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사탕들 / 이영주 지음 / 2014년 3월 31일 발행


"네가 혼자 방 안으로 들어갈 때 나는 골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네가 텅 빈 곳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때 나는 골목에서 퍽치기를 당했다 다 잃어버렸어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다....." 

<겨울 목수 中>


이영주의 시는 몰락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시 속 상황은 이미 불길하거나, 곧 불길해질 순간을 그리고 있다. "거절 당할까봐 두려웠다." 끝내 아무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이 안쓰러운 화자는 누구인가. 퍽치기, 개의 똥구멍, 개떡 같아. 급작스레 던져지는 어휘의 거칠함은 이 이미지를 말하는, 독백하는 화자를 더 애처롭게 한다.


"너는 방 안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고 벽돌은 하나씩 멍이 들고 있었다" (겨울목수 中) 아무리 애를 써도 끝내 소통할 수 없다. 애인은 죽은 애인이고 (어릴 적 이모는 애인을 만나려고 공동묘지로 가는 여자의 이름을 말해주었습니다. 애인이 얼굴을 감쌌던 삼베 천 귀퉁이를 잘라서 늘 품에 넣어가지고 다닌다고요 (친밀하게 中)), 우리 말로는 '너'를 이해할 도리가 없어 희랍어를 베껴써야 한다. (너를 이해할 수 없어서 희랍어를 베껴 쓴다. 도서관에는 탄내가 가득하다. 두꺼운 책이 좋아서 꼭 끌어안는다 (불에 탄 편지 中))




죽음의 이미지는 2014년 4월, 절대 잊어선 안 될 시간을 상기시킨다. 죽음은 도처에 산재해 있고, 늙기 위해, 죽기 위해, 시간은 살뜰히도 흐른다. 끝내 벗어날 수 없을 이미지들에 관해 시인은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표현대로 '가장 확실한 자리에서'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이미지들. 


어떻게 하면 물속에 꿈을 담글 수 있나 우리는 한강 둔치에 앉아 발목이 흘러가는 걸 말없이 보았지 

-우리는 헤어진다 中


새로운 폐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요 우리는 서로의 뼈를 찾아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 잠 中


오늘도 무사히. 표어 액자 모서리가 부서져 있다.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하는것. 너무나 피로해. 석탄가루 봉우리에서 검은 얼굴로 구름이 나를 내려다본다. 

-영월 中


자기 안에 있을 때조차 밖으로 나갔다 심지어 늙기 위해 책을 읽었지 집을 구할 때는 무덤 생각을 해야 한다 

-도우미 中


언제나 이 잠이 마지막이라는 예감.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가는 두더지처럼 여름을 잘 이겨내야 하겠지요 누군가가 내게서 떠난다는 사실이 마치 돌을 먹는 병자의 심장 

-석공들의 뜰 中




"이상하지? 왜 조용하다는 것은 슬픔을 과장하는 순간들이 모인 것인지. 그는 새로 도착할 요일들이 과장한 대로 흘러가는 유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자라나는 구석 中) 시인의 말대로 요일은 새로 도착하고, 새로운 한 달은 다시 시작된다. "생활은 이해할 수 없는 깊고 따뜻한 구덩이"임을 곱씹는 부끄러운 나날이 이어지는 하루하루. "떠나는 길목에서 이모가 울고 있습니다. 무서운 현실과 친해져야 합니다" (친밀하게 中) 모두에게 평안을, 안녕을,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부끄러운 희망을.







무력한 중에 몇 권의 책을 읽었다. 몇 개의 책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을 함께 붙여넣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가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것'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비경제적 영역에서 찾아야 했고 '안전'을 통해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국가가 자신의 존립근거와 정당성을 안전에서 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그 안전을 위협하는 적이다. 과거의 적은 오로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왜 세계에는 행복한 자가 있고 불행한 자가 있는가? 인생에 의미는 있는가? 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아들의 물음에는, 이세계를 찢을 만큼의 절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어른은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어딘가에서 "행복을 발견한 최후의 사람들"(니체)의 심정으로 있고 싶었기 떄문이다.

하지만 아들의 물음은 그치지 않았고, 그 눈빛은 바로 '욥기'의 욥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 부조리의 심연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그야말로 신에게 힐문하는 듯한 격렬함을 키워나갔다. (....) 


"세계의 비참함이 자신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행복한 자,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자는 결코 알지 못한다"라고 어느 날 중얼거린 아들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두 이야기 다 침춤 호의 침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렇죠."

"두 분은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지 증명할 수 없어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죠.

"두 이야기 다 배가 가라앉고, 내 가족 전부가 죽고, 나는 고생하지요."

"맞아요."

"그럼 말해보세요.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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