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5년 5월 1일 출간 /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2015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정지돈 작가와 2014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황정은 작가가 대화를 나눴습니다. 문학동네 출판사의 도움으로 전문을 옮겨 싣습니다. 다양한 이야기가 공존하는 '젊은' 이야기를 읽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계간 문학동네 82호 - 2015. 봄> 中)








모든 크레타人은 거짓말쟁이

―어느 날, 에피메니데스


황정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서울에서 지돈을 만났다. 


  이야기를 마치고 보니 눈은 그쳤고 해는 졌고 길은 얼어붙었다. 나는 버스를 탔고 지돈은 아마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커피 한 잔과 물 한 잔을 연료 삼아 네 시간 정도를 이야기했다. 별로 묻지 않고 별로 대답하지 않는 자리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대단히 묻고 대단히 대답하는 자리가 되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소설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는데 루카치, 보리스 사빈코프,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 블랑쇼, 장 콕토, 사사키 아타루에 장 뤽 고다르, 리얼리즘과 쉬르레알리슴, 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의 이야기까지 해버렸다. 이게 뭐야……라고 나는 생각했고 민나 도로보데쓰……라고 지돈은 말했다. 오늘까지 반년하고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나는 일정한 간격으로 지돈을 만나왔다. 9부 팬츠에 ‘있는 듯 없는 듯’이 모토인 페이크류의 덧신을 신는 지돈…… 정지돈씨는 어떤가요?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다. 지돈씨는요 발등 없는 양말을 신습니다. 최근에도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했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등 없는 양말을 신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발에 털도 많으면서……라는 대꾸를 듣게 된 것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근무하는 이모 언니의 대답이었는데 이 언니는 도대체 지돈의 발에 털이 많은지 적은지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기회가 따로 있겠지. 어쨌거나 여기저기에서 이상하게 발로 기억되는 남자…… 지돈이 대구에서 자랐으며 그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뭐로 유명했어? 라고 묻자 지돈은 커피 한 잔을 더 시키더니 누나 나 진짜 노는 애였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혼자…… 노는 애였어, 라고 지돈은 말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고 소설에도 관심이 많은데 그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다. 대구에서 꼬마 지돈은 외로워서 소설을 읽었다. 처음엔 추리소설을 읽었는데 무척 재미있어서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신나게 시도도 해보았다고 한다. 그게 무슨 내용이었느냐면 누나…… 교장선생이 교단에서 훈화를 하다가 마이크를 쥐고 갑자기 죽어버려서 초등학생 탐정이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추리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트릭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어. 꼬마 지돈은 꼬마였으니까…… 아직 덜 꼬인 인간이었으니까…… 추리소설은 단념하고 판타지로 넘어가 판타지를 읽고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무척 재미있어서 이 정도는! 하고 내가 판타지소설을 썼거든. 그런데 같은 반 애들이 그걸 되게 재밌게 여겼어. 자기들 이름이 나오니까. 내 짝 요한이는 검투사, 나는 마법사…… 제일 간지나는 걸 내가 하고…… 무협소설도 좀 썼는데 애들한테 그게 인기가 있었어. 이름도 뭐 있어 보이게 육지일마 김요한, 천하일검 정지돈 뭐 이런 식이니까…… 제일 간지나는 걸 내가 하고…… 그런데 이런 걸 말하니까 내가 너무 얇은 애 같잖아…… 누나 그런데 실은 내 별명이 얇지돈이야…… 왜 얇지돈이냐면 음……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 얼굴이네…… 됐어 나 예민하다…… 아무튼 그때가 중학교 일학년 때였는데 내 소설을 재미있게 읽고 애들이 너도나도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 판타지소설 쓰기 붐이 일어난 거야, 우리 반에…… 그래도 나는 계속 혼자 노는 애였어…… 


  중학교 삼학년 때 IMF를 맞은 뒤로 지돈은 오랫동안 읽기도 쓰기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는 영화 연출을 전공했지만 편집 작업에 좀처럼 매력을 느끼지 못해 시나리오를 쓰다가 소설로 돌아왔고, 소설을 열심히 썼는데 등단이 되지 않아 출판사 창비에 입사했고, 그럭저럭 적응하며 지내다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려고 출판사에 사표를 제출했는데, 사표를 제출하러 출판사에 들른 날에 등단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지돈이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이자 등단 소식을 들은 날에 나는 그를 처음 보았다. 2013년 4월 어느 날, 나는 팟캐스트 <책다방>을 녹음하는 파주 녹음실에 머물고 있었는데 지돈이 이른 오후에 마지막 출근이라며 인사를 하러 왔다가 늦은 오후에 등단 연락을 받았다고 다시 인사를 하러 왔다. 지돈은 두 차례 모두, 김두식 선생에게는 인사를 하고 내게는 하지 않았다…… 나도 예민하다…… 기억해두겠다고 생각했고 기억해두었다. 오늘 같은 날이 드디어 도래했으니 오래 마음먹은 대로, 울려버리겠다…… 




  울려버리겠다……고 마음먹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데엔 딱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내가 소설을 마감한 뒤라서 육신이며 모든 것이 희박한 상태였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지돈의 소설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서야 「여행자들의 지침서」로 지돈의 소설을 접하고 다음 작품이 너무도 궁금해 빨리 다음 원고를 완성하라고 독촉하고 있는 입장이니 이 작가를 울려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여행자들의 지침서」에서 뭔지 모르게 케루악을 향한 애정을 감지한 나는 비트 세대의 문학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비트는 별로, 라고 지돈은 말했다. 그들의 작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의 애티튜드는 좋아한다고 지돈은 덧붙였다. 비트 세대의 어떤 애티튜드? 라고 묻자 지돈은,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싸움을 제대로 한번, 해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라는 이야기를 했다. 누나 나는 자기 장르에 대한 자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좋아…… 자기 미디어에 관한 의식 말이야. 애티튜드 애티튜드…… 


  언젠가 지돈은 어딘가의 인터뷰에서 조금 긴 소설을 쓰고 있다며 그 소설은…… 문학에 대한 문학인 동시에 정치적이고 사회 비판적이며 사랑과 섹스, 동성애와 죽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역사, 도시와 범죄, 망명과 머무름, 혁명과 밤에 대한,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오렌지에 대한 소설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었고 나는 그게 지돈이 요즘 쓰고 있다는 장편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실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였다고 지돈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지돈의 다른 작품들처럼 「건축이냐 혁명이냐」의 인물들은 한국적 맥락을 넘어 세계적 맥락으로 우연이자 필연인 것처럼 존재하고 있는데 지돈은 태어나 한 번도 한국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다. 가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며 지돈은 말했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어. 파리…… 뉴욕…… 나는 그런 장소엔 가보지 않았지만 소설을 쓰는 데 그런 장소를 직접 가보는 게 반드시 효과적이진 않은 것 같아. 소설은 르포르타주가 아니니까…… 어떤 장소나 인물을 직접 보는 것보다는 그것을 적은 문장을 보는 게 훨씬 더 상상하게 만들어. 예컨대…… 내가 어느 날 삼청동 카페에서 어떤 남자를 봤거든. 이 남자가 계속 화장실에 머물면서 누가 문을 두드리면 일단 나왔다가 그 사람이 나오면 다시 들어가고 또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나와서 기다리다가 화장실이 비자마자 다시 들어가고…… 그걸 반복하고 있는 거야. 화장실 앞에서 화장실이 비기를 기다리면서도 거울 앞에서 뭘 계속 하고 있어. 저 사람이 도대체 뭘 하고 있나…… 하고 봤더니 되게 힙하게 입은 사람이었거든? 모자를 조금씩 돌려가면서 자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거야. 진짜 일 밀리미터씩…… 모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돌렸다 말았다…… 재킷 깃을 이렇게 만지작만지작…… 그걸 한 시간 반 동안 하고 있더라고…… 화장실 앞에서…… 진짜 특이한 광경이었는데 이런 광경을 직접 보는 건 별로 나를 상상하게 만들지 않아. 현실 이미지 자체가 너무 압도적이니까…… 그 광경을 묘사한 간접 텍스트가 훨씬 더 나를 상상하게 만들어. 내 경우 영화도 아니고 문장, 나를 가장 상상하게 만드는 게 문장이야…… 그러므로 내내 도래하지 않을 적절한 각도로 깃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라는 그 광경 자체보다는, 내내 도래하지 않을 적절한 각도로 깃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 라는 문장이 나를 더 상상하게 만드는 거야…… 텍스트는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텍스트도 현실이라고 나는 생각해. 장 뤽 고다르가…… 내가 이 아저씨 되게 좋아하는데…… 고다르가 영화는 현실을 잘 담아내야 한다는 주장에 맞서 한 이야기가 있어. 영화는 촬영된 현실이다…… 아마 그렇게 말했을걸? 누나가 지면으로 이 이야기를 재인용하려면 고생 좀 하겠다…… 자료도 찾고 좀 힘들겠어? 라고 지돈은 말했다……라고 적어버리겠다……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글쓰는 것이 좋으냐고 물었다. 지돈은 망설이는 척을 하면서 좋다고 대답했다. 글쓰는 거,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묻자 이번에 지돈은 진짜로 대답을 망설였다. 어떤 말로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글쓰는 거,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물으면 말문이 막히고 마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아마도 질문이 이미 답이라서. 그런데 지돈이 글쓰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다. 다른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고, 소설 쓰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다. 왜냐하면 내가 지돈의 소설을 좋아하니까. 더 읽고 싶으니까.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어디까지가 실재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를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허구와 실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본다면 지돈의 허구 만들기는 무척 흥미로운 작업일 테고 그것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 말하기 시작할 테니 나는 지돈의 소설 포인트를 리듬에 두고 싶다. 「여행자들의 지침서」를 읽을 때 나는 처음에 담담했다가 이윽고 음독(音讀)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은 다음엔 이 작가의 다음이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소리를 내서 읽은 문장들에 어떤 리듬이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난 뒤에도 그 리듬이 남아 짤깍 짤깍, 이 작가의 다음 그다음을 계속 읽고 싶게 만들고 그 리듬을 조금 더 타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었으니까. 맛있었다. 얼핏 평범한 문장이었지만 그 언어를 수집하고 배열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지돈은 그 공을 더욱 닦아 “언뜻 봐서는 연관을 찾을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와 수집물로 가득하며 그러한 이미지는 통상 말하는 예술적인 무언가가 아닌 단순한 기록 사진과 사소한 물품이 뒤섞인 것들로 이를 통해 기획자들은 이미지의 도서관, 그러나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찾을 수 없고 고정된 정보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묘한 확장성과 통일성이 있는 이미지의 궁전을 만들어냈”다. 짤깍 짤깍. 물론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라서 짤깍 짤깍, 리듬을 따라가다보면 문득 “유덕문은 부군당은 왕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곳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와 같은 놀라운 문장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서울에서 지돈을 만났다. 

  나는 이날 인터뷰를 마치고 다른 곳에 가볼 작정이었는데 지돈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보니 눈은 그쳤고 해는 졌고 길은 얼어붙었다. 나는 버스를 탔고 지돈은 아마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지돈을 만나고 돌아온 결과가 지금 내 책상에 있다. 








  어느 시점에 나는 지돈의 소설을 펼치고 지돈에게 밑줄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상상으로 적은 문장에 밑줄을 그려보라는 이야기였는데 거짓말에…… 밑줄을 그려보라고? 라고 지돈은 반문했다. 다소 어색하고 무례하고 이상한 부탁이라서 뺨을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지돈은 연필을 쥐고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아무데나 막 긋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지돈이 연필을 내려놓더니 소설을 내 쪽으로 밀어주면서 알다시피…… 이게 거짓말이라는 거짓말일 수도 있어……라고 내게 말했다. 그래……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정지돈이라고 적힌 곳 아래 밑줄을 긋고 크레타人이라고 적어두었다. 









_『문학동네』2015년 봄호, 제6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자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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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5-13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정지돈 작가에게 관심이 갑니다. 이번 수상작품집 꼭 읽어야겠어요!!

원곡변 2016-01-0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상작을 다시 읽게 만드는 좋은 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