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작가상> 심사 경위



키워드는 여전히 ‘페미니즘’, 더 강력히 호출된 ‘여성 서사’


2018 오늘의 작가상의 영예는 『뱀과 물』 배수아 작가에게 돌아갔다. 서로 다른 취향과 기준을 지닌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모인 자리였으나 하나의 현상에는 모두 수긍했다. 오늘날 작품을 써내는 작가와 작품을 선택하는 독자, 양방향으로 ‘여성의 서사’가 강한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젠더 감수성’과 ‘페미니즘’은 독자가 작품을 선택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그것을 읽어 내는 프리즘이 되었다. 그 현상을 반영하듯 올해 <오늘의 작가상> 본심 심사에서 끝까지 겨룬 작품은 여성 서사의 양 극단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두 작품,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와 배수아의 『뱀과 물』이었다. 오늘을 담은 작품과 오늘이 비출 작품에 대한 지지가 팽팽했으나, 배수아의 작품에 드러난 독특한 ‘오늘’에 대해 이야기하며 표가 기울었다. 이 작품의 원시적이고도 현시적인 여성 서사가 2018년과 닿아 있는 절묘한 지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참석한 심사위원들 모두 『뱀과 물』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여성 서사가 더 넓은 상상력을 획득하고 거듭 확장되리라고 예감했다. 문학평론가 강지희는 수상 작가인 배수아에 대해 “여성 서사의 스펙트럼에 대해 생각할 때 항상 떠오르는 작가”라고 말했다. 수상작인 『뱀과 물』에 대해서는 “특히 시대와 한 번도 일치한 적 없던 배수아의 작품 세계에서, 하필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에 쓰인 소설이 『뱀과 물』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라고 설명하며 작가의 수상을 응원했다. 









2018 <오늘의 작가상> 심사평



  배수아 소설에 여성이 돌아왔다. 『뱀과 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동안 적극적으로 젠더를 해체하는 실험에 몰두하던 배수아는 『뱀과 물』을 통해 또 한 번 문학적 전회를 이루어 냈다. 전과 달리 『뱀과 물』에는 여성 인물들이 강렬하게 부조되어 있고, 읽다 보면 그 인물들은 마트료시카처럼 겹겹이 겹쳐져 하나의 여성적 형상을 이룬다. 그러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그 형상은 그림자처럼 흩어지며, 끝내 어떤 하나의 고정된 신화적 규범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배수아 소설을 두고 여성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수아 소설 속 여성은 성녀도 악녀도 아니며, 처음 보는 지느러미를 달고 영원히 어딘가를 헤매며 담담하게 절망적 자유를 만끽하는 새로운 생물체 같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배제되어있기에 여성적인 것이라거나, 비가시화되고 재현 불가능한 것의 드러남과 전복이라 말하며 여성 소설을 타자화하고 싶지는 않다. 『뱀과 물』은 그저 여성이 어떤 존재도 될 수 있는 자유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모호하고 난해한 꿈이 때로 현실을 압도하는 경험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이 소설은 그렇게 여성성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새로 태어난 ‘오늘의 작가상’을 두고 지금 한국의 교양을 재편하는 상이라 생각해 왔다. 교양은 누구의 것인가. 언뜻 객관적으로 들리는 이 교양이라는 단어는 실은 한 사회의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승인과 배제의 정치학이다. 지금 이 세계의 교양은 그간 무질서하고 비합리적이고 나쁜 취향이라 말해져 왔던 쪽으로 꺾이며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배제되어 왔던 그 자리는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놓여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 어제의 나쁜 취향이 오늘의 교양이 될 것이다. 배수아의 『뱀과 물』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 이어 이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기쁘다. 여성 소설들은 이렇게 함께 계속 걸어 나갈 것이다.

―강지희(문학평론가)



『뱀과 물』을 뱀과 술, 이라고 종종 잘못 말하곤 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아마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물잔에 맑은 술이 가득 담긴 것을 모르고 다 들이켠 다음 그대로 쓰러져 잠든 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기분(「뱀과 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과감히 소설 속 “시곗바늘”을 떼어 내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들이 하나의 풍경이 되는 “회전목마” 위로 독자를 안착시킨다. 하여 이 기묘한 유원지 같은 소설은 순차적인 시간성을 거부함으로써 늘 비가시적으로 다뤄지던 여성의 유년 시절과 노년 시절을 드러내고, 곧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까지도 “피부 아래의 아득한 감각”으로 느끼게 만드는 데에 이른다. 

취중에 벌어진 일처럼, 어느 꿈속의 일처럼 흐릿한 순간들이 분명하게 있었음을 서사가 아닌 감각으로 증명해 내는 작품들에 나는 그저 홀릴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 낫다. 시간을 지우고, 사건을 지운 뒤 오롯이 남은 감각들은 입 밖에 내기 어렵고, 좀체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이 비밀스러운 감각은 말해질 수 없기에 곧 모든 이야기가 되고,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오늘의 작가상> 본심에 오른 다수의 후보작들이 ‘오늘’을 보여 주고 있었기에 어떤 한 작품을 고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 번 자문하는 일이었다. 고민 끝에 내린 답은 이러했다. 어느 날 펼쳐보아도 ‘오늘’이 될 수 있는 작품을 고르는 것. 『뱀과 물』은 그런 작품으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한 번쯤은 보고 겪었을 환영(幻影)같은 순간을 불러오는 이 소설을 오늘도 환영(歡迎)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믿기로 했다.

―박하빈(독자)



  무엇이 ‘배수아’를 멀리 있게 했던가. 20여 년 전 ‘신세대’의 부박한 취향들 속에서 황막하게 번득이던 그 고독한 격정과 불온함에 매혹된 때부터일까. 10여 년 전, 분절된 개별자들의 세계를 감싸는 그 자유롭고 선명한 언어의 추상성이 이룩한 창조적 정신의 높이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턴가, 문자를 통한 사유와 상상이 꿈처럼 음악처럼 흐르는 그 장면들 속에서 줄곧 미끄러지며 헤맸기 때문일지도. 어쩌면 한 세대라고 말해도 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수아’라는 고유명에 입혀진 이런 저런 기억들은 얼마큼 맞고 또 얼마큼 틀렸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들로 사랑했고 또 그런 이유들로 충분히 친숙할 수 없었던 ‘배수아’와의 시간을 이제 다시 펼쳐본다면? 

  우리는 8권의 후보작을 앞에 두고 그 중 하나만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뽑기 위해 숙고하는 중이었다. 난감한 고민과 흔들리는 판단이 오가며 각자의 마음들이 조금씩 뭉쳐질 때쯤, 문득 ‘배수아’에 대한 어떤 생각이 우리에게 점점 선명해졌다는 느낌을 서로 감출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배수아’와의 거리감이란 대체 무엇인지, 누구의 것인지, 어떻게 확신하는지, 우리 중 누구도 그 답을 안다는 듯이 말하지 않았고, 그러자 당연한 뭔가를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었다. 우리 앞에는 ‘오늘의 독자’가 선택한 『뱀과 물』이 놓여 있었으니까. 너무 낯설다, 지나치게 독특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당황스러운 소설이다 등등의 오래 굳은 수수한 감정(鑑定)에 끝내 갇히지 않은 ‘배수아’가 되려 우리에게 ‘오늘의 독자’를 소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의 작가’가 오늘만 빛나는 작가가 아닐진대, ‘배수아’를 오늘에야 빛을 본 작가처럼 말해선 안 될 것이다. ‘배수아’를 읽고 또 읽고, 처음 읽고 다시 읽는 독자들을 언제나 빛나게 해 주는 작가로서, 어제도 그랬듯 내일도 그럴 것이라는 신뢰로써, 배수아는 2018년 오늘의 작가다.

―백지은(문학평론가)



  책방 ‘사적인 서점’을 열고 손님들의 독서 경험에 대해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왜 책을 읽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이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소설은 어차피 다 가짜인데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묻는 손님이 꽤 많았다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나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대답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 보는 경험은 소설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우리는 더 많은 소설을 읽으며 더 많은 타인이 되어야 한다고. <오늘의 작가상> 후보작 중에서는 『딸에 대하여』가 가장 그러한 책이었다. 딸에 대하여, 엄마에 대하여, 늙음에 대하여, 혐오와 배제에 대하여, 결국엔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가 현실 세계에서 살을 맞대고 사는 타인의 삶을 경험하게 하는 소설이라면, 『뱀과 물』은 이야기가 이끌어 내는 허구의 세상과 만나는 매혹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작품의 독해는 쉽지 않았다. 순차적인 서사 진행 방식도 없고, 단어에 담긴 의미가 해석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빠져들었다. 본능적으로 끌렸다. ‘홀렸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직관의 독서, 유희의 독서. 새로운 독서 경험의 확장이었다. 작가가 만든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즐거움을 알려 준 배수아 작가의 <오늘의 작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정지혜(책방 ‘사적인서점’ 대표) 



  작가가 온 힘을 다 해 완성한 한 권의 이야기를 평가하고 그 중 최고를 뽑는다는 것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각자의 이야기는 모두 고유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상작이냐 아니냐에 따라 독서 여부가 결정된 적도 없다. <오늘의 작가상>에서 심사를 제안받았을 때 잠시 고민을 했다. 과연 내가 가장 좋은 작품을 골라낼 수 있을까하고. 하지만 ‘오늘’이라는 명제를 통해 한국 소설의 오늘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 심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8권의 책을 받고 한 상자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아 매우 흡족했다. 책 중에는 내가 이미 읽은 책도 있었고, 다소 생소한 작가의 이름도 섞여 있었다. 독서할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수상 여부와 횟수, 작가 이름에 절대 휘둘리지 말 것. 8권의 책을 읽으며 한국 소설에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새삼 느끼며 그에 무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들은 가볍고, 무거우며, 전위적이고, 세련되고, 시의성 짙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각자의 고유한 색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심사는 더더욱 쉽지 않았다. 

  <오늘의 작가상>이라는 상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을 대변하는 작품이 받아야 할까? ‘오늘의 작가’란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작가를 말하는 것일까? 혹은 오늘날 독자들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작가여야 하는 것일까? ‘오늘’이라는 명제는 참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수상작을 결정하는 것 또한 <오늘의 작가상>의 ‘오늘’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본심작에는 현 시대에 문제 제기를 하는 소설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는 우리가 짊어진 사회적인 문제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려고 할 때 다가오는 수많은 갈등과 고민들을 매우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한 다른 이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자기 자신의 이해라는 작은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다. 배수아 작가의 『뱀과 물』은 인간이 어떤 존재나 자기 자신, 혹은 본질에 집중할 때 펼칠 수 있는 순수한 상상과 그 이상의 경이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는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며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라는 물음에 선명한 그림으로 답을 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 두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의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지난 해 수상작인 『82년생 김지영』에 이어 『딸에 대하여』가 수상할 경우 <오늘의 작가상>은 어쩐지 그 의미를 하나의 통로로 단단히 굳히게 될 것이라고 느꼈다. 우리의 오늘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 안에서 나름의 성찰을 유도하는 것이 ‘오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당선작은 『뱀과 물』로 결정되었다. 이는 <오늘의 작가상>의 ‘오늘’을 보다 넓은 의미로 바라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들이 내일로 이어지는 새로운 가능성과 다양성에 주목했다.


―지은경 (잡지 《Chaeg》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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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출간 이후 진행된, 악스트 Axt 2018.3.4호에 실린 배수아 작가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컨텐츠를 제공해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text Song Jong won 송종원 

photo Paik Da huim 백다흠 



나는 소설이란 독자의 감수성과 감수능력과 독서력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는 편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독자의 상상력이 함께 요구된다고.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마침내 살게 되는 거라고. 나는 내 소설이 상상력이 있는 독자를 스스로 찾아가기를,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1. 


배(배수아 이하 ‘배’) 

나는 질문하고 싶다. 한국 시와 한국어로 번역된 외국 시는 어떤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항상 궁금했다. 시 평론가이니 이론 전문가에 속하지 않는가. 그래서 이렇게 만난 기회에 물어보고 싶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고 봐야 할까? 외국 시가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면, 그건 한국 시일까 아닐까. 자주 읽지는 않지만 어쩌다 시를 마주하면 나는 항상 그런 종류의 의문이 들곤 한다. 한국 시와 한국어로 번역된 시가 다르다는 느낌, 그래, 느낌인 것이다. 이 느낌을 설명해주는 언어가 있을까? 


송(송종원 이하 ‘송’) 

한복과 양복은 다르다. 하지만 둘은 옷이라는 유개념에 같이 속했을 뿐 아니라, 상의와 하의의 구분하는 공통의 형식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의 질감, 색감, 세부 기능 등등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한국어로 쓰인 시와 다른 언어로 쓰인 시도 비슷하지 않을까. 외국 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국 시와 쉽게 호환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할 부분도 존재할 것이다. 한국어 또는 한국 시의 경계가 거기서 드러날 것이고. 시는 기본적으로 타자의 무엇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오는 움직임을 취하는데, 외국 시의 경우 번역이 되었다 하더라도 내면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좀 더 복잡하고 수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로 번역되는 외국 시는 한국에 도착 중인 시가 아닐까. 그것이 한국어를 조금씩 바꾸기도 할 것이고. 시뿐만 아니라 크게 보면 소설도 비슷할 것 같다. 


배 

물론 마찬가지지만, 소설보다는 시에게 그 다름이 더욱 확연한 것 같다. 번역된 소설은 그 다름을 속이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더욱 궁금한 것이 있다. 시와 소설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송 질문은 내가 하는 건 줄 알고 이 자리에 왔다. 


노(노승영 이하 ‘노’) 

인터뷰이가 생각보다 인도를 잘한다. 


배 

이건 대화를 인도하는 게 아니라, 단지 내가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내 호기심은 매우 즉흥적이고 그만큼 빠르게 휘발되어버리기도 하는데, 일단 떠오른 호기심을 실행해버리면 기억이 오래 남는 경험을 했다. 물리적으로 몸으로 실행하는 것 말이다.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 또한 그런 실행에 속한다. 최근에 독일 여성 시인의 시를 번역하면서 번역 시와 한국 시의 차이에 대해서 평소의 의문이 더욱 커졌다. 번역 시는 원래 외국어로 창작된 시어를 번역했기 때문에 시어의 함축적 특성이 와해되어서 도리어 비전형적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한국 시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단순히 언어의 차이 때문인지. 그리고 번역 시도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에 포함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나? 


송 생각을 조금 해봐야 될 것 같은데…… 



배 

미안하다. 나는 카오스적인 대화가 좋다. A를 묻는 내 질문에 반드시 A에 대한 답변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시를 다루는 평론가들은 이런 점에 대해서 뭔가 특별하고 전문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시 평론가들은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겠는가? 


송 맞다, 가끔씩 한다. 가끔. 


정(정용준 이하 ‘정’) 그 점은 나도 궁금하다. 시와 소설의 차이에 대해서 평론가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배 

옛날에 우연히 만난 신용목 시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시와 소설에는 궁극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용목 시인은 있다는 의견이었다. 왜냐하면 시에는 운율이라는 요소가 들어가야 하므로. 그것은 예를 들어서 스토리 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는 말과도 유사하게 들린다. 그러면 산문시의 형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산문시와 산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소설을 쓸 때 항상 이런 의문을 갖는다. 내가 쓰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시인가―소설인가? 특히 단편소설을 쓸 때 그렇다. 아 말을 하고 보니,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차이라는 것도 궁금하다. 단지 길이의 차이라면, 단편소설의 중첩이 곧 장편소설이 되는 것인가. 


송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정리하자. 운문에 대타항 산문을 이야기할 때, 웬만한 것들은 다 산문에 들어간다. 두 대립항을 논하기 시작했을 때 시가 주로 정형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산문에는 운율이 외부로 드러난 정형시가 아닌 시적인 것들이 대부분 포함될 거다. 그러므로 산문시라는 말도 가능할 거도. 단편과 장편은 같은 소설의 범주에 들지만, 시와 소설만큼이나 다른 장르라고 생각한다. 단지 길이가 아니라, 길이가 다름으로써 세계와의 접촉면이나 타자에 대한 수용력 또한 급격한 차이를 보이지 않겠나. 소설가들은 그렇게도 말하던데, 단편과 장편은 전혀 다른 근육을 쓰는 노동이라고. 


배 

그리고 보통의 산문도 운율이 있다. 우리는 산문을 읽을 때, 그리고 특히 산문을 쓸 때 운율을 의식한다. 적어도 나는 분명 그렇다. 그러면 시의 특징을 단지 운율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송 운율 중에서도 내재율은 정의하기가 어려워서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피해 가는 경향이 있다. 



배 

그리고 외국 시에서는 좀 더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규칙, 예를 들자면 라임(rhyme)이라거나. 물론 번역을 하면 대개 사라지고 말지만. 그런데 한국 시에는 그런 정형성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 시와 산문의 경계는 어디인가. 행갈이? 



송 그런 말이 있다. 잡지의 시란에 실리면 시고 소설란에 실리면 소설. 




배 솔직히 그게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한 답인 것도 같다. 나는 오랫동안 시와 산문의 경계는 인위적으로 강제되었을 뿐, 사실상 없다고 간주하고 글을 써왔다. 그런데 생각이 조금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최근 나는 낭독 공연을 여러 번 했다. 낭독 공연이란, 내가 쓴 하나의 단편소설을 관객들 앞에서 전부 읽어주는 형식이다. 나는 이것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보고 싶어서, 여기에 음향 효과나 음악, 외국 배우들의 낭독 소리, 그리고 장소에 따라서는 영상 자료를 활용했다. 물론 낭독 공연을 하지 않을 때도 나는 원래 주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원고를 쓰는 편이었다. 이건 번역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원문을 무의식중에 그대로 다 옮기다 보면 한국어 문장의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관형절이 기형적으로 길어진다거나 문장의 앞뒤가 조화롭지 못하다거나. 일단 그런 문장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그 부조화를 다듬는 것이다. 그런데 낭독을 염두에 두고 내 단편을 다시 읽어보니, 눈으로 읽기 위한 글의 시각적 운율과는 또 다른 차원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을 느꼈다. 한 예를 들자면, 「도둑 자매」라는 단편의 마지막 문장은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이다.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문장의 형태를 중시했다. 처음 절과 두 번째 절의 길이가 서로 균형이 맞고, 소리가 적당한 화음을 이루며 어우러진다고 생각해서 만족했던 문장이다. 그런데 작품의 낭독 공연을 준비하면서 이 문장을 읽으니, 아주 심하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눈으로 보기 위한 운율과 귀로 듣기 위한 운율은 별개라는 느낌이 왔다. 아니 눈으로 보기 위한 운율과 낭송을 위한 운율은 별개였다. 후자의 경우, 무대의 연극 배우가 대사를 낭송하듯이 실제로 목소리가 움직이고 요동칠 감정의 인토네이션이 필요한데, 원래 내가 써둔 문장은 그런 힘이 없었다. 눈으로 보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소리 내어 읽어볼 때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낭송용으로 단편을 개조하면서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었다. “말해다오 자매여,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는지, 모든 기억이 왜 이토록 생생한지.” 그러자 낭송이 훨씬 용이해졌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와 소설의 차이란, 소리 내어 낭송하기 위한 글인가 아니면 소리 없이 눈으로만 읽는 글인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난 「도둑 자매」의 낭송용 각색 원고 일부를 아예 시로 바꾸어버리기도 했다. 더욱 효과적인 낭송을 위해서. 



송 어떤 과정 혹은 매개를 통해 전달하는가에 따라 세부는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시가 언어의 소리 자질까지 최대한 활용하려고 애쓴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어떤 시는 낭독할 때 눈으로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약화시키기도 하더라. 그러므로 낭송을 기준으로 시와 소설을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좀 더 추상화된 언어가 필요한 거 같은데…… 시와 소설 모두 그 형식 이전에 문학적인 자 극이나 떨림 같은 게 있었을 것이다. 그 떨림의 종류가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가볍게는 지금의 어떤 공식화된 문화에 대한 불만 또는 허무함, 조금 거창하게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다른 미래에 대한 꿈. 그것이 아마 그 떨림일지도.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조금 다른 것도 같다. 시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부분의 목소리와 시선들을 탄력적으로 이어놓은 형식에 가깝고,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통합을 이룬 인물을 통해, 그 문제적 인물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 소설이 아닐지. 그러니까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좀 더 분열적인 것이 시이고, 조금은 통합적인 것이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고유한 존재 원리를 찾으려는 강박은 장르를 폐쇄적으로 만들고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잊게 한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배 그렇구나. 


송 사실 요번에 『뱀과 물』은 시인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어떤 율동이라든가 이미지의 연쇄 같은 것들이 시에서 봐왔던 것들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 

그렇다면 소설의 고유한 특징은 서사라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건가? 


송 그보다는 내가 느끼기에 『뱀과 물』은 명확한 화자가 아니라 죽음과 같은 어떤 거대한 것이 말하는 것 같더라. 황폐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말하는 것 같은, 딱 인칭화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렬할 때 시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 것 같다. 


배 오,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차이점이다. 새로운 것을 배운 기분이다. 그래서, 우와, 너무 좋다. 



송 아이고. 


정 이 인터뷰로 소설과 시에 대한 완벽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배 

한국에서는 시를 전문으로 쓰는 작가와 소설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의 경계가 굉장히 예리하지 않은가. 서로 넘어설 수 없는 경계인 듯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외국 작가들의 창작 영역은 경계가 없어 보이고, 시와 소설, 희곡, 산문을 두루 쓸 뿐만 아니라 직접 연극 연출을 하거나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시인(Dichter)”이란 이름은 시라는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정적인 문학을 하는 모든 작가에게 일종의 존칭으로 부여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번역을 할 때 그 단어를 사전적인 “시인”으로 옮기면 대개의 한국 독자들은 시만 쓰는 한국 시인을 대입해버리게 된다. 한국에는 시를 쓸 자격증이 따로 있고, 소설을 쓸 자격증이 따로 있다. 희곡 자격증이나 시나리오 자격증도 따로 있을 것이다. 과목별 시험을 쳐서 각각의 글을 쓸 자격증을 따는 것 같은. 


송 제도적인 거겠지. 한국은 등단이라는 제도가 시인, 소설가 따로 영역을 나눠 뽑는 관습이 있으니까. 



배 

그것은 곧, 시는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으니까 가능한 형태가 아닌가.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 결말을 내고 싶은 생각으로 이 화제를 꺼낸 건 아니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특히 내가 나서서 그러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냥 이렇게, 문학에 대해 가벼우면서 무심한 대화를 나누는 게 좋다. 모든 인터뷰가 이런 식이면 참으로 즐거울 텐데!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문학은 내게 미지였고, 지금도 여전히 미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기초적으로 보이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이 여전히 즐겁다.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잘 없기 때문에 당신이 평론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당장 질문하고 싶어졌다. 


송 나는 배수아를 만난다는 말을 듣자마다 내가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배수아라는 아우라가 있기 때문에. 말로 그것을 잘 건드릴 수 있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만나고 싶은 욕망이 커서 인터뷰에 참여하기로 했고. 사실 명확함 없이 구분되고 유지되는 것들이 태반이지 않을까. 시와 소설 사이에 선험적인 구분 형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때그때 새롭게 생각할 거리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시를 더 조각난 말들로 여긴다. 부분성이 강한 상태의, 아직 하나의 개체로 통합이 안 된 상태 같은. 그와 달리 소설은 통합된 개체에서 시작한다. 물론 그 개체 안에도 수많은 조각들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배 그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현상일 뿐, 출발점은 아닌 듯하다. 물론 결과를 염두에 두고 거기 맞추는 글쓰기가 가능하긴 하겠지만. 하여튼 내 의문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내가 쓰는 것이 무엇 인가?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시인가 ― 소설인가? 나를 소설가로 알고 있는 독자들이여, 용서해달라. 




2. 


송 『뱀과 물』은 사람들에게 꽤 읽힐 것 같다. 


배 

내 책이 희귀하게도 그런 인상을 주게 된 것은, 이 책의 문체 때문일 것이다. 나의 전 작품인 『북쪽 거실』이나 『서울의 낮은 언덕들』에서는 의도적으로 굉장히 긴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 책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아마 사람들은 긴 문장보다는 짧은 문장을 선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긴 문장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던, 혹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을 짧은 문장으로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인다면, 그건 긴 문장이 적절하지 않은 전달 수단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긴 문장으로는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던 것을 가독성이 좋은 짧은 문장일 때 역시 마찬가지로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면, 그건 문장 차원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뱀과 물』의 문장이―『북쪽거실』 과 달리―술술 읽히기는 하지만, 작품에 대해서는 역시 모르겠다고 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이다. 


송 아, 문장!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복문이나 장문은 읽는 훈련이 많이 된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거 같긴 하다. 그런데 가독성은 문장 길이나 형식에만 영향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뱀과 물』이 사람들을 매혹할 만한 흡인력이 있다고 여긴 건 분위기 때문이다. 잔혹동화 같은 느낌이랄까. 이제 이런 유의 분위기는 사람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경험해봤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낯설게만 느낄 거 같지도 않고. 


배 

만약 그런 이유라면 나는 스스로에게 좀 실망할 것 같다. 나는 이걸 쓰면서 동화처럼 읽히는 것을 많이 경계했고 그걸 거부하는 장치를 주려고 했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이니까, 형식적으로는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세계와 감각의 묘사가 설명되고 있으니까 곧장 동화로 읽히는 건 원하지 않았다. 


송 어쨌든 변화를 주었지 않았나. 


배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건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묘사된 세계와 감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방식인 것은 맞다. 


송 왜 어린아이의 시점을 사용했나? 초기작에서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여성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주도했다. 사춘기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그 시기에 겪을 만한 어떤 불안과 저항심 같은 것을 담고 있었다. 『뱀과 물』의 아이들이 특이한 것은 그들이 개체라기보다 계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이의 형상과 목소리 안에 커다란 집단 같은 게 용해된 인상을 받았다. 


배 

나는 과거에 흥미가 많다.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고대사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싶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 혹은 문자가 없는 문화권의 역사 말이다. 나는 알타이에서 스키타이족의 무덤을 보았고, 그것이 『뱀과 물』의 첫 번째 단편을 쓰게 된 아주 희미하고 흐릿한 시초를 이루었다. 내게 어린 시절이란, 개인의 선사시대에 해당한다.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흐릿한 경계 지대 말이다. 어휘나 개념을 알지 못하던, 세계를 어휘나 개념의 틀 안에서 이해하기 이전의 개인사. 마치 요람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처럼, 성인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빛의 감각, 난막을 갓 벗어난 병아리 같은 여린 살갗의 체험. 그런 감각에 이야기를 입히고 싶었다. 『뱀과 물』은 내가 초기에 썼던 『바람인형』과 비교할 수 있다. 소설집 『바람인형』에는 주로 성인 여성 화자가 등장하지만 그들을 규정짓는 것은 보이지 않게 드리운 그들의 어린 시절이었다는 점에서 『뱀과 물』과 유사하다. 반면 『바람인형』 속 문장은 여성의 내밀한 음성이지만 거기에는 그들의 사회적 포지션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매우 개성 있고 서정적인 사회소설을 쓰고 싶었던 초기의 나는 그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뱀과 물』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이나 화자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사회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해설에서는 꿈이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내 용어로 바꾸어 부른다면, 전생 혹은 무의식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기억의 이전의 기억, 개인사의 선사시대라고. 


송 그런데 이 소설집에도 사회적인 것들이 강하게 환기되는 기표들이 있다. 가령, 비행기 신이라든가 전쟁 이야기, 빨치산이라는 기표 이런 것들은 마주하는 순간에 갑자기 현실적인 어떤 것들로 확 다가왔다. 이 소설의 단어들은 시처럼 용해되어 있고 응축되어 있는데 앞서 언급한 단어들은 응축의 성질이 좀 다르더라. 역사적인 것을 환기시키는 능력도 남달랐고. 그래서 이 소설이 기존에 『바람인형』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역사적인 맥락하고 차이가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이 소설집 안에서도 사회·역사적 맥락을 발견할 것이 꽤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 

나는 이 책에서 자명하고 현실적인 것들을 전설처럼 다루고 싶었다. 당신이 말한 어휘나 이미지, 그런 파편을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그 파편들이 현실을 그대로 지적하고 노출하는 방식은 피해 가고 싶었다. 도리어 역설적으로 그 반대의 효과를 노리기를 기대했다. 



송 전설처럼? 여전히 진행 중인 무언가를 전설로? 이건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긴 한데 문장들이 엄청 사실적이었다. 거리를 두고 일부러 현실이나 이런 맥락도 멀리 둔다기보다, 그래서 ‘꿈’과 같은 말들을 가지고 그런 사실적인 감각들을 지워버리는, 더 모호하게 만드는 식의 해석적인 말들이 만들어질까 걱정되기도 하더라. 


배 

나는 이 책에서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를 쓰려고 했다. “K가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파묻혀 있었다.” 이런 건조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해명할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처럼. 사실적 묘사와 표현이 곧 사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반대여야 했다. 비행기, 전쟁, 빨치산, 이것들은 환상, 꿈, 비전과 달리 우리의 현실이지만, 글의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환상, 꿈, 비전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송 어린아이들이 많이 나와서 뻔한 질문이긴 한데,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 


배 신기하다. 그런 질문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다. 


송 그런가? 인터뷰들을 보면 청소년기 이야기가 조금은 있던데. 


배 

이 책에 나온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들이 실제 체험인가, 그런 질문을 받았다. 유년 시절 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는데, 내가 어렸을 때에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레코드판이 있었다. 그걸 즐겨 들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송 그게 레코드판으로 있었나? 


배 

그렇다. 『콩쥐팥쥐』도 있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도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은 섬광 같은 깨달음에 강타 당하던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세계 자체가 아이에게는 신대륙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세계의 어떤 면모를 스스로 깨달을 때의 전율이 나를 아찔하게 만들곤 했다. 물론 그중에는 얼토당토않은 깨달음도 많다. 유치원 다니던 때 『선녀와 나무꾼』 레코드를 들으면서 ‘아, 나는 아이를 낳지 말아야겠다’ 하고 결심한 기억이 난다. 그 생각은 매우 강렬하게 내게로 침투해 들어왔다. 왜냐하면 선녀는 하늘로 가고 싶은데 아이를 많이 낳으면 하늘로 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오니까. 나는 하늘을 특별히 원하지는 않았다. 선녀들만 가득 있다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는 “여성이 소망하는 일을 하지 못함”의 상징으로 아이들이 사용되는 것이다. 그건 생각해볼 문제였다. 그리고 선녀가 두 아이를 양팔에, 세 번째 아이를 다리에 끼고 하늘로 올라간다니, 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다. 엉뚱하고 허황되고 찬란하고 눈부시고 숨이 멎는, 그런 깨달음으로 충만했던 나날이다. 


송 눈으로 이야기를 읽어 내려간 기억이 아니라 소리로 이야기를 듣고 상상한 기억인 셈이네. 가족의 목소리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레코드판의 소리로 전해 들은 이야기라는 것도 특이하고. 요즘 낭독회를 종종 하던데, 레코드판으로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나중에 커서 직접 낭독을 하는 사람이 된 건가. 



배 

내가 낭독을 시작하게 된 건, 책이 나오면 으레 열리는 북토크 자리가 싫어서였다. 그런 자리에서 토크를 한다는 것은,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너의 소설을 해명해봐!”라는 강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내 소설을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해를 구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 역시 일종의 해명이라는 생각이 좀 들긴 한다. 뭐, 하지만 나는 은둔자 역시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부딪히는 것 역시 필요하고 즐거울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 단편을 낭독하자는 거였다. 단, 오디오북처럼 평면적인 낭독이 아니라, 장르를 포괄하는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시드니의 한 미술관에서 목소리가 전시되는 공간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아마도 영감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나는 무대에 관해서 아무런 테크닉이 없다. 심지어는 파워포인트 등의 프로그램도 다룰 줄 모른다. 영상 편집도 모른다. 그런 낭독 공연을 위해서는 어차피 현장에서 엔지니어링을 담당해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노승영 번역가가 기꺼이 그 일을 맡아주었다. 우리는 단편의 낭독 중간중간에 영상 자료와 소리, 영어로 번역된 텍스트의 낭독을 삽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영상에 다른 소리를 입히고 한글 자막을 넣는 작업 등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소리 낭독을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보려는 시도였다. 소설 속 이미지들을 다양한 감각으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 물론 중심이 되는 건 텍스트다. 목소리로 표현되는 텍스트. 나는 배우가 아니고 한 번도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게다가 이번에 낭독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가 긴장하고 흥분하면 사투리 악센트가 분출된다는 것이다. 또 공연 형태를 만들어내기에는 우리가 가진 장비나 기술도 한참 모자란다. 문학 텍스트의 목소리 공연에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쯤 전이다. 이후 계속 마음만 품고 있다가 이번에 『뱀과 물』 출간과 함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연은 전문 녹음 스튜디오에서 전문 성우들과 만든 매끈하고 세련된 낭독극에 비하면 그야말로 구석기인의 돌도끼 같지만, 이런 작업 과정 자체가 나는 즐겁고 행복하다. 


송 꿈 이야기가 『뱀과 물』에서 꽤 많이 나온다. 그런데 꿈을 쓰거나 꿈에 대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 


배 당신의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송 다행이다. 꿈을 만드는 작업으로 보였다. 글을 가지고. 꿈을 매개로 뭔가 다른 차원까지 가보고 싶어 하는. 


배 

말한 대로 나는 꿈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꿈에서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모티프를 얻기도 한다. 그것은 장면이기도 하고, 문장이기도 하고, 불안의 어떤 종류이기도 하다. 유동적인 현실을 어떻게 하나의 폼(Form)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힌트를 꿈속에서 얻기도 하고. 그런데 꿈은 어디서 오는가? 그건 현실의 감각에서 온다고 믿는다. 의식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주관적 경험에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란, 직관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건 『뱀과 물』 속의 한 단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이 하나의 문장에서 출발하여, 이 책을 쓴 셈이다.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송 꿈을 자주 꾸는 편? 

배 그렇다. 

송 꿈을 쓰되 작품을 쓸 때에는 일종의 가공을 한다는 말일 텐데. 

배 그렇다. 나는 그것을 소설화한다. 

송 가공하는 단계가 좀 궁금하다. 

배 

그런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글을 쓰느냐,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느냐, 어떻게 캐릭터를 만드느냐. 그런 이야기는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송 그런가? 

배 

왜냐하면 나는 그것에 대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내 글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자세하게 언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정교하고 치밀한 수공업자가 아닌 듯하다. 나는 매뉴얼이 없다. 나는 숙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다. 습작생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강연이나 토크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죄 

송하다. 

송 이 책에서 부사 중에 눈에 가장 많이 띄었던 건 ‘멀리’. 



배 아 그런가? 세어보았나? 

송 실제로 세어보지는 않았다. 읽으면서 여기도 있네, 아 또 저기도 있네 하며 봤다. 

배 그런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송 멀리 가는 것에 대한 반복이 있다. 초기작에는 집이라는 공간 같은 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게 있었고, 

그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배 내가 생각하는 내 서사의 중요 요소 중 하나는 ‘떠나다’이다. 

송 떠나다. 맞다. 

배 그다음은 ‘홀로’. 


송 떠나다. 홀로. 


배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서사는 이런 쪽이다, 라고 처음부터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글을 쓰다 보니 어렴풋이 잡히는 방향이 있다. 그런 것들이다. 떠나다, 홀로. 


송 떠남의 성격이 작품을 써오는 과정에서 조금씩 변했을 거 같다. 초기에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아까 이야기한 작품들은 가족으로부터 떠남이 강했다면 『뱀과 물』에서의 떠남은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멀리, 멀리라고 쓸 때 그 목적지. 꿈을 매개로 어떤 기억의 지대로 향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정신과 감각의 유년지대라는 말도 가능하겠다. 거기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어떤 상실감을 느끼기에 그런 것일까. 아무튼 그 멀리 가는 과정 속에서 언어를 새롭게 바라보고 또 자신을 위로해주는 느낌도 들었다. 


배 브라보, 멋진 해석이다. 


송 멋지면 안 되는데. 당신이 답을 해주셔야 하는데. 



배 

거기에 무슨 답이 있겠는가. 이 책의 주인공들은 어린 시절을 떠난다. 그럼으로써 어린 시절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어디로, 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 곳으로도 안 가면서 영원히 떠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소설의 힘이 아닐까 한다. 나는 소설이란 독자의 감수성과 감수능력과 독서력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는 편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독자의 상상력이 함께 요구된다고.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마침내 살게 되는 거라고. 나는 내 소설이 상상력이 있는 독자를 스스로 찾아가기를,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3. 


송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이 특이하다. 


배 

내게 주인공의 이름은 중요하다. 많은 요소를 고려해서 이름을 짓는 편이다. 그래서 약간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비현실적인 이름이 무의미한 이름보다는 좋다. 



송 그렇기도 하고 소설의 유머라는 코드가 거의 없는 것도 같은데, 이름이 그나마. 


배 그건 아니다. 나는 유머가 많은 소설을 좋아하고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 


송 이번 소설집에도 유머가 크게 작용하는 작품이 있나? 그나마 인물들의 이름이 유머러스하게 다가왔다. 얼이라는 이름이라든가, 예전 소설에서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쓴 적도 있다. 



배 

그 이름이야말로 유머였다. 아이러니와 유머. 그리고 내가 생각한 유머란 디테일에 숨어 있는 장치에 가깝다. 무대 앞에서 관객을 작정하고 웃기는 광대가 아니라,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이름 없이 등장하는 여경처럼. 나는 그 영화에서 그 여경을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기억한다. 경찰 제복을 입고는 있지만 하루 종일 남자 경찰들 커피나 타고 종종거리며 심부름이나 하고……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범인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것은 베테랑 형사도, 엘리트 형사도 아닌 그녀의 아이디어였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감독이 숨겨놓은 씁쓸한 유머코드로 인식했다. 그리고 『뱀과 물』에서는 음…… 「얼이에 대해서」에서 아이들의 담임교사 이름이 은주다. 그녀는 그냥 은주라고 지칭된다. 난 이런 게 재미있다. 그리고 「도둑 자매」에서 뚱한 표정의 젊은 의사. 난 그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또 「1979」의 교사. 그는 결혼하자마자 신부에게 말한다. 자신은 나이가 많으니 당장 아이부터 낳아야 한다고. 나만 우스운가? 왜 이런 설정을 했느냐고 물으면 뭔가 유머 비슷한 장치를 만들고 싶어서다. 


송 유머에 대한 나의 생각이 협소했던 거 같다. 이름 지을 때 뭔가 고민을 많이 하고 짓는가? 



배 

나는 이름이 정해져야 소설의 스토리를 생각할 수 있는 편이다. 캐릭터가 어느 정도 구체화되거나 성격 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으려면, 아니 스토리나 캐릭터는 없어도 화자라는 존재의 발성, 음색, 목소리가 있으 려면, 먼저 이름이 있어야 한다. 


송 제일 먼저 이름을? 


배 그런 편이다. 


송 여러 평론가들이 당신의 소설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즉흥적인 연쇄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배 그런가? 


송 어떤 즉흥적인 연쇄가 가능한 게 당신이 어딘가에 혹은 어떤 분위기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라고 본다. 그 분 위기가 먼저 있고 나서 문장들이 오니까 이것들이 즉흥적으로 연쇄가 되어도 이미지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예전 인터뷰에서 수용체, 안테나 이런 비유를 통해 말한 적도 있더라. 


배 

과거에 쓴 글에 대해서 너무 캐묻지 말길 바란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리고 그때그때 많이 바뀌는 편이다. 하지만 당신이 말한 수용체 글은 기억이 난다. 글을 쓰기 위해서 나를 만드는 작업……. 그렇다, 나를 곧 화자의 목소리로 만드는 작업 같은 것. 


송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무튼 어떤 분위기로 몰입하게 들어가는 과정이 궁금했다. 



배 

그런 글쓰기 전 단계인 몰입의 과정에 이름 정하기가 들어간다. 그 과정에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극단적으로 찢어진 채 존재하는 파편의 사건들, 무관한 이미지들, 독립적인 감정들이 있다. 그 소설이, 혹은 그 목소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어떤 계기들, 그런 것들이 내 의식을 떠다닌다. 투명한 부유물처럼. 물속에. 정신의 원형질 속에 떠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없으면 그 파편들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오랫동안 하나의 이름을 찾아다닌다. 그건 곧 목소리를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 


송 아직 작품이 나오지 않았지만 만들어진 이름이 있나? 



배 

그렇다. 이름이 있어야 하니까. 이름을 도저히 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하나의 임시로 하나의 이름을 정해놓고 쓸 때도 있다. 그런데 오래 생각한 이름이라고 해서 반드시 근사하고 멋지게 들리지는 않는다. 아주 평범한 이름이 선택될 때도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경희였다. 나는 한동안 그 이름을 사랑했으니까. 이렇게 이름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름에 주의를 기울여주는 인터뷰어를 만나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송 이름이 정해지면 어떤 편안함이 오나? 



배 

이름이 정해지면,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구체적인 스토리도 전혀 없지만, 뭔가 완성된 기분이다. ‘아, 나는 그/그녀를 알았어.’ 그런 마음이 된다. 최근에 든 생각인데, 그건 아마도 내가 그 이름 속으로, 이 인물의 목소리로 들어가는 첫발을 내디뎠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작가의 이런 태도는 비판의 소지도 있다. 예를 들어 작품과 작가의 거리감을 중시하는 경우라면 나 같은 작업 태도는 아마추어라거나 초보 소설가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작업한다. 


송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배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설을 급하게 쓰느라 적당한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예 화자의 이름을 끝까지 명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름이 없는 주인공이나 혹은 이니셜만을 갖는 주인공들. 그래도 최근에는 이름을 발견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내가 찾는 건 단지 사람의 이름뿐만은 아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내가 창작해낸 이름일 수도 있고,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이름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노인 울라에서」의 노인 울라 (Noin Ula) 같은 

경우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지만, 그것과 마주치기 위해서 나는 굉장히 먼 길을 지나왔다. 이 세상은 이름으로 넘친다. 그중에서 단 하나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경이롭다. 나는 그 경이감이 내 글 속에 스미기를 원한다. 실제로 단편 「노인 울라에서」의 주인공 아이 이름은 “눈아이”지만, 그 글에서는 지명이 주인공의 이름보다 더 큰 비중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송 이름과 지명,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예전에 한 소설가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수아라는 이름이 페소아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은 아닐까 추측했었다. 관련이 있을까? 또한 이름에서 당신 소설의 변화를 감지할 수도 있을까? 배수아의 소설 의 변모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가령 소설가 김사과 씨는 당신의 작품을 『이바나』 전후로 구분하기도 하던데. 



배 

나는 페소아의 작품 『불안의 서』를 번역했지만, 사람들이 저자와 역자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지적하기 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발음의 음성적 측면이 아니라 한국어로 표기된 글자의 시각적 측면에 치중한 인상일 것이다. 배수아와 페소아라는 한국어 표기가 유사해 보이지만, Pessoa와 Baesuah는 그렇지 않다. 내 글쓰기의 변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 또한 유기체니까, 당연히 유기체인 나의 뇌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을 테니까. 화학적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생각을 포함해서, 끊임없는 동적 평형의 상태에 놓여 있을 테니까. 당연히 내 생각이나 글쓰기 또한 변한다. 


송 독자로서 또 평론가로서 궁금했다. 작품 세계의 분기들이. 



배 

글 쓰는 환경의 변화라면 겪었다. 처음 글을 발표한 이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8년 정도는 전업 작가가 아니었다. 독일에 가기 전까지는 직장에 다녔다. 그러다 독일에 간 시점부터 나는 전업작가가 되었다. 그것은 매우 큰 변화였다. 



송 독일 이후에는 변화가 없다? 



배 

독일에서의 생활이 내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영향은 내 삶에서 글이 모든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직장을 통한 반강제적 “사회생활”이라고 부르는 요소가 사라졌다. 나는 해방된 기분을 느꼈고, 그 해방감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몇몇 작가들과 나누던 미약한 교류, 즉 프리랜서형 ‘사회생활’에서도 해방되기를 원했다. 나는 혼자이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독일 시기와 함께 시작 되었다. 독일 이후에는 번역을 하게 된 것이 하나의 큰 변화였다. 주로 글과 관련한 환경이 바뀐 것이다. 


송 번역이 작품 활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말해줄 수 있나. 




4. 


배 

번역을 하면서 나는 독서의 영역이 확장되었고 새로운 번역을 염두에 두고 읽을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소설을, 그것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소설만을 골라서 읽고 있다. 내게 번역은 큰 의미에서 독서이기도 하다. 그것도 매우 선택적인 독서. 독서는 일반적으로 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번역 작업 자체가 내 글쓰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도리어 (번역을 고려해서 선택된) 독서에 의해서 영향 받은 내 글쓰기가 역으로 번역에 영향을 주는 편이다. 




송 어떤 책에 ‘번역이라는 건 번역할 텍스트를 쓴 작가의 머리에 번역하는 사람의 몸을 이어놓는 작업과 같다’는 말이 있더라. 


배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가? 


송 아니, 다른 저자의 책에서. 머리가 보내는 어떤 시그널들이 있는데 그걸 자신의 몸으로 받아야 되니까 번역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머리의 시그널보다 내 몸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라는 말도 있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번역이란 어떤 이미지인가? 



배 

그 말은, 마치 번역을 육체적인 접신의 행위로 비유한 것처럼 들린다. 동의한다. 번역가의 몸은 하나의 글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동안 머무는 장소이기도 하니까. 


송 육체적이라는 건? 



배 

샤먼이 하는 일은 다른 영혼을 자신의 온몸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번역이 하는 일도 바로 그것과 비슷하다. 다른 영혼이란 곧 다른 언어이다. 원작자의 문장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건 사전적 번역에 그친다고 생각한다. 온몸의 감각을 동반하는 자신의 언어로 옮겨질 필요가 있다. 아까 당신이 인용한 말은 몸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모국어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번역에 관해서는 모든 번역가가 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송 받아들이는 그 작업이 가장 수월했던 작품은 무엇이었나? 



배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 나는 그 책을 번역하면서, 내가 원작자보다 더 앞서 나가지 않게 나 자신을 붙들어 매야만 할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힘든 번역이기도 했다. 내 몸을 통과한 글들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제멋대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작업은 중역이어서, 몇 번이나 불확실성 속에 갇혀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책을 통해서 나는 번역가로서의 시각을 좀 더 굳건하게 가질 수 있었다. 



송 지금은 어떤 걸 번역하고 있나? 



배 

최근에는 독일 여성 시인의 시집을 번역했다. 엘제 라스커 쉴러(Else Lasker-Schuler)라는 시인이다. 나는 여성 작 가의 글을 번역하기를 좋아한다. 아니, 사실은 무척 좋다. 그리고 시 번역도 마찬가지로 무척 좋았다.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더 많이 해보고 싶다. 얼마 전에는 또 다른 출판사에서 시 번역을 의뢰를 해왔는데, 몇몇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선별 번역해서 시 모음집을 내자는 거였다. 이런 제안은 번역가가 시인과 작품을 고를 수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그래서 아마 진지하게 생각할 듯하다. 


송 여성 시인들을 선집처럼 번역하는 건 당신의 기획인가? 아니면 출판사가? 




배 내가 제안했다. 나는 여성 시인들의 시를 더 많이 번역하고 싶으니까. 


송 요즘 한국 문단에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래서 출판사들도 부러 관련 도서를 더 적극적으로 찾는 거 같기도 하고. 


배 

출판사에서 내 제안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여성 시인의 작품을 번역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일단 내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번역에서의 유리함 때문이다. 시 번역은 소설 번역보다 번역가의 자율적인 언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번역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원작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도 있지만 번역 가능한 시어인가, 구조나 형태가 전달 가능한 편인가,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인데, 번역가의 언어와 얼마나 호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내 경험상 여성 시인의 언어가 내 번역어와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번역가로서 가능하면 최고의 시너지를 내는 작품을 하고 싶은 것이다. 반면에 내가 즐겨 읽기는 하지만 번역은 하고 싶지 않은 작가가 있다. 왜냐하면 그/그녀의 언어는 번역가에 따라서 큰 변이를 일으키지 않고 비슷하게 번역되며, 따라서 내가 한 번역이 조금이라도 특별하다는 느낌을 스스로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송 여성 시인의 언어의 어떤 면들이 당신의 언어와 잘 맞는 걸까. 또 한 가지 질문. 번역은 자기 언어의 한계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작업일 것도 같은데. 


배 

물론 모든 여성 시인이 다 내 언어의 호응권 안에 들어오는 건 당연히 아니다. 어디까지나 번역은, 그리고 문학은 ‘소수 선택’을 전제로 한다. 내가 선호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방금도 말했지만, 번역자에 따라서 매우 다른 번역어로 재탄생하는 작가이다. 심지어 같은 원작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개의 문학작품은 어느 정도는 이 기준을 맞춘다. 반면에 원본이 갖고 있는 견고함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튼튼하거나 너무 구체적이거나 너무 그 자체가 너무 완전해서 번역으로 인해서 파생되거나 변용될 가능성이 덜한 작가가 있는데, 작품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나는 그런 작가의 번역가가 되기를 썩 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 반대편에는 묘하게 구멍을 가진 문장이 있다. 번역가가 자신의 무엇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심지어 번역가 자신의 구멍으로조차. 텍스트의 이런 두 가지는 유형은 문학적 훌륭함과는 무관하다. 그냥 텍스트의 기질이고 성격이다. 나는 내 언어의 한계를 외국어의 번역보다는 글쓰기를 통해서 더 많이 느끼는 편이다. 아니, 글쓰기보다는 낭독을 통해서 더 많이 느낀다. 이번에 다섯 차례의 낭독 공연을 하면서 그걸 실감했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번역을 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번역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다. 


송 당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무성적이니 양성애적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은 여성이라는 게 뚜렷하게 감지된 편이다. 


배 

그런가. 나는 이 책에서 성별을 의식하지 않는 여성을 등장시켰다고 생각한다. 성별의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이라고 할 수도 있는. 



송 여아의 형상에 수많은 여성의 모습이 끼어든 것처럼도 보였다. 할머니와 20~30대 여성의 목소리가 구분없이 스며들어 있다. 


배 그렇게 볼 수 있다. 


송 요즘 한국 문단에 페미니즘과 관련해 작품을 다시 읽는 시도들이 있던데, 당신의 소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글도 봤다. 


배 

몰랐다. 내가 보기엔 가장 거리가 먼 텍스트에 속할 것 같은데. 적어도 겉으로는. 


송 음. 어쨌든 요즘 다시 읽기 시작하는 것 같다. 


배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브라질의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이다. 그녀는 1977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사후 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는 그녀의 글을 “여성적 글쓰기(I’Ecriture feminine)의 훌륭한 예”라고 칭했다. 여기서 여성적 글쓰기란 여성의 경험에 기반한 글 Tm기를 통해 여성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자율적인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리스펙토르의 일생을 살펴보면 개인으로서 그녀가 의식적인 페미니스트였다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작가인 그녀는 자신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썼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여성적 글쓰기가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송 단순한 질문이지만 한국문단에서 이야기되는 페미니즘과 관련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배 

그렇게 언급되는 작품들을 나는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 관련 작품”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그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장르화시키는 행위는 아닐까 생각한 적은 있다. 리스펙토르의 예에서 보듯이, 나는 ‘여성적 글쓰기’를 목표가 아니라 도리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디로든 갈 수 있으며 어디에도 묶일 필요가 없다. 



송 동감한다. 어떤 카테고리를 겨냥하고 쓰는 작가들이 전혀 없는건 아니겠지만, 작품을 특정 범주에 한정하는 식의 언사를 언제나 조심해야 하는데 경솔했다. 한국 소설에 넘쳐나는 것 혹은 한국 소설에 이건 건 너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있나? 


배 나는 한국문학의 전문가가 아닌데 이런 질문을 많이 하면 곤란하다. 


송 나는 넘쳐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가족 이야기인 것 같다. 



배 

많이 읽어봤으니 잘 알겠구나 싶다. 그런데 가족 이야기는 사실 외국 소설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심지어는 가족소설, 혹은 세대소설이라고 하여 하나의 장르처럼 말해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소설은 당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가족은 여전히 인간의 중요한 사회적, 운명적 구조니까, 소설가로서는 그 이야기를 무시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가족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가족 이야기의 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5. 


송 편지, 이메일 같은 걸 주고받나? 소설에 편지가 자주 등장한다. 


배 

가족소설보다는 편지소설이 더 좋다. 편지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문학 중 하나가 카프카의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카프카는 여자를, 사랑을 어떻게 체험했을까, 의문이 생겼는데, 그때 누군가가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 카프카가 정말로 “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난 종종 카프카의 소설보다 그의 편지가 더 좋을 때가 많다. 


송 어떤 면이? 


배 

그 사람의 열정, 그리움, 기다림으로 나온 언어가 그 안에 들어가 있다. 소설에서는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던, 열정적이고 절망적이고, 심지어는 로맨틱한 언어들. 그의 편지가 20세기 초에 쓰인 것을 생각해보자. 그 시절 편지는 오랜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그런 편지는 가장 최고의 연애 문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송 당신의 소설 속에도 편지의 구절들이 있다. 정말 한 구절씩 쓴 것 같은. 


배 나는 편지를 좋아한다. 이메일도 좋아한다. 물론 사적인 통신을 말하는 것이다. 


송 그것을 주로 수신하는 사람이 있나? 

배 

그렇다. 이메일로 서신 교환을 하는 친구가 있다. 실제로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를 번역해서 소설에 쓴 적도 몇 번이나 있다. 나는 비교적 짧으면서 인상적인 이메일을 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엽서도 좋아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책을 선물하면서 안쪽 표지에 적어주는 짧은 인사와 같은 말이다. 그 또한 일종의 메시지니까 편지에 포함시킨다. 


송 아까 가족 이야기 하면서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니까 가족의 형상이 그렇게 나올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뱀과 물』 안에도 한국 사회나 현실에 대한 반영의 지점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걸로 환원할 수 없겠지만 그런 것들을 꼽는다면 어떤 한국 사회의 모습이 녹아 있다고 보는지. 


배 

내가 쓰는 것은 꿈이고 환상인가? 하지만 나는 아무리 환상을 다룬 작품이라도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는 편이다. 예를 들어 단편 「1979」 「뱀과 물」은 70년대의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나는 비교적 그 시절 학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도둑 자매」는, 내가 어린 시절에 실제로 체험했거나 체험했었다고 믿고 있는 어떤 만남을 기초로 한 이야기다. 내게 그 이야기들은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 사실이란, 내 경험과 주관이 선별한 사실이다. 현실은 무수한 사실의 집합체가 아닌가. 현실은 내게 내용이 아니라 감각을 제공해준다. 나는 그 감각을 직관의 언어로 번역하고 이야기의 옷을 입힌다. 한 작가에게 이국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하더라도, 그가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이면 그가 쓰는 것은 한국적인 것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겠지. 환상도 현실의 파생물이 아니겠는가. 


송 가난과 돈, 이런 요소들에 눈이 가는 작품들도 썼다. 


배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말하는가? 



송 그것도 포함된다. 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당신의 소설을 읽어내는 작품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배 

돈이 중요하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반드시 물질적 풍요라는 측면을 떠나서도 그렇다. 내가 최초로 번역한 문학작품이 말하자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돈의 미학을 다룬 거였다. 인상적이게도. 


송 어떤 작품을 말하는 거지? 


배 마르틴 발저의 『불안의 꽃』이다. 그 작품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너무 좋다. 


송 뜬금없는 질문이긴 한데 너무 매혹적인 이야기와 풍족하게 쓸 수 있는 돈과 두 개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떤 걸 고르겠나? 



배 당연히 매혹적인 이야기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송 우문에 현답으로 답해주셨다. 내가 아는 작가들한테 당신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더니 김엄지 소설가가 독일 맛집 좀 알려달라고 요청하더라. 




배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맛집도 모른다. 집에서 요리를 해서 먹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가지 않을 때면 주로 집 안에서 머물고, 밤에 산책을 나가는 일 말고는 거의 외출하지 않는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식당 정보에 둔감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은 맛있는 식당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식당이다. 그런 곳은 당연히 맛집이 아니다. 


송 집에서 직접 해서 먹는 편? 


배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나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 좋다. 


송 집에서 1인분의 요리를 해 먹는 일은 어렵지 않나. 


배 

혼자 먹는다고 반드시 1인분만 할 필요는 없다. 샐러드 같은 건 아침에 많이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하루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난 한식은 못한다. 


송 한식이 아니면 주로 어떤 걸? 샐러드랑 고기? 


배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샐러드와 직접 구운 통밀빵 그리고 커피이다. 샐러드는 원칙적으로 모든 재료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달걀이나 마카로니, 와일드 라이스로 밥을 해서 넣을 때도 있고, 간혹 스테이크용 고기를 구워 샐러드에 넣기도 한다. 


송 빵을 직접 구워서? 


배 

그렇다. 나는 호밀빵이나 통밀빵을 좋아하는데, 동네에 그런 빵을 파는 빵집이 없다. 그래서 작은 오븐을 사서 직접 구워보기로 했다. 


송 제빵을 배웠나? 


배 

아니다. 나는 학원에 다니며 뭔가를 배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실패하더라도 혼자서 해보기를 선호한다. 빵은 한 달 정도 실패를 거듭했다. 돌덩이같이 딱딱한 빵만 굽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제대로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레시피를 무시한다. 그러다보니 과연 내가 만든 것이 정통적인 의미의 빵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독일에서 사 먹은 통밀빵과 맛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게 빵은 빵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송 작품 하나 쓰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배 

사실 그것이 내 고민 중의 하나이다. 번역을 많이 하고 있어서 작품을 쓸 시간을 내기가 정말 힘들다.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럴 마음은 아니었는데, 점점 더 번역을 많이 하게 된다. 번역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 많아서, 먼저 번역을 붙들고 있으면 글쓰기는 점점 뒤로 밀리는 경향이 있다. 또 번역하고 싶은 작품도 점점 많아지고, 번역 기획을 맡기려는 출판사도 늘어난다. 정말 하고 싶은 번역 작품이 생기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내가 책을 읽는 속도도, 번역을 하는 속도도 느리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본 원칙을 세웠다.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번역은 하지 않고 글을 쓰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번역에 집중한다. 작년 가을 독일에 있는 동안 글을 썼다. 완성하지 못했다. 이제 곧 다시 독일에 간다. 가면 그때 쓰던 글을 계속해서 쓸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글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아마도 비행기에서부터 나는 오직 그 글만 생각할 것 같다. 


송 체류 기간을 얼마 정도 정해두는 건가? 


배 

이번에 가면 3개월 정도 머물 예정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니 기쁘다. 하지만 급한 번역이 있으면 한국에 있는 편이 좋다. 집에서는 번역 속도를 낼 수가 있으니까. 독일에 가면, 주로 집에만 머물지만 간혹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책을 보거나 화집을 보면서, 하루 온종일 게으르게 보내기도 한다. 


송 독일어는 늦게 공부한 편이라고 들었다. 


배 그렇다. 거의 30대 후반에 시작했다. 


송 아이큐가 높다고도 들었다. 그래서 가능했던 걸까? 


배 

아이큐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독일어를 잘하지 못한다. 어휘력도 딸려서 번역은 사전에 의존하고, 하지만 사전의 어휘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피한다. 아마 번역가 중에서 내가 가장 말을 못하고 어학 실력도 가장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송 번역과 소설쓰기를 번갈아 한다는 건 그 작업 기간이 대략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 환경에서 장편을 쓰기는 힘들겠다는 생각도 든다. 





배 

그렇다. 분량이 나가는 장편을 쓰기에는 아주 불리한 여건이다. 그런데 나는 예전부터 긴 장편보다는 노벨레 사이즈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쓰는 것도 좋아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 같은 것.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장편 작품들도 많다. 볼라뇨의 『2666』, 포크너의 작품들. 결론은, 나는 소설의 사이즈를 개의치 않고 즐긴다. 그런데, 간혹 생각이 들기를, 모든 단편은 거대한 장편의 일부분이 아닐까? 그러니 하나의 책이 너무나 길어야 할 필요를 잘 못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반드시 짧아야 할 필요도 없다. 이야기의 완결성과 독립성을 중시하는 작가라면 생각이 다르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지구력보다는 순간적인 전류가 흐르는 듯한 글쓰기를 좋아하므로, 나에게 맞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송 단편은 약간 답답한 완결성 같은 것이 있다고 보는 걸까? 


배 

내가 단편을 쓸 때 그런 전제는 갖지 않는다. 장편도 마찬가지다. 장편, 단편의 구분도 시, 소설의 구분처럼, 내게는 애매하다. “어떤 작가는 오직 하나의 작품을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쓴다”는 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그냥 쓴다. 



송 요즘 잡지에서는 단편을 더 짧게 청탁하기도 한다. 40~50매. 



배 

나는 15매 소설을 쓰기도 했다. 1.5매면 또 어떤가. 그러다 보면 하나의 단어로만 된 소설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너무 극단이라고 보는가? 스토리가 없다고? 이러다가 우리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송 돌아가지 말자……. 



배 그러다 보면 우리는 결국 시와 소설, 단편과 장편. 그런 형식의 구분에 대해서 많이 회의하게 될 테지. 


송 회의적이지만은 않다. 그런 느슨한 구분이 있으니까 장르성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고 질문하는 실험들이 발생하는 순기능도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장르 구분 없이 청탁하는 실험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혹 시 청탁 받아본 적은 없나? 



배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질문을 받으니 문득 생각이 났는데, 며칠 전 노르웨이의 친구가 내 책에 대한 서평을 썼다면서 링크를 보내왔다. 나는 그 리뷰 기사를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읽었는데, 노르웨이-영어 번역은 읽기에 거의 무리가 없이 매끈했다. 그의 서평 마지막 문장은 신기하게도, “배수아가 앞으로 시집을 한두 권 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였다. 


송 아까 언급한 시 번역도 어느 정도 작업이 진척이 된 상황인가? 



배 

아니다. 아직 시인도 선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읽기 위해서 번역해둔 시들이 있고, 그 시를 중심으로 구성해보려고 생각 중이다. 나는 일종의 취미처럼, 시집을 뒤적이다가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한국어로 읽기 위해서 번역해보는 습관이 있다. 특히 그렇게 연애시를 몇 편 번역했다. 굳이 번역을 한 이유는 그것을 한국어로 음미하고 싶어서다. 그러면 원어로 읽을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 난다. 그것이 사실 좋다. 소설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데, 시는 한국어로 옮겨서 읽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나는 번역시 읽기를 좋아한다. 


송 기대된다, 연애시. 두 개 이상의 언어 사이를 떠도는 경험도 좋을 것 같고. 

배 그렇다. 

송 작품을 쓸 때 강박적으로 행하는 무언가가 있나? 

배 

음…… 옷을 챙겨 입는다. 번역할 때는 무조건 편하게 입지만, 작품을 쓸 때는 뭔가 여행을 떠나는 그런 마음이 되고 싶기 때문에, 실내복이나 이지웨어만 입는 건 싫다. 그리고 피하고 싶은 단어들이 있다. 

송 피하는 단어는 가령 어떤 단어? 

배 

지나치게 구어체적인 어휘는 피하고 싶다. 나는 창의적인 문어체를 좋아한다. 소설의 대화에서도 그걸 활용하는 편이다. 

송 그런데 이분들은 원래 이렇게 있는 건가? 



배 원래 이러고 있다. 


송 인터뷰 찍힌 걸 보면 중간중간 등장해서 말을 하던데. 


배 

우리는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인터뷰어를 맡는데, 다른 사람들이 간혹 인터뷰어를 거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해진 건 아니어서, 관심이 없을 때는 한마디도 안 하기도 한다. 


노 아니, 약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면 끼어들려고. 


배 그런데 이번 인터뷰에는 다들 별 관심이 없나보다. 



정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뭔가 견고하다. 


송 희곡 작업이나 연극에 참여한 적은 없나? 


배 

희곡이나 연극? 그런 적 없다. 단 영화에 출연해본 적은 있다. 독립영화고, 짧은 단역이지만. 한국에서가 아니라 독일에서. 연극이라고 하니 생각났는데, 10여 년 전부터 나는 목소리로 표현되는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연히 극단 일을 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 그에게 내 단편 하나를 낭송극 형태로 무대에 올릴 방안이 없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했다. 그러자 그가 일단 배우들과 함께 한번 읽어보겠다고 하기에 내 단편을 건네주었다. 단편집 『올빼미의 없음』에 수록된 「밤이 염세적이다」라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다음에 만나서 그가 하는 말이, 극단의 배우들이 그 단편의 낭송을 거부했다고 한다. 


송 왜? 




배 

자신들은 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는 공감할 수 없다. 공감할 수 없는 텍스트를 무대 위에서 앵무새처럼 소리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의 배우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라야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저질렀다. 배우들이 텍스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내 글의 비타협성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송 무산됐나? 



배 

당연히 무산됐을 뿐만 아니라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구나, 만약 누군가 내 글을 ‘기꺼이’ 읽는다면, 그건 아마도 단 하나, 오직 내 목소리뿐이라고. 


송 낭독하는 것을 보았다. 

배 어떤 낭독을? 

송 「뱀과 물」. 

배 이리카페 낭독 말인가. 거기 왔었나? 


송 유튜브에 올라와 있더라. 

배 

유투브에 올라간 건 몰랐다. 이리카페 낭독은 나의 완전 최초 공연이므로 어떤 정신으로 읽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송 처음에 깜짝 놀랐다, 낭독 직전에 태연하게 전화를 받아서. 


배 

그건 연출이었다. 처음으로 “낭독공연”이란 걸 만들어보고 싶었다. 100%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약간의 연출을 기획해서. 


송 이게 연출일까 실제일까. 잠시 고민했다. 


배 

어떤 관객 중 한 명은 내가 전화를 받으니 공연 중에 통화를 하는 줄 알았던지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송 그 웃음소리도 들어가 있더라. 


배 

그 장면은 소설의 처음 신을 지문 없이 연출한 거였다. 사실은 연출을 좀 더 풍부하게 넣고 싶었는데, 이리카페라는 장소를 잘 몰랐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녹음이며 음향이며 아는 것도 없었다. 두 번째 낭독공연은 번역가 노승영 씨의 작업실에서 했다. 물론 그건 공개공연은 아니었고 한 여덟 명 정도 개인적인 친구들을 초대한 거였다. 그 때는 연출을 좀 더 가미할 수 있었는데, 노승영 번역가가 도와주어서 가능했다. 


송 그것도 어디서 볼 수 있거나 들을 수 있는 건가? 

배 

아쉽지만 공연 녹화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2월 초에 일산의 책방 이듬에서. 그때도 노승영 씨가 많이 도와주었고, 나도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노 

낭독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리카페를 못 갔다. 그래서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연출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공연에서 음향 조작을 하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막상 나는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송 비공개 파일 같은 게 있겠다 그럼. 



배 낭독공연을 녹화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노 사진조차 한 장 없고. 

배 

물론 나는 전문 성우나 배우가 아니라서 발성이 취약하다. 처음에는 그 한계점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용기를 냈다. 이리카페에서의 최초 공연은 연출 준비도 미비했고, 나도 경험이 없어서 공연의 성격보다는 그냥 낭독에 더 가까웠고, 전체적으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찾아온 관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생전 처음이니 속으로 많이 떨기도 했고. 단편 하나를 통째로 사람들 앞에서 라이브로 읽는 건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 었다. 기존의 낭독회 등에서 작품 일부를 읽는 것과는 차원이 좀 다른 일이었다. 


송 최근에 들은 건데 한 출판사에서는 오디오북 작업을 준비하는 것 같더라. 단편 하나씩 녹음하고 그걸 만들 어서 판매한다고. 


배 오 그런가? 오디오북이라면 CD인가? mp3 같은 게 아니라? 



송 그런 것까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무튼 처음 발표하는 작품을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서 작가가 직접 낭독하는 형식으로. 



배 

내가 아는 한 보통의 오디오북에는 연출이 들어가지 않는다. 연출이 들어가는 건 오디오극이다. 텍스트를 낭독에 맞게 각색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도 두 번째 공연부터는 각색을 거쳤다. 다음 작품으로 단편 「도둑 자매」를 준비 중인데, 이 단편 공연은 영상을 연출에 넣고 각색도 많이 하려고 생각 중이다. 같은 「뱀과 물」로 공연하더라도 매 공연마다 음악이나 음향은 바뀔 수 있다. 「뱀과 물」 첫 번째 공연에서는 막스 리히터의 음악을 썼는데 좀 밋밋한 것 같아서 두 번째 공연에는 독일의 오디오극 낭송 소리를 전화벨 소리로 만든 다음 그걸 시그널 음악으로 썼다. 중간에 들어가는 인터미션 음악도 오디오극의 소리를 빌려 왔다. 기존의 오디오극은 감독이 무척 고심해서 최고의 낭송과 최고의 배우, 최고의 음향을 마련해놓았다는 걸 안다. 물론 독일의 감독에게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준비하다보니, 연출 자체가 무척 즐거워졌다. 


송 

재밌다. 텍스트에다가 다양한 시그널을 입히는 작업이겠다. 「뱀과 물」을 오디오북으로 만드는 건 어떨까. 


배 그런데 단순히 읽기만 하는 오디오북은, 만드는 입장에서는 좀 재미는 없을 듯하다. 나는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 더 좋다. 그리고 어느 낭독회에서 독자가 질문한 것인데, 나는 내 텍스트가 다른 성우나 배우들에게 읽히는 것을 이제는 더는 바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낭독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내 글을 낭독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 어휘 하나하나에 깃든 감정의 온도를, 작가는 어려움 없이 즉석에서 선택해서 읽을 수 있다. 「도둑 자매」 낭독공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외국의 몇몇 친구들에게, 영어로 번역된 「도둑 자매」의 한 구절 을 주고 그것을 각자 영어로 읽고 녹음 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짧지만 인상적이고, 시와 같고, 감정이 고조될 수도 있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감정이 고조되는지는 다들 잘 모르는 입장이다. 그들은 단편 전체를 읽지 않았고, 또 읽었다 하더라도 다들 생각이나 해석이 다를 테니까. 그 결과 는 흥미로웠다. 모두 다섯 친구가 녹음을 보내왔는데, 얌전하고 수줍게 , 감정을 억제하고 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치 무대의 배우처럼 열성적으로 읽은 사람, 그리고 교과서적으로 딱딱하게 읽어 내려간 사람도 있었다. 같은 텍스트를 같은 언어로 읽었는데 음색이나 어조, 강조하는 발성이 너무 달라 마치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 개인들의 다양한 독서가 목소리로 나타난 풍경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돌림노래처럼 약간의 시차를 두고 겹쳤다. 그걸 나의 한국어 낭독 부분에 앞서 틀어 주려고 계획하고 있다. 


송 오! 흥미로운 시도이다. 두 개 이상의 언어 속에서 작업을 하는 작가의 상황을 청각적으로 재현하는 실험이겠다. 당신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어디서 그 에너지가 오는 걸까. 뻔한 질문 두 개를 마지막으로 던지겠다. 『뱀과 물』 후속으로 하는 작업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리고, 어떤 작가로 남고 싶나. 



배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어떤’ 소설이 될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른다. 아직은 파편의 단계이므로. 여성 화자의 목소리가 주인공이라는 것 정도만 말할 수 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상상한다. 이 글이 ‘미래의 나’에게 읽히게 된다는 상상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스스로 ‘미래의 나’가 되기를 상상한다. 미래의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글을 찾아 책들을 떠돈다. 마치 내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미래의 나는 어느 날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를 발견하고, 그의 글을 읽고 사랑한다. 그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20180131 일산 정발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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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대담한 장편소설 <N.E.W.>로 독자를 찾은 김사과 작가와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소설을 읽은 후 함께 생각해보기 좋은 답변을 공유합니다. (N.E.W.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 질문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안녕하세요. 현재 뉴욕에 거주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평소에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 작가로서의 삶과 개인으로서의 일상생활이 궁금합니다.


일이 없는 날에는 집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거나 아니면 밖에 나가서 사 먹습니다. 일이 있는 날에는 근처 카페에 가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씁니다.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다른 자잘한 일을 하고 저녁은 가능한 한 집에서 먹습니다.

보통 책을 쓸 때는 몇 달 동안 꾸준히 쓰고 고치고 하는 편이고요 그렇지 않을 때는 일기조차 쓰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그때 메모를 해두는 편입니다.




재벌 2세와 치정이 얽힌 이야기입니다. 흔히 '막장 드라마'라고 말할 만한 이야기인데요, 재미있게 잘 읽히기도 했고요. 기존 김사과의 소설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낯선 부분과 익숙한 부분을 동시에 느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발자크와 헨리 제임스 소설을 즐겨 읽어서 그 영향이 큰데요, 예를 들어 최상층 부자와 밑바닥 가난한 자들이 등장하며 등장인물들이 신분 상승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하고 치정과 배신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등, 그것이 요즘 한국 기준으로 봤을 때 영락 없는 막장드라마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흥미롭습니다. 어찌보면 한국의 순수(고급)예술이 현실(세속)의 인간사회를 탐구하는 것을 결벽증적으로 멀리하여 대중예술이 그 역할을 억지로 떠맡은 것이 아닌가 안타깝기도 해요.

















전작 <천국에서>보다 계급의 범주가 더 극으로 벌어진 느낌이 듭니다. 5평 원룸에서 200평 펜트하우스까지. 이 사람들이 '메종드레브'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알고 있으면서도 구별된다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도시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면, 다시 말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시로만 몰려들게 되면 양극화는 필연적인 결론인 것 같습니다. ‘메종드레브라는 장소는 그렇게 도시화 하는 세상에 대한 메타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평생 교류할 가망이 적은, '상류층'의 일상에 그들이 참여하는 방법. 소설에서 묘사된 최영주의 유튜브 동영상, 정대철 회장을 둘러싼 소문이 퍼지는데 도움을 주는 휴대폰 메신저, 최영주가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인스타그램 등의 매체가 인상적이었어요.


저를 포함하여 요즘 사람들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을 통해서 타인들의 진짜 삶을 엿볼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완벽한 환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진짜로 살아가는 삶은 인터넷을 떠도는 이미지와는 영 딴판인 것이 거듭 지적됩니다. 진짜 삶이 보여지는 이미지와 정반대인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요즘은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서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스스로의 이미지와 라이프 스타일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 상관이 없죠. 만약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면 공항이나 버스터미널에 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어, 영어 등의 문장 인용이 부분부분 등장하는데, 해석이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었어요. 모든 문장을 다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고요.


, 글에서도 뜻보다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중요한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하나를 돕는 캐릭터인 '성공자'가 재미있었습니다. 중독자라는 점에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 공통점이 있어보였고요, 도박중독이 다른 소비 중독, 권태 중독보다 덜 심각하게 느껴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성공자는 도박을 통해서 해소하는 것이 나았을 파괴적인 열정을 이하나가 정지용과 엮이는 것에 도움을 주는 데 사용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해로운 인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공자가 부추기지만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재미있는 문장이 많습니다. 저는 정지용의 입에서 나온 "나는 미끄러지는 미꾸라지ㅡ 잠시 외로운 미꾸라지" 같은 말장난이 정지용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장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정지용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위험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반대로 귀엽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으면 했어요. 덧붙여 정지용이 영어와 불어, 독어를 할 줄 알고, 랭보나 바이런, 셰익스피어 같은 문학가들을 언급하는데요, 유치한 말장난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언어적 재능이 풍부하다는 느낌을 주고 싶기도 했어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욕망은 무엇으로도 충족되지 않습니다 최영주와 이하나 사이를 오가는 정지용의 욕망도, 정지용에게서 카드를 받아 소비생활의 끝을 즐기는 이하나의 욕망도 한 단계를 넘어서면 더 이상 무엇으로도 충족되지 않음이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그저 꾸준히, 가능한 한 길게 기분이 좋은 상태가 이어지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아주 좋은 일도, 아주 나쁜 일도, 혹은 아주 괴상한 일도 벌일 수 있다. 내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면.”(143) 이 문장이 그래서 더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욕망은 원래 충족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욕망 그 자체보다는 욕망을 둘러싼 모든 것이 거래 혹은 게임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정지용은 이하나와 최영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계속해서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한 게임이지요. 이하나는 정지용의 첩이 된 대신 무제한 신용카드를 얻습니다. 최영주는 정지용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아이를 버리고요. 정대철은 자신의 왕국을 보존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습니다.거래들은 전혀 공정하지가 않고, 게임의 룰은 가혹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무정한 신의 관점에서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끔찍한 풍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인간이라 부르기로 할 때 그 인간은 혹은 우리는 우리로부터 영원히 멀어지는 것이다." (264)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이어 나갈 정지용과 최영주는 새로운 인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히려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악명 높은 폭군과 악녀의 계보를 잇는 고전적인 인간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대철을 어머니 은미라를 '잡아먹은' 아버지라고 묘사하는 부분 , "하나 씨, 먹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정지용 등, 소설에서 사용된 '먹는다'라는 단어가 굉장히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이 단어들이 놓인 자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정지용이 사는 세상은 흠 없이 완벽한 세상입니다. 항상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날 것입니다. 한 사회의 지배계층이 사는 세계의 전형적인 이미지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들의 삶은 가장 더러운 것, 피냄새 진동하는 밑바닥 세계가 없다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먹는다는 원초적인 단어, 동물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생각이 드는 소설이었습니다. 최근 즐겨본 드라마, 요즘 빠져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Thirteen reasons why(한국명: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미드가 재미있었습니다. 미국의 십대들 이야기인데요, 스킨스가십걸을 섞은 데다가 유령 이야기를 가미한 느낌입니다.




이하나에게 책을 한 권 추천한다면 어떤 책을 권할 수 있을까요?


셰익스피어 『겨울이야기』




요즘 읽은 책 중 알라딘 독자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리처드 호프스태더 『미국의 반지성주의』


















오랜만에 장편소설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알라딘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쓰는 동안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읽는 분들도 즐겁게, 신기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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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럽고 싱그러운, 여름 같은 소설 <경애의 마음>의 김금희 작가를 만났습니다. '마음'에 대해 함께 나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질문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권벼리, 정리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경애'한다는 것



<경애의 마음> 출간 이후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묻고 싶어요.


<경애의 마음>이 나오고 나서 인터뷰도 좀 있고 행사들도 있고 그래서 사실 아직 뭔가를 계속 진행중인 느낌이고, 확 쉬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아직은 긴장하고 있는 상태예요. 장편이라 확실히 단편집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계속 행사 등이 있어서 아직은 그냥 이 책 안에 있는 느낌이에요.


여행은 도쿄로 다녀왔어요.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제 책이 일본에서 봄에 나왔어요. 그게 서점에서 꽂혀있는 걸 보겠다는 생각으로 간 건데 막상 이상하게 도쿄에 가니까 굳이 찾아보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한 이틀은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길을 지나다 중고 악기상 있고, 대학교 있고, 그런 거리에서 대학교 건물에 있는 서점에 들어갔더니 외국문학 책장에 제 책이 있는 거예요. 희열을 느낀 나머지 책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려고 삼십분 넘는 거리를 걸어서 다른 서점에도 또 갔어요. 이 도시가 이제 내 책이 있는 도시가 됐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게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전작 <너무 한낮의 연애>도 제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한낮에 만난 연애는 어쩐지 불가항력이라 도리가 없을 듯해요. 이 소설 속 인물들, 경애와 상수에게 벌어지는 어떤 일들도 불가항력적인 것들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경애가 어렸을 때 자기 닉네임을 ‘피조물’이라고 하잖아요. 피조물은 ‘있게 된’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많은 상처들이 우리가 선택해서 생겨난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잖아요. 그 주어진 것을 넘어야 하는게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무게인 것 같아요. 경애와 상수에게 일어나는 일들, 경애가 어렸을 때 부딪치게 되는 상황들도 그렇고요. ‘피조물’이라는 닉네임에도 사실 그런 마음을 담은 거였는데 독자분들이 그렇게 읽어주시면 좋겠죠.


쓰면서 생각을 했어요. 이들의 인생에 주어지는 상처들이 있죠. 내가 원치 않는 상처가 내게 주어졌을 때 그걸 넘어서는 힘을 보여주잖아요. 그런 모습이 실제의 삶과 되게 닮아있는 것 같아요. 대단한 일을 하다 상처 입은 건 아니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로도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경애의 마음>이라는 제목이 작가에게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경애’라는 단어도 이 소설 이후 새로운 맥락으로 받아들여질 듯합니다.


‘경애’라는 제목은 갑자기 떠올랐어요. 이 작품을 시작한 게 2016년이었는데요, 장편을 써야 되고 연재를 해야 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경애’라는 이름이 왔어요. 여자주인공은 경애가 되는 거구나. 이 소설 속 두 주인공을 추슬러서 결국에 둘이 서로의 조력자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게 이 소설의 목표라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의 결을 생각하다 갑자기 팍 떠올랐어요.


계간지에 연재할 때는 제목에 경애(敬愛)라는 한자가 있었어요. 단행본 작업을 하다 디자인상 한자가 들어가면 보기에 나빠서 빠지게 되었는데, 출간 후 인터뷰를 진행하며 만난 기자들이 한자가 없는 게 훨씬 낫다고 하시더라고요.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진대요. 그래서 아 그랬구나. 빠지는 게 더 경애라는 인물에 집중하게 되는 거였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좋아하는 것을 말하기


독서 후 "재밌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좋아한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을 사랑하게 되고 응원하게 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친구 같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내 주변에 있는 친구 같고. 우리가 사는 모습이 담겨있고, 엄청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 아니고, 일상적인 얘기들이 많잖아요. 물론 소설이고 이야기이지만,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진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처음 이 소설의 결말을 구상했을 때는 이 인물들이 이렇게 의지적이지 않았거든요.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인물들에게 의지가 생겨서 경애가 일어선다, 인물들이 도드라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장편은 2년을 넘게 쓰니까요, 그 가운데 작가도 변하고 이야기도 쌓이고 하며 작가가 의도한 대로가 아니더라도 인물이 의지를 가지고 변하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쓰는 저에게도 좋고 책에게도 좋은 일이었던 것 같아요.




상수는 일반적인 남성 사회에서는 적응을 하기 어려운 유형의 사람입니다. 처음 상수라는 인물을 상상했을 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 주변에 있는 남성들과 자기 속내 얘기를 나누다보면 의외로 상수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결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어요. 화장실을 가린다든지 하는 점이요. 남자형제가 있는 가운데 성장했을 때 형에게 받은 고통, 아버지라는 존재에 가지는 부담감.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경험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제 또래뿐 아니라 저보다 더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이런 얘기를 하실 때가 있는데, 이게 한국사회의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상처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 면들을 그려 넣었어요. 상수가 도드라지게 특이한 건 맞죠. 그렇지만 상수라는 인물을 해명하면 상수 같은 어떤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상처도 해명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상수의 언어와 경애의 언어가 다른 점도 인상적입니다. 상수는 문어투의 말투를 쓰고, 경애는 욕설도 서슴지 않는 말투를 씁니다. 상수는 실제 사람과의 대화보다는 페이스북 등의 문자로 하는 소통이 더 익숙한 사람일 테고, 경애는 그에 반해 실제 사람과 나누는 말이 익숙한 사람이라는 점도 다를 듯해요.

(주 : 상수는 이런 말투를 씁니다. “박경애 씨, 제가 어떤 사람이나면요. 운전하면서 클랙슨도 한번 안 누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렇게 규칙을 잘 지켜요. 매뉴얼이 뚜렷하지요.”(54쪽))


둘 다 아웃사이더고 회사에서 내쳐져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과정이 다른 것 같아요. 상수는 개인적인 인물에 가깝죠. 경애는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파업문제라든지 주변과의 관계, 공적인 자리에서의 상처가 있는 친구죠. 이 둘이 성장해온 과정을 생각해봐도 상수는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사적인 맥락에서의 아버지 역할은 충실하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랐죠. 반면 경애는 아버지는 없지만 어머니가 할 수 있는 한은 충실하게 역할을 해주셨고요. 이런 다른 성장과정을 거친 남녀가 가질 법한 고립감과 연대감의 차이가 이들이 쓰는 언어를 다르게 하는 것 같아요. 상수도 연대를 추구하는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경애는 실제 관계에서 풀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고, 상수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자기 세상을 만들어서 관계 맺기를 시도해 본 거라고 생각해요.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생각했다.” (71쪽) E, 은총과 연관된 사고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읽으며 화가 났어요. 이 소설에는 이렇게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 장면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경애의 투쟁, 경애를 파괴하는 것 같은 산주의 태도 등을 볼 때 그랬어요.


그 장면을 쓰던 순간은 저도 기억이 나요. 스타벅스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그 사고, 사건에 대한 서술이 분량이 꽤 되는데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나와서 한번에 썼어요. 그때는 경애가 그 사건을 바라보는 분노감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한번에 막 터져 나왔던 것 같아요. 실제 책에 들어간 부분도 처음 쓴 글에서 별로 손대지 않은 상태예요.


제가 인천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는데요, 그 사건(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고)에 대해서는 이십대의 제가 느꼈던 그런 당혹감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말을 하기 어려운, 인간으로서 비참해진 느낌 같은 거였는데, 그 감정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상수가 경애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경애다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좋게 읽혔어요. 

(주 : “상수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다.” (47쪽))


좋은 감정이 들기 시작하면 사람이 수그리게 되잖아요. 자기를 꺾고 맞춰주고 싶고 이런 마음이 들어서 자기 마음이 순해지는 순간이 누구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상수가 그런 마음을 가져보는 순간을 생각했어요. 경애와 회식을 하는 상황에도 상수는 자기가 이 팀을 이끌기 위해 경애에게 맞춰준다는 변명을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경애가 자기한텐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된 거죠. 어렸을 때도 상수가 형에 대해서 형이 안하무인인 인간이 된 건 형에게 중요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형이 그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상수에겐 또 다른 밀침처럼 느껴져서 비참해졌다는 서술이 있고요. 자신에게 중요한 누군가가 생겨나는 순간, 상수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은 감정이 낯설어서 부인을 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독자의 눈에는 몸이 낮춰지고 순해지고 풀어지는 그런 느낌이 보이잖아요.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일하는 풍경의 구체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도미싱의 회사 생활에서부터 베트남 파견 근무까지. 노동으로 돈을 버는 생활의 풍경을 활달하게 그리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주 :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도 그런 ‘의미’랄까, ‘본질’이랄까 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 (84쪽))


일하는 사람들을 작가가 그릴 때, 그들을 일종의 타성에 젖은 사람으로 그리는 걸 볼 때 약간 화가 나요. 제가 실제로 만난 사람들이 일을 할 때 풍기는 분위기라는 게 그렇게 수동적이거나 타성에 젖어있기만 하진 않았어요. 저도 그렇고 모두가 일을 하며 살잖아요. 일을 한다는 건 그 일에 자기 삶을 부어넣는 행위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야기의 전달을 위해 일의 측면을 삭제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해요. 실제로 제가 알고 있는 저희 부모님도 일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성실할 이유가 있나?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웃음) 그 노동을 대하는 자세가 진솔했다는 기억이 있어요. 제가 직장생활을 하며 만난 선배들도 기억해보면 노동을 통해 뭔가 이루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다고 저는 기억을 해요. 그런 결이 있는데 없다고 하는 건 기만 같아서 느끼는 대로 쓴 것 같아요.




비슷한 맥락의 질문인데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이 부분이 좋게 읽혔습니다.


저도 약간, 하루를 보내면서도 순간순간 제 마음을 다시 단정하게 하고 노력해야 되는 사람이에요. 그게 잘 되지 않을 때는 실제로 일상부터 파괴되거든요. (소설 속 경애처럼) 안 먹고 안 씻고 하는 건 가장 필수적인 것부터 안 하게 되는 거잖아요. 사람이 자기 무게를 감당 못하는 순간이 올 수 있죠. 실제로 저도 그랬기 때문에 하루하루 어떻게든 일상을 꾸려나가는 게 굉장한 힘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사람들이 ‘내가 되게 열심히 못하고 있네. 나는 왜 이거밖에 안 되지.’ 이렇게 자기 채찍질을 하는 게 안타깝기도 해요. 일을 하고 퇴근해서 다시 내일을 준비하는 그 질서가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상수가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스북 사건 이후 못 씻고 있을 때 경애가 해주는 말 등의 장면을 넣게 되었어요.




피씨통신 동호회, 미투데이 등의 매체에서 페이스북 페이지로 이어지는 동안, 모이는 장소는 달라져도 사람들이 나누고 싶은 마음들은 다 비슷한 결이라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경애랑 은총이 ‘번개’를 해서 만나고, 상수와 ‘언죄다’ 회원이 만나고 그런 장면들이 있죠. 이 소설을 쓸 때 문득 이십대들이 ‘번개’를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물 두 살인 친구 동생에게 물어봤는데 모르더라고요. 그게 참 신기했어요. 말은 바뀌는데 온라인 모임이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어지는 건 그대로인 점이요. 


처음 만나선 낯선 사람이니까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온라인에서 알게된 사람들도 마음에 들어오면 만나고 싶죠. 궁금하고. 제 인스타그램 친구분 중 몇 년 전에 제 소설의 일부를 캘리그라피로 쓰셔서 올려주셨던 분이 계세요. 그 작품이 너무 예뻐서 제가 먼저 ‘좋아요’를 찍었고, 그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어요. 그분이 얼마 전 도서전에서 사인회를 할 때 처음으로 오셔서 실제로 뵙게 됐어요. 제가 낸 책이 앤솔러지 등을 포함하면 꽤 많은데, 그 책을 다 가지고 오셨어요. 그 책들에 사인을 해드렸고, 너무 반가워하시고 좋아해주시더라고요. 뭘 주고 가셔서 집에 가서 풀어보니 <경애의 마음> 속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문장을 넣어서 그림을 그려주셨더라고요. 인스타로만 연결되어 있던 분을 실제로 잠깐이지만 만나 뵙게 되었고, 그분이 실제로 자기 손길이 닿은 선물을 주고 가시니까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작가로서 응원 받은 게 아니라, 아는 사람으로 응원을 받은 것 같았어요.




이유와 목적이 없이, 단순한 선의로, 사람을 돕는 게 결국 사람이라는 점이 좋았어요. 경애에게 하는 주끼박의 충고가 그랬고요, (“내가 한 이삼일 내로라도 짐 싸서 한국 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해. 안 그러면 못 버텨.” 218쪽)) 김유정이 경애에게 해주는 말이 그랬고요. 헬레나와 경애가 스스로 서로를 돕는 모습 역시 참 좋았습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그런 식의 도움을 주고받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생기잖아요. 굳이 내가 해야 되는 일은 아니었는데 선의로 누군가를 돕게 되는 일이요. 노동이 쉽지 않죠. 일을 같이 해야 하는 사람들과도 경쟁도 있고 싸워야 하는 순간도 있고요. 그렇지만 마음이 가서 서로 도와서 이 일이라는 것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저는 팀에는 대부분 여자들만 있고, 상사만 남자인 부서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어요. 제가 막내였고, 다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분들이었죠. 실제로 여자 선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런 장면을 쓸 때 제가 직장생활에서 받았던 느낌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그려진 것 같아요.


‘주끼박’이라는 사람은 그 사람이 과거에 했던 행동들을 보면 사실 남성 사회에서 요구하는 폭력성을 익힌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 남성 중심의 영업자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런 두 가지 면을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경애에게 조언을 해줄 때, 경애를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테고 기존 반도미싱 베트남팀이 ‘아작’났으면 좋겠으면 마음도 있었겠죠. 그래서 그런 애매모호한 충고를 했을 거예요. 경애가 주끼박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가 궁금해서 이런 설정을 넣게 됐어요.




상수가 형이 한 잘못(동급생에게 가한 폭력)에 대해 사과하러 가는 장면에서 피해자 엄마의 신발을 볼 때 묘사가 담담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사실 눈물이 났어요.


그 분들이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섬에서 올라오신 상황이잖아요. 자기 인생을 완전히 바꾼 거죠. 그런 선택을 하면서까지 아이를 데리고 이 서울이라는 곳에 정착하려 했는데 굉장한 폭력을 마주한 거잖아요. 마음에 후회와 분노도 있을 것 같았고, 저라면 떠나왔던 고향을 생각하게 될 것 같았어요. 파도가 치는 섬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온기라든지요. 그 어머니에겐 극한의 분노가 느껴지는 상황이었겠죠. 이런 상황에서 그 엄마를 다독이고 싶었어요. 서울에는 바다가 없으니까, 대신 나뭇잎이 파도처럼 발을 쓸어주는 장면을 썼어요. 그런 마음을 느꼈으면 했고요.


(주 : 그러는 동안에도 낮의 그 백홍식당의 어느 장면들은 상수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는데, 가장 뚜렷한 건 배웅하려는지 아니면 상수와 일행이 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그 엄마가 식당 앞 보도까지 나와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 엄마가 신고 나온 붉은 가죽끈의 샌들 위로 떨어지던 나뭇잎의 어른거리던 그림자들. 그 검정의 그림자들은 발을 덮는 듯도 하고 어둡게 물들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동시에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마치 파도처럼 발을 여러번 쓸어주는 듯했다. (122쪽)




마지막에 상수에게 부장이 전화로 “간곡하게 말하는데 제발 좀 닥쳐”라는 말을 해요. 이 부분이 ‘빵 터질’ 정도로 굉장히 재밌었어요.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을까요?


실제로 닥치라고는 말을 못했지만 그러고 싶은 순간은 되게 많잖아요. 그게 그 상사가 한 말이라서 웃긴 것 같아요. 그 상사에게 상수는 처음부터 부담스러운 상황에 만난 사람이었죠. 그 부장님이 인간적인 면이 있는 분이에요. 상수가 사고를 칠 때마다 어쨌든 해결을 해주시잖아요. 회사측의 입장으로 하는 말이긴 했지만, 그 장면에서도 상수에게 과격하면서도 인간적인 충고를 하게 된 것 같아요. 말 앞머리의 ‘간곡하게’라는 예의바름과 ‘닥쳐’ 사이의 간극이 재미있게 보였으면 했어요.




한강에서 오리배를 탈 때 오리배에 ‘파라다이스’라고 써있어요. 그 장면의 아이러니가 인상깊었습니다.


사람들이 오리배를 왜 한강에 띄울까 띄우는 마음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됐어요. 상업적인 발상이고 사실 촌스러운 발상이죠. 80년대엔 새로운 시설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타는 사람도 얼마 없고요. 그래도 그 시설이 계속 유지된 채로 한강에 떠있다는 건, 사람들의 향수가 들어가 있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오리배가 어떤 시절을 환기할 수 있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유년을 생각할 때, 화나는 부분, 아름답지 못한 순간들도 떠오르겠지만 오리배를 타던 순간 같은 즐거운 순간도 있었을 거잖아요.

 

물론 산주와 오리배를 본 상황 자체는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연인이었기 때문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둘에게 일어나는 기쁨이 있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유년의 어떤 시절을 환기했을 때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고, 씁쓸하기도 하지만 기억에 남는, 그런 순간들이 있듯이요.




‘은총’이 애틋합니다. 사고가 있지 않았다면 은총이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작가가 상상하는 은총은 어떤 사람일지요.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됐을 거라는 생각이 있어요. 소설 뒷부분에 경애가 과거라 은총에 대한 기억이 미화된 게 아닐까, 자신의 슬픔이 포장된 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긴 해요. 그렇지만 경애가 기억하는 은총의 모습이 실제의 그가 맞는 것 같아요. 회상 속에 등장하는 은총이 아이인데도 가지고 있는 의젓함, 건강함이 있어요. 그게 은총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서 저절로 주어진 것들은 아니거든요. 은총의 가족을 만나는 장면에 나오듯 아버지가 현재 실직한 상태죠. 은총의 동네가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 옆 동네인데,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기도 했던 곳이에요. 아이가 건강하지 못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은총은 그런 걸 보듬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기 때문에, 커서도 건강하고 환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읽고 쓰는 마음



인간 김금희로서의 첫 기억이 궁금합니다.


세살 때 기억이 있어요. 제가 문지방에 이렇게 앉아있고 엄마가 부엌에 앉아 있는 장면이었어요. 문지방은 갈색이고 나머지는 청색이었어요. 부엌과 방의 경계에 있는 나, 그게 최초의 기억이에요,




언제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지, 또는 언제 소설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꿈이 종종 바뀌기는 했지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했어요. 소설가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된 건 중학교 때인 것 같아요. 문예반을 하면서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제가 중학교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를 많이 읽었는데, 십대 때부터 좋아하던 작가분과 비슷한 시기에 책을 내게 되어서 신기했어요. 이십년 가량 시간이 지난 거거든요. 소설가라는 직업이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직업이구나, 이게 갑자기 의식이 됐어요.


(주 : 최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고양이>가 출간되었습니다.) 




“그런 건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 중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부스러기 같은 기억들인데 가장 오래 남는 기억도 그런 것이었다.”(231페이지) 은총과 경애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문장인데요, 작가가 기억하는 ‘부스러기 같은 기억’ 중 지금 소개할 수 있는 기억이 있을까요?


대학 때 연애했던 사람이 있는데요. 연애하기 직전, 약간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저는 마을버스에 타고 있었고 그 사람은 길을 지나는 걸 봤었어요. 버스가 지나고 그 사람이 지나는데 점퍼에 손을 넣고 노래를 부르며 가고 있더라고요. 그 장면이 지금도 되게 생각이 나요.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차림이 별로 멋있지도 않았어요. 애벌레옷 같았어요. (웃음) 볼록볼록하고 멋없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그 순간 되게 건강해보이고 멋있어보였어요. 자기 세계가 건강하면 저럴 수 있구나 싶은, 건강함이 도드라지던 순간이어서 그 장면은 지금까지도 되게 실감있게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주 : 김금희 작가의 이 ‘부스러기 같은 기억’은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소설과 감정의 결이 닿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경애의 마음>에서 독자에게 읽어주고 싶은 문장, 단락이 있다면.


교회에서 경애가 호프집 사장님 같은 사람을 쫓아가서 “죄를 지었죠?” 묻고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답을 받는 장면이 있어요. 나가는 문이 어디냐는 그 사람의 질문을 받고 대답으로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순간, 경애의 성장이 이루어졌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이 소설에서 경애가 그려지는 거의 마지막 장면이거든요. 완전한 성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로서는 경애가 자기 내부에서의 한계를 넘었다고 할까, 그런 장면이라 같이 읽어보고 싶은 기분이에요.


주 : 

“죄를 지었죠?”

그래도 경애는 물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선선히 답했다. 그러자 경애는 더는 물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기타를 다시 어깨에 메며 경애에게 물었다.

“자매님 여기 출구가 어딥니까? 계단으로 올라가면 들어온 문이 나옵니까?”

경애는 치미는 뭔가를 참기 위해 주먹을 쥐고 있다가 풀며 이내 문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남자가 그쪽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346쪽)




소설 이외의 책 중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을까요.


저는 사실 소설을 주로 읽어요. 또 최근에는 작업하느라 무거운 책은 못 읽기도 했고요.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은 <히끄네 집>이에요. ‘히끄’ 계정을 팔로잉하면 매일 아침 고양이 ‘히끄’ 사진을 받을 수 있거든요. 달마다 배경사진을 올려주셔서 지금 제 전화기 배경화면도 ‘히끄’사진으로 되어 있어요.


예전에 읽은 책 중엔 배수아 선생님이 쓰신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이라는 알타이 여행기가 있는데요, 너무 좋았어요. 그 여행의 이국적인 풍경과 선생님이 가진 고유의 리듬이 맞아서 너무 깊으면서도 신비로운 여행기가 되었더라고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알타이 남자는 암소로 자기 재력을 뽐내고, 이런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배수아 월드에 대해 찬양하게 됐어요.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연을 보낼 ‘언니’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지금 읽고 있는 책이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 인데요, (주 : 이하 내용엔 <디스코 멜랑코리아>라는 작품 내용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디스코 멜랑코리아>라는 작품의 감동에 대해서 오늘도 생각했어요.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에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랑에 상심한 사람들이겠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상처라는 게 언니한테 사연으로 보낼 때는 솔직해지고 세세해지잖아요. 이 작품을 읽을 때 그렇게 사랑 얘기를 듣는 것 같았어요.


두 남자가 만났는데 거기에서 만난 상대가 ‘나는 몸을 중요하게 생각해’라고 말을 해요. 소설에서 나타난 걸로는 내가 그 사람이 원하는 체형은 아닌 것 같아요. 연애 상황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라는 게 공통된 부분이 있죠. 제가 가슴 아팠던 건, 자기 고향에 이 처음 만나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보낸 뒤 자기 집에 있는 티셔츠를 가져다가 입혀줘요. 연락처 교환도 안 했고 하루로 끝나는 연애인데요. 


제가 <경애의 마음>에서 미싱 회사에 관심을 가진 것도 실은 그 생산물이 옷이라는 점 때문이었어요. 옷이라는 게 자기 일부인 셈이잖아요.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떠나면 이 사랑도 정리가 되죠. 자기 일부와 다름없는 ‘옷’을 주었고, 이별하게 되는 순간 떠나는 이를 보며 “너에게 이 계절을 주고 싶다, 날씨를 주고 싶어, 그건 내가 아는 최고의 선물이고”(120쪽)라고 감정을 토로해요. 이 순간의 감정이 슬픔과 환희가 다 얼룩진 상태라고 생각했고요, 사랑이 가진 밀도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빵빵하게 차오르는 순간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언니는 죄가 없다’에 사연을 보내고 싶은 언니들이 있다면 신간이지만 소설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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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최은영 작가를 만났습니다. 소설처럼 정성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하던 작가의 말을 소개합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최은영이 오다


두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서점에서는 예약판매로 사인본을 구매하고 싶어하는 고객의 열기에 새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실감했는데요. 신간 출간 이후 달라진 부분이 있을까요?


예약판매를 진행할 때, 사실은 신기했어요. 아마 첫 번째 소설집 읽으신 독자분들이 다시 재구매를 해주신 거겠죠? 다시 이어졌구나 생각을 하니 신기했어요. 신간이 나온 뒤엔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책을 보내드려야 하는 친구들, 아는 사람들 주소록도 정리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이번 학기 강의를 해서 성적을 매기는 기간이라 최근에는 성적 매기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입니다. 평소 최은영 작가의 하루, 하루를 보내는 순서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요. 열시쯤 일어나서 운동을 가기도 하고, 운동을 안 가는 날엔 잠을 더 자고, 두시쯤 작업실에 가요. 글을 쓸 때는 밤까지 작업실에 있어요. 밤 열 시, 열한 시까지 글을 쓰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 놀면서 인터넷도 하고 그래요. (웃음)




인터뷰를 진행한 오늘(7/4일 낮 최고 기온은 32도였습니다)도 날씨가 굉장히 더운데요, 전작 <쇼코의 미소>의 여름, 산책의 이미지가 근래의 날씨와 특히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계절에 대해 여쭙고 싶어요. 


저는 여름을 좋아하고 겨울을 너무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이에요. 여름이 되면 살아있다는 게 느껴지고 기분도 좋아지는데,  슬슬 추워지면 정말 우울해지고 힘들고 몸이 아파요. 더위도 별로 안 타고, 겨울엔 좀 아프기도 해서 여름이 훨씬 좋고 기운이 납니다.




최은영 작가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전의 일, 나의 첫 기억이 궁금합니다.


저의 첫 기억은, 조금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어요. 정말 아기 때 본 장면인데 좀 ‘저 사람 뭐지?’ 했던 기억이 있어요.




<쇼코의 미소>가 출간되기 전 김연수 작가의 기획으로 낭독회를 진행핬뎐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낭독회에 대한 기억, 그리고 최은영 작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온 독자와의 낭독회의 기억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주 : <쇼코의 미소>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에 이 일화가 등장합니다. 2016년 2월, 소설가 김연수의 기획으로 <우리가 처음 듣는 소설의 밤>이라는 이름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한 신인 작가가 어디에서도 공개한 적 없는 단편소설을 그날, 낭독의 형식으로 처음 발표하기로 한 것. 평소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해 그가 계속해서 소설을 써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행사를 기획했다는 김연수의 소개가 끝나고, 곧바로 작가의 낭독이 이어졌다. 그날 공개된 작품의 제목은 「씬짜오, 씬짜오」, 신인 작가의 이름은 최은영이다.)


제 작품을 통으로 읽었던 낭독회는 두 번이었던 것 같아요. 김연수 선생님께서 기획하신 낭독회는 그중 첫 낭독회였어요. 그땐 책도 나오기 전이고,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물론 지금도 잘 모르지만 정말 모르던 때고, 그러던 중 선생님께 부탁들 받아서 사실 부담이 되더라고요. 거기 오신 60여명은 저를 아는 사람이 아니고, 선생님을 보러 오신 분들인데, 눈 오는 추운 겨울날, 사람들을 불러서 이상한 소설을 읽어서 미안해지게 될까봐 사실 걱정을 했어요. 이후 행사는 혼자 하는 행사여서 괜찮았어요. 못해도 저만 욕먹으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만 첫 행사는 선배 작가님께서 추천해주셨는데, 선배 작가님께 피해가 될까봐 걱정했던 기억이 있어요.


(주 : 2년 전 일인데 그 날의 날씨, 모인 사람들, 그 사람들을 대하던 내 마음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말씀해주시는 부분을 저는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읽었습니다.)







내게 무해한 사람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곱씹어 보셨을 듯해요. 작가의 말에서도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말씀을 해주시기도 했고요.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고백> 中)


누군가에게 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저 사람은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 내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사람이라면, 실은 대부분 그 사람이 뭔가를 참고 있을 거라고, 힘든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다른 이에 대해 ‘저 사람은 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은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요.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다른 사람을 무해하다고 판단하는 그러 위치에 있어봤을 것 같아요.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순간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번 소설집 속 일곱 편의 소설에도 대부분 다른 사람한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 같았어요. 악해서도 아니고, 악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닌데 결과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작품들을 엮다보니 제목을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정하게 됐습니다.




정말 모르던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는 소설이 있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을 잘 들여다보며 이야기해주는 소설이 있을 텐데요. 이 소설은 후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소설이 묘사하는 감정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잘 알아채지 못한, 알아채지 않으려 하는 감정들인 듯해요.


세상에 재밌는 게 정말 많잖아요. 드라마도 정말 재미있고 유튜브도 재밌고. 그런데 왜 굳이 소설을, 제 소설 같은 평범한 소설을 읽을까, 하는 생각을 저도 하는데요.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소설을, 저는 사실 재밌어서 읽어요. 예를 들면 영화 같은 다른 매체는 너무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특이한걸 보여줄 순 있지만, 소설만큼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긴 어렵다고 저는 생각해요.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지점을 알아채도록 하는 소설의 역할이 독자로서 제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자신이 가장 아프다고 생각했던 부분, 기억 속에 묻어둔 어떤 부분들에 대해 특히 더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모래로 지은 집>이 가장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우리가 어떤 감정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다고 하면,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화를 냈어야 하는데 화를 못 낸 상황이 지나갔다고 하면, 물론 내가 계속 화가 난 상태는 아니지만, 그 화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내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어떤 걸 잃어버렸던 상황, 슬픈 상황에도 충분히 슬퍼하지 않으면 그 감정은 제 안에 남아서, 제가 비록 느끼지 못하더라도 사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 작품을 읽은 후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감정을 다시 느낀다면 풀어지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때 그런 일이 있었고, 이런 감정을 느꼈었지.’하며,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야 슬프고 화가 나는 경험을 했던 과거의 나와 더불어 살 수 있으니까요. 일상을 살다보면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으니까, 자기감정을 들여다볼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묻고 잊어버리고 살아야 할 때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병드는 게 아닌가 해요. 그 마음을 돌봐주고 풀어주는 게 소설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글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소설을 왜 쓰는지, 아직 다는 모르겠지만, <쇼코의 미소>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봤을 때 내가 나를 되게, 위로해주려고 썼구나. 나를 위해서 썼구나 생각했어요. 나를 위해서 썼구나. 내가 한 인간관계에서의 실패라든지, 많은 걸 애도하려고 썼구나. 




손길이라는 작품 속 등장인물 혜인에 대해 "혜인이 쟤는 참 유난해. 약하고 예민하고."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소설이 이야기하는 사람들, 혹은 그 사람들의 시절이 이런 시절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작에서도 '선천적으로 눈이나 위가 약한 사람이 있듯이 마음이 특별히 약해서 쉽게 부서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는 작가의 말을 보며 위로를 받은 독자가 많을 듯해요.


제가 어릴 때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야단맞고 그런 애였기 때문에 예민한 게 안 좋다고 생각했어요. 예민하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요즘 생각하기엔 예민하다는 건 감정이 많다는 뜻인 것 같아요. 감정을 많이 느끼는 건 일종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게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는 잔인한 사회, 비인간적인 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느끼는 건데, ‘왜 느끼니.’라고 타박하는 건 잔인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한국사회는 학교를 다닐 때부터 권위주의적인 분위기가 이미 스며들어 있잖아요. 그 안에서 정말 인간적인 사람들이, 단순히 잔인한 문화적인 맥락 안에 놓여있다는 이유만으로 예민하다고 멸시받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했고요. 더 슬픈 건 그렇게 자신이 예민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약하고, 나약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고, 루저고 그렇게 해석되는 게 슬프다고 생각했어요. 사회가 잔인한 건 비판하지 않으면서 잔인함에 상처받는 사람들을 왜 탓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해요.




이야기의 바깥에서 주인공을 보는 인물들의 자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공무와 모래를 지켜보는 나비의 자리(<모래로 지은 집>), 미주와 진희의 이야기 바깥의 수사 종은의 자리(<고백>) 등이 그렇게 보였어요.


소설은 현실이 아닌 소설이지만, 저는 항상 무서운 느낌이 있어요. 제가 만들어낸 인물들이긴 하지만 그 인물이 저는 아닌 거잖아요. 함부로 재현해서, 함부로 내가 아는 것처럼 써도 되는 걸까? 하는 부분이 항상 걱정이 돼요. 그래서 작품 안에 사람들을 지켜보는 누군가를 항상 넣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위치에서 이 인물을 보는 거니까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생기잖아요. 한계를 설정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것밖에 못 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손길 속 정희와 혜인, 공무에게 가족보다 더 힘이 되어주었을 나비와 모래처럼, 때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의 연대에 기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이라는 말을 정말 협소한 의미로 따지면 남녀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이런 ‘정상가족’이라고 일컬어지는 관계를 말할 수 있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느슨한 개념의 가족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정말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아는 언니가 될 수도 있겠죠. 정말 끝까지 지지해주고 편을 들어주고 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저는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 게 평가 절하되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정상가족이 항상 우선이고, 정상가족을 이루지 않는 사람들은 루저고 그런 가치관이 답답하다고 느껴져서, 정상가족을 이루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소설집에 대한 강지희 평론가의 해설 중 "자신이 누군가를 배반하고 그에게 상처 주었던 순간을 끝내 잊지 않겠다는 의연함" 이라는 문장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 여름> 속 이경은 제가 수이에게 상처를 주었던 순간을, 그럼에도 수이가 자신에게 자신의 감정을 과시하지 않았던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사람이 미안한 걸 알아야 한다고 저는 항상 생각해요. 되게 뻔뻔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제가 봤을 때는 상처를 줬던 상황보다도 더 많이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건 상처를 준 사람이 자기가 한 행동이 계속 옳다고 생각하면서 피해자를 탓하거나, 아니면 자기는 상처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얘기한다거나,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거나 이런 태도들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할 때는 정치인들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대하는 방식도 그런 방식이었던 것 같고요.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들, 뻔뻔한 사람들이 당당한 사회에서 살다보니 우리도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상황들에 상처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모래로 지은 집>에서 모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니. 너무 나쁜 사람들을 너무 나쁘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얘기해?” (126쪽) “가해자들도 변할 수 있어? 달라질 수 있어?” (136)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길을 열어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들은 쉽게 용서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소설 속엔 등장합니다.


용서가 되게 좋은 말인 것처럼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아마 정희진 선생님 글에서 읽은 것 같은데요, 용서가 좋은 것이 아니고 누가 용서를 하는지, 누구에게 용서가 강요되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는 글이 있었어요. 용서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대부분 좀 약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자신에겐 힘이 없어서 용서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가 강요된다고 생각해요. 당사자가 용서를 마음먹기 전에 “그래도 네가 용서를 좀 해줘야지.” 이렇게 용서를 강요하는 문화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잘못을 하고서도 스스로를 너무 쉽게 용서해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요. 


저는 용서라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용서를 할 수 있으려면 나에게 나쁘게 대한 사람이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있었던 일은 있었다고 인정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을 해요.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용서를 해라, 잊어라, 기억해서 뭐하느냐 이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마음이 머무르는 문장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작가가 독자에게 읽어주고 싶은 문장이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이 부분이에요.


예전 일들을 잊고, 지워버리고,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 내 안에 갇힌 그애가 추워하면 더 외면해서 얼어죽기를 바라고, 배고파하면 그대로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했지. 그게 다 뭐였을까. 그 애는 나였는데. (<모래로 지은 집> 178쪽)


(주 : 저는 이 문장이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아치디에서 中)>) 







소설가로 말하기


소설 속 인물들은 상황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빠른 가치판단은 때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말을 미루는 사람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최은영 작가에게 최근 가장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일까요.


작가들이 되게 위험해질 수 있는 부분이, 자기가 어떤 일에 대해 되게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읽고 쓰다보면 부정의한 것에 반대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 나는 이 글대로 이렇게 정의로운 사람이야. 너무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항상 조심해야겠다, 확신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해요. 대부분의 경우 저는 단호하게 ‘저는 이래요’ 말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많은 것들이 말하기 어려워요.



언제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지, 또는 언제 소설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꿈으로서 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된 건 이십대 후반이었어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제가 소설을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공부를 하다보니 제가 하고 싶은 건 창작이라는 걸 나중에 알겠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원래 있었던 마음인데 계속 무시하고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불현듯이 너무 구체적으로 하고 싶어져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소설이 아닌 책 중 좋아하는 책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지금 생각나는 책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예요. 이후에 쓴 다른 책에도 아우슈비츠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 글은 특히 직후에 쓴 글이라 구체적인 상황들이 잘 나와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겐 되게 많은, 새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책이었어요.
















최은영과 결이 같은, 최은영이 지나온 시절을 지나고 있을,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같은 상황의 독자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떤 책일까요.


아마도 이십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겠죠? 지금 떠오르는 책은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 책이에요. 이 책을 읽고 마음에 남았던 게,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얘기가 나와요. 여자애들은 항상 사랑을 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교육을 받잖아요. 정작 사랑받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는 건 배우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당신은 당연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사랑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책이라 공감이 갔어요. 이 책을 이십대 때 읽었다면 당당하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 텐데 생각했어요. 저는 항상 주눅 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조건이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이 책을 어릴 때 읽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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