들 인생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거였어. 이를테면 나는 손보미의 소설 〈담요〉에 나오는 어린 부부가 자주 마음에 밟히곤 해. 아마도 이런 겨울밤이었을 거야. 그들은 Andre Kertesz의 사진처럼 드문드문 불빛이 번지는 한밤의 공원에 앉아 있었지. 

 














“그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그들에게 린디합을》p. 22)이었으므로 〈담요〉의 중심인물 장은 마침 헝겊으로 순찰차 유리에 낀 성에를 닦아내고 있어. 몇 년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장은 야간 순찰을 도맡아 해왔지. 그가 눈에 담는 거라곤 기껏해야 둑길 건너편에 늘어선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전부야. 때문에 모든 불빛이 사라지는 새벽이 되면 그는 늘 지니고 다니던 담요에 얼굴을 묻어. “무언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 “자신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 같”(p. 21)은 기분에 아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몸에 지니고 있던 그 담요를 절박하게 움켜쥐지.

 

그런 그의 앞에 어린 부부가 보이는 거야. 살아 있었다면 자기 아들 또래였을 연인들. 선명해진 창 너머, 그들은 갈 곳 잃은 사람들처럼  나란히 앉아 있어. 얇은 외투 차림으로 옷깃을 여민 채 캔맥주를 마시고 때로 서로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면서. 장이 다가가자 여자아이는 경계하듯 선언해. “우린 부부랍니다.”(p. 23) 요는, 둘 다 성인이고 결혼도 했다는 거야. 물론 결혼식은 못 올렸지만 여기는 자유국가니까, 여기서 얼어 죽는 것도 자기들 마음이라고 하지. 그러면서 여자 아이는 추위 때문에 빨갛게 부풀어 오른 손을 남자아이의 어깨에 올려. 동의를 구하듯 연인의 언 몸에 자신의 언 몸을 겹쳐놓지. 장은 그들을 마냥 바라보다 이렇게 말해.

 

“당신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일 거야.” (p. 23)

 

그날 장은 순찰차로 돌아가 담요를 꺼내와. 그걸 그 어린 부부에게 건네주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부 사이임을 강조하던 아이들이 “우린 인간쓰레기예요”라고 자조해도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 가만히 그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 “그 작고, 동그랗고, 차가운 아이들의 머리를”(p. 28) 말이야. 

 















〈담요〉의 장처럼 고개 숙인 사람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바라본 적 있어? 김연수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잖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짬뽕 그릇만 내려다보았다는 어느 여배우 이야기. 유부남 영화감독과 싱글인 여배우가 서귀포 한구석, 함석지붕집 아래 살림을 차리고 3개월을 함께 살았다지. 나중에 영화감독의 부인과 아들이 그 집까지 찾아와 결국 드잡이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네 사람은 마지막으로 함께 중국집에서 점잖게 밥을 먹어. 알고 보니 영화감독이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는 거야. 도망치듯 여배우와 제주도로 내려간 건 그의 마지막 탈주였던 셈이고. 그런 연유로 네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두고 숙연히 마주앉았는데, 제 아빠를 찾아 왔던 소년은 훗날 영화감독이 되어서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해.

 

“그때 짬뽕 먹을 때, 저는 계속 선생님만 보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으셨어요. 먹는 내내 선생님 정수리께를 보는데, 뭔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어떤 슬픈 마음이 들더라구요.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요. 전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영화든 소설이든 뭔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요. 선생님 그 정수리 보면서.” (《사월의 미, 칠월의 솔》p. 95)


우리는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표정을 감추기도 하지. 감정을 단련시켜 비언어적인 행동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모면하기도 해. 하지만 고개를 떨어뜨린 누군가의 모습, 연약하고 무방비한 몸짓 앞에서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나봐. 연민 어린 시선 속에서 타인은 나의 다른 모습으로 읽히고, 때로 그건 자신의 상처처럼 기억되기도 할 테지.

 



 








모디아노 역시 이렇게 말해. “사람과 사람의 첫 만남은 마치 가벼운 상처처럼 두 사람에게 남아 그들을 고독과 무감각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고(pp. 25-26). “모든 첫 만남은 상처”라고(p. 28). 그러니까 상처는 일종의 각인인지도 몰라. 속살이 벌어졌던 흔적, 그것이 아무느라 걸렸던 시간, 희미해질지언정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 어떤 현재가 그들 몸에 동시에 새겨지는 거야. 때문에 두 사람은 “세상의 시간을 벗어나 있다는,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확신”(p. 49) 속에서 함께 영원에 고착될 수 있어. 《지평》의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가 그랬던 것처럼. 


“미래…… 지금의 보스망스에게는 날카롭고도 신비로운 울림을 주는 말.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한 번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한 현재 속에 있었다.”(p. 170)

 

 

최근 출간된 《지평》에서 모디아노는 그 영원한 현재의 또 다른 가능성, 희망을 향한 한 걸음을 보여주고 있어. 사십 년 가까이 헤어져 있던 연인을 찾아 육십 대의 소설가가 베를린으로 향하는 것이지. 그리고 보스망스가 그녀의 종착지로 짐작되는 디펜바흐 가에 도착한 순간, 딱 거기에서 이야기를 멈춰.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연습하는 그의 모습, 폐허가 되었던 도시의 공원 한구석에 피어난 라일락 꽃 등을 슬쩍 언급하면서

 

그들은 정말 만날 수 있을까? Andre Kertesz의 아래 공원 사진처럼 마침내 두 사람이 다시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오게 될까? 그러나 왠지 나는 이 이야기 바깥에서 벌어질 그들 삶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아. 이번에는 구체적인 결말을 궁금해하는 대신 프레데릭 파작의 이런 문장을 떠올리지. "너를 발견하고 난 뒤 내가 어디에 있는지 헤아리는 건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어려움은 길을 잃어버리는 데 있었다." 




Washington Square, New York, 1954, by Andre Kertes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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